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4권 (5)

카지모도 2024. 5. 3. 06:36
728x90

 

입 모양이나 말하는 품이 아마도 이런 따위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정말

강모가 오유끼한테 묻고 싶은 말들이었다. 설마 네가 나를 따라오는 건 아니겠

지? 안면 있는 사람들끼리 우연히 같은 기차를 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오유끼

는 오유끼대로 솜리(이리)나 어디쯤 갈 일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으니. 이제 곧

내릴는지도 모른다. 기차는 전라선 가냘픈 지류에서 호남선 물목으로 들어서려

한다. 그러나 그네는 이리에서 내리지 않았다. 내리기는커녕 단팥죽 장수가 손

수레를 밀고 복잡한 차내의 승객과 봇짐 사이를 용케도 누비고 다니면서, 구슬

픈 듯 독경하듯 단팥죽을 사라고 외자, 두 손을 까불어 그를 부르더니

"머가 맛나요?"

묻는 모양인지 생긋 웃기까지 하면서 장수와 몇 마디 나누고는 고개를 갸오록

빼밀고 손수레 선반에 얹힌 군것질감을 이것 저것 사는 것이었다. 그러는 모양

은 조금도 급할 것이 없어서 누구를 서둘러 찾으려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오유끼의 모습이 하도 태연하고 느긋하여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강모가 초조해

졌다. 그렇지만 강모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저 여자와는 이제 무

관하다, 고 생각을 누르며, 공연히 긁어부스럼으로 그네 앞에 나타나 일을 키우

는 것보다 조금만 참아 보자, 대전쯤에서 내릴는지도 모르지, 눈을 감았다. 하

지만 오유끼는 대전에서도 내리지 않았다. 호남선 지선에서 기차는 경부선 간선

으로 빨려들어 경성을 바라보며 철컹 처끄덕, 쉬임없이 달리는데 오유끼는 대관

절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만일에 자기를 따라 나섰다면 행여라도 강모를 놓칠까

두려워 벌써 아는 체를 몇 번이나 하고도 남았을 오유기가, 눈길조차 이쪽으로

는 흘리지 않는 것을 보면, 아예 강모는 처음부터 그네의 안중에 없는 것도 같

았다. 나는 너한테 과히 섭섭잖게 계산을 해 주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는 헤

어졌다. 이제 와 우리가 다시금 이 좁은 기차칸에서 설령 마주친다 하여도, 그

것은 이미 관계를 정리한 장부를 우연히 넘기다 시선이 머문 것과 무엇이 다르

리오. 청암부인의 마지막 임종을 받쳐 준 그 베개 아래 눅눅한 습기가 눈물같이

배어 있던 돈 삼백 원. 명주 수건은 노르끄름히 청암부인의 체취를 머금은 채,

마치 이 서러운 삼백 원을 품에 안아 감싼 듯 돈을 감아 싸고 있었지. 운명 앞에

바치는 공물처럼 그것은 가련하고 경건했었다. 나는 그 돈을 너 오유끼한테 다

주었다. 그것이 단순한 돈 아닌 것을 너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나도 끝내 말하

고 싶지 않지만. 그리고 전주천 냇물가 다가정의 살림살이 온갖 호화로운 가재

도구와 가지각색 패물이며 비단 이불, 비단 옷, 집값 들을 그대로 다 두고

"네가 남아 살기에 그다지 불편치는 않을 것이다."

오로지 빈 몸 하나 신발 신고 떠나온 강모였으니. 노류장화 길거리에서 오다가

다 만난 여인, 그 꽃은 스치는 손님도 많을 터이니 꼭 강모가 아니라도 사람만

새로 바꿔 들이면 그네로서는 또 새 정 붙이며 얼마든지 연명할 수 있을 법 했었

다. 더구나 그 살림살이를 다 그대로 두고 처분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모를

이처럼 다급히 따라 나서기에는, 그간 오유끼가 보인 가구 집기 애착이 탐욕에

가까웠으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너, 저 여자를 어쩔 셈이냐?'

"아마 나하고 상관없을 겁니다."

밑둥을 자른 이 말에 강태 낯색이 노여움을 못 이겨 노랗게 질린다.

"이 세상에 계집질하는 사내가 너 하나냐? 허지만 너같이 우유부단, 그 꼴을 당

하고도 맺고 끊지를 못해서 질질 끌려 다니는 위인도 몇 안될거다."

"누가 맺고 끊지를 못해요?"

"저 여자 꼴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나는 진즉에 다 맺고 다 끊었습니다. 제 발 가진 계집이 제 돈 주고 표 끊어서

제 갈 곳 어디를 간단들, 그것이 무어 그리 대숩니까?"

"그랬으면야 오죽이나 좋겠는고."

강태가 전주부청 파면 사건까지 밑바닥에 깔면서 비아냥대는 것이 강모의 비위

를 발칵 뒤집었다.

"내, 가서 속시원히 물어 보고 오지요. 만일 형님 말씀대로 나를 따라가는 것이

라면 멱살을 잡아 비틀어서라도 기어이 끌어내 버릴 터이니, 짐 될까 걱정은 미

리 하지 마시오."

"되는가 보자."

그런데 꼭 이 말을 멀리서도 듣기나 한 사람같이 조금 머칫거리더니 옆엣사람한

테 무어라 중얼거린 오유끼가 부시럭부시럭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

면 그렇지. 내 짐작이 옳았다. 저도 모르게 강모는 마음이 놓여 긴 숨을 내쉬었

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춤거리며 아장아장, 덜컹거리는 변소에 들어가 한참

이나 있다 나온 오유끼는, 강모가 노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아까

그 자리에 아주 깊숙이 들어앉았다. 저 애가 혹시나 경성에라도 가는 것 아닐

까? 어차피 떠도는 몸인데 새 일자리를 찾아서 기왕에 큰 물로 나가 보는 것일

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다면 여기까지 오도록 저렇게 딴전만 피울 리는 없지.

허나, 오유끼는 경성에서도 내리지 않았다. 평양을 지나 신의주를 향하여 차창

이 온통 눈얼음에 뒤엎이도록 달리고 달리는 기차가 밤이 찾아왔지만, 오유끼는

아까 처음 그 행색 그대로 여전히, 지나가는 손수레를 불러 세워 군것질거리를

사고, 장수와 몇 마디 새실새실 웃으며 농짓거리를 주고받고, 옆자리 노인네한

테 양갱을 권하며 지칠 줄 몰랐다. 지친 것은 강모였다. 오유끼는 강모의 존재

를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강모의 신경은 온통 오유끼한테로 쏠려 팽팽히 곤두

선 줄이 금방이라도 툭, 터질 것처럼 아팠다. 아아, 내가, 너보다 더한 것을 다

버리고 지금, 나조차도 버리고 떠나가는데, 네가 감히 무엇이라고 나를 따라오

는 것이냐. 절대로 그럴리 없겠지마는, 만일에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는 켤코 너

를 데리고 살지는 않으리라. 네 인생과 나는 별개다.

"기독교인들 성경책을 보면, 예수를 처형해야 하는 본디오 빌라도가 집행장 한

쪽에서, 나는 이 일과 상관이 없다는 표시로 대야에 물을 떠오라 하여 손 씻는

장면이 나오지. 은대야에 손을 깨끗이 씻고 씻으면 그 피와 무관해질 줄 알았던

모양이야.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빌라도의 이름은 씻어지는 대신 몇 천 년 동안

기독교의 중요한 기도문에 각인되었단 말이다. 사도신경이라는 걸 일거 봤냐?

거기,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라고 나와 있거든. 명문화된 거지. 너도 마찬가지야. 빌라도가 손 씻는 것 마냥

너는 저 여자를 모른 체하기로 한 것 같은데. 소용없는 짓이다. 내가 보기엔 저

여자는 널 따라가는 거야."

왜, 무엇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렸는데. 이제는 가진 것도 없는데.

이때였다. 마침 기차는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서는 참이라 검표를 하려고

차장이 두 사람 들어섰다. 기차칸이 술렁거리며, 누군가 표없는 사람이 무임승

차를 했던가, 우두두둑, 화적 튀듯이 눈 깜작할 새 건너칸으로 달아난다. 젊은

차장은 고막이 찢어지게 호각을 불며 짐모퉁이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헤치고

구둣발로 뒤쫒아 뛴다. 사람들이 불안하게 힐끗힐끗 웅성인다. 나이가 좀 든 차

장은 그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답게 그들이 사라진 쪽을 일별하더니, 노련한 솜

씨로 토각, 토각, 조사한 차료에 구멍을 뚫는다.

"표 잘 뒀지?"

"예."

하는데, 바로 귀밑에서 표 끊는 소리가 금속성으로 차갑게 들린다. 그 순간, 이

게 어찌 된 일인가.

"아저씨, 저 표 정말로 끊었단 말이에요. 사람들도 아까 다 봤어요오. 할아버

지, 말 좀 해 줘요. 아이, 어떻게 해애."

울음에 목이 메어 어쩔 줄 모르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목소리는 오유끼의 것이

었다. 아마 검표할 때 표가 없어 걸린 모양이었다.

"아 글쎄 가만 좀 있어요. 시끄럽게 하지 말고."

멱을 틀어쥔 음성으로 오유끼를 한 대 후려칠 것처럼 윽박지른 차장은, 사나운

눈초리를 부릅떠 퉁방울을 굴리며 한 손으로 오유끼 등을 떠민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윽박지르고는 오유끼 앞 좌석에 앉은 숭객에게 그는

"손님, 표 좀 봅시다."

하였다. 그 손님은 중절모 모자테에 꽂아 둔 차표를 뽑는다. 이제 더는 모른 척

할 수가 없어 강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오유끼를 뚫어지게 노려보았

다. 강태는 이쪽에 대하여 아예 아는 체하지 않고 그냥 차창 바깥만 내다본다.

바깥은 칠흑이다. 압록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 오유끼는 강모가 벌떡 일어나

제 앞을 가로막는데 조금도 반가워한다거나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강모의 시선

을 피하며 고개를 떨군다.

"어떻게 된 거야?"

강모가 쥐어질러 묻는다. 미처 무어라고 오유끼가 대답도 하기 전에 차장은 오

유끼의 등을 다시 툭 밀어뜨리며, 앞으로 가라고 턱짓을 한다. 차장은 나이 한

사십여나믄 되어 보이는 남자로 체격이 건장한데다가 제복에 모자에 붉은 완장

에 자못 기세가 등등하여 몹시 위압적이었다. 오유끼는 비척 넘어질 뻔 하면서

뒷발굽 차는 염소처럼 뒤로 발을 뻗댄다.

"가요, 얼른."

거친 손길로 왁살스럽게 오유끼 팔을 낚아챈 차장이 , 난처하여 벋장대같이 서

있는 강모를 힐끔 쳐다본다. 비키라는 시선이다.

"이 사람이 무얼 잘못했습니까?"

강모가 오유끼의 한쪽 팔을 보살펴 잡는 시늉으로 물었다. ]

"당신은 누구요?"

"예, 제가 좀 아는 사람인데요."

"그래요오?"

차장은 강모를 위아래로 휘익 마실러 보더니 잘라 말했다.

"보면 모릅니까? 무임승찹니다."

"왜, 표 안 끊었어?"

강모가 오유끼를 보고 물었다. 오유끼는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아

니 한쪽 눈구녁 눈귀에서는 벌써 참느라고 충혈된 눈물이 빠짓이 배어나오고 있

었다.

"전주서 분명히 끓었는데, 없어졌어요."

"여태까지 검표할 때마다 어떻게 했어? 차표 검사 여러 번 했잖아."

"그게 이상해요. 내내 있었거든. 아까 변소 갔다 올 때 빠졌는가?"

"어디다 뒀는데?"

"여기."

오유끼는 몸뻬 허리춤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또 한번 잘 찾어봐."

"응."

이 여자는 참 놀라운 데가 있다. 강모는 생각하였다. 버리고 떠나는 계집이 뒤

쫒아 질기게 따라오는 것이 결코 혼감할 일 아닌데다가, 구경 만난 뭇사람들이

수군수군, 사태마저 이처럼 망신스럽고 난감하게 되어 버린 마당에, 칠칠치 못

한 계집의 차표값까지 벌금 몇 배로 얹어 엄청나게 물어 주어야 할 판인데. 오

유끼는 이 같은 위기에서 강모를 만났다고 하여 구원이나 받은 것처럼 호들갑스

럽게 원정을 하지도 않고, 저를 버리고 가는 사내를 뒤쫓다 당하는 이 봉변을

원망하지도 않고, 전주에서 신의주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언만 그 동안 내내

강모한테는 기척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숨죽이고 오는 수모와, 끝내 강모도

국경을 넘도록 자기한테 아는 체 안하는 모욕을 푸념하지도 않고, 그 모든 것들

이 살 속에 스며 흔연한 얼굴로

"또 한번 잘 찾어봐."

라고, 무뚝뚝하게 나무라는 강모에게 그네는 그냥 아무런 경계도 없이

"응."

이라고 한다.

그 방심의 '응'이 주는 무장 해제. 그것은 아무도 흉내낼 수가 없다. 오직 이

여자만이 그렇게 오탁의 뒤엉킴 속에서도 순간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처럼 마음에

찌꺼기 한낱 끼이지 않은 본빛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강모는 물끄러미 오유

끼를 바라보았다. 오유끼는 마고자 겉주머니 속주머니부터 차근차근 뒤져 나가

다가 구려서 쥐어 보기도 하고 털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차표는 없었다. 이번

에는 찬찬히 몸뻬 겉주머니부터 더듬어 들어갔으나 역시 차표는 나오지 않았다.

"기차 똥통에다가 빠뜨렸는가 봐."

느닷없이 강모가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지체했던 차장은, 용수만 씌우지 않았지

영락없이 포승 묶은 죄인 몰 듯이 큰 소리로 주변 이목을 집중시키며, 오유끼를

기차칸 꽁지에 붙은 역무실 쪽으로 밀고 갔다. 강모는 어쩔 수 없이 주춤주춤

그네 곁을 따라가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역무실로 오시오."

라고 차장은 강모한테도 명령조로 말했던 것이다. 그 꼴을 냉정하게 지켜보던

강태는 혀를 한번 차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깎아 놓은 대나무처럼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곧추앉은 강태의 꼿꼿한 자세가, 강모한테는 울컥 모멸감을 느끼게

하였다.

죄 없는 죄.

라는 말이 밑도 끝도 없이 얼음칼처럼 강모 가슴에 꽂힌다. 형님은 죄 없어서

나를 이렇게, 내 죄로 무안하게 하십니까. 그리고는 이상하게도, 내 죽을 때까

지 기어이 오유끼를 데리고 다니리라, 잘난 형님 보라고 아주 꼭 형님하고 붙어

살면서 이 꼴을 다 보이리라, 싶은 앙심이 부글부글 고이면서 소리없이 끓어 올

랐다. 결국 오유끼는 전주에서 신의주까지의 기차 요금 세 배를 물고, 미농지로

만든 간이 차표를 한 장 신주단지같이 모시어 받아든 뒤 제 자리로 돌아갔다.

물론 그 돈은 강모가 냈다.

"이 돈도 있는데."

하면서 오유끼가 미안하다는 낯바대기로 남 앞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몸뻬 고

의춤을 헤집어 꺼낸 것은, 명주 수건에 싸인 삼백 원 이었다. 그것을 본 강모는

그만 오장이 뒤집혀 하마터면 오유끼의 뺨을 후려 칠 뻔하였다. 기왕에 주어 버

린 돈인데,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생 동안 다시는 그걸 내 눈앞에 보이게 하지 마."

어금니가 부스러지리만큼 악물고, 강모는 다만 그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봉천에

서 그들은 내렸다. 아아, 나는 과연 무엇을 버리고 여기까지 떠나 온 것일까.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4권 (7)  (0) 2024.05.05
혼불 4권 (6)  (0) 2024.05.04
혼불 4권 (4)  (1) 2024.05.01
혼불 4권 (3)  (0) 2024.04.30
혼불 4권 (2)  (0) 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