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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5권 (54)

카지모도 2024. 9. 4.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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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비석의 뒷면에 적혀 있는 그리운 문자들은

"공으로부터 거슬러 올라 사 대에서 세 분의 정승의 났으니 공은 본디 겸허한

데가 또 가문이 융성한 때문에 그 마음은 더욱 벼슬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아경(참판의 별칭)의 열에서 의직을 원하여 절라부백(전라관찰사)이 되었

으나, 얼마 후 그만두고 돌아와 향리에서 여생을 보낸 지 십여 년이 되었다. 금

상(임금)이 자헌의 품계를 특별히 더하여 형조판서를 제수하자 공은 받지 않고

상소하여 사양하니, 비답한 말씀이 특별히 많았고 공을 부르는 전지가 잇달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는 말씀을 적고 있다.

청빈하고 용모가 아름다워 보는 이에게 감화를 주며, 그 행실이 단정하고 학

문이 높았던 그 선조의 한평생 살아온 흔적이, 한 집안은 물론이요, 향리와 나라

에 빛나 가히 훗날의 후손에게 본이 되었던 조상.

 

高年長德(고년장덕:높은 나이 훌륭한)

今名永垂(금명영수:오늘의 명성 길이 드리워)

公自能人(공자능인:공은 절로오래 전할텐데)

何事乎碑(하사호비:빗돌이 무슨상관있으리)

 

기라성같이 기둥같이 우뚝우뚝 서 있는 비석들과 이를 보호하여 시립하고 서

있는 호석들의 발치에, 이 조상의 후손이 되어 가문에 들어와 평생토록 종가를

지킨 종부 청암부인의 동그만 무덤이 품에 안긴 듯 누워 있으나.

그 의연한 위용의 즐비함은 이 무덤 하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있었다. 향기로

운 이름이 천년을 가고 만년을 간다 해도, 이미 죽어 혼백이 된 조상의 비석은

그저 무심한 돌덩어리 하나에 불과한 것인가.

대낮보다 더 어두울 것도 없는 달빛 휘영청한 대보름 밤에. 후손의 종부 무덤

이 헐리는 것도. 그 무덤 속에 천골 무당 무부의 뼈다귀가 쑤셔 넣어지는 것도.

그리고 다시 그 무덤이 메워지는 것도 다 한눈에 보면서. 숨소리 하나도 내지

않았다. 신도비의 글자들은 처음에 새겨질 때는 한 자 한 획이 모두. 구 조상의

살아 생전 업적과 덕망을 소중하게 담아서. 그분의 한 생애가 눈감은 그 자리에

또렷 또렷이 눈뜨고 다시 태어나. 후손에게 그 안광을 전하였으련만. 지금은 오

직 달빛이 스민 음각의 그림자만을 묵묵히 머금고 있을 뿐이니. 그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기게끔 살아오신 선조의 음덕은 어디로 가고. 이처럼 무참한 능욕에도

오직 침묵하고 계신다.

조상님 모시자아 조상님을 모시자.

선대 선천아 조상님네 조상을 모시자아

후자 후천은 만조상님네 어느 조상님이 아니 오시리이

남 사는 세상을 못다 씨고 못다 입고 못다 살고 가오신 님

이제 가시던 만조상님네 이 굿을 준다는 말씀을 듣고오

시름없이도 오셨다가아 이 굿 주신다는 말씀으을 듣고

자던 조상님 잠을 깨워 졸던 조상님 옆을 질러서

썩은 갓을 다 털어 씨고 썩은 도포르을 다 털어 이입고오

조상은 가 열 대 조상이요 봉사는 가 사 대 봉사인데

어느 조상님이 아니 오시리이 시우 식상으로 돌아를 오시요오

혼이라도 돌아오소. 넋이라도 돌아오소

혼이 오며는 온 줄을 아나아 넋이 오며는 온 줄을 아나

내가 왔다 내가 왔네에 할아바이 조상님네

불쌍한 내 자손 솔씨 받어 알뜰히 살뜰히 키워나 가지고

마른 자리는 네가 나 밟고 진 자리는 네가 나 밟고오

당골네 백단이는 무서움을 이기려고 조상굿 구슬픈 가락을 웅얼엉얼 읊조리

고. 무부 만동이는 속으로 시나위 반주를 한다. 이 굿가락은 묵묵히 장승처럼 서

있는 비석과 호석들을 음산하게 휘감으며 그 뼛속으로 파고 스며든다. 능욕.

"섞어 부러. 인자는 죽었는디 어쩔 거이여. 산 사램이 더 무섭제. 죽은 혼백 안

무섭다. 이렇게 섞어 부러야여. 진작에 이런 시상이 우리 아부님 살어 생전에 왔

어얀디. 요렇게 한 살로 섞는 시상이."

백단이는 끼치는 두려움을 덜어 내려는 듯 숨소리로 말했다.

"압씨는 오늘 밤이 첫날밤이네."

그러나 만동이는 무겁게 입을 다물고 오히려 그러는 백단이를 못마땅하게 흘

겨보았다. 그는 아무리 애써도 와들와들 떨리는 손을 가누기 어려웠다. 드디어

구멍이 뚫리며 옆구리가 헐리는 청암부인의 무덤에 흥술이 뼈보다 검은 바람이

먼저 스며. 휘익. 들어간다.

바로 이때. 어금니를 깊이 사려 물고. 뱃속까지 숨을 들이마신 춘복이가 주먹

을 힘주어 쥐고는 뚜벅 뚜벅. 결코 서두리지 않으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에 땀

이 배도록 절박하게 어느결에 도선산을 한 바퀴 돌아. 매안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대보름 달밤의 흥에 겨워 풍물 치는 소리와 달집 사르는 불꽃이며 온마

을 매캐하게 감고 있는 연기들이 춘복이한테는 마침 좋았다. 아무도 그가 이 한

밤중에 주먹을 부르쥐고 매안의 원뜸으로 올라가는 것을 눈여겨보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달빛은 얼음가루 이내처럼 푸른 듯. 흰 듯. 부우연

듯. 달집 타는 연기에 자우룩히 섞여들어 춘복이 발밑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

달빛은 구불구불 오르는 고샅길에 시린 물빛으로 흐른다. 그러더니 그만 발 아

래 물 소리가 굽이를 이루며 물살을 뒤채. 춘복이 발을 덮친다. 춘복이는 자칫

뒤우뚱 물 속으로 빠질세라 한 발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강실이 이름을 부르며

다른 발을 놓는다. 그네의 이름은 소용돌이 물살 속에 박힌 징검다리 돌멩이였

다. 이 강물의 이쪽에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는 물살의 희오리 한가운데 숨은

듯 드러난 듯 그 이름이 들을 내밀고 춘복이는 그 등을 밟는다. 밟힌 등에 검은

발자국이 찍힌다. 달빛이 묻어나 버린 발자국이 동굴처럼 거멓게 입을 벌린다.

작은아씨. 나오시오. 제발 이리 나오시오. 내손 좀 잡어 주시오. 나 안 떠내리가

게.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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