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혼불 5권 (40)

카지모도 2024. 8. 21. 06:38
728x90

 

"만주로 가거라."

"그곳에 가면 임자 없는 땅이 지천이다. 누구든지 먼저 가서 말뚝 박고 개간하

면. 그것이 바로 자기 땅 되느니. 만주로 가거라. "

일본에서는 그렇게 충동질하였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부여대로.

사내는 이불 보퉁이를 뚤뚤 뭉쳐 등에 지고 아낙은 다 떨어진 옷 보따리 하나

를 머리에 인 채. 바가지 덜렁거리며 만주로 마주로 흘러갔던가. 그런 총중에 총

독부는 일본의 영농 인구가 대량 출정하여 감소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방편

으로 '농업보국청년대'를 조직하고. 조선인들한테

"진보된 영농법을 견학 실습시켜 준다."

는 구실을 내세워 매년 봄.가을로 두 차례씩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일손이 가장 바쁜 농번기 모내기철과 추수철에 나라. 사가. 미에와

그 외의 다른 영농지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일본인 출정 유가족의 농가에서 무

려 사십여 일씩이나 등뼈가 휘어지게 모 심어 주고. 벼 베어 주고. 온갖 자질구

레한 일을 다 해 준 뒤에야 조선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노동력의

착취였다. 농사일이란 단 하루 한나절만 비워도 눈에 띄고 표가 나는 것인데. 제

논밭 돌보느라고 잠시 옆눈 돌릴 틈도 없어야 할 농번기에 조리장수 체곗돈이라

도 움켜다가 놉을 사 대야 할 제 농사를 버려두고. 생전에 코빼기도 본 일 없는

남의 나라 남의 땅에 남의 집 농사 지어 주고 지쳐서 털래털래 돌아오는. 농부

들의 어처구니없는 정경이라니. 아 이래서 종이로구나. 종. 그렇지. 이것이 종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선 팔도 삼천리 고고샅샅 강토가 땅덩어리째 옴시레기 일본

의 것이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남녀노소 몇 천만 인구 전원이 모두 일본에 매인

종이 되어. 풀뿌리 나무 껍질로 여물 먹으며. 오직 일본이라는 상전을 위하여

개. 돼지. 짐승처럼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이 조선 백성이었다. 이럴 때에

조선의 모든 초등하교 학동들은 매일 아침 조회가 있을 때마다 우렁차게 소리

높여 '황국 신민의 서사'를 외쳤다.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 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일본 국내에는 없었던 이 맹서를. 조선의 아동들이 조선의 임금이 아니고 대

일본 제국의 천황 폐하에게 충성으로 바치는 목소리는 노랗게 맴도는 조선의 허

공으로 어질머리를 일으키며 울려 나갔다. 열에 세 명이 채 못되던 자작농들도

말이 자작농이지 금융조합에 부채 없는 집이 없었으며. 해마다 늘어나는 공출로

그 빚을 갚지 못하여 끝내는 조합에 토지를 빼앗기고 마는 집도 하나둘이 아니

었다. 그러나 본디 살림이 탄탄하여 부농 소리 듣던 천석꾼이나 만석꾼. 혹은 그

만은 못하여도 몇 백 석씩 짓는 사람. 또는 한 고장에서 대대로 세거하여 남다

른 문벌로 벌족한 집안들은 예전 같지 않아서 그렇지 고달픈 가운데도 여전히

누릴 만큼은 누리고 살았다. 매안의 청암부인 살림도 그러하였다. 부인이 한 생

애를 다하여 일으킨 가산을 이기채는 타고난 이재의 재능으로 빈틈없이 지켰으

며. 수완이 뛰어난 아우 기표가 그 옆에서 시대 정황을 따라 민활하게 대처해

준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재작년의 그 참담한 흉작과 작년의 목타는 가뭄을 겪

고도 실농의 자국이 종가 살림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허나. 사람마다 그 인생은

천차만별이라. 아랫몰 부서방의 집 몰골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었으니. 제 살

림이 있다 해도 살아 남기 어려운 시대고에 그나마도 한푼어치 가진 것 없는 세

궁민이 교활하지도 못하여 한없이 무르고 착해빠진 것만이 자랑인지 허물인지.

몇 날 며칠째 끼니를 끓이지 못한 부엌의 아궁이는. 한여름 오뉴월 염천에도 식

은 냉기에 써늘한 바람을 머금고 있었다. 검댕이 그을은 아궁이에서 끼치는 찬

바람은 저승의 냉기였다. 그리고 그 아궁이는 바로 저승의 아가리였다. 이제 그

찬 기운이 자칫 조금만 더 식으면 방안에 늘피하게 드러누운 새끼들과 부황들린

몸으로 아이를 낳고는 미역국 한 대접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내리 굶어 기진한

어미와 젖 안 나는 어미 곁에서 보채는 것도 힘에 겨워 가랑가랑 숨소리만 내고

있는 핏덩이가. 떼거리로 식은 송장이 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미 여러 날 전

에 불기 가신 아궁이는 한입에 이 식구들을 시커멓게 둘러 삼키려고 음험한 아

기리를 벌리고 있었다. 애기 낳은 첫날이야 동냥을 해서라도 첫국밥은 한 그릇

얻어먹일 수 있다손 치지만. 미역이고 김이고 모두 공출해 가 버리는 바람에 산

모 미역국은 대갓집에서나 겨우 먹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일 반 사람들은 미역

대신 그래도 좀 구하기가 쉬웠던 김을 풀어 뜨겁게 먹으며 땀을 내곤 하였다.

그러나 김이라고 어디 흔해서 부서방 같은 처지에 그것을 사다가 끓여 먹을 수

있었으랴. 옆집 뒷집에서 인정으로 한줌씩 보태 준 피 같은 곡식으로 한두 끼는

넘기었지만. 그 사람들도 너나없이 흉년에. 가뭄에. 공출에. 동원에. 껍데기만 남

아 그것마저 벗겨 내라 할까 무서운 마당에 더는 산모를 측은히 여길 여력조차

없었으니. 일가 문중 큰집 작은집이 있었다면 이보다는 아무래도 좀더 나았겠지

만. 하잘것없는 타성바지 미천한 신세에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하며. 누구한테 의

지하여 울어라도 본단 말인가. 부서방은 넋이 나가. 죽은 듯이 눈을 감고 땀투성

이로 혼곤히 누워 있는 제 아낙과 조막만한 애기의 잿빛 손가락이 힘없이 안쪽

으로 도르르 말려 있는 것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만일에 죽는다면 이 둘이 식구

중에 맨 먼저 죽을 것이라는 데 펀뜻 생각이 미쳤다. 지난 열 달 동안. 소나무

껍질 벗겨 서속 넣고 죽 끓여 먹은 것과. 쑥 캐다가 물 붓고 끓여 먹은 것말고

는 곡기라고 언제 한 번 제대로 입에 대 본 일도 없이. 빈 속에 애기한테 먹은

것을 다 빨리우고. 이제 저렇게 보도시 애기를 낳아 놓고는 지쳐서 나가떨어진

어미가. 이토록 여러 날을 굶고서 어떻게 살아나기를 바랄 것인가. 빈 젖조차도

빨 힘이 없는 저 어린 것은 또 어떻게. 부서방은 새새끼 주둥이보다 더 조그만

애기의 노랗게 벌어진 입에 눈이 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었다. 도독

질인들 못해 와….

그의 눈에 퍼렇게 불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더덕더덕 기운 자루 하

나를 감추고 아무도 모르게 청암부인의 광 모퉁이로 숨어들었다. 그날은 마침

달도 없는 그믐이었다. 온 집안에 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집채가

깊이 잠겨 들어갈 때. 그는 손으로 더듬더듬 더듬어 광의 문고리를 찾아냈다. 손

끝에 툭 부딪치는 쇠통의 묵중하고 썬득한 촉감에 그는. 아이고매. 놀라 철렁 가

슴이 내려앉았다. 여기구나. 싶은. 바로 찾았구나. 하는 안도의 느낌이 언뜻 스치

듯 지나갔지만. 그것은 순간이고. 무겁게 잠긴 그 쇠통의 견고함이 절컥 그의 가

슴까지 채워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틀렸구나. 하는 절망의 낙담이었다. 광은 바

위 벼랑 절벽같이 깎아지른 허리를 캄캄한 허공에 곧추세우고. 어느 한 구석 벌

어진 틈 없이 사면을 철갑한 채. 문고리에는 무거운 쇠통을 물고 있었다. 그 쇠

통은 광보다 더 무거운 것이었다. 절거덕. 절거덕.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가만히

소리 안 나게 비틀어 보고. 두드려 보고. 잡아 빼 보아도 그것은. 절그락. 잘그

락. 소리만 낼 뿐. 요지부동 좀체로 열리지 않았다. 오금이 붙은 부서방은 등골

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무 꼬쟁이 하나 어디 없을랑가. 저 쇠통 구녁에다 꼽아

보면 혹시 열릴랑가 모르는디. 아이고. 깡깜허구라. 큰일났네. 이러다가 날 새겄

는디. 누가 나오먼 어쩐다냐. 아니 긍게 이놈의 쇠통을 어쩌얀디야. 철거덕. 철거

덕. 이번에는 좀더 세게 흔들어 보았다.

"누구냐."

그때 어둠 속에서 굵고 우렁우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서방은 뒷골을 망치로

맞은 것처럼 소스라쳐 놀랐다. 그리고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오금

이 딱 오그라붙은 다리를 엉거주춤 구부리고 선 그대로 부서방은 차마 돌아서지

도 못한 채 와들와들 떨었다. 소리는 그의 등뒤에서 들리었다.

"웬 놈이냐."

그것은 청암부인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은 의외에도 낮았다.

"마님."

부서방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며 불밤송이같이 깎아 버린 머리통을 땅에 박

았다. 부인이 들고 있던 등롱이 그의 모습을 비추었다.

"살려 줍시오."

부서방은 목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소리로 오직 그 한 마디를 하였다. 그것은

외마디 단말마 비명 같았다.

"살려 줍시오."

그러는 부서방의 눈에서 북받쳐 오른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도둑이야."

하고 부인이 소리를 지르면. 온 집 안팎의 노복과 계집종. 호제들이 단 걸음에

문짝을 차고 튀어나와. 부서방을 붙잡아서 덕석에 말아 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몰래를 치고. 온 동네에 조리를 돌리고. 여기저기 마구 끌고

다니며 구름같이 모여드는 구경꾼들에게

"나는 도독놈이요오."

"나는 도독놈이요오."

큰 소리로 외게 하는 회술레를 시킬 것이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5권 (42)  (0) 2024.08.23
혼불 5권 (41)  (0) 2024.08.22
혼불 5권 (39)  (0) 2024.08.20
혼불 5권 (38)  (0) 2024.08.19
혼불 5권 (37)  (0) 202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