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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8)

카지모도 2024. 5. 6.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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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의 살림하고야 비길 수 없지만, '살림'이란 대궐이나, 사대부의 집이나, 서

민의 것이나, 신분과 재산의 규모와 형평에 따라서 종류는 더 다양하거나 단출

한 것이 서로 다르겠지만, 기본 골격 뼈대는 똑같은 것인즉. 노비를 많이 거느

리는 집에서는 일의 대소,경중,완급을 따라 세밀하고 규모있게 분담을 할 것이

며, 노비가 적은 집에서는 꼭 그렇게 네 일 내 일 가를 수가 없이 자기 맡은 책

임말고도 웬만큼은 서로 거들어야 할 것이고, 그나마 단비로 노비가 하나뿐이면

그는 한 몸에 그 일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단비조차 부릴 수 없는 처지의

형세라면 반상을 막론하고 본인이 직접 하나에서 열까지 다 일해야 하지 않겠는

가. 동네 사람들은 오례 잡아 서리쌀, 풋돔부, 풋콩 까서, 밥을 짓네, 송편하네,

창 앞에 대추 따고, 뒤안에 알밤 줍고, 논귀에서 붕어 잡고, 두엄에 집장 띄워

먹을 것 많건마는, 가련한 우리 신세 먹을 것 바이없네. 세상에 죽는 목슘 밥

한 덩이 누가 주며, 찬 부엌에 굶은 아내 조강인들 볼 수 있나. 철 모르는 우

는 자식, 배를 달라 밥을 달라, 무엇으로 달래 볼까. 우리는 저 박을 타서 박

속은 지져 먹고 막적은 팔어다가 한 끼 구급하여 보세. 하고는 탄식을 하며, 동

네 도끼를 얻어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박꼭지를 찍어 마당에다 내려놓고, 하도

큰 박이라 동네 대목의 큰 톱을 얻어다가 박통을 켜는데, 기껏 부린 욕심은 박

속이나마 배불리 먹고, 바가지는 쌀도 일고 물도 떠먹는다는 것이 고작이었으

나. 이것이 왠일인가. 슬근슬근 탁, 타 놓은 박통 속에서 푸른 옷 입은 동자 한

쌍이 썩 나서며, 흥부 앞에 절하고 드리는 온갖 진기한 약재부터 시작하여, 타

는 박마다 쌀 나오고, 돈 쏟아지고, 휘황 찬란 금은보패, 일광단, 월광단에 산

더미 같은 비단, 포목이 노적가리처럼 쌓인데다, 수백 수천 가재 기물이 꾸역꾸

역 다 나오는데. 심지어는 뒷간 똥치우는 가래조차, 다른 나무는 무겁다고 오동

으로 정히 깎아 나주칠을 곱게 하여 나올 지경이었다. 사흘 나흘을 예사로 굶

어, 뱃가죽이 등에 붙고 갈빗대가 따로 나서, 두 눈이 캄캄하고 두 귀가 먹먹하

여, 누웠다 일어나면 정신이 어질어질, 앉았다 일어서면 다리가 벌렁벌렁, 말라

죽게 되었으되 찾는 이 전혀 없고, 밥이라고는 냄새조차 안 맡히던 흥부 내외

가, 서 말 여덟 되밥을 한 번에 지을 적에 솥이 적어 못하고는, 동네에서 쇠죽

솥 그 중 큰집을 찾아가 밥을 짓고, 씻도 안한 쇠죽통에 밥 두통을 퍼다 담아

놓으니, 뭉게뭉게 뜨거운 김, 밥 냄새에 숨막힌다. 스물다섯 명이나 되는 아들

을 떼죽으로 몰아 앉혀 제 양껏 먹인 후에, 식구대로 비단 한 필씩을 통으로 휘

감아, 흑공단, 백공단, 붉은 비단, 꾀꼬리색, 청색 비단, 해오라기 백설 같은

흰 비단을 둘러쓰니, 이런 기이한 일이 세상에 어디 다시 있으리오. 흥부 마누

라가 하도 좋아 춤을 추며 마지막에 놓인 박을 타는데, 메나리 목청으로 낙랑하

게 소리를 메기고, 흥부는 뒷소리를 받았다.

노비는 말 그대로 오직 주인의 손과 발이니 많을수록 상전의 손은 편해지고, 노

비가 적을수록 그만큼 상전의 손은 고달프기 때문에, 노비야말로 불어날수록 좋

은 재산이었다. 그러나 상전의 형편이 여의치 않고, 뜻밖에도 가세가 기울어 끼

니를 끓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수도 있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도 부모

한테 물려받은 종이 있다거나 또 무슨 연유로든지 종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부

릴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종은 오직 신분이 천하여 종일 뿐이지, 오장육부 먹

는 것 입는 것은 다른 사람과 똑같으니, 그것을 감당하여 먹이고 입히기 힘든

상전은, 자기 집 문서에 매인 종이나 대대로 물려 내리는 씨종이라 할지라도

"자, 너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하고 남한테 파는 대신 속량을 해 주어, 그가 종의 멍에를 벗고 한 양민이 되게

하는 일도 있었다. 기르던 강아지도 오래되면 정이 드는데 하물며 노비이랴.

조선의 영조 때에 장례원을 없애고, 정조 때에는 도망하는 노비를 막고 잡아 들

이던 노비추쇄법을 폐지했으며, 순조가 즉위하고는 내수사 각 관방의 노비원부

를 전부 폐지하면서 인신 매매를 엄금하였으나, 누천 년 동안 삶의 골에 깊이

박혀 뿌리를 내린 노비 제도는 결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또 속량을 받은 노

비들도 대개는 어디로 가지 않고, 상전의 집 근처, 살던 고을에 그대로 머물러

여전히 옛 상전의 살림을 돌보며 일을 하곤 했다. 다만 이제는 매인 종이 아니

라는 것만 다를 뿐 변함없는 생활을 하는 것은, 아주 못된 상전만 아니라면 서

로 정리가 깊어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이유의 하나요, 또 하나는 낯선 곳으로 떠

나 보았자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일가 친척 집안붙이 하나도 없는

신세로 떠돌다가 결국은 다시 남의 집 종이 되거나 아니면 거지 되기 십상이어

서, 양민이 된 노비는 살던 곳에 그대로 사는 것이 여러모로 더 이로운 때문이

었다.

"개중에는, 제 앞길 가릴 만한 총명한 노비도 있어서, 봇짐을 싸들고 저 먼 곳

어느 두메 산골이나 아무도 알아보는 이 없는 동에로 가서 양반 노릇을 하며 사

는 경우도 있다더라."

"본 데 있는 집 종은 어설픈 양반보다 낫다."

고 하는 말이 있을 만큼, 도덕과 학문이 높은 집의 종은 상전의 하는 것을 보아

서 배운 범절이나 지식, 그리고 솜씨 같은 것이 나무랄 데가 없어서, 어디 모르

는 곳, 민촌으로 가서는 양반 노릇을 하고도 남았다.

우례는, 매안 원뜸의 종가 씨종인 막손의 소생이었다. 청암부인과 율촌댁과 효

원이 각기 그 친정인 청암과 율촌, 그리고 대실에서 데리고 온 교전비나, 사는

중간에 들어온 종들하고는 씨종은 아무래도 좀 달랐다. 상전이 대하는 품도 더

각별하고 씨종도 비록 신분은 다르다 하나, 바로 이 마당, 이 방안에서 아비와

할아비 그 할아비를 낳았을 것이니, 이곳이 뿌리요, 이곳이 자신의 세상이었기

때문에 상전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따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씨종 막손이 내

외가 낳은 소생 셋 가운데 우례는 맨 위, 첫배였다. 낳아 놓았을 때부터 살빛이

보얗고, 생긴 것도 또렷해서 "종의 자식으로 아깝다." 는 말을 들었는데, 성질

도 그저 안순한 편이라 청암부인은

"이 애한테 바느질을 가르치라."

고 침모하테 일렀다. 침선이라면 사대부의 따님이나 양반의 여식이라도 부덕으

로 반드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며, 사정이 생기면 삯바느질을 하기도 하므로

노비로서 침비가 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궁중에서나 마찬가지로

하는 일이 그러해서 늘 상전 가까이에 있고, 대우도 달라, 어미 모자를 붙여 침

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알어야 종을 부린다고 안 그러대? 상전이 솜씨가 있어야 죙이 보고 딸체. 하루

는 마님이 종한테 보손 맨들어라아 그랬다고 허자. 암만 해바도 당최 이뿌게 안

된단 말이여? 에이 안되겄다, 마님하테 가서 여쭤보자, 허고는, 마니임, 마님,

이 보손 맨드는 것 좁 갈쳐 주시요오, 했는디. 마님이 조께 지달러라, 그래 놓

고는 한참 있다가, 아나, 보손. 허는디 기양 보손이 어뜨케나 큼지막헌지, 쌀

차두(자루)만이나 허다아, 그러먼 어쩌겄냐? 우숩겄지? 종이 상전보고 웃어 불

먼 상전은 상전 노릇 다헌 거이다. 그렇게 상전은 종보다 더 바뻐. 머이든지 알

랑게, 종은 한나만 알먼 되지마는, 상전은 다 알어야 헝게. 긍게 양반은 맨날

무신 생각을 요러어고 허고, 책을 늘 디다보고 안 그러냐? 근디, 우리 아씨랑

마님이랑은 어찌 그리 아능 것도 많고 솜씨도 좋으시까잉. 옛말에도 기왕에 종

을 살라면 대갓집이 가 살라고 했는디. 일리가 있니라. 보고 배우능 거이 다르

그더엉. 긍게 너는, 신세 한탄을 허들 말고, 채라리 머 한나라도, 앉고 스는 거

이라도, 말허는 법 하나라도 배와야 히여. 배우먼 다 니껏 되고, 넘들이 너보고

빤듯허다고 칭송허제. 그러고 바느질 잘 배우고."

우례하테 바느질을 가르쳐 준 침모는 그렇게 말했었다. 옷을 모양 있게 마르고,

실을 바늘에 꿰어 바고, 감치고, 공그르며, 휘갑을 치고, 상침을 뜨는 우례의

솜씨를 보고

"천상 너는 바느질 허겄구나."

하고 칭찬하는 침모는 수도 아주 곱게 놓았다. 그래서 우례는, 수본을 뜨고 본

에 따라 수를 놓아 보곤 하였다. 집안의 어른인 청암부인은 비록 여자라 하지만

언제 한가히 들어앉아 침선을 할 만큼 틈을 내기 어렵게, 추려야 할 안팎 대소

사가 많았고, 연갑도 있어서 손수 바느질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며

느리 율촌댁은 바느질 솜씨가 남달리 좋아서, 특별히 날렵하면서도 부드럽게 돌

아가는 깃을 잘 달았다. 그래서 율촌댁의 저고리는 우아하였다. 이 깃과 섶을

날아갈 듯 아름답게 다는 솜씨란, 다른 바느질을 안 보고도 가히 짐작할 수 있

는 일이었다. 그래서 귀한 옷감으로 만드는 좋은 옷은 율촌댁이 손수 지었지만,

그네 역시 집안의 어른으로서 거두고 살필 일이 많은지라, 식구들의 옷을 일일

이 손댈 수는 없었다. 청암부인과 율촌댁, 그리고 이기채와 소년 강모의 옷은

율촌댁 혼자서 다 하기 어려웠다. 이 옷은 아무리 공들여서 지었다 할지라도 한

번 물에 들어가면 모두 흩어져 처음부터 새로 지어야 하는데, 여름 같은 때는,

어제 밤 새워 지은 옷을 오늘 하루 입고 벗어 내놓으면 다시 빨래하여 내일 밤

을 새우고 지어야 할 지경이었다. 구겨진 옷을 입지 않는 단아한 상전들을 위하

여 우례는 침모와 더불어 많은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앞앞의 이부자리와 베개,

보료, 안석, 방석 등을 모두 도맡아 손질하였다. 이부자리는 그만 두고 베개만

보더라도 일이 많았다. 좁고 납작한 판자 나무를 상자 모양으로 만들어 조그만

서랍을 단 퇴침, 여름에 서재에서 잠깐 잠이 들 때 베는 시원한 도침이야 손 갈

것이 없었지만, 둥글고 가늘고 긴 주머니에 쌀겨를 넣어서 만든 것으로 양쪽 끝

마구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장식을 다는 곡침, 골이 여섯 개, 혹은 여덟 개가 나

도록 누비어, 골마다 수를 놓고 속에는 겨를 넣어 베개깃을 씌운 화사하고 미려

한 골침, 늦은 가을에 국화꽃을 많이 따다가 말려서 붉은 베 주머니에 넣어 만

드는 국화 베개, 결명자로 베갯속을 넣는 결명자 베개, 그리고 어린아이가 베면

머리가 맑아지고 눈이 밝아지며 풍이 없어진다는 녹두 베개, 또 갓난아기에게

베어 주는 좁쌀 베개. 이것들을 늘 새것처럼 정갈하게 건사하는 것은 여간 마음

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머리란 기름이 오르기 쉬운 것이어서 금방 잇을 시쳐 놓았는가 싶으면 금방 갈

아 씌울 때가 되곤 하였다. 옷가지와 이불호청, 베갯잇을 뜯어 빠는 것은 우례

의 바로 아래 계집동생 소례의 일이었다. 지금은 소례도 비부를 얻어 행랑의 저

쪽 방에 살지만, 그네의 손은 언제나 허옇게 물에 불어 있어, 건드리면 손바닥

이 물이끼처럼 덩클거리며 흩어져 버릴 것같이 보였다. 그래도 소례는 비시시

잘 웃었다. 그런 것을 본 날은, 우례의 속이 바늘에 찔린 것보다 더 저며들어

바느질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우례는 그 떨어진 눈물위에 바늘을 꽂았다. 때

로 눈물은 수 놓던 꽃잎위로 번졌다.

"이 아이한테 바느질을 가르치라."

는 청암부인의 말이 없었다면 우례의 손도 소례와 하나 다를 바 없이 물에 퉁퉁

불어 잇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천행으로 이렇게 고실고실한 비단, 명주의 현란

한 색깔들을 만지고 있으니, 부인데 대한 감사가 뜨겁게 치밀다가도 문득 수례

와 부딪치면 그만 손바닥에 눈물이 배듯 땀이 돋았다. 바느질하는 손은 습기만

끼어도 안되는데도.

그런데다가 몇 년 전, 강모가 혼인하면서 효원의 옷이 늘어나고 또 얼마 후에는

그들의 아들, 이 집안의 종손 철재 도령의 옷이 새로 생기게 되었다. 날이 갈수

록 도령은 자라 옷의 품을 자꾸 늘리는데, 집을 떠난 새서방님 강모의 옷은 언

제나 다시 짓게 될 것인지. 착잡하였다. 그리고, 마님 청암부인의 옷은 이제 영

영 지을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철없는 꽃니는 오밤중까지 등잔불 밑에

앉아서 가슴이 섬뜩하게 고운 옥색의 색색 가지 헝겊 조각을 늘어 놓고 노는 것

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내버려 두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무시로 곡성이

들리는 때라서, 색 있는 것을 삼가야 하기에 우례는 꽃니를 나무란다. 그것이

헝겊 자투리에 불과한 것이지만 웬일인지 망인에게 송구스러운 탓이었다.

"너 열 살 먹은 지가 언제라고 아직도 그렇게 속이 없냐. 눈치로도 그만헌 것은

알겄다, 원. 바누질도 다 헐 때가 있고 안헐 때가 있는 거이여. 더군다나 이런

무색 것, 상중에는 안 만치는 거이라고 내가 안그래애? 말을 허먼 어디로 듣능

고오. 마님 초상이 나서 모다 안팎으로 베옷 입고 통곡을 허는디, 머어이 좋다

고 한가허게 청실 홍실 치키들고 앉어서 울긋불긋 색 바누질을 헌다냐, 아랫것

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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