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 일을 다 우리가 허는디, 새비맹이로 등쌀이 꼬브라져 갖꼬 모심고, 김매서,
추수끄장 다 해 줘도, 우리한테 떨어지능 것은 품삯 맻 전이여."
"공으로 일해 중가. 밥 먹고, 새참 먹고, 담배 술 다 줘서 먹고, 품삯도 받고, 놉
이란 게 그렇제 그러먼."
볼멘소리를 누르는 것은 그보다 나이 조금 더 먹은 공배다.
"있는 양반은 손에다 흙 한 보래기 안 묻히고 그 농사를 다 둘러 먹는디, 떡은
고물이 묻어서 어뜨께 자시능고."
"물팍에 앉인 쳅이 백옥 같은 섬섬옥수로 입 속으다 너 디리제."
"깍 물어 부러."
"멀?"
"손구락을."
"아야."
"아야? 아나, 아야. 시방 참말로 속 아푼 것은 우롈 꺼이네, 우례. 그거이 시방
막 이쁠 때라 기양 날로 씹어도 빈내 한나 안 나게 생곘등마는, 아이고. 어디다
대고 말도 못허고, 나 어쩔라요. 가서 물어 볼 수도 없고."
"죽은 디끼 엎어져서 처분만 바래야지 누가 엇다 텍을 쳐들고 무신 소리를 묻고
자시고 헐 수가 있겄어? 그러다 베락 맞어 죽을라고."
"죽을라먼 상감님 턱을 못 차냔 말도 있기는 있드라만."
"엉? 상감님 턱을 차? 발로? 아이고, 옹골져라."
"긍게 쫓아가서 베락 맞는 거이여. 가만 있으먼 안 죽을 거인디."
"기왕지사 그렇게 된 노무 일이먼, 천헌 신세를 한탄헐 배끼, 무신 재주로 꺼꿀
로 돌리 수는 없는 거이고, 종들이 머 양반들맹이로 남녀 칠세 부동석 내외를
허능 것도 아닝게, 무신 숭될 거 있당가?"
공배가 혀를 차며 하는 말을 임서방이 받았다.
"어차피 종의 자식, 개 짐생 다를 거 없이 새끼를 낳는 거이라면, 이럴 때, 그 존
양반의 씨 받은 김에 달라들어 죽을 꾀를 낼 거이 아니라, 차라리 정승 판서 유
자광이를 낳야제. 유자광이를 나 부러야여. 그 냥반도 종의 자식이였단디."
그러자 아까 개미 떨어 내던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유자광이는 간신 아니여?"
"영웅 호걸이제. 그런 양반 보고 이인, 기인, 그러그덩. 아 세도 있고 지조 있고
문서 있고 내림 있는 양반들이야 유자광이 보고, 간웅이네 난신이네, 소인배, 천
하 몹쓸 놈이네 허지마는, 그거 다 가진 거 있는 양반들 이얘기고. 우리 같은 사
람들 맘속에는 그런 영웅이 다시 있으까 싶으데. 아 그게 어뜬 세상이라고 계집
종의 자식이 재상이 되야 긍게. 났제, 났어. 났고 말고."
"아 요 바로 여그 남원읍 왕치에 누른대 있잖이여? 그 동네가 유자광이 그 냥반
탯자리여. 거그서 났잉게."
"우리 에레서 들으먼, 원래 그 동네가 고죽리라는디 , 옛날부텀 대가 많었든 모
냥이라, 그 무성허게 새애파런 대나무들이 자광이를 딱 나 놓으닝게 하루아침에
기운 없이 실들시들 허드니만 메칠 못 가서 온통 누우러니 말러 죽네 기양. 인
걸은 지령이라, 땅의 정기를 싹 뽑아 자광이가 생긴 탓이란 말이여, 그게. 그래
서 동네 이름이 황죽리, 누른대가 되얐드리야."
"이 근방에서야 그 이얘기 다 알제 아먼."
"근디 그 태몽 말이여, 임서방. 그 태몽 어뜬 거이 맞능가. 유자관이 아부지가 꿈
을 꾼디, 낮잠을 자다가. 근디 누구는 남원산성 그 거창헌거이 입 안으로 옴시레
기 들왔다고 허고이, 누그는 또 호랭이 집채맹이로 큰 백호가 입 속으로 쑥 들
왔다고도 허고. 또 하나 있어. 내가 고리배미 솔밭 삼거리 주막에 앉었다가 운봉
권포리 덧멀서 산다는 붓장시를 만났는디, 그 사람은 그러등만. 그 아부지가 밤
에 꿈을 꿍게, 달이 , 아니 해가 훤허니 뜨더니 문구녁으로 후르르 들어온단 말
이여. 하, 그거 요상허다, 허고는 다시 잼이 들었드리야. 근디 아 해가 또 훤히
자기 목구녁으로 스르르 넘어와. 머이 맞능 거잉가?"
"본래 영웅이 날 때는 이얘기가 많은 거이라. 태몽부텀도."
임서방은 그렇게 말하고는 곰방담배를 물었다.
"유자광이 종의 자식 얼자라. 정실 부인 마나님의 소생이먼 적출이고, 그만 못해
도, 첩한테서라도 났이먼 서자는 된디, 유자광이는 종한테서 났어. 생모가 종이
여. 참, 사람으로 나서는 제일로 천헌 거이 종 아닝가. 그러고 종은 아부지를 안
따르고 어머이를 따릉게, 신분을 말여, 내비두먼 유자광이는 그대로 종이 되는
거이여. 그런 처징게 에레서부텀 설움, 멸시, 천대, 몸썰나게 많이 받었제. 기구
헌 운멩이여. 그러먼, 아부지는 누구냐."
조선 초기 태종 원년에 나서 세종 8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역임하
고, 호조참의를 거처 나중에는 지중추부사에 올랐다가 성종 4년에 세상을 뜬 무
신 유규였다. 그가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 소송자 중에 뇌물을 바친 자를 치도
곤으로 호되게 쳐서 때려 죽인 일로 사단이 나서 파직당하고는 향리인 남원의
고죽리로 와서, 어느 날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한참 자노라니 비몽사몽
간에 목젖까지 보이게 붉은 입을 쩌억 벌리어 천지가 진동하도록 허흐어으어어,
표효하는 백호가 휘익 나타나 그의 입 속으로 바람처럼 내달리며 들어온다. 엉
겁결에 그것을 꿀꺽 삼키기는 삼켰으나, 소스라쳐 놀라 깨어 보니 그것이 꿈이
었다. 그는 어찌나 놀랐던지 상기도 가슴은 벌떡벅떡 뛰는 데, 마치 꿈에 삼킨
백호가 꼭 뱃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태몽
이라, 이럴 때 아이를 낳으면 큰 인물이 날 것인데, 이런 꿈은 평생에 한 번 얻
어 보기 어려운 꿈, 또 아무나 꿀 수 있는 꿈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큰 길몽을
얻었을 때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입을 딱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입을 열어 버리면 뱃속에 삼킨 정기가 그만 새어 나가 흩어지게 되니, 꿈의 효
력이 없어지고 마는 탓이었다. 그리고, 서둘러 꿈의 정기를 생명으로 맺히게 해
야만 한다. 만일 한 집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나 마소나 개, 도야지라도, 한 발
앞서 아차 일을 하게 되면, 이 정기를 고스란히 따 가 버리는 때문이다.
이게 어떤 꿈이라고 잃을 수가 있느냐. 마음이 다급해진 유규는 안방으로 달려
들어가 손짓 발짓 하면서 부인에게 시늉으로 이야기 하였으나, 입은 함봉을 하
고 눈은 불길이 번득이는 영감의 이 해괴한 작태에, 짐작은 가지만 점잖치 못한
일이라.
"양반의 집안에서 허구헌 밤 다 두고 대낮에 이 무슨 망령이신가요? 아랫것들
보기 민망합니다. 어서 사랑으로 나가십시오."
유규의 뜻을 엄숙하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딴은 옳은 말이라서 무안해진 그는
거기 더 있지 못하고 안방에서 나와 대문간에서 서성거렸다. 여전히 속에서 벌
떡벌떡 호랑이의 거친 맥이 뛰고 있는 것만 같아서 숨이 가쁘고 진정하기가 어
려웠다.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대문 밖 공터에서 유규가 아끼며 기르는
숫말과 옆엣집의 암말이 서로 가까이 서서 희롱하는 것이 눈에 띄인 것이다.
"아, 이런. 큰일났구나. 저것들이 만일 내 꿈을 따 가 버리면, 관운장이 타고 다
녔다던, 그 하루에 삼천 리를 달린다는 적토마를 낳으리라. 그러나 안될 말이다.
적토마 한 필을 얻으려고 내가 아들을 잃을 수 있겄느냐. 내 꿈은 반드시 천하
에 위용을 떨치고 만인 위에 호령하는 아들을 낳을 수 있는 큰 태몽인데."
유규는 순식간에 낫을 뽑아 들고 쫓아 나가 두 말을 떼어 놓았다. 이때였다. 들
에 갔던 계집종이 나물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아장아장 부엌으로 들어가는 모습
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옳지, 됐다. 할 수 없지, 너한테라도."
그는 쏜살같이 부엌으로 따라 들어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맨바닥에서 하
녀를 안았다. 계집종은 속으로 무한히 놀랐으나, 상전이 하시는 일이라 다만 참
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유규는 꿈에 얻은 백호의 정기를 계집종의 뱃속
에 심어 놓으니, 과연 그로부텨 종의 몸에 태기 있어 열 달 후에는 옥동자를 낳
게 되었다. 이가 곧 유자광이었다.
"애기를 나 노니 이것 또한 예삿일이 아니였드라지. 산모 방에는 기양 항상 오색
무지개가 아롱아롱, 서기가 감돌고 향내가 자옥히여."
"애기는 무럭무럭 잘도 크는디, 칠칠은 사십구, 일곱 이레를 지내고 낭게 눈은
호안으로 번갯불이 번쩍허고 울음을 한 번 울라치먼 산이 무너지게 우렁찼드랑
만, 그러드니 한 달이 못 되야서 일어나 앉고, 두 달이 못 되야서 일어스고, 석
달이 채 못되얐는디 걸어 댕기드만, 백일을 딱 채우고 나서는 뛰어 댕겠다대. 그
렁게 이런 사람허고는 달체. 우리 같은 사람허고는 말이여."
"세 살 때부텀 글을 배왔는디 그렇게 영리해서, 다섯 살에는 대학을 배우고, 일
곱 살에는 시문을 짓드니, 열 살 먹음서는 글방에서 항상 장원을 헝게로, 누구라
도 그 재주를 따를 사람이 없었제잉."
"문장도 문쟁이지만, 심이 장사라, 열 살 먹응게 벌세 키는 육 척이 넘어서, 씨름
판 송아지는 다 자광이 꺼이였는디, 날이 갈수록 누가 당헐 사램이 없어, 당최,
아아고 어런이고 간에. 그렁게 사방에 소문이 자자허게 날 거 아니여? 인재 났
다고이. 그래서 모다 귀경들을 왔어. 흐윽허게 몰려와. 대나무 누우러니 된 것도
보고, 소년 재사 소년 장사가 대체나 어치케 생겠능가 신기헝게 좀 볼라고."
"근디, 마을에 대나무가 누레지먼 머 안 존 일 생긴다고 안허요? 그게 원래 새파
러니 겨울에도 그렁 거인디 본색을 변허게 했잉게 무신 변괴가 난다고. 흉허다
고."
"그런 말도 있제."
하이튼지간에 유자광이는, 누른대 동네 앞에, 나도 가서 봤그만, 그 아름드리 정
자나무, 시방도 그대로 있데이, 그런디 그 정자나무 아래 바우 욱에 걸터앉어서
날마동 하루 삼천 자를 외왔대. 그러고 나서는 그 앞에 요천수에 가서 은어 삼
백 수를 금새 잡어. 그러고는 나무 삼백짐을 헌단 말이여. 그거이 자광이 일과
라. 그런디 큰물이 나서 요천수가 북적물이 삐이러게 요동을 침서 내리와도 유
지광이는 맨발 멋고 물 욱으로 징검징검 걸어 댕기고 허는 대인이여. 그 냥반이
축지법도 허고, 그게 소축, 대축, 그러네이. 대축은 한 발짝에 삼십 리를 가고, 소
축은 시오리배끼 못 가. 유자광이는 대축을 했제. 그렁게 얼매나 야망이 크겄능
가이.
"천하를 호령허고 싶었겄지맹."
이러한 자광이 일곱 살 때, 하루는 유규가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고 큰 바위
를 가리키며 글을 지으라 하였다. 어린 자광은 즉석에서
근반구천하니 세압삼한이로소이다.
"반석의 뿌리가 구천에 벋으니, 그 기세는 삼한을 누릅니다."
하고 썼다. 이에 놀란 유규는, 과연 자광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아봤다.
그러나 그는 비첩의 소생이라. 제 아무리 하늘을 난다 해도 쓸데없다 하고 사람
들은 자광을 멸시, 천대하였다.
"아깝다. 모처럼 세상에 인재가 났는가 했더니 하릴없는 일이구나. 기왕이면 적
자로 나지. 얼자는 차라리 세상에 안 나느니만 못해. 차라리 어수룩하든지. 그러
면 모나지나 않지. 미천한 심준에 재주 비범하고 야망이 하늘을 찌르면, 울분을
못 이기어 병이나기 쉽고, 경박하거나 방자해지기도 쉬우니, 일을 저질러 오히려
화를 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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