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4권 (12)

카지모도 2024. 5. 10. 06:43
728x90

 

동네 사람들은 오례 잡아 서리쌀, 풋돔부, 풋콩 까서 밥을 짓네, 송편 하네, 창

앞에 대추 따고, 뒤안에 알밤 줍고, 논귀에서 붕어 잡고, 두엄에 집장 띄워 먹

을 것 많건마는, 가련한 우리 신세 먹을 것 바이 없네. 세상에 죽는 목숨 밥 한

덩이 누가 주며, 찬 부엌에 굶는 아내 조강인들 볼 수 있나, 철 모르고 우는 자

식, 배를 달라 밥을 달라, 무엇으로 달래 볼까. 우리는 저 박을 타서 박 속은

지져 먹고, 박적은 팔어다가 한 끼 구급하여 보세. 하고는 탄식을 하며, 동네

도끼를 얻어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박꼭지를 찍어 마당에다 내려놓고, 하도 큰

박이라 동네 대목의 큰 톱을 얻어다가 박통을 켜는데, 기껏 부린 욕심은 박 속

이나마 배불리 먹고, 바가지는 쌀도 일고 물도 떠먹는다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것이 웬일인가.

슬근슬근 탁, 타 놓은 박통 속에서 푸른 옷 입은 동자 한 쌍이 씩 나서며, 흥부

앞에 절하고 드리는 온갖 진기한 약재부터 시작하여, 타는 박마다 쌀 나오고,

돈 쏟아지고, 휘황 찬란 금은보패, 일광단, 월광단에 산더미 같은 비단, 포목이

노적가리 처럼 쌓인데다, 수백 수천 가재 기물이 꾸역꾸역 다 나오는데, 심지어

는 뒷간 똥 치우는 가래조차, 다른 나무는 무겁다고 오동으로 정히 깍아 나주칠

을 곱게하여 나올 지경이었다. 사흘 나흘을 예사로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고

갈빗대가 따로 나서, 두 눈이 캄캄하고 두 귀가 먹먹하여, 누웠다 일어나면 정

신이 어질어질, 앉았다 일어서면 다리가 벌렁벌렁, 말라 죽게 되었으되 찾는 이

전혀 없고, 밥이라고는 냄새조차 안 맡히던 흥부 내외가, 서 말 여덟 되밥을 한

번에 지을 적에 솥이 적어 못하고는, 동네에서 쇠죽솥 그 중 큰 집을 찾아가 밥

을 짓고, 씻도 안한 쇠죽통에 밥 두 통을 퍼다 담아 놓으니, 뭉게뭉게 뜨거운

김, 밥 냄새에 숨막힌다. 스물다섯 명이나 되는 아들을 떼죽으로 몰아 앉혀 제

양것 먹인 후에, 식구대로 비단 한 필씩을 통으로 휘감아, 흑공단, 백공단, 붉

은 비단, 꾀꼬리색, 청색 비단, 해오라기 백설 같은 흰 비단을 둘러쓰니, 이런

기이한 일이 세상에 어디 다시 있으리오.

흥부 마누라가 하도 좋아 춤을 추며 마지막에 놓인 박을 타는데, 메나리 목청으

로 낭랑하게 소리를 메기고, 흥부는 뒷소리를 받았다.

"여보소, 세상 사람, 내 노래를 들어 보소. 세상에 좋은 것이 부부밖에 또 있는

가."

"어기여라 톱질이야."

"우리 부부 만난 후에 서런 고생 많이 했네. 여러 날 밥을 굶고, 엄동에 옷이

없어, 그 신세를 생각하면 벌써 아니 죽었을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가장 하나 못 잊어서 이때까지 살았더니, 천신이 감동하사 박통 속에 옷 밥 났

네. 만복 좋은 우리 부부, 이 금슬을 변치 말고 호의호식 즐겨 보세."

"어기여라 톱질이야."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방에서 잠을 잘 제, 부자 서방 좋다 하고 욕심 낼 년

많으리라. 암캐라도 얼씬하면 내 솜씨에 결딴나지."

"어기여라 톱질이야."

흥이 나서 목청을 돋우며 스리슬근 박을 탁, 타 놓으니

"아이구머니나."

천만 뜻밖에도 화용월태 미인 하나 교태로 무르익어 미소를 머금고 나오는데,

구름 같은 머리털로 낭자를 곱게 하여, 쌍룡 새김 밀화 비녀 느직하게 질렀으

며, 매미 머리 나비 눈썹, 은근한 정을 담뿍 머금은 눈빛에, 연지 뺨 앵두 입

술, 박씨같이 고운 잇속, 삐비같이 연한 손길, 버들같이 가는 허리에 곱게 수놓

은 비단옷을 호리낭창 걸쳐 입고, 연꽃이 나부끼듯, 해당화 조으는 듯, 모란화

벙그는 듯, 옥을 씻는 고운 소리로 아리잠직하게 말한다.

"놀라지 마옵시고 내 말씀 들으시오. 당 명황 천보간에, 눈동자 살며시 내리뜨

며 한번 웃음 머금어 지으면, 백 가지 아름다움 아양스레 피어나서, 육궁의 후

궁들이 무안 무색하던 양귀비를 모르시오. 제가 그 향혼이로소이다. 마의역 말

앞에서 칼날아래 죽은 후에 천하를 주유하여 임자를 구하더니, 제비 편에 듣자

온즉 흥부씨의 적선 행인이 부자가 되었다니, 천자 서방 내사 싫으이, 육군 분

발할 수 없데. 이제 강남 부가옹 당신의 첩이 되어, 봄을 따라 밤을 새며 즐거

이 노닐고자 하오니, 저와 더불어 무궁행락 하사이다."

흥부가 이에어이 아니 미치리. 제 식구 새까만 흑각 발톱, 냉기로 검붉어진 다

목다리만 보았다가 이런 일색을 보아 놓으니, 오죽이나 좋겠는가. 손목을 그만

덤벅 쥐다가 깜짝 놀라 탁, 놓으며

"어디 그것 다루겄냐, 살이 아니고 우무로다. 저런 것 한창 좋을제, 잔뜩 안고

채긋시면 뭉그러질텐데 어찌할꼬."

서로 보며 농탕치니, 무슨 좋은 보물이나 나올 줄 알고 소리까지 메긴 것이 분

하고 원통하다. 흥부 마누라가 못 볼 꼴을 보고 말아, 부정탄 손님같이 고개를

외로 틀고 뒤로 돌아앉으면서

"저것들 지랄하지, 박통 속에서 나온 세간 뉘 것인 줄 채 모르고 양귀비와 농탕

친고. 당 명황은 천자로되 양귀비에 정신 놓아 망국을 했다는데, 누구를 망치랴

고 네가 여기 찾어왔냐. 이까짓 박통 세간이 다 무엇이야. 나는 열 끼를 곧 굶

어도 시앗 꼴은 못 보겄다. 나는 지금 당장 나가니 양귀비랑 물고 뜯고 천년 만

년 잘 살어라."

자리를 차고 일어서며 발을 구르고 가슴을 두드려 강새암을 부리는데 잔뜩 독이

올라 있다.

"여보소, 아기어멈, 이것이 웬일인가. 자네 방에 열흘 자면 첩의 방에 하루 자

지. 저렇게 양귀비가 나 같은 사람 보려 하고 만리 타국에 박을 타고 왔으니,

사람의 인정상 어찌 도로 쫓아 보내겠나."

흥부가 사정하고, 달래고, 빌어서, 결국은 안채에 쌀가마니 같은 본처 두고, 별

당에 혀끝이 녹아나는 양귀비를 곱게 앉혀 밤낮 보며

"재미야 재미야 허고 살었다잖등게비. 사나들 속이란 게 다 그렇지 머. 지 먹구

녁으 풀칠도 못헐 때는 헐 수 없지만 사림만 피여 바. 맨 몬자 얻는 것이 쳅이

여, 첩. 그 짓 못허는 사램이 외나 팔불출이제."

"성님 엇다가 바 둔 각시 있소? 오입허실랑게비."

옹구네가 가스르며 비양거리자 공배네는

"씰닥쟁이 없는 소리."

하며 헛심 팽긴 듯 웃고 만다.

"그나저나 우례가 애기를 뱄능갑등만. 인자 배는 불러오고 어떨랑고. 가 심사가

까까압허겄네. 신세 한탄도 절로 나고."

평순네가 걱정스럽게 한 마디 섞었다.

"섣달에 들온 머심이 안주인 속곳 걱정 헌다드니. 넘의 일에 어쩐 일로 걱쟁이

많네?"

입술을 비죽이는 옹구네한테 평순네는 혼자말처럼 덧붙인다.

"여자 속은 다 같제. 몸 베리먼 죽고 싶고."

"옛날부텀도 그런 일은 많이 있었당게 기양 비첩을 삼을랑가. 종이라도 이뿌먼

데꼬 살잖이여 왜."

공배네도 한 마디 거들어 세 사람은 저마다 수군수군 우례 말들을 하였다. 그것

은 어쩐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건너짚다 팔 분질러져. 첩은 무신 노무 첩. 기양 한번 건드러 보고 첫물 입맛

만 다신 것일랑가도 모르는디, 거그다 대고 언감생심 허다가는, 무단히 일만 꾀

이제."

암만해도 일이 수월치 않을 것 같은 예감에 평순네가 말끝을 떨군다.

"헤기는 수천양반 쳅이 되기만 험사, 그 양반 가문에 풍채 식견에 머이 빠져?

외나 우례한테는 홍자(횡재)지. 한펭생 종년으로 허드레 천역만 허능 것보담이

야 백 번 낫제. 그런대 그거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당가? 성님 동상 새이라도

이 집 저 집이 문서가 달른디, 아나 너 가져라, 호락호락 줄랑가. 혹시 몰르지.

그 가이내는 낯바닥이 반드로옴 헝게로 수천양반이 기연히 내가 데꼬 살라요,

나 주시오, 그럴랑가. 그러기만 험사."

옹구네는 무슨 궁리를 골똘히 하는 사람처럼 고개까지 배틀치고 말했다. 그런

옹구네 하는 양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평순네가

"아이고, 수천양반 첩으로 못 가서 한잉가? 입 가생이 거품끄장 물고는 헌다는

소리마동."

"갈라먼 가제. 이러고 사능 것만 못허까? 쳅이면 어쩌? 삼승 보손에 볼 받어 신

고, 놋 요강에 떠르르르 오좀 눔서, 할랑할랑 부채질 허고 사는 세상, 쳅이라도

나는 좋겄다."

"죄로 간다, 죄로 가. 무단히 입빠른 소리 허고 저러다가 저 예펜네 꼭 주딩이

값 허고 말 거잉만."

"체, 호강이 싫은 년 있으먼 나와 보라고 그려. 늙으나 젊으나. 내 손꾸락에 장

을 지지게"

"안해 본 호강, 동티난다, 넘보지 말어. 사램이 호강보담 더 몬야 도리를 찾어

야능 거이여, 도리."

"꾀 벗고 장도칼 차네. 동낭치 박적에 수실을 달제. 다 떨어진 상것들이 도리?

아이고오, 도리? 그거 머에다 쓰는 거잉고."

"그러고 막 상게 양반들이 우리 보고 상것, 상것 헌단다."

"병 주고 양 주제. 존 것은 양반들이 다 허고 상것들은 요렇게 살 수 배끼 없게

꽉 쥐여서 맨들아 놓고는, 그랬다고 또 숭을 바? 그러면 자개들은 왜 숭잽힐 일

을 허능고? 대낮에 계집종 찌고 보란 디끼 자빠져서 홍야 홍야."

"양반 세도에 계집종 조께 밨다고 그거이 머 숭이겄어? 상것도 못되는 종년이

아직 임자할라 없는디."

"신이나 안 뵈이게 허든지. 헤기는 머이 무서서 신을 슁키겄능가잉."

평순네와 공배는 한 자락을 덮어 놓고 말하는데 옹구네는 쌍지팡이를 곧추세웠

다.

"임자? 임자 있으먼 멋 헌다요? 있다고 참간디? 상놈의 예펜네는 제쳐두고 중로

라도, 제 서방 버젯이 있는 아낙을 샛거리로 맛 다시는 양반이 어디 하나 둘잉

게비? 멩색 없는 목숨들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지 어쩔 거이여? 서슬이 호랭

이맹이로 시퍼런 양반들한테 앙탈을 해밨자지. 호랭이 개 빰 우시디끼 헐 거인

디?"

"한 뱃속으로 난 새끼도 아롱이 다롱이라고, 한 말로 양반, 그러지만 성정도 행

세도 다 각객이라, 이 양반 저 양반이 서로 같든 않제. 다 달러."

"다르고 말고."

"그래 밨자 오백 자 한 또래여. 거르서 거그. 초록은 동색이란 말도 못 들어 뵈

겼소? 아이고."

옹구네는 평순네도 들으라고 공배네 말끝을 잡아 누른다. 아름드리 둥구나무를

둥그렇게 에워싸고 그 둥치에 등을 기대어, 드러난 뿌리 위에 걸터앉거나 혹은

풀밭에, 아니면 맨땅에 이만큼 저만큼씩 앉아 잠시 한가롭던 사람들은

"일어나세."

하는 말에 궁둥이에 묻은 그늘을 털어 냈다.

"당허고 나먼 당헌 속이나 씨리고 에리제 엇다 대고 따질 수도 없고."

그쪽에서도 우례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건넛마을의 타성바지 쇠여 울네가 같이

일어서는 아낙에게 말했다. 아낙이 그 말을 받았다.

"따져? 종이?"

"중로라도 갬히 못헐 일이제잉."

"온 식구 다 쪽박 차고 거라시맹이로 동네 배깥이로 쬐께날라고?"

"그리여. 종이라먼 직사허게 매타작이나 당헐 거이고, 중로 상놈 같으면 괘씸허

다고 트재기잡어서 뚜들고 소작도 뺏어 부릴 거인디. 쬐께 나야지."

"아 생각해 바. 가진 땅 없어서 대를 물려 그 집이 논 부치고, 그 집이 놉 허

고, 허드렛일 걷어 험서 게우 먹고 사는 처지라먼, 누가 거그다 대고 대가리 쳐

들 수가 있겄능가? 꼭 매인 종이 아니라도. 앙 그리여? 또 머 꼭 무신 양반한테

만이 아니라 말이여. 말을 허자먼."

"옛날 같으먼 사실 이렁 것은 말꺼리도 안되야. 시방은 그래도 시상이 많이 달

러져서 콩이야 퐅이야 허지마는, 그 전보단 눅어진 셈이제."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4권 (14)  (0) 2024.05.12
혼불 4권 (13)  (0) 2024.05.11
혼불 4권 (11)  (0) 2024.05.09
혼불 4권 (10)  (0) 2024.05.08
혼불 4권 (9)  (0) 2024.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