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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42)

카지모도 2024. 8. 23.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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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 죽거든 부디 투장하여 달라

 

버석. 버스럭.

창호지 구겨지는 소리가 음습한 주홍의 등잔 불빛이 번진 방안에 오싹할 만큼

커다랗게 울린다. 그것은 불빛이 구겨지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무명씨 기름으로

밝힌 등잔의 불빛은 그 주홍에 그을음을 머금고 있어. 됫박만한 방안의 어둠을

환하게 밀어낸다기보다는 오히려 벽 속에 스민 어둠까지도 깊이 빨아들이고 있

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주홍을 내쉬고 어둠을 삼키는 등잔불 혓바닥이 제 숨결

을 따라 팔락. 파르락. 흔들린다. 그 불빛을 받으며 등잔 아래 숨을 죽이고 앉아.

무엇인가를 창호지로 싸고 있는 당골네 백단이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후드르르

떨린다. 어두운 불 그림자가 흰 창호지에 검은 손가락 무늬를 드리운다. 버스럭.

버스럭. 뭉치가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싼 것을 다시 한 번 더 겹으로 싸는 그

네의 주홍 비친 얼굴에 긴장된 날이 파랗게 돋는다. 얄포름한 입술을 무겁게 다

물고 양미간을 깊게 모아 찌푸린 그네의 이마에 골주름이 한 줄 먹금같이 패인

모습이 여느 때와는 아주 달라 보였다. 그것은 엄숙하고도 두려움에 가득 찬 얼

굴이었다.

"어지간히 다 되얐능가?"

그네와 이마를 맞대다시피 바싹 가까이 앉아 옆에서 거들던 만동이 숨죽인 목

소리로 낮게 물었다.

"그 보재기 이리 주시오."

백단이가 역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동산 위에 달

맞으러 올라간 춘복이와 공배 내외. 그리고 백정 택주네 오물조물한 붙이들이며

평순네들과 어울려 아무 내색 없이 횃불을 잡고 흥겨운 듯 달 구경을 하던 당골

네 백단이는. 어느 틈에 아무도 눈치 못 채개 다복솔 사이로 몸을 숨기며 제집

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마치 무슨 소피라도 잠깐 하고 오려는 사람처럼 흔연스

럽게. 만동이는 그보다 조금 더 앞서.

"고리배미 농악대. 나 없어도 갠찮응가아?"

하면서 옆에 사람 들으란 듯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길게 빼물어 그쪽 동네를

멀리 바라다보더니. 어느결에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한 걸음 먼저 집에 닿아 초조하게 서성거리며 뒤미처 백단이가

바로 쫓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동이는 백단이의 서방으로. 사람들은 그를.

"무부"

라고 불렀다. 무당 서방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또 굿판의 무악인 시나위 반

주를 하는 자라 하여 고인이라고도 하고 또 그냥 잽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다른

무부들이 그러한 것처럼 제 아낙 백단이가 굿을 할 때면 으레 따라가서 이만큼

한쪽에 앉아. 시누대 피리를 불거나. 장구를 치거나. 혹은 징을 데뎅 뎅뎅 뎅 뎅

뎅 데뎅. 두드리기도 하였다. 만일 그 굿이 '동정재비'같이. 흙을 잘못 다루어 지

신이 노한 끝에 가족이 병이 나서 앓거나 혹은 흙이 아니라도 장롱을 잘못 옮기

어 탈이 붙은 경우. 아니면 부뚜막을 함부로 건드리거나 집을 고치다가 동티가

난 집에서 간단한 제상을 차려 놓고 하는 것이라면 굳이 여러 고인들이 함께 갈

필요는 없었다. 제상 앞에 앉은 백단이가 도끼를 방바닥에 뉘어 놓고. 자귀를 들

어 도끼 머리를 두당당당 두당당당 낮게 두들기며 무경을 읊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날 사납고 수 사난 날 나무 지둥 돌 지둥을

디리고 내고 디리고 내고 디리고 다리고 기여서도 흠탈을 마옵소사

옴여률영급급사바하아 대장군방 원진방 삼살 오구방을

디리고 내고 디리고 내고 디리고 다리고 기여서도 흠탈을 마옵소사

옴여률영급급사바하아 대장군방 원진방 삼살 오구방에

인간덜이 허고 사는 일을 다 허물타를 말으시고

무릎 밑에 접어 넣고 치비하고 내부하야 주업소사아

옴여률영급급사바하아아

쒜에 쒜 쒜에

쒜 쒜 휘이이

쒜 쒜 휘이이

쒜에에 쒜에 휘이이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고. 해 넘어갈 무렵. 흰 쌀이 담긴 함지에 시

퍼렇게 뻗친 대나무 가지와 촛불을 꽂아 술 한 병과 청수 한그릇을 부뚜막에 올

리며. 징을 두드리어 부정을 물리고 액과 살을 막아 달라 비는 조왕굿으로부터

시작하여. 안당과 성주굿. 그리고 시왕. 칠성. 지신. 장자풀이. 오구물림에 제석

굿. 고풀이. 넋풀이. 씻김을 다하고. 길을 닦어 종천멕이 해원굿을 다 하자면. 일

이 컸다. 온 밤을 그대로 새우고 나서 동이 틀 무렵에야 끝이 나는 큰 굿이 있

을 때는. 만동이 한 사람만으로는 어린도 없어. 늘 한 패가 되는 여러 고인들이

어우러져야만 했다. 거멍굴 근심바우 옆에 백정과 이웃하여 대대로 대를 물려

살면서. 서슬 푸른 매안과 가호 많은 고리배미를 당골판으로 가지고 있는 세습

무가 점데기의 집에. 애가 닳게 느지막이 쉬흔둥이로 태어난 만동이는. 나이 몇

살 안 먹어서부터 그 아비 홍술에게서 장구와 피리를 배웠다. 만동이의 아비 홍

술이도. 만동이의 어미 점데기 굿판에서 잽이 노릇을 하였다. 그리고 굿이 있을

때면 장에 나가 제물을 사오고. 굿에 쓸 종이꽃을 만들거나 혼백을 창호지로 하

얗게 오리기도 하였다. 그것이 무부가 하는 일이었다. 전라도에서는 반드시 여자

만이 굿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굿판의 주인은 무녀 당골네였고. 무

부는 들러리. 반주자였다. 늦게 본 손자 같은 자식을 앞에 놓고 홍술은 장구를

두드리며. 피리를 불며. 이제 나이 차서 장가를 들면 그 또한 무부가 되어 당골

이 된 제 아낙의 굿판에서 주악을 하는 잽이 노릇을 해야 할 만동이한테

"잘 배와라. 건성으로 허지 말고. 너는 그저 내가 장고다. 내가 피리다. 허고…

…니가 기양 소리가 되야 불 때끄장 오직 두디리고. 불고. 해라. 그것만이 니가

헐 일잉게. 니가 세상에 나서 헐 일이라고는 이것뿐잉게. 다른 일을 헐 수는 없

잉게."

라고 일렀다.

"왜 딴 일은 못헌당가? 지게 지고. 꼴 비고. 농사도 짓고?"

만동이는 동그만 턱을 두 손으로 받치고 앉아 아비한테 물었다.

"니가 아직은 에레서 잘 모르겄지마는 사램이 세상에 나와서 허는 일이 다 같

든 안헌 거이다. 어뜬 사람은 글 읽고 베실허고. 어뜬 사람은 농사 짓고. 어뜬

사람은 질쌈하고. 또 어뜬 사람은 장사도 허고. 저그 택주네맹이로 소도 잡고.

또 우리맹이로 어매는 굿을 허고. 아배는 장고 치고 피리 불고. 어디 그런 사람

만 있간디? 누구는 넘으 집에 종을 살고. 또 머심도 산다."

"왜 그렁고?"

"머이 왜 그리여?"

"바꿔서는 못 산당가?"

"그거이 벱이여. 국법."

"국벱이 머인디?"

"나라에서 정헌 벱이다아. 그 말이여."

"긍게로 못 바꿍만?"

"하아. 그것이 얼매나 엄중헌 벱인지 너 아냐? 한 번 그렇게 정해졌으먼 죽으

나 사나 그런지 알고 살어야제. 이러고 접다고 이러고. 저로고 접다고 저러고.

지 맘대로 바꿀 수가 있는 거이간디? 안되는 거여. 우리 맘대로는."

"왜 안되까이……반찬도 이것 먹었다 저것 먹었다 허는디."

"야 이놈아. 세상살이가 무신 밥 반찬이다냐? 벱이랑게. 법. 버업."

"밥이 아니고?"

"에라이. 썩을 놈."

홍술이는 제 아비 말을 달콩달콩 받는 만동이의 대가리를 쥐고 있던 장구채로

한 대 때려 주었다. 그러면서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니 말대로 이놈아. 세상 사는 나날이 반찬 집어 먹는 것맹이로. 입맛따러 요

놈도 살어 보고 저놈도 살아 보먼 오직이나 좋겄냐. 근디 그게 안되는 거이. 절

대로 안되는 거이 세상이란 거이다."

홍술은 웃다 말고 무겁게 말하며 깊은 한숨을 지었다.

"그러먼 왜 누구는 이렇게 살고 누구는 저렇게 살고 헌디야? 지가 그러고 자

퍼서 그렇게 살라고 골랐이까? 허고 자운 놈으로?"

"타고나제. 맘대로 골라 살 수 있다먼 어뜬 쎄 빠진 놈이 무당 서방을 허겄

냐? 지집 덕에 먹고 사는 지둥서방 한가지로."

"타고나?"

"그리여. 조상 뼈다구 모양을 따러서. 어뜬 놈은 갓 씨고 도포 입는 양반으로

도 나고. 어뜬 놈은 밤잠 못 자고 젓대 부는 잽이로도 나는 거아니냐. 그것을 가

문이라고 허능 거이여. 가문. 알겄냐?"

"그러먼 양반은 양반만 낳고. 당골은 당골만 낳는당가?"

"호랭이는 호랭이만 낳고. 구렝이는 구렝이만 낳디끼."

"낯바닥은 사람마당 다 똑같은디잉. 뼈다구가 머이 달릉가아?"

"긍게 말이다. 우리는 잘 몰라도 머이 달러도 달르기는 달릉갑제. 껍데기 활랑

벳게 보든 안했잉게 그 속은 알 수가 없지마는."

"까깝허네."

"쬐깐헌 놈이 무신 소리여?"

"무단히."

"벨일이구만."

"아부지는 무신 뼈다구에서 나왔대?"

만동이는 여전히 동그만 턱을 두 손으로 받친 채 홍술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제 아비를 깜작깜작 올려다보며 물었다. 조

선의 법으로. 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

을 팔천이라 하였는데, 이 여덟 가지 천민 중에서도 가장 수락한 것이 백정과

무당이었으니.

이들은 사람축에 끼일 수가 없어, 일반 양인들이 사는 부성이나 마을 안은 물

론이요, 그 언저리에서도 감히 살진 못하고, 저만큼 물러나 귀빠진 곳에 저희끼

리 웅크리며 어깨를 부비고 살아야만 하였다. 그것도 제 마음대로 살 곳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정 같으면 고을에서 한 곳에 거처를 정하여 주고 어디

로도 함부로 떠나지 못하게 감시하였다.

무당이라고 그것보다 더 나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양반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민촌의 마을 사람 누구에게라도 존대로 말을

바쳐 써야만 하였으며, 심지어는 어린아이에게조차 반드시 경어를 써야 하는 무

당 당골네 집 아니. 홍술의 가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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