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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34)

카지모도 2024. 8. 15.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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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실이는 사립문간에 선 채로 하염없이 연들의 뚫린 가슴을 올려다 보았다.

그 연들은 가슴에 하늘이 시리게 박힌 것처럼도 보였다.

"왜 연에다가는 구멍을 뚫는대요?"

어린 날 강모는 그렇게 물었다.

"그래야 잘 날지. 그게 바로 연의 비밀이니라."

기응은 웃으면서 대답했었다.

"비밀?"

"비어야 상하. 좌우. 자유 자재로 날 수 있는 것이다."

강모는 알 수 없는 말이라고 고개를 갸웃하였다.

"봐라. 이걸 방구멍이라고 허는데."

기응은 연달을 다 깎아 한쪽으로 밀어 놓고. 깨끗한 연종이를 가로 한 번. 또

다시 세로 한 번 접어서. 각이 지게 접혀진 한가운데를 칼로 그린 듯 동그랗게

오려 냈다. 반듯하고 온전했던 하얀 백지는 그만 한순간에 가슴이 송두리째 빠

져 버려 펑 뚫리고 말았다.

종이의 오장을 무참하게 도려내 버린 것이라고나 할까. 이상하게도 그것이 너

무나 아까워서 강실이는 아버지의 손을 숨죽이어 바라보았었다. 기응은 구멍이

뚫린 연종이를 지금 막 바람을 받아 떠오르기나 하는 것처럼 비스듬히 경사지게

세워 들었다.

"바람이 여기 이마에 와서 탁 부딪쳐 때리면서 이렇게 연을 공중으로 띄워

올리지 않냐? 그럴 때 바람을 맨 먼저 받는 것이 이 이마다. 그래서 연 이마는

찌어지기가 쉬워. 허나 이 복판 구멍 도려낸 꼭지를 이마에 붙이면. 안 찢어진

다. 질겨져. 이마가 네 겹이 되거든. 연 몸이 한 겹. 꼭지가 또 한 겹. 그러고 풀

칠이 한 겹. 참 묘허지? 헌데. 연 이마에 한 번 부딪친 바람은 그냥 그 이마 위

쪽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라. 그럼 어떻게 되꼬? 요 이마 뒤쪽이 순간 바람 없

는 진공이 되겄지? 그때 바로 이 방구멍으로 빠져 나간 바람이 진공된 자리를

메꾸어 주는 게야. 좌우로 미끄러져 나간 바람허고 같이. 이 바람이 조화를 부려

서 묘기를 내는 것이다. 물론 띄우는 사람이 연자새를 잘 다뤄서. 실을 당기고.

놓고. 튕기고를 때 맞추어 잘해 줘야 하지만. 연을 제대로 날릴 테면 바람을 읽

을 줄 알아야 헌다. 그 바람을 실로 가늠해서 손 끝에 탁 느끼고는 연자새를 팽

그르르 감었다. 풀었다. 살살 땡겼다. 놓았다. 옆으로 눕혔다. 바로 세웠다. 허는

걸 잘해야지. 그래야 연을 잘 날려."

기응은 아까 오려 낸 종이를 구기거나 버리지 않고 한쪽 옆에 두었다. 그리고

물감을 곱게 풀어 때로는 선연한 다홍으로 때로는 쪽빛청람으로 또 때로는 아주

검은 먹물로 색칠하여 연의 이마에 갖다 붙였다. 그것이 바로 '꼭지'였다. 그러면

창백하게 핏기를 잃었던 연의 흰이마에 선홍색 붉은 해가 찍히고 푸른 달이 만

월로 뜨며 검은 동산이 신비롭게 뚜렷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뿐인가. 먹머리

동인 띠 아래 반달로도 숨고. 어느 해인가는 소스라치도록 여염한 꼭두서니빛

초승달이 걸리기도 하였다.

기응만이 그렇게 오만 가지 도안을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연

을 만들 때는 그렇게 했다.

"이렇게 꼭지를 붙이면 머리가 두터워지고 강해져서. 웬만한 바람이 세게 불어

도 견디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고 이 문양은 그냥 무단히 이쁘라고만 붙이

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빌면서 연을 날리는 마음이 저 하늘에 뜬 해와 달에까지

가서 닿아 모두 이루어지고 나쁜 액은 또 이 연에 그린 것들이 다 막아 주기를

바라는 심정을 붙이는 게지."

그러니까 그것은 부적이기도 한 셈이었다.

연이야 무슨 생각이 있을까마는 그렇게 제 가슴을 아프게 도려낸 애를 곱게

곱게 물들이어 이마빼기에 붙이고. 그 어느 연보다 더 휘황한 빛깔로 자태를 자

랑하며 이름까지 지어 받아 소원을 싣고 악귀를 쫓으면서 높고 높은 하늘의 먼

곳으로 나는 것이다.

얼마나 서럽고도 아름다운 일이리.

사람도 그러하랴.

한 생애를 두고 그 무슨 못 견딜 일 당하여서. 순결한 눈밭처럼 희고 깨끗한

백지의 인생을 무참하게 달려들어 반으로 꺾은 허리. 다시 한 번 접어서 또 반

으로 꺾은 종이. 이제는 도려내어 구멍 뚫는데 죄도 없이 운명에게 폭행당하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폐장이 다 썩어 내려 텅 비어 버린 가슴. 혹은 삶의 고

비 막다른 곳에서 피할 길 없는 비수를 들이댄 누구인가에게 난자당한 가슴. 그

비수같이 꽂힌 어느 이름이 밤마다 흘리는 눈물에 녹아서 이제는 흔적마저 희미

한데. 그 이름에 함께 녹아 썩은 물이 되어 버린 애.

그 애 녹은 자리의 쓰라린 공동. 이 상실과 상처와 상심이 버린 가슴은 오히

려. 해 같고 달 같은 꼭지로 물들어서. 한숨과 눈물의 풀로 한 생애의 이마에 곱

게 붙여질 것인가.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비어 버린 것의 힘으로 가

벼이 되며. 또 그 비어 버린 것의 힘으로 강하게 되어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인가.

옴시레기 도려내어 가시만 남은 가슴이 없었더라면. 무엇으로 저 연의 오채

찬란한 꼭지를 장식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모양 없고 무미 건조한 종잇장 하나.

그저 날고 싶은 욕망으로 떠다니고 있을 뿐이리라.

강실이는 하늘에 뜬 연의 투명하게 뚫린 가슴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의 가슴도 차라리 저처럼 애의 찌꺼기 한 토막 붙어 있지 않을만큼 말갛

게 뚫리어 비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좋을 것인가.

강실이는 명치를 밀고 올라오는 눈물을 지그시 누른다.

그때였다.

어느 것보다 높이 날아. 하늘 꼭대기 상상의 갈피로 점 하나처럼 반짝이며 오

르던 연이 아칠아칠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힘없이 어깨를 떨구면서. 아득히 떨어

져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실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땅

으로 내리박혀 떨어지지는 않았다. 가라앉을 무게조차 가지지 않은 가벼움 때문

이리라. 그래서 그것은 실이 끊어져 버린 연이면서도 살아 있는 다른 연들보다

아직은 더 높은 곳에서 바람에 실리어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연은 아까보다 휠

씬 더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

웬일인지 강실이는 그 연이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아. 얼른 눈을 거두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었다. 이미 그 어떤 힘으로부터 끊기어져. 살아 있는 줄

알고 가물가물 흘러가지만 사실은 죽은 연 하나가 파리하게 여위어 사립문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저토록 공들이어 치장하고 정성을 다해 만든 연이

라 할지라도, 이윽고 머지 않아 보름날이 되면 모두 걷어 달집에 넣고 태워야한

다. 보름이 넘어서도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이라고 크게 꾸중을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보름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연을 날리고, 신명나게 연싸움을 하며, 볼

따구니가 바람에 터 발갛게 갈라지도록 논배미와 동산과 언덕을 누비고 다니었

다. 그러다가 가시 많은 대추나무에 걸린 연을 떼어 내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

르기도 하고. 아차 놓쳐 버린 연을 까마득히 바라만 보며 오직 눈물을 글썽거릴

뿐이기도 하였다.

그 연 날릴 수 있는 날들이 다 지나가고.

오늘은 보름밤.

지치게 날리고 놀던 연이나 금방 만든 새 연이나 가릴 것 없이. 이제 더는 가

지고 있지 못한다. 생솔가지와 생대나무로 푸르게 엮어 지은 달집이 뭉글뭉글

구름덩이 같은 흰 연기를 토하며 타오르는 붉은 불길에 던져 넣은 연들은 화르

르 불너울을 일으키며 눈 깜짝할 사이에 스러져갔다.

"모든 액은 다 타 버리라."

고 사람들은 연을 던져 넣으며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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