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는 유명이 달라 명부의 그림자를 좇아갈 수 없었으나, 이제 죽어 가벼
운 혼백이 되었는데도 바로 가서 만나지는 못하고, 아직도 더 기다릴 일 남아서,
가슴에 맺힌 애를 다 삭히고 썩이어 온전히 씻어 내고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사람.
이승에서 만났던 단 사흘의 인연으로 한세상을 다하여, 오직 그가 남긴 시간
을 살고, 죽어서도 한 삼 년은 더 기다려야 갈 수 있는 이 사람의 그 무엇이 그
토록 컸던 것일까.
청암부인은 이승을 벗어 놓고 저승으로 가면서, 이 어린 신랑 준의가 써서 보
낸 달필의 혼서지를 신발로 만들어 신고 갔다.
時維孟春(시유맹춘)
尊體百福(존체백복) 僕之長子俊儀(복지장자준의) 年旣長成(연기장성)
未有沆麗伏蒙(미유항려복몽)
尊玆(존자) 許以(허이) 令愛(영애) 항室(항실) 玆有先人之禮(자유선인지례)
謹行納幣之儀(근행납폐지의) 不備伏惟(불비복유)
尊照(존조) 謹拜(근배) 上狀(상장)
全州後人(전주후인)李奉宇(이봉우)再拜(재배)
때는 한창 봄이 무르익은 계절이온데 존체 만복하십니까.
저의 장자 준의가 이제 장성하여 배필이 아직 없더니, 어르신께서 높이 사랑
하심을 입사와 귀한 따님으로 아내를 삼게 해 주시매, 예전부터 지켜 내려오는
조상의 예에 따라, 두루 갖추지 못하였으나 삼가 납폐하는 의식을 행하오니 살
펴 주시옵소서.
전주 이씨 이봉우 삼가 절함
길이로는 한 자가 조금 더 되고 폭으로는 두 자가 조금 못되는 이 간지는, 그
러니까 함 크기만한 것이었다.
두꺼운 백지를 아홉 칸으로 접어 양편을 한 칸씩 비우고, 가운데 일곱 칸에다
먹빛도 선연하게 한 획 한 획 정성껏 써내려 간 그 혼서지는, 혼주인 신랑의 부
친이 신부의 부친에게 보내는 서간으로, 그럴 만한 형편이 못되는 경우에는 할
수 없지만, 대개는 혼인 당사자인 신랑이 직접 글씨를 썼으니, 이는 그 자신 어
느덧 장성하여 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엄숙한 순간에, 스스로 붓을 들어 백
지에 먹을 직을 때,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을 실감케 하기도 했지만.
또 하나는 낭재의 필재가 이만하다는 것을 신부 쪽 가문에 드러내 선보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인 혼주가 엄연히 계셔도 으레 혼서지는 신랑이
쓰도록 했던 것이다.
홍지에 싸 청사 동심결을 맺은 청색 비단 치마감을, 청색 종이에 싸서 홍색
명주 타래실로 동심결을 맺은 붉은 비단 치마감과 함께 검은색 비단 겹보에 소
중히 싸서, 함 속에 곱게 넣어 보내온 이 혼서지는 혼인하기 전에 벌써 신부댁
으로 넘어가 온 문중 대소가가 들러앉은 가운데 읽혀지고, 신랑자리 됨됨이를
평가받았다.
그리고는 일생 동안, 한 지아비의 아내 되는 여인의 생애를 다할 때까지 안방
의 가장 깊숙한 곳에 정결하게 보관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은 결코 함부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여인이 이승에서 가질 수 있는 제일 큰 문서였다.
운명의 약정서.
그러다가 훗날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갈 때, 이승에서 받은 이 약정의 문
서를 신발로 만들어 신고 여인은 먼 길을 떠나는 것이다.
청암부인은 이 혼서지 신발을 마치 저승의 강물 위에 뜬 반야용선처럼 신고서
무거운 이승을 가볍게 버리고 홀연히 갔다.
살아 생전 못다 본 신랑의 고운 모습이 다만 글시 몇 점으로 문신된 혼서지의
육필을 신고, 그 손 닿은 글씨의 체온으로 저승가는 시린 발을 감싸 주는 묵혼
을 신고.
그 혼인에 입었던 원삼에 족두리 쓰고.
이제는 썩으면 된다.
이제는 한세상도 다 기다렸으니 한 삼 년만 좋이 더 기다려 썩기만 하면. 그
러면 만날 수 있으리. 혼서지의 문서를 증빙으로 간직한 채.
부인이 홀로 누워 오직 육탈을 기다리고 있는 그 무덤의 옆구리가 아까부터
조금씩 헐리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그러나 민첩하게.
어느새 팔이 하나 그대로 들어갈 만큼.
그 옆구리에 납작 붙어 호미로 봉분의 흙을 긁어 내고 있는 만동이와 백단이
의 이마에는 검은 땀이 진액같이 배어 나오고, 두 손에는 날카롭게 발톱이 서
있었다.
괴괴한 이씨 문중 도선산 아래 종산 중천에는 오직 얼음같이 차고 시린 정월
대보름 푸른 달만이 질린 듯 떠 있을 뿐, 우뚝우뚝 서 있는 호석과 비석들말고
는 아무도 이들을 보는 이 없었다.
몇 백 년 전 이곳에 낙남하시어 처음으로 마을을 세우신 입향조 이래, 대대로
세거하며 학문을 닦고 덕망을 드러내, 나라에 그 아름다운 이름을 의롭게 떨친
가문의 조상들이, 이제는 한낱 빗돌이 되어, 다만 돌 하나로 서서, 질린 달빛 아
래 후손의 무덤 옆구리 헐리는 구멍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泥而不滓(니이부재) 玉豈火 (옥기화삭)
진흙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않는데, 그 옥을 불꽃이 어이 녹이리.
라 새겨져 있는 비문의 일절이 소슬하게 드러나 비석이며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 資憲大夫(자헌대부) 知敦寧府事(지돈녕부사)
李公(이공) 神道碑銘(신도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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