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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9)

카지모도 2024. 5. 7.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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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안 뵈이는디 머."

"아이고, 저 말허는 것 좀 봐, 꼭. 상전은 눈이 열두 개단다. 본다고 알고 안

본다고 몰라? 두 눈 다 깜고도 속까지 훠언히 알제. 종 부리는 디는 이골이 난

양반들인디."

우례의 목소리에 그을음이 스며든다. 눈발 없는 동짓달의 마른 바람이 무겁게

캄캄한 밤 한복판을 베폭 찢는 소리로 날카롭게 가르며 문풍지를 후려 친다. 그

서슬에 놀란 등잔불이 허리를 질려 깝북 숨을 죽인 채 까무러들더니 이윽고 길

게 솟구쳐 오르며 너훌거린다. 방안으로 끼쳐든 삭풍 기운에 소름을 털어 내듯

흔들리는 불 혓바닥이 검은 그을음을 자욱하게 토한다.

"이노무 심지가."

우례는 헝겁 보따리를 묶어 웃목으로 다시 밀어 놓고는 귀이개를 뒷머리에서 뽑

아 들고 등잔 심지를 건드려 본다. 대가리가 어수선하게 뭉친 심지는 들쑤셔져

아까보다 더 매캐한 그을음을 거멓게 토해 냈다. 불이파리 끝에서 긴 꼬리를 끌

며 위로 오르는 그을음은 우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그것은 숨

을 들이쉴 때마다 속으로 스며들어 매웁게 한다. 한 심지에 붙은 불이 왜 어떤

것은 화안허고 고운 불꽃으로 타고, 또 왜 어뜬 것은 저런 시커먼 끄시럼이 되

능고. 우례는 귀이개를 놓고 우두머니 등잔 불꽃을 들여다 보았다. 불꽃 한 가

운데 심지가 뭉친 덩어리는 귀이개 꼭지보다 조금 더 클 뿐이었지만, 거기서는

끝도 없는 그을음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불꽃의 가슴에 박힌 어둠

의 검은 옹이 같았다. 그 형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례는 까닭 모를 깊은 한

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그리고 반닫이 위에 놓인 헌 가위를 집으려고 엉거주춤

일어선다. 아무래도 심지를 후려 불꽃을 고르게 잡으려면 뭉친 덩어리룰 자라내

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막 반 몸을 일으키는 울례의 그림자가 바람벽에 시커멓게

드리워지는가 싶었는데 그것은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잠든 꽃니 아비 정쇠의 구부

린 몸뚱이 위로 어둡게 덮인다. 이제 마흔에 이르는 그의 고단한 숨소리가 그

림자에 눌리어 잦아드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것은 무엇에 숨 한가닥을 찝힌 채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삼키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우례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정쇠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제 커다란 그림자에 먹힌 정쇠 옆에 잠들어 있는 열

다섯살 장정이 다 된 아들 봉출이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어미의

그림자가 덮인 아들의 얼굴은 무거운 어둠속에 가라앉아 겨우 희끄무레 낯이나

분별할 수 있을 뿐 그 모색을 확연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마치 짙은 그을음에

가리워진 것처럼.

그런 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우례는 어금니를 물었다. 너는 어쩌든지,

꼭. 하고는 그 다음 말을 어금니로 깊이 사려 문 것이었다. 그것은 한두 번 벼

른 말이 아니었고, 하두 해 벼른 말도 아니었다. 뼈에 새기게 문 이빨 틈바구니

로 그네의 폐장에 고여 있던 그을음이 피가 배어나듯 배어났다. 그 그을음은 우

례의 가슴 한복판에 심지로 박힌 아들 봉출이의 응어리가 그렇게 불꽃에 싸인

채 토해 내는 것이었다. 우례는 문득 등잔 불꽃 한가운데 박힌 심지가 무슨 일

로 덩어리가 되어 끝도 없이 그을음을 태우고 있는 것이, 꼭 제 속인 것만 같다

는 생각을 하였다.

너는 어쩌든지 꼭.

하고 아들 봉출이를 바라볼 때마다, 어김없이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너무나 뚜렷하고 단단해서 오히려 이쪽이 주춤 물러서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러나 물러선 그만큼의 치수로 우례는 그 얼굴 쪽으로 딸려 갔다. 그 기우뚱거리

는 거리를 바로 잡으려는 것처럼 우례는 늘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꽃니가 잘란다고 이불 밑으로 파고들어가는데, 봉출이는 잠결에도 이불을 턱밑

으로 끌어올린다. 아마 꽃니가 이불을 들추는 바람에 찬 기운이 끼친 모양이었

다. 그런데 벽 쪽으로 누운 정쇠는 여전히 우례의 컴컴한 그림자에 눌리어 숨

한쪽을 찝힌 듯한 소리로 잠이 들어 있었다.

"꽃니 아범."

사람들은 정쇠를 그렇게 불렀다. 우례가 사노 정쇠와 혼인하여 몇 달 후에 봉출

이를 낳았을 때, 사람들은 아무도 정쇠를

"봉출이 아범."

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정쇠도 그것을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봉출이

는 어느 누가 한눈에 보아도 정쇠를 닮지 않았는데, 그 대신에 어느 누가 보아

도 한눈에 "닮았다."고 말할 얼굴이 었었다. 그냥 얼핏 닮은 구석이 있는 정도

가 아니라, 마치 선명한 붉은 인주로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얼굴의 모색도,

두상도, 체형도, 그리고 쉰 듯하면서도 칼칼한 음성까지도 영락없이 닮은 얼굴

이었다.

"봉출아, 너는 어쩌든지 꼭, 니 성을 찾어라. 내가 나중에 죽고 없드라도. 너는

추가가 아니고 이씨다. 잊어 부리지 말그라. 너는 이씨여. 추봉출이 아니라 이

봉출이여, 이. 어쩌든지 꼭, 너는."

우례는 봉출이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주문처럼 말했다. 그리고 청암부인을 남

모르게 가리키며 말했다.

"잘 바 두어라. 네 할머님 되시는 어른이시니라."

그을음은 이제 온 방안에 차 올랐다. 그것은 횃대의 옷갈피 속으로, 바람벽 속

으로, 그리고 이불이며 베개, 살 속으로 막막하게 자욱한 연기처럼 스며들어간

다. 숨 속으로도 스며든다.

우례는, 가위로 잘라 내야겠다고 일어서려던 무릎을 주저 앉히며 등잔불을 들여

다 본다. 아까보다 더 단단하게 뭉친 심지는 제 몸이 탄 덩어리가 뭉친 자리에

엉기어 더 커다란 옹이가 되어 있었다. 그 옹이는 검고 불길한 그을음을 끝도

없이 토해 낸다.

"어머이."

검정 무명 이불 아래 몸을 묻은 꽃니가 등잔불 앞에 앉아 있는 어미를 부른다.

어미의 그림자가 어둡게 진 등뒤에 대고 꽃니는 묻는다.

"헝겊데기가잉."

"잉."

"왜 어뜬 것은 색이 빠알거고, 어뜬 것은 노오러대?"

"물딜인 사람한테 가서 물어 보그라."

"그러먼잉, 같은 꽃, 같은 나문디, 왜 어뜬 꽃은 빨강이, 어뜬 나무는 노랑이,

어뜬 풀은 파랑이 나온대?"

"하누님한테 물어 바아."

"어머이."

"왜."

"근디잉, 헝겊데기는 지가 그 물을 들고 자퍼서 들고, 나무랑 풀이랑 꽃이랑은

지가 그 색 물 내고 자퍼서 내능 거이당가?"

"몰라."

"어머이, 근디잉, 아무 물도 안 나오는 꽃, 기양 물 못 딜이는, 아무껏도 아닌

풀, 잉, 그렁 건 왜 그렇게 타고났이까아. 그렁 것은 멋 헐라고 살으까잉."

꽃니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까막까막 하며 한 마디 한 마디씩을 짚어 묻는데, 등

잔불의 심지는 더욱 덩어리진 그을음으로 불꽃을 길고 어둡게 에워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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