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부인은 이기채에게 그렇게 일렀다.
"내 젊어서는 혼자몸으로 눈앞이 캄캄하여 살림을 이루노라고. 남한테 모질고
독한 소리도 많이 들었다마는. 그것은 한때라. 종내 그렇게 모으기만 한다면 그
것이 도척이지 사람이겠느냐.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만 허게 되었으니 나눌 줄도
알어야지 싶어지고. 또 내 앞에 모이고 쌓인 재물이 다 내것이 아니라 남의 것
눈물나게 억지로 빼앗은 것도 있지 싶어져서. 하늘이 무섭고 사람이 가여워 무
엇으론가 갚어야 가벼이 될 것만 같았더니라. 이제는 전답이 무거워. 눈물이 무
겁다……. 굳이 좋게 생각허자면. 내가 남보다 좀 치부한 것은 하늘이 내 능력을
믿고. 여러 사람 쓸 것을 나한테 한 번에 맡기어 심부름 시키는 것이라고. 고지
기 시키신 것이라고나 헐까. 나는 그러니. 곳간의 쇳대만 책임지고 있을 뿐. 내
한 입에 내 뱃속에 그 곡식 그 재물을 다 둘러 삼키라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사람의 욕심이지 하늘이 그리허라고 그대로 두시지도 않어. 그것을 혼자
다 삼키려고 헐라치면. 입이 찢어지고 배가 찢어져 살 수가 없게 되느니. 그래서
옛말에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랬다고. 재물이란 비록 비루하고 독하게 번
것이라 할지라도 쓸 데를 제대로 알아 선하게 써야 헌다. 그래야 누에가 고치
벗고. 매미가 허물 벗듯이. 치부할 때의 누추한 부끄러움도 다 벗을 수가 있는
게야. 그러고는 나비 되고 매미 되어서 훨훨 날어가는 것이지. 가볍게 홀가분허
게 빚 다 갚고. 이게 다 빚이니라. 내가 세상에 진 빚."
청암부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쩔거렁. 연상 위에 올려놓
았었다. 그때 그네의 파리하게 여읜 손목은 비단실 매듭을 색색으로 앞앞이 달
고 있는 열쇠 무더기를 들었다 놓기에도 겨워 보였다. 그것은 임종이 가까워 올
무렵이어서 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모시고 앉은 이기채와 율촌댁은 고개를
수그리었다. 그러나 열쇠패는 손대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감히 물려
받을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마당에 이제 자신이 죽고 나면
풀이 날 것이라고 그네는 말했었으니. 잡초 우거질 것이라고 한 말보다 그저
"풀 날 것이다."
고 한 짧은 말이 더 가슴을 후비게 하였다.
"저번에 설 쇠고는. 부서방이 와서 백모님 영연에 절하고는 많이 울었다대."
"또요……."
수천댁의 말에 오류골댁은 측은하다는 낯빛으로 동서를 바라보았다. 부서방.
그는 지난번 청암부인 초상 마당에 허청걸음으로 반 넋이 나간 듯 들이달아 고
꾸라지며 몹시 서럽게 울던 사람이었다. 남루하게 기워 입은 저고리 동정에 기
름때가 거멓게 절어든 그는. 제 가슴팍을 갈퀴 같은 두 손으로 움키어 쥐어뜯으
며. 머리를 땅에 박고 울었다. 메마른 목이 쉬어 갈라진 그 곡성에는 애통으로
다하지 못하는 절분이 뒤엉켜 있어. 집안 사람들과 빈소에 선 문상객들을 놀라
게 했던 것이다.
"가까운 대소가 사람도 아니요. 문중의 일가도 아닌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저
다지도 절통하게 운단 말이냐."
빈소에 이기채와 함께 있던 이헌의가 곡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부서방을
내려다보며. 그 곁에 웅숭그리고 선 머슴에게 물었다.
"아랫몰 부서방인디요. 곡절이 있능게비여요."
"곡절이라니……?'
아무리 옆에서 말려도 좀체로 울음을 그치지 못하던 그는 옷섶에 떨어지는 눈
물이 무명 올 사이로 스며들어 서걱서걱 얼어붙도록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진정이 된 연후에 그는 더
듬더듬. 한참씩 숨을 삼키어 울음을 가라앉혀 가며 이헌의 앞에 사정을 털어놓
기 시작하였다. 마당 가운데 화롯불을 담아 내고. 큰사랑. 작은사랑에 그득 들어
앉고도 모자라 사랑마당. 중마당. 안마당에 차일을 몇 개씩 친 아래 모여 앉은
문상객들에게 술과 전과 떡을 정신없이 나르던 종들이며 집안팎의 머슴. 호제들
도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서방네가 개다리 소반에 따로
음식을 챙겨 부서방 앞에 놓아 준 것을. 그는 끝내 한 점도 집어먹지 못하였다.
동짓달 엄동의 한뎃바람 속에 창자가 다 비어 버릴 만큼 눈물을 쏟아 온 얼굴이
퍼렇게 얼어 질린 그는. 그의 할아비 때부터 이 마을 언저리에 얹히어 살게 된
타성이었다. 비록 지금은 서릿발 같은 훼철령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여 원통하게
도 헐어서 걷어 내고 말았지만. 일찍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 사액한 매안서
원에는. 그에 딸린 전답이며 노비까지도 함께 하사되었고. 또 서원에는 일이 많
은지라 부릴 사람도 필요하여. 매안에는 동종 이씨들말고도 타성들이 쌀밥에 뉘
처럼 섞여 살았다. 서원 일을 하다가 머뭇머뭇 주저앉은 성씨며. 서원이 헐리는
바람에 속량된 노비들이 상민이 되어 그냥 이 마을에 눌러 사는 경우들이었다.
부서방도 그 붙이내림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아랫몰 개울가에 새막 같은 오두
막 하나를 겨우 얽어 놓고 사는 구차한 형편에 손재주도 남다르지 못한데다. 재
바르고 부지런한 사람 또한 못되어서. 늘 남의 뒤에 처지곤 하였다. 정짓간의 부
지깽이도 깨금발을 뛴다는 농사철이 닥쳐도 그에게는 일이 없을 때가 많았다.
제 농사 있는 사람은 더 말할 것 없고. 송곳 꽂을 땅 한 뼘 없는 사람이라도 이
철이면 놉일이 끊이지 않아 콧등이 다 벌겋게 벗어지건만. 그는 굼띠어서 손이
느리니. 누가 선뜻
"우리 일 좀 헐라요?"
부탁하지를 않았다.
"아이고. 옆집이 임서방 반절만 좀 허시오. 예? 사램이 땅바닥에 금뎅이 떨어
진 것 바도. 아이고 저것 줏어야지. 험서 한나잘이나 꾸부려 갖꼬 보도시 줏을
거이여잉. 누가 그때끄장 내비두간디? 아나. 줏어가그라. 허고? 무신 보살이나
되먼 몰라도. 어이그흐. 내속이여어. 임서방은 우리맹이로 아무 근본 없어도 어
디로 가든지 어서 오라고 안허요오? 아 저 중뜸. 원뜸 꼭대기 용마루도. 기왓장
깨졌다 허먼 임서방 안불릅디여? 다 저 헐 탓이요. 조상 원망 말으시오. 상놈이
라도 저만 잘허먼 매안 양반 지붕 꼭대기에 날름 올라앉어 지근지근 밟고 댕길
수 있능 거 아닝게비. 참말로. 눈치만 있으먼 절깐에 가서도 새비젓을 얻어먹는
다는디. 무신 사램이 새비젓통에 들앉어서도 소금 어딨냐고 허게 생겠이니. 멋
헐라고 아그들은 논바닥에 머구리 새끼들맹이로 와글와글 나 놓고. 저 주뎅이를
다 멀로 채와 줄랑고. 이 깡보리 숭년에 피죽 한 그륵도 없이. 아이고오. 시끄러
어. 그만 좀 처울어라. 귀때기 떨어지겄다 기양. 처먹은 것도 없이 그렇게 울어
제낄 기운이 어디서 나능고. 휘유우."
부서방의 아낙은 올망졸망 연년생으로 예닐곱이나 되는 새끼들을 새 쫓듯이
저쪽으로 몰아내며 턱에 찬 한숨을 길게 뿜어 냈다. 오뉴월 염천에 아무것도 안
하고 그늘에 대밭 드리우고 앉아만 있어도 목덜미에 가슴패기에. 등줄기에. 줄줄
골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데. 만삭이 다 되어 오늘 내일 금방 낳게 생긴 아이
를 또 하나 동산만한 뱃속에 담고. 놋젓가락같이 정수리에 꽂히는 뙤약볕을 받
으며 하루 종일 남의 밭에 가 놉으로 일하고 온 아낙은. 헐떡헐떡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그 네의 턱에까지 찬 것은 숨이 아니라 고달픔이었다. 그런 어미 속
을 알리 없는 아이들은 깨알만한 등잔불 밑에서 무엇을 가지고 타드락거리는지
시비가 오가더니. 급기야 위엣놈이 아랫놈 대가리를 딱. 소리가 나게 쥐어박는
다. 왕땀띠 곪은 자리를 정통으로 맞은 아랫놈은
"으아아아."
모가지를 발딱 뒤로 제낀 채. 아프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어미 역성을 바라
느라고 더 숨이 깔딱 넘어가게 울었다. 그 총중에 가운뎃놈은 엉거주춤 선 채로
절절절절 방바닥에 오줌을 누는데. 황급히 방구석지 걸레를 집어 드는 어미한테.
아직 기어 다니는 어린 것이 칭얼칭얼 기운 없이 보채며 품으로 기어들었다. 배
도 고프고 잠도 오는 것이리라. 한 손에 걸레 들고 한 손으로 아이를 안아 무릎
에 앉히는 어미의 등에 또 한 놈이 찰싹 들어붙는다. 업어 달라는 말이었다. 뜨
끈한 기운이 목을 감고 늘어지며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흔들어 떨구고는
"아이고. 이노무 새깽이들아. 차라리 에미를 뜯어먹어라. 뜯어먹어. 느그들이
자식이냐. 웬수냐아."
악을 쓰며 탄식을 터뜨렸다.
왜애앵.
아이들이 어미 서슬에 잠시 멈칫 하는데. 모기 한 마리가 대신 아낙의 잔등이
를 따끔하게 쏘았다. 번개같이 짧은 순간에 아낙은 다 떨어진 부채를 집어 등뒤
를 탁 쳤지만. 한 번 쏘인 자리는 한참이나 가렵고 얼얼하였다. 그러나 모기는
한 놈만으로 그만두지 않았다. 마당에 피워 놓은 생쑥 모깃불만으로는 다 쫓을
수 없는 모기떼들이 방으로 달려들어 생살을 모두 뜯어먹을 듯이 왱왱거렸다.
오직 이 어미한테로 달려들지 않는 것은 눈구녁 퀭하게 뚫린 계집아이 하나뿐이
었다. 배들배들 말라 비틀어진 계집아이는 그래도 아이들 중에 맨 위엣것이라.
동생들 뒤엉킨 곳에 같이 엉기지 않고 저만치 한 쪽 구석지에 오도카니 혼자 앉
아. 검은 눈구녁만 끔벅끔벅 하며 어둠속에서 말없이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모가지라고 똑 저렇게 실내끼맹이로."
눈썹 위로 앞머리를 빗어 내려 비뚤비뚤 한 줄로 단발로 머리통을 가까스로
받치고 있는 딸년의 목이 위태로워. 그만 툭 꺾이며 떨어질 것만 같이 보인다.
그 모양이 문득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지는 어미의 얼굴은. 오래 굶주린 끝에 부
황이 들어 밀룽밀룽 멀겋게 들뜬 살가죽이 누렇게 부어 있었다. 그때가 바로 작
년 여름 일이었다. 이태 전 경진년에 조선 팔도 농사가 유례 없는 대흉작이었던
데다가 그 이듬해인 작년 신사년에는 삼한 일대를 모조리 꼬실라 태워 버린 한
발이 너무나도 극심하여. 그렇지 않아도 국민정신총동원이다. 근로보국대다. 공
출이다 하여 흉흉하기 짝이없는 세상을 더욱 각박하고 극악하게 만들었던 것이
다. 새암가에 심어 놓은 호박 넝쿨도 말라 꼬드라져 타 들어갈 지경이니. 논에
꽂은 모는 꼬딱하니 선 채로 부스러지고. 논바닥은 돌덩이처럼 딴딴하게 굳어서
쩍쩍 금이 가 거북이 등판처럼 갈라졌으며. 보리밭이나 서속밭, 면화밭에서는 누
런 황토 흙먼지가 부옇게 날았다. 아무리 그렇단들 아예 밭을 안 맬 수는 없어
서. 호미를 갖다 대기만해도 퍼스르르 모래같이 부서지는 밭에 김을 매면서 뚝
뚝 떨어지는 땀으로 물을 주고는. 황을 대고 팍 그으면 그대로 불이 일어날 것
만 같은 하늘을 원망하여 올려다보았다.
"쥑일 놈들. 자식 같은 황소는 생으로 끌어다가 왜놈 군대 괴기국 ㄲ에 먹고.
그 까죽으로는 장화를 만들어 신는다더라."
"그놈들이 철이 모지랭게 벨 지랄을 다 허는디. 관공서고 건물이고 간에 쇠난
간 있으먼 미친 듯이 뜯어 내고 학교에 쇠울타리를 다 뽑아 내서 불에 녹이고.
질가에 전봇대고 머이고 눈구녁에 쇠라고 비치기만허먼 선불 맞은 멧돼야지맹이
로 달라들어서 뽑아 간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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