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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39)

카지모도 2024. 8. 20.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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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말 수도 있지만. 칼 찬

순사가 집안으로 들이닥쳐 쟁기에 박힌 보습을 빼 가며. 부엌에 걸린 가마솥까

지 모조리 뜯어 가는 데는 하도 기가 막힌 끝에 차라리 얼이 빠져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거기다가 놋그릇은 물론이고 숟가락. 젓가락. 제기까지 남

김없이 뒤져 내어 훑어 가는 데는. 이것이 순 날강도지 인성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는 도저히 없었다.

"철은 갖다가 녹여서 비행기 맨들고. 놋그릇. 숟가락. 제기는 갖다가 녹여서 총

알 탄피를 맨든다대. 참 무신 노무 세상이 환장을 해도 유분수제. 밥상으 밥그륵

이 총알이 되고 밥먹든 숟구락이 탄피가 되야. 긍게. 미쳤제. 미쳐. 눈꾸녁들이

삐이래 갖꼬."

"호성암 부체님은 끄집혀 가서 시방 비행기가 되시능가. 탄피가 되시능가…."

사람들은 넋을 놓고 주저앉아 겨우 그런 말이나 할 수밖에 무엇을 어떻게도

해 볼 수가 없었다. 상대가 한두 사람이어서 떼로 덤벼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

고. 말이 통하는 동포여서 하소연을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성의 억울한

처지를 굽어살핀 조정에서 대신 나서 해결을 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눈

번히 뜬 채로. 내 집 내 땅에서 내 손으로 일하고. 거두고. 장만한 내 것들을 깡

그리 빼앗겼으니.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수탈. 공출해 갈 품목을 산물별로 나누고

다시 세목을 하나하나 정하여 물경 여든 몇 종류로 열거하였는데. 이 물품들을

반드시 할당량만큼 걷어가기 위하여. 삼십여 만 명에 달하는 기관원을 별도로

두고. 삼십오만여 개의 애국반과 십삼 개의 병사구 사령부를 두어. 헌병. 정보원.

왜경들을 총동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만 비끗하면 행정력을 발동하여 일본

도를 빼들고 단칼에 베어 넘길 듯 살기 등등 강제로 집행하는 데야 어느 누가

당할 수 있었으랴. 그들이 칼빛을 번뜩이며 공출해 가는 것들은 실로 다 헤아리

기 어려웠고. 그 방법은 혹독하였다. 쌀. 보리. 밀. 콩. 팥. 녹두. 참깨. 조. 그리고

땅콩. 피마자에 감자. 고구마. 무. 배추 같은 채소며 사과. 배. 감. 밤. 복숭아의

과일. 면화. 누에고치. 대마. 아마. 모시. 그리고 칡이나 왕골. 갈대도 걷어 갔고.

마초나 꼴 같은 말 먹이고 소 먹일 풀도 베어 내라 하였다. 거기다 가마니. 멍

석. 새끼. 짚까지도. 농산물을 그렇게 지푸라기 한낱 남기지 않고 깡그리 걷어

갈 때 소. 돼지. 닭이라고 어찌 놓아 둘 리가 있겠는가. 그것들은 산 채로 끌어

갔다. 뿐만 아니라 토끼 가죽. 쇠가죽. 돼지털. 양털에 계란. 우유도 공출하였다.

산에서는 아름드리 목재를 베었고. 장작. 솔가지. 솔뿌리. 관솔을 자르고 캐고 따

서 바리바리 실어 내갔다. 또 옻이며 잣. 심지어는 산나물조차도 할당량을 주어

캐라 하였다. 그래서 산에는 언제나 강제 동원된 사람들이 허옇게 나무에 매달

리거나 땅에 엎드리어 헉헉거리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공부 대신 자루

를 둘러메고 산으로 가 관솔을 하루 종일 따는 일이 허다하였다. 그러나 그것만

이 아니었다. 바다에서 잡은 온갖 생선도 막 건진 채 선어로 궤짝 궤짝 다 실어

가고. 또 말려서 건어로 공출하고. 톳. 김. 다시마도 남김없이 가져 갔다. 조선에

해산물이라고는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집집마다 베 짜는 소리 덜

컥 덜커덕 밤이고 낮이고 들렸으나. 그것은 한 올 한 올 고운 날 앉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이 덜컥 덜커덕 내려앉는 소리였으니. 무명. 삼베. 모시. 비단이 필로

쌓이면 무엇 하겠는가. 짜는 대로 자투리까지 걷어 가는 것을. 밤을 낮 삼아 잠

못 이루고 베를 짜는 것은 오직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노역이었던 것이다. 만일

할당된 양을 제 기한 안에 짜내지 못하면. 신민정신이 투철하지 못해서 게으른

것이라고. 차마 못 당할 수모와 처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질 좋은 조선지를 그들

이 놓아 둘 리 없어서 그것도 베나 마찬가지로 낱장 하나 남기지 않고 걷어 갔

다. 금속으로 금. 백금. 은이라고 생긴 것은 머리에 찌르고 있는 비녀와 손가락

에 끼고 있는 가락지까지 다 빼가고. 구리. 유기. 놋쇠도 마당을 파 뒤집어 창끝

으로 찔러서. 아무리 깊이 숨겨 놓은 것도 기어이 찾아내 빼앗아 갔다. 마치 미

치광이처럼 눈에 핏발이 돋아. 한편 광산에서는 총독부 광공국의 지시를 받은

광공부에서 일사불란하게. 철광석. 구리. 납. 아연. 흑연. 수연. 망간과 운모. 형

석. 석면. 텅스텐 같은 온갖 광석을 무한정으로 캐내었으며. 석탄. 연탄을 산더미

처럼 무너지게 싣고 실었다. 그것은 거대한 걸귀야차가 두억시니 대가리를 땅

속에 처박고 한없이 갈퀴질을 하는 것보다 더 악착스러운 형태였다. 거의 강제

징용되어 그 탄광의 갱내로 무참히 몰아 넣어진 노무자들은 이미 사람이라고 부

를 수 없을 만큼 가혹 참담하게 사역되었다. 그들은 약초도 있는 대로 공출하였

다. 향료. 음료. 약재로 쓰이는 박하. 담. 구토. 기침에 쓰이는 반하. 향신료와 건

위제로 이용되는 생강. 땀을 내는 힘이 탁월한 창출. 소화제인 백출. 해열제와

강장제로 쓰이는 구기자에 성질은 온하고 맛은 시어 혈액 순환을 돕는 약초로

특히 부인병에 많이 쓰이는 천궁. 승검초 뿌리인 당귀. 인삼과 꿀. 또 오미자와

호두. 그러고도 다 일일이 꼽을 수 없는 조선 약초 약재들을 모조리 훑어 공출

했던 것이다. 일찍이 제 한 몸뚱이를 위해서나 늙으신 어버이를 위해서 혹은 어

린 자식을 위해서도 이만한 약초를 캐 본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

로도 모자라서 마침내 길가의 잡초까지. 훌륭한 군수품 및 생산 원료라고 승격

시켜. 걸레. 깡통. 누더기. 헌 병. 헌 쇠 같은 폐물과 함께 휩쓸어 공출했던 것이

다. 그러니까 잡초는 비료와 말먹이로 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 단위 면단

위로 벌초 대회가 거창하게 열리고. 강제근로동원이 여름 내내 실시되었다. 이글

이글 달구어진 불볕이 숯가마를 거꾸로 들이붓는 것처럼 쏟아지는 뙤약볕을 이

고 어푸라져. 입안이 파싹파싹 타고 마르는 가뭄에. 제 논을 갈아 밭작물이나마

심어 보아야 무슨 콩깍지 한 조각이라도 볼 수 있을지 말지 한 형편인데. 허구

한 날 잡초를 베러 낫을 들고 나가는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다더니 과연 살가

죽 한 겹을 마른 뼈 위에 씌워 놓은 것 같은 얼굴로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죽지

못하여 하루하루 연면해 가고 있엇다. 사람의 목숨이란 참으로 모진 것이어서

그렇게 속속들이 다 긁어 가게 빼앗기고 곡식 한 톨 남지 않은 정황에도 어떻게

든 살아 남아 날이 밝으면 눈을 뜨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 못하는 것도 한

도가 있는지라. 드디어 팔도 각처에서 부황이 나고. 굶주림에 지쳐 흙을 파 먹다

가 하룻밤 자고 나면 송장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아우성처럼 생겨났다. 그런 중

에 할 수가 없어 깨진 바가지 하나 겨우 들고 온 식구가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무리들이 동네 어귀마다 즐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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