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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11)

카지모도 2024. 5. 9.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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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로 이하의 사람들로 신분이 미천하고 가진 재주 없는데다가, 집도 절도 없이

궁박한 처지여서제 살림은 그만두고 목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의 상민들

이, 어느 양반의 행랑이나 혹은 그 집 발치에 붙어 살면서, 종도 머슴도 아니지

만 그와 마찬가지로 주인네 일을 하는 호제들이 사는 집도 '호제집'이고, 혼인

한 노비들이 저희 식구끼리 나와 사는 집도 '호제집'이라고 두루 불렀다. 살림

이 근동에 울리는 대갓집이라면, 남노여비에 호제들, 그리고 상머슴, 중머슴과

소 먹이고 꼴을 베는 깔담살이, 물만 긷는 물담살이들을 욱근욱근 불리었지만,

같은 문중의 양반 집안이라도 물려받은 것 여의치 않고 처지가 곤란한 집에서는

잘사는 일가의 집으로 가서 안팎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매안 고을 이씨 문중의

종가 이기채의 솟을대문 지척에 엎드리고 있는 여남은 호제집들 중에서도, 씨종

막손이의 집은 바로 대문 바깥 발치에 바싹 붙어 있었다. 막손이 내외와 그 소

생들은 우례, 소례, 그리고 끝엣놈 막둥이가 모두 눈만 뜨면 상전에게로 가서 하

루 종일 일을 하고, 날이 어두워져야 집이라고 돌아와 겨우 잘 뿐이니, 삼시 세

끼를 모두 그 댁 정지에 쪼그리고 앉아 먹지마는. 그래도 솥단지 걸린 제 정짓

간이 따로 있고, 단지와 항아리도 몇 개 놓인 이집의 허술한 뒤안에는 철따라

심심치 않게 일년초 풀꽃들이 피고, 여름이면 봉숭아나 맨드라미가 붉은 꽃잎을

피우기도 하였다. 그것은 우례가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옮겨 심은 것들이었다.

물이 차 오르던 그 봉숭아 꽃봉오리가 막 연한 꽃송이를 터뜨리고 꽃대를 솟구

친 맨드라미는 선홍색 여린 혀를 수줍은 듯 내어밀 때.

"아무개 양반이 막손이네 뒤안에서 우례 허리를 담쑥 감어 보듬고, 그 집 아랫

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는 말이 생겨나고

"대낮에, 모다 일허로 나가서 빈 집인디, 더운 여름날에 방문은 다 함봉을 허고

닫혔드만, 들마루 밑이가 신짝들만 기양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한 것을 지나가다가 힐끗 보았는데

"짚신 두 짝은 우례꺼이 분명허고 까마구 등허리맹이로 윤이 자르르헌 구두는

아무개 양반 것 아니겄느냐."

는 말이 수군수군 돌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다 떨어진 짚신짝일망정 이제 물이

오르는 열여서 살 처녀꼴이 박이는 큰애기 짚신은 그 꼴의 모양새가, 헤벌어진

제 어미의 마당발과는 같을 리가 없었고, 온 마을 문중에서 맨 먼저 머리를 깍

고 구두를 신은 개명 양반은 말 안해도 누구인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으니.

그것은 기표였다.

따갑게 익은 햇빛이 사람의 기척 없는 빈 집의 지붕과 마당을 조청같이 숨막히

게 누르고, 제 물에 겨운 봉숭아, 맨드라미의 꽃시울이 한낮의 정적 속에 자지

러지는데, 닫은 방문이 무색하게 온 몸뚱이를 맨살로 드러내고 있는 신발 네 짝

은, 어쩌면 굳이 숨기려 할 것도 없는 행색으로도 보였다. 그것이 벌써 십오륙

년 전 일이었다. 그 여름, 농부들이 '미끈덩 유월'이라고 부르는 계하에, 소서

대서의 절기를 당하여 더위가 극심해질무렵, 이따금 큰 비가 내려 초목은 검푸

른데, 날파리에 하루살이 모기들은 앵앵거리며 모여들고, 무농에서는 왁 그악

와악, 엉머구리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날만 새면 너나 없이 남정은 논으

로 나가고 아낙은 밭으로 가서, 긴긴 하루 해가 다하도록 김을 매야하는 오유월

일에,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면화밭이나 콩밭을 매는 날은 으레 놉을 불러 부

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규모가 큰 청암부인의 논이나 밭에는 그 넓은 면적만

큼 많은 놉이 늘 필요하여, 마을 안의 타성바지나 물 건너 거멍굴 사람들, 그리

고 더 저 아래 고리배미, 심지어는 매안의 문중 집안에서도 무세 곤궁한 사람은

호미를 들고 이 밭으로 일을 하러 왔다. 하여 자연히 뒤섞인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튀어나오고, 그것은 꼬리를 물어 퍽퍽하게 뒤집히는 흙에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과 범벅이 되었다. 화덕같이 달구어진 햇볕에 정수리가 까

맣게 타는 옹구네는 제 옆에서 묵묵히 손을 놀리는 평순네한테 낮은 소리로 말

을 붙인다. 그때는 옹구네도 평순네도 명색이 남정을 만나 시집이라고 온 지 얼

마 안되어 옹구도 평순이도 낳지 않았을 때였다.

"양반 참 존 거이여잉."

"깨소금이 묻었네."

"내 말에? 아따, 안 듣는 디서는 나라님 숭도 본다는디, 내가 머 없는 말을 잣

어 냈능가, 안헌 일을 했다고 허능가아."

"어찌 그리 잘 아능고, 자개는 재주도 좋등만, 무신 소리 줏어 딛기도 잘히여.

귓구녁이 비암구녁이드라고. 이런 사람 귀 같으면 기양 지내갈 말도 똑 그 귓구

녁으로는 파고 들으가데. 쪼르르 미끌어짐서."

"오냐, 나는 그런다. 들오기만 혀? 또아리 틀고 앉는다. 어쩔래?"

홍시처럼 붉게 익은 낯바닥을 평순네 쪽으로 들이민 옹구네는, 도톰한 아랫입술

한가운데 마치 검뎅이 한 점을 찍어 놓은 것같이 박힌 검은 점을 웃이빨로 앙다

물어 심사가 틀어진 표를 낸다. "아이고오, 더워. 내 속으다 불때지 마. 글 안

해도 입이서 단내가 풀풀 낭게."

평순네는 매운 연기 쫓는 시늉으로 호미 쥔 손을 쳐들어 뒤흔든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매양 그런 식이어서 한쪽이 이빨을 내밀면 한쪽이 뒤로 물러앉았다.

그러나 평순네가 그런다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킬 옹구네도 아니고, 평순네도 그

성질 속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 요런 노래도 못 들어 밨당가?"

꽃 좋다아 탐내지 마오

모진 손으로 꺽지를 마아오

모진 손으로 꺽어나 버리시이니

장부 행신이 그 뿌운이인가아

얼시구 좋네에 저절시구

아니 놀지는 모옷허겄네

혼자아 자는 큰애기 방으

웬 숨소리가 둘이다냐아

오랍시도 그 말 마오

동지 섣달 기인 긴 밤으

문풍지 떠는 소리이로오다

얼씨구나 좋네에 저절시구

아니 놀지는 모옷허겄네

목통에서 울리는 찰진 가락이 자랑인 옹구네 노래는 훅훅 끼치는 지열의 화덕

기운을 잠시 잊게 해주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이죽거리며 부르는 이 민요

는 왠지 평순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다.

"옛날 옛적으도 수천양반맹인 사램이 있고 우례맹인 사람도 있었등게비여. 아

그러게 꽃모가지 똑 뿐질러 놨으면 내불지나 말어야제."

원아앙침 진 비개느은

혼자 비고 누워었이니

잼이 옹가 임이 오옹가아

요 내 눈물 솟아 나와

비개 넘고 강이 되에야아

오리 한 쌍 거우 하안 쌍

피양 대동강을 어엇다 두고오

요 내 눈물강으로마안

둥실 둥시일 떠어나 오오네

눈물 비개에 원앙이 뜨네에

에헤이야아 에이야아

흥얼거리며 가락을 빼는 옹구네 소리 끝을 물고 때마침 점심 광주리를 머리에

인 키녜와 돔바리가 둥구나무 아래로 나타났다. 둘 다 '정지것'이라고 불리는

계집종들인데, 키녜는 키가 건드런하니 크고, 속이 빈 듯한 성격에 서글서글 모

난 데가 없는 편이고, 돔바리는 키가 작고 똥똥한 모통이 바라져 앙바틈하데다

가 성격도 꼼꼼한 편이었다. 나이 엇비슷한 이 들이 나타나자 밭 매던 사람들은

반갑게 일어섰다. 매미가 목청껏 울어 젖히며 날개를 비비는 아름드리 둥구나무

그늘은 여기 앉고 저기 앉아 풋고추 된장에 점심밥 한 그릇 먹기에는 살로 가게

오진 곳이었다. 그 두터운 나무 그늘 그림자에 들어앉아 허기진 배를 채운 뒤에

잠깐 포만으로 방심하며, 따갑게 내리쬐는 뙤약볕을 저만큼 바라보는 놉들의 머

리위로, 둥구나무 무성한 이파리마다 매미 소리가 물소리를 내며 쏟아지는데,

때 맞추어 건듯 불며 물 소리를 쓸고 내려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이런 바람이

한 줄기 스쳐 주면 등허리에 달라 붙은 삼베 적삼이 어느결에 고실고실해지고,

그 바람에 고달픈 근심까지도 일순 잊혀지면서 잠시나마 낙낙해지는 것이다. 이

만한 낙이라도 없다 하면 무슨 재주로 그 허구한 날을 남의 밭에 어푸러져 살

수 있으리. 웅기중기 끼리끼리 모여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한가롭게 웃음엣소리

도 하고 새로 들은 소문둘도 이야기 하였다. 아까 하던 이야기의 끝을 못 보아

말꽁지가 근지러운 옹구네는 바가지로 동이의 물을 떠서 벌컥벌컥 마시고는 손

등으로 입술을 훔쳐 냈다.

"아이고오, 시끄러라. 사발 그만 뚜디려. 밑구녁 뚫어지겄네."

옹구네 말에, 밥 사발 밑바닥을 긁고 있던 평순네는 밥티 하나 남지 않은 그릇

을 아쉬운 듯 내려놓았고, 그 옆에 앉은 공배네는 벌써 나이보다 앞질러 새치

같은 횐 터럭이 돋아나기 시작한 머리에 무명 수건을 고쳐 쓰고 있었다. 옹구네

와 평순네는 서로 마주치면 티격거리지만, 나이 훨씬 더 먹고 속이 무른 공배네

가 이쪽 저쪽 성질을 잘 아는지라, 때로 다둑거리고, 때로는 대신 받어주고, 또

때로는 이일 저일 모르는 척도 하면서

"이우제(이웃)서 짚시락 코빼기 맞대고 삼서, 친동구간 못잖게 가차이 지내야제

잉. 우리 같은 처지에 어디 큰집이 있어어, 작은집이 있어. 각동백이가."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남의 밭에 놉일을 나와도, 미우나

고우나 앉고 보면 옆자리인 것이다.

"오빼미는 성허까? 그것도 하매 열예닐곱 되얐을 거인디."

옹구네는 기어이 더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연다. '오빼미'란 눈이 똥그람하고 손

이 굼뜬, 수천양반 기표네 가내 노비로, 늘 목이 쉬어 있어 말을 할 때면 그억

그억 소리가 걸려 나왔다. 그래도 성질의 안팎이 항상 한결같아서 변통이 없는

것이 수더분하여, 수천댁은 큰소리 별로 안내고 오빼미를 부렸다. 그런데 그 오

빼미 이야기를 서두로 꺼낸 것은 아무래도 우례 말을 더 하고 싶은 때문이었다.

"오빼미야 수천양반네 종잉게 잡어먹든 구어먹든 누가 머라고 못허지만, 우례는

율촌양반네 매인 종인디 말이여. 긍게 그거이 넘으 밥 아니냐고. 왜 자개 밥 두

고 넘으 밥끄장 먹으까잉."

"큰집 작은집 성지간 새이에 니 밥 내 밥이 어딨당가. 말을 허자면."

평순네는 옹구네한테 지나가는 말처럼 대꾸를 한다. 그리고 그 끝에

"영웅 호걸은 열 손구락 첩 갖꼬는 모지랜담서? 양반이 풍채있고 세도 있겄다.

열두 첩을 마다까?"

덧붙인다.

"그건 그리여."

감물 바랜 것 같은 낯색으로 공배네도 한 마디 옆에서 거들었다.

"그 착허디 착헌 흥부도, 박 속으서 나온 천하 일색 양귀비를 첩으로 삼었다등

만, 금은 보화 다 좋지만 흥부한테는 그거이 일등 선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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