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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13)

카지모도 2024. 5. 11.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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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들의 등뒤에서 키녜와 돔바리는 광주리에 그릇과

숟가락들을 챙겨 담고, 물담살이 붙둘이는 밭으로 논으로 새물을 길어다 동이에

부어 주었다. 논에서도 일꾼들은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보리 단술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고는 얼근해져서 쌈지를 꺼내 곰방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밭일은 주

로 여자가 하였지만 논일을 하는 것은 주로 남자들이었다. 살림과 농사가 큰 집

에서는 상머슴, 중머슴, 담살이를 다 두고 부리지만, 보통은 하나 아니면 둘을

두는데, 담살이는 그 중 나이가 어려 열두어 살부터 열일곱 정도의 사이에 든

소년 일꾼으로, 땔나무를 장만하거나 소를 먹이고 꼴을 베는 깔담살이, 물 긷는

일을 전담으로 맡는 물담살이가 있어, 주인집에서 먹고 자며 옷을 얻어 입고,

새경으로는 한 해에 쌀 한 가마니를 받았다.

"붙들아. 너 진새헐 때 아직 안되얐냐?"

물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붙들이에게, 담뱃대를 두드려 떨던 일꾼 하나가 말을

건넸다.

"되얐지맹. 그러지야?"

붙들이 대신 옆에서 말을 받은 장정이, 나이치고는 가녈가녈한 붙들이의 허우대

를 위아래로 훑어 보더니

"야 야, 넘 다 자는 오밤중에도 너는 자지 말고 살째기 나와서, 거들독 지는 연

습 좀 허그라. 젊은 놈이 어찌 노상 매가리가 그렇게 없냐? 너도 인자 내년 단

오에는 진샛날 받고 중머심 새경 받어야 안히여? 그래야 이뿐 각시 얻어서 장개

도 가제. 근디 너 그래 갖꼬 어디 심 쓰겄냐?"

한다. '진새'란, 담살이의 애티를 벗고 드디어 '온 일꾼'으로 인정되는 한판의

잔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일이나 명절처럼 날짜 되었다고 치르는 것이 아니었

다. 이 진새를 하기 전에 담살이는 반드시 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

것은

"내가 이만한 힘이 있소."

하고 보여 주는 증거로,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자나무 근처에 놓인 쌀

가마니보다 크고 무거운 돌을 불끈 들어 짊어지고 나무 주위를 도는 일이었다.

그 돌을 '들돌'이라 했다. 온전한 일꾼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자질의 바탕은

힘이었던 것이다. 이 일을 거뜬하게 해내면, 모여 선 사람들이 장하다고 함성을

질렀다. 그 동안 송아지도 소도 아니었던 어중간한 어석이소가 이제 떡 벌어진

황소로 때를 벗는 뿌듯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면 담살이의 주인집에서는 바로

진새 잔치를 할 날을 잡았다. 그리고 푸짐한 술과 음식을 준비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명절인 단오를 전후해서 벌어지는 이런 잔치는 머슴들에게 몹시 흥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은 기양 온 동네 머심들을 다 불러 갖꼬, 술을 막 동우째 엥기고, 닭죽 쒀

주고, 있는 집이서는 돼야지 괴기 먹고 남게 내주고."

당사자에게는 장정이 된 축하의 뜻으로 옷 한 벌씩을 해 주었다. 나이가 차고,

황소라도 들어올릴 만한 힘이 넘친다 할지라도, 진새를 치로지 않으면 다른 집

일꾼들이 품앗이 상대로 삼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이후에는 온 일꾼 대접

을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새경도 달라졌으니, 중머슴은 한 해에

쌀 열 가마나 열한 가마, 그보다 더 나이 많고 능력이 있는 상머습은 열세 가마

를 받았다. 주인집에서는 머슴이 기거하는 머슴 사랑을 따로 주고, 사철 의복도

물론 다 해 주었는데, 봄, 가을로는 무명 중의, 적삼, 여름에는 베 잠뱅이, 등

거리에, 겨울에는 솜 바지, 저고리였다. 옷과 새경만 해도 그렇지만, 머슴이 먹

는 양식도 수얼치 않아서, 삼 시 세 끼 끼니마다 단지 만한 사발에 고깔

봉우리를 한 고봉밥을 담고, 샛거리 먹을 것을 고프지 않게 주어야 하는데

"한 되 쌀을 씻어서 머슴 밥을 지으면 한 그릇 밥이 좀 모자란다."

고 하였다. 그러니

"한 해 농사 지으면 머슴이 절반은 가지고 간다."

는 말이 저절로 나옴직도 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머슴의 일은 고되고 힘도 많이

쓰는 것이어서, 만일 실하게 먹이지 못하면 배가 고파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우선 기운이 없어서 무슨 일을 하려 해도 힘이 닿지 않는 것이다. 또 심정이 상

해서도 배곯은 머슴이 공력 들여 일할 리가 없으니, 인심 박한 집 머슴은 건둥

건둥 건너뛰어 일을 하거나 번연히 일을 보고도 건성으로 지나쳐 버리기 일쑤였

다.

"머슴 먹일 것 아끼다가는 그해 농사 다 망친다."

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게으르고 못된 머슴이 들

어온다면,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도 허사라, 주인으로서는 어떤 머슴이 들어

오느냐에 따라 농사 성패가 정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해의 일이 마무리되

는 동짓달의 동짓날을 기준으로 일꾼을 들이거나 내보낼 때, 주인들은 모쪼록

정직하고 일 잘하는 머슴을 구하기 위하여 널리 사람을 놓아 알아보고 수소문을

하였다. 물론 머슴이 모두 해마다 들고 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정해진 집에

서 서로 마땅하여 몇 년씩 머슴을 살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부자 형제들

이 같은 집에서 연이어 머슴을 살기도 하였다. 머슴은 제 농사를 못 짓고 남의

집에 고용되어 새경 받고 일해주는 것이 고달픈 처지이기는 하지만, 농사에 관

한 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머슴손에 맡겨진 것이어서, 주인이 된 심정으로 이

일 저 일 스스로 알아서 추려 나가야 했다. 그 중에 상머슴이 하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언제 잠깐 손놓고 앉아 있을 틈이 없는 그는 쟁기, 가래, 괭이, 쇠스랑

과 작두, 호미, 낫에서부터 잿박에 오줌장군, 개똥 삼태기까지 몇 십 가지 농기

구 연장을 제 살같이 다루고 손보면서, 정월이면 한 해 지을 농사를 계획한다.

봄철에 모내고 여름철에 김매며 가을철에 온갖 곡식 추수를 할 때, 아무리 일

잘하고 힘 좋은 머슴이라 할지라도 혼자나 둘, 셋이서 그 일을 도저히 다 해낼

수는 없으니 놉을 부리게 되는데

"어느 날."

"어느 논에."

"몇 사람을 부르며."

"누구를 오라고 할까."

"일은 어떻게 시킬까."

를 주관하여 여축없이 해야 하는 것이 상머슴이었다.

"원래 글 읽는 선비는 아무리 가난해도 일하러는 나가지 않는 것이고, 주인은 일

꾼을 감독하려 하여도 한번 둘러보면 그때뿐."

이어서, 일꾼들이 눈을 속이기로 하면, 주인이 하루 종일 지키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 볼 때만 하는 척하고 안 보이면 해찰을 해 버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었다. 일에 닳아지고 꾀만 남은 일꾼들을 요령껏 다루기 위해서는 상머슴의 남

다른 수완이 있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큰 수완은 일꾼들이 따라 하지 않을 수

없게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남을 시키려면 자기는 그보다 열 배를

더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머슴은 어쩌든지 밑이 가벼워야 했다. 이 머슴을 두는

것이 형편에 벅차서 혼잣손으로 머슴이나 다를 바 없이 농사를 짓는 집도 많았

다. 또 그것이나마 자기 논이면 다행이었지만, 소작을 부치는 집이나, 몹시 가난

하여

"오늘 우리집에 일허는데 오실라요?"

부르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집이 문중에서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아

무래도, 다른 일꾼들과 마구 섞여 함부로 말을 주고 받지는 않았다.

"썩어도 준치."

라고 처신을 조심하는 까닭이었다.

이삼십 명 일꾼들이 지게로 지어 온 점심밥을 다 먹고 나서 삼삼오오 둘러앉아

잠시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도 이들을 절대로 거멍굴이나 고리배미 사람들과는

섞이지 않았다. 눈 내리는 엄동 한철을 빼놓고는 으레 매안으로 올라와,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의 놉으로 일하는 공배는, 걷어부친 베 잠뱅이에 소매없는

등거리를 걸치고, 다른 일꾼들 틈에 어울려들어,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

다.

"시상이 달러졌단디."

"무신 시상이?"

"아, 사람 사는 시상."

"그래서 시방 자네 머이 달러징 거이 있당가?"

"넘들이 그렇다고 헝게 그렁갑다 싶은 거이제."

"나 원, 시상이 달러졌다, 달러졌다, 허드라만 그거이 다 말뿐이제 실상 머 달러

징 거이 있능가? 그대로제. 쥐뿔이나 가진 거이 있어야 재주를 넘든 용을 쓰든

달러지제, 아 손바닥 뻘그런디, 쥔 것 없는 맨손 바닥에 하대 받고 살든 그 자리

서 하루아칙에 달라지면 대관절 머이 달러진당 거이여? 안 달러져, 그대로여. 나

라가 망해 부러도 양반은 양반이고, 상놈은 상놈, 종은 종이여. 무단히 넘의 불

에 개 잡을라고 말어. 그러다가 매급시 지 머리크락이나 꼬실르제."

"시방은 상감님도 종을 산다는디."

"온 백성이 다 종을 살제, 그렁게."

말하던 사람이 발등으로 불불 기어 올라오는 왕개미를 툭, 발을 굴려 떨어트린

다.

"그러면 양반도 종이란 말인디, 참말로 그렇다먼 그께잇 거 이판사판, 헐 말 못

헐 말이 어디 있어? 너냐 나냐 체다보고, 개릴 것은 개렐바야겄네."

"왜 머 개릴 일 있능가?"

"무신 일이 꼭 있어서가 아니라, 머이 달러졌단디 내 손에가 잽히능건 암껏도 없

잉게 무단히 까깝허고, 멀 좀 알먼 좋겄는디 알든 못헝게 보손 신고 발등 긁고,

넘의 다리 긁는 것맹이라."

"오장에서 불 낭가?"

"저 사램이 어디서 우례 소문 들었능갑다. 쩍 허먼 입맛이제."

"오, 그렇고만? 애돌와서 그렇제? 아까부텀 밥도 못 버고 애돌애돌 허드라니. 아

서라, 애초에 넘으 꺼이여. 여보소, 자네가 조강지처 내부리고 대그빡에 흰 털 돋

느디 비부쟁이로 갈 것도 아님서, 우례가 이뿌먼 멋 허고 고우먼 또 멋 헐랑가?"

웃음엣소리로 여기저기서 몰아 붙이자 당사자 얼굴이 벌개져서 무슨 말을 얼른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한 마디 한다.

"첩을 삼제."

그는 재담도 잘하고 아는 이야기도 많은 아랫몰 타성 임서방이다. 생김새 자그

마하나 다부져 보여 물에 잘 씻긴 돌멩이 같다. 그의 조부 대에, 매안에 있는 사

액서원인 매안서원의 원지기를 하다가, 대원군의 훼철령으로 서원이 헐려 버린

다음에도 어디로 가지 않고 그냥 마을 끄트머리 아랫몰에 남아 눌러 살면서 대

를 물린 그는. 비록 타성바지지만 행동거지 눈밖에 나지 않게 처신할 줄 아는데

다가 남다른 붙임성도 있고, 손재주까지 곰살가워 박대를 받지는 않았다. 그보다

는 오히려 지붕을 새로 잇거나 무너진 담을 다시 쌓을 때, 혹은 벽을 바르고 구

들을 놓을 때면, 문중의 이 집 저 집에 놉으로 빠짐없이 불려 다니곤 하였다. 이

상하게 그의 손이 닿으면, 같은 일을 해도 태깔이 나고 야물었다. 그래서 마을에

는 그가 할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본디 재바른 그는, 이런 일을 하러 간 집의

비복들과도 허물없이 쉽게 사귀었지만, 주인을 대하면 주인의 걸음걸이와 말씨,

그리고 얼굴표정까지도 세심하게 보다 두어 그 양을 배우려 하였다. 임서방이

던진 '첩' 소리에, 아까 몰리던 사람이 말을 받았다.

"첩을 삼어? 사흘 굶어도 따러 산단 쳅이 있이까?"

"굶어? 이런 손. 이러니 무신 첩을 두겄능가. 아 멕일 생각을 해야지 왜 궁길 생

각을 몬야 허능고? 사램이 다 생각대로 되는 것이당만."

"그렁게 환장허겄제. 다 같은 대장부로 나서 누구는 지 목구녁 풀칠도 제때 못허

는디, 누그는 처첩을 쌍나란히 줄세우고."

그 말 끝에 누가

"샘현육각을 불제."

하였다. 그러자 그 옆에 앉았던 어서방도 볼멘소리를 한 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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