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재즙을 넣을 때는 끓인 물이 아닌 냉수를 넣은 후에, 끝으로 오미자즙
을 알맞게 넣으면 드디어 선명한 홍화색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홍화색을
무명에 들이려 할 때는 먼저 엷고 맑은 담홍색으로부터 시작해서 짙고 깊은 농
색이 될 때까지, 뜨거운 온도로 몇 번이고 염색을 하면 되지만, 아무래도 홍화
색은 곧바로 젖은 물을 들이는 것보다는 연지로 만들어서 물에 풀어 염색하는
빛깔이 더 곱고 선명하다. 홍화색을 만들 때, 홍화 한 근에 오미자 한 근의 비
례로 오미자를 같이 마련하여, 따로 옆에다가 항아리를 하나 놓고, 거기에 연수
를 부어 오미자를 담그어 두는데, 날짜는 홍화꽃과 마찬가지로 잡는다. 이윽고
홍화꽃물 밭칠 때, 오미자도 체로 쳐서 고운 물을 항아리에 받아 놓고는, 홍화
두 번째 재즙으로 만든 가장 고운 홍색에 냉수를 넣은 다음, 금방 받쳐 둔 오미
자 첫물을 거기에 부어 저으면, 거품이 일면서 오미자에서 우러난 노란 비치 황
수는 위로 뜨고, 붉은 연지는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 항아리를 기울여 위에 뜬
황수를 조십스럽게 따라 버리면, 거기 붉은 연지가 남는다. 그러면 곱게 두드려
다듬이질한 종이를 소쿠리에 펴고 이것을 쏟아 한참 있다가 웬만큼 수분이 빠져
꼬독꼬독해지거든, 종이를 그대로 우그러서 주둥이를 묶어 매달아 둔 뒤, 바짝
마르면, 사기 그릇에 담아 보관하는 연지.
이 연지는 보통, 홍화 한 근에 한 보시기 정도가 나왔다. 모든 염색 가운데 제
일 비싼 홍화색은, 홍화가 많이 들어가 색이 선명하고 고운 것일수록 그 값은
엄청났는데, 그것은 홍화가 비록 나라안에서 자생하여 그 염재가 난다 하나 몹
시 희귀한 때문이었다. 이 홍화꽃 한 근 값은, 순조 8년에, 중급 정도의 쌀 강
원미 한 섬이었다. 그때 쌀값이라면 중등급이 한 섬에 열닷 냥인데, 홍화색 물
들이는 값은 모시 한 필에 서른넉 냥이었으니, 모시 한 필 홍화색으로 염색하자
면 쌀 두섬이 조금 더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것이 아주 짙고 붉은 대홍색일 경
우에는, 두꺼운 바닥에 빛깔이 노르스름한 명주인 백토주 한 필이 스물한 냥인
데 비하여, 홍화로 물들여 놓은 대홍토즈는 아흔한 냥이어서, 무려 일흔 냥이나
더 비쌌다. 염색값인 것이다.
그러니, 고운 빛깔 하나 얻는데 쌀이 여섯 섬이요, 돈으로 백 냥을 넘보는 대홍
명주란, 꼭 법으로 금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서민이나 노비들한테는 참으로 꿈
같은 것이었다. 더욱이나 홍화는 꽃의 성품이 성덕스러워서, 그 황정색 꽃은 피
를 잘돌게 하는 약재로 쓰이고 씨앗은 기름을 짠다. 이 기름으로 등불 켜서 나
오는 그을음을 받아 만든 먹 홍화묵은 최고의 먹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귀하고
비싼 홍화말고도 복숭아로 붉은 물을 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빛깔도 미미하고
또 금방 색이 바래 버려 홍화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으나, 그런 물빛도 노비한테
는 당치않은 것이었다. 속이 시린 남색을 만들 때는 육칠월의 도톰한 쪽잎을 따
서 돌로 갈아 얼음을 넣고 색을 빚어 내며, 그보다 엷은 푸른색은 닭이장풀로
하고, 또 자색은 지초, 자초의 뿌리를 찧어 만들며, 황색은 치자, 황백, 울금을
우려서 물들이지만, 이 모든 빛깔이 노비에게는 다만 아득하게 먼 것들일 뿐이
었다. 고달픈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떠나는 길에 입고 가는 수의는 치자물
을 들인 마포로 짓는다 하나, 비천한 신분 노비의 죽은 몸에 오련히 우러나는
치자 물빛 은은한 수의를 어찌 감을 수 있으랴. 그만한 것을 누릴 수 있다면 이
미 이승은 그렇게 서러운 곳이 아닐는지도 몰랐다. 노비는 세상의 색 바깥으로
쫓겨나 아무런 색도 없는 까만 옷으로 제 몸뚱이를 두른 채, 그것으로 저의
세상을 삼았으니. 기껏해야, 칠팔월 복더위에 감나무 아래 웬일로 떨어져 버린
시퍼런 풋감을 주워 먹다가, 아직 단물의 기미도 돌지 않는 떫은 물이 어쩌다
그만 저고리 앞섶에 묻으면, 마치 살 속으로 스미듯이 무명 베올 사이로 배어든
감물, 그것이나 노비의 색이었다. 한번 들면,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으면서 날
이 갈수록 점점 녹슨 쇠빛을 띠다가, 끝내는 죽은 피빛으로 가슴 언저리에 남는
갈물. 그것은 그냥 감물이 아니라, 마치 가슴 어디 안 보이는 데를 깊이 다쳐
멍든 울혈이 그리 거멓게 배어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아이고, 저 땡감 먹은 손, 옷에 딲지 말어, 물들어. 옷 베리능고만."
하고 어미 우례가 으름장을 놓아도, 종종머리 꽃니는 어느결에 땡감을 베어 물
다가 끈적이는 손을 저고리 고름이나 앞섶에 닦아, 무던히도 얼룩얼룩 감물을
범벅하여 놓더니만. 이제는 열 살이 넘었다고 제 어미한테 바느질을 배우기 시
작하여, 틈만 나면 어미의 보따리를 헤집어 알록달록 헝겊 조각들을 추려 내곤
하였다. 그리고 제 마음에 드는 색들을 골라 서툰 바느질로 이어 붙여 가며, 난
양대로 조각보 만드는 시늉을 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까운 헝겊을 조무
락거리거나 쪼작거려 못 쓰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지만, 우례는 그런 것들을 평
소에는 별로 나무라지 않았다. 매안 원뜸의 종가에 씨종의 소생인 꽃니가 평생
을 두고 두르거나 입을 날은 없을 비단이나 명주, 모시였지만 그래도 어미가 침
비인 덕으로 바라보기 저리게 눈부신 오색이 영롱한 헝겊 자투리라도 몫으로 가
질 수 있으니, 꽃니한테 그 색깔만이라도 여한없이 실컷 만지고, 가지고, 놀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우례속에 있는 탓이었다.
색깔의 강물에 멱 감고 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꽃니가 다행히 어
미의 찬찬한 솜씨를 닮아 제법 바느질을 해낸다면 침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
직은 나이도 어리고, 계집 종이 해야 할 이런 저런 일들도 안팎에 많아, 꽃니는
노상 부엌과 뒤안과 중문, 대문간을 팔랑거리고 뛰어다니며 심부름을 하였다.
엉덕 밑이 꽃니야아 해 넘어 간다 밥 히라아 밥 헐란다 불 띠라아
나그네 들온다 밥 채리라아 상 물린다 그륵 싯쳐라아 잠 잘란다 방 닦어라아
꽃니야아 꽃니야 애기 운다 업어 줘라 아이고오 다리야아 콕.
꽃니보다 몇 살 더 먹은 열네 살 계집종 콩심이는, 꽃니를 보면 곧잘 흥얼흥얼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가, '콕'할 때는 알밤 주먹으로 꽃니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였다.
콩심이는 효원이 대실의 친정에서 매안으로 데리고 온 교전비인데, 저 혼자 제
머리 빗기에도 서투른 아홉 살 코흘리개이던 것이 이제 제법 나이꼴이 나고, 남
원 말도 혀에 돌게 잘했다. 남원말은 다른 곳과 달라 전라남북도와 경상도, 삼
도 접경 지역의 여러 고을 사투리 억양이 묘하게 섞이어 있었다. 맨 처음 콩심
이가 남도 말로
"워찌 고렇코롬 생겼다요?"
했을 때 안서방네는 손질하던 빨래 홑이불에 푸우, 물을 뿜어 내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고렇코롬? 그거이 무신 말이여? 긍게, 그렇게, 그 말이냐? 느그 동네는 그 말
을 그렇게 허냐?"
하며 웃었다. 반면에 콩심이가 이상하게 생각한 말은
"하아."
였다. '하'가 높고 '아'가 낮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하였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콩심이도 얼마든지 경우에 따라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웃어른한테는 못 쓰는 것으로, 무슨 말에 대답을 할 때 주로 썼
다. 그러나 그 쓰임새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너 밥 먹었냐?"
"하아."
같은 것은 알아듣기 쉽지만, 긍정, 맞장구,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 감탄, 노여
움 들은 모두 그 곡조로 알아들어야 했다. 그 곡조는,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내용,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무궁무진 변조가 되었고, 미끄러지거나 채올리거
나 툭 자르거나 미묘하게 출렁이는 말의 가락은 마치 노래 같은 생각이 들게 하
였다. 콩심이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이제는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나 처녀꼴이 박인 콩심이는, 저 혼자 있을 때나 물
을 길러 갈 때, 흥얼흥얼 노래를 잘 읊조리었다. 콩심이는 효원의 교전비이니,
효원에게 딸려서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래서 콩심이는 항상
아침 저녁으로 효원의 세숫물을 떠다 놓고, 요강을 비우며, 수건을 깨끗하게 빨
고, 효원이 쓰는 건넌방을 쓸고 닦고 소제하였다. 궁중에도 교전비는 있었는데
왕비가 가례때 친정에서 데리고 들어온 계집종을, 본방나인이란 이름으로 왕비
곁에 가까이 두었다. 이 나인은 왕비의 다시 없는 심복으로 그야말로 충심을 다
하여 기쁜 마음으로 성심껏 순중하는 종이니, 왕비의 사사로운 정으로야 대하는
마음이 각별하겠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다른 궁녀들과 같이 부렸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아침 저녁으로 왕비가 본댁에 보내는 문안편지에 쓰는 풀을
쑤는 것이었다. 본댁이라 해도 한집이 아니며, 봉투까지 같은 종이로 붙여서 만
들기 때문에 풀이 많이 필요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빨래와 다듬이, 다림질
을 도맡은 세답방의 나인들하고야 그 일의 고단함이 비교될 수 없을텐데, 세답
방에서는 평상시에도 늘 그렇지만 만일 국혼이나 진연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면
비단과 명주 다듬이가 몇 십 필씩 되어 일이 끝날 때까지 잠을 못 이루며 이곳
처소 나인들은 손바닥이 부르텄다 한다. 그리고 왕과 왕비가 일상 생활에 머물
면서, 먹고 자고 앉고 눕는 살림집을 '지밀'이라 하여, 대궐에서 제일 깊은 곳,
가장 지엄하고 중요한 곳으로 알았는데, 귀한 분을 직접 받들고 있는 곳이라 여
러 처소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아, 이곳 소속 나인들은 애기나인까지도 까다로
운 조건으로 엄선하여 뽑았다.
그리고는 침방이 있어, 소속된 전각과 궁전의 주인, 그러니까 대전이면 왕과 왕
비의 의대를 짓고, 동궁전이면 세자와 빈궁의 옷을 짓는 곳으로, 이처소의 나인
들은 맡은 일의 성격상 나인의 서위가 지밀 다음이었으며, 치마도 사대부 부인
들처럼 특별히 외로 입었다. 그 다음에 수방과 세숫간, 생과방, 소줏방 들에서
도 다 각각 하는 일이 정해져 있어, 궁중의 안살림을 이 일곱 부에서 맡아 하였
다. 그런데 지밀은 워낙 높은 곳이라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곳을 가리켜 '육처
소'라고 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4권 (9) (0) | 2024.05.07 |
---|---|
혼불 4권 (8) (0) | 2024.05.06 |
혼불 4권 (6) (0) | 2024.05.04 |
혼불 4권 (5) (0) | 2024.05.03 |
혼불 4권 (4) (1) | 2024.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