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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41)

카지모도 2024. 8. 22.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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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 둥. 둥. 둥.

조리를 돌리거나 회술레를 시킬 때는. 북을 쳐서 모두 알게 하였다. 그러나 그

것만이라면. 만인의 손가락질과 부끄러움을 무릅쓰는 것으로 벌이 끝나지만. 다

른 집도 아니요. 원뜸의 세도 문중 종갓집에 든 도둑이니. 더 말할 것도 없이 치

도곤이를 당한 그날로 마을에서 당장 쫓겨나고 말 일이었다. 이 마을에 붙어 있

어 누가 특별히 보살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흉흉하고 살벌한 타지. 생전에 나

가 본 일이 없는 마을 바깥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평소에도

그는 엄두가 안 났었다. 더구나 지금 굶어 죽어가는 자식들과. 아이 막 낳은 아

낙과 핏덩이를 데불고. 만일 쫓겨난다면 동구밖을 다 못 나가 길거리에서 죽게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살려 줍시오."

부서방은 비쩍 말라 여윈 등허리를 캄캄하게 구부리고. 무릎을 꿇어 엎드린

채 다시 한 번 오직 그 말을 되뇌었다. 그 목소리에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

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부서방은 덕석말이나 몰매나 조리돌림. 그리고 회술레가

무서워서 살려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밀룽밀룽 누렇게 부어오른 제 아낙과

벌써 잿빛으로 잦아든 어린 것. 그리고 오불오불한 자식 새끼들을 부디 살려 달

라고 비는 심정이 복받쳐 울음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언감생심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담을 넘어. 광을 열고 곡식을 훔쳐 가려고 들어온 도둑이

라는 것을 이미 잊어 버린 사람 같았다. 등롱을 든 청암부인은 우뚝 서서. 엎드

려 우는 부서방의 등허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흐느끼는 등허리

에 어둠의 주황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청암부인은 아무 말도 더 묻지 않고 손수

광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그 먹장같이 어두운 광 속으로 등롱을 비추며 성큼 들

어섰다. "따라오너라."

겁 김에 저도 모르게 부인의 말을 따라 일어선 부서방은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등롱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곡식 가마 위에 검은 무늬로 비치며 커다랗게

일룽였다. 눅눅한 겨 냄새의 온기도 같이 흔들렸다. 그 겨 냄새에 부서방은 휘청

어지러웠다. 뱃속을 훠어 할퀴어 머리꼭지까지 가르는 어지러움이었다. 그리고

뒤미처. 여그나 나를 가둬 둘랑게비다. 시방은 밤중잉게 가둬서 묶어 뒀다가. 내

일 아침 날이 새면 데꼬 나가 치도곤이를 칠랑게비다. 아이고. 그러먼 그렇제.

부자 인심이 더 무섭다는디 자개 집으 들온 도독놈을 어뜬 보살이 기양 놔 줄

거이냐. 아까 들켰을 때 기양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쳐 부렀어야는디. 인자

나는 죽었다. 나는 죽었어. 나 죽으먼 다 죽제. 집구석으 있는 것들 눈꾸녁도 못

뜨고 그대로 다 죽어. 아이고. 이 노릇을 어쩌끄나. 내가 무신 도독질이여. 도독

질이. 언제 해 본 일이 있다고 겁도 없이 이렇게 서툰 짓을 해 갖꼬는 매급시

일만 크게 저질러 놨네. 밤새 생각헌 꾀가 죽을 꾀라드니. 내가 그짝이 났구나.

덕석몰이고 조리고 회술레고 다 안 무선디. 쬐께나는 것도 인자는 안 무선디. 나

를 주재소로 넹기먼 어쩌꼬잉. 그러먼 인자 어쩌꼬잉. 도독놈잉게 그렇게 허겄지

맹. 하이고오. 부서방은 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청암부인의 뒤를 더 따르지

못하고. 이대로 돌아서서 달아나 버릴까. 순간 걸음을 멈칫 하였다. 그의 등뒤에

는 열린 광문이 희끄무레 바깥을 비쳐 주고 있었다.

"지고 길 수 있겠느냐?"

막 몸을 돌려 바깥으로 튀려는 부서방의 귀에 청암부인의 음성이 무겁게 얹혔

다. 덜컥 놀란 부서방은 그 음성에 덜미를 잡혀 도로 오금이 붙어 버렸다.

"예?"

놀란 끝에 터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질려 있었다.

"네 기운에 이것을 지고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느니라."

안쪽에서 청암부인은 곡식 가마 중에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두 손을 맞부비며 부서방은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고 가거라."

부인은 등롱을 높이 치켜들었다. 어둠의 가루가 섞인 주황빛이 부옇게 번지며

곡식 가마를 아까보다 더 두렷이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러고. 네 일생 동안 아무한테도 오늘 일은 말허지 말아라."

청암부인은 그렇게 말했다. 부서방은 얼른 입이 떨어지지 않아 숨을 들이쉬어

헉. 삼킨 채 내뱉지도 못하고. 얼어붙은 사람처럼 혼이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더니 그만 무너지듯 꿇어앉으며 머리를 조아려 어흐으윽. 울음을 토하고 말

았다. 어푸러지며 넘어지며 아랫몰까지 무슨 정신에 어떻게 지고 왔는지를 모를

곡식 가마 속에 담겨 있는 것은. 목이 메이게 흰 쌀이었다. 그 메인 목을 놓아

부서방은 청암부인의 영연 앞에서 그토록 울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털

어놓지 못하여 더 목이 메이던 이야기를 그는 이헌의에게 비로소 엉엉 울며 하

고 있었다. 부서방의 둘레에 앉아 숙연히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 중에서 그 이야

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암부인 역시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가 그 쌀을 어떻게 먹을 수가 있었겄습니까. 체다만 바도 배가 불른디. 그

배불른 거이 눈물이 차서 그런 것맹이였지요. 그래 속으로 어치케든 내가 살 도

리를 찾아바야겄다고 굳은 마음을 먹게 되얐지요. 이거이 내 목숨이고 내 식구

들 목숨잉게. 애끼고 애껴서. 내가 한 번 심을 잡고 일어스는 무신 발판으로 꼭

삼어야겄다. 무신 궁리를 꼭 해야만 쓰겄다. 결심을 헌 거이지요. 그래서 차마

먹들 못허고. 조께씩 속새로 사람 놔서 돈으로 바꿨는디요. 만주로 한 번 가 볼

라고요. 거그 가서 참말로 부지런히 한 번 일해 갖꼬. 사람맹이로 사는 것 좀 마

님한테 뵈 디릴라고 그랬는디요. 가기 전에 그런 저런 말씀도 좀 디리고. 지 속

에 있는 말씀. 맥헤서 못 터지는. 이 속에 말씀 좀……그날 저녁 일 좀……지가

언제 한 번 죄용히 찾어 뵙고 말씀 디릴라고 했는디요. 마님이 그날 저녁 저한

테 주신 그 쌀 이얘기 좀. 언제 한 번 마님한테 속 시원히 디릴라고 했는디요.

아니 꼭 무신 무신 이얘기를 해야겄다고 정해 논 것이 아니라. 기양요. 기양……

기양 이것 저것 다 털어놓고……만주 갈라고 허는 계획도요. 가기전에 꼭 와서

뵈어야지 했는디. 병환중이신 거 암서도 차마 에러와서 못 오고. 그날은 그러고

염치도 없이 쌀가마니를 지고 갔지만. 그날이 지내고 날이 밝응게 가심이 두근

두근 가라앉들 안허고. 도저히 맨얼굴로 마님을 다시 뵈입든 못허겄길래 기냥

방안 맴만 돌다가……설에 세배허로 올라고 그랬는디요. 사실은 이 못난 놈이

여그 잘못 왔다가는 지가 그날 도독질허로 온 거 매급시 들킬 것만 같어서. 도

적놈 소리 들으까 무서서. 그래서 못 왔그만요. 도독놈이 지 발 제린다고 저 혼

자 그렇게 그 말이 무서서 여그를 못오고……마님이 덜컥 돌아가세 부렀어요.

살어 지실 적으 단 한 번만이라도 더 뵈일 것을. 인자는 영영 다시는 못 뵈입게

……되야 부렀어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부서방은 사뭇 서럽게 울었다. 이기채의 눈시울이 축축히

젖었다. 이헌의도 묵연히 앉아만 있었다. 문상객들이며 다른 안팎 사람들도 소리

없이 고개들만 끄덕이었다. 아무도 부서방을 도적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부서방이 만주로 가먼 어디로 간다등고?"

수천댁이 큰집 솟을대문 앞에 발을 멈추고 물었다. 오류골댁은 옹송그린 어깨

를 부르르 한 번 떨고는 팔장을 끼어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목단강가 어디라데요. 전라도 사람들은 그리 가서 많이 산다고."

"만주에도 전라도 사람 가는 데. 경상도 사람 가는 데가 따로 있는가? 국경

넘어 남의 땅에 새로 가서 사는데도?"

"암만해도 누가 먼저 가서 자리 잡은 데로 아는 사람들이 연줄 찾어 따라가니.

고향 사람은 거기서도 고향사람을 찾는 것이겄지요."

"그럼 부서방은 만주 가면 강모도 만나고 강태도 만날 수 있으까."

오류골은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띄워 올린 강실이의 액막이 연

은 이미 하늘의 늪 어느 깊은 곳으로 아득히 빠져 들어가 버리고. 그 검푸른 야

청의 수면에는 너무나 차고 맑아서 이상하게 귀기 어린 달이 창백하게 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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