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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19)

카지모도 2024. 9. 30.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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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일에 아직은 내가 있으니 너는 위로 어른 모시고 아래로 사람 부리는 일에

빈틈이 없게 해라. 이제 차츰 내 아는 일을 너한테도 가르쳐 줄 것이다만. 너도

모르는 것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묻도록해라."

핏기 가신 낯빛이 삼베 상복 누런 빛과 별 다를 바 없는 이기채는 메마른 음성

으로 말하였다. 그 음성이 깐깐하면서도 허적하게 들렸던 것은, 정작 마주앉아

가르쳐야 할 '바깥일'을 배울 사람이 제자리에 없는 탓이었으리라. 그 자리에 대

신 앉아 시아버지의 빈 마음을 채워야 하는 며느리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

세우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그 이기채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참담

한 일에 부딪쳐, 효원은 지금 이렇게 휘어질 듯 팽팽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 궁금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물으라."

하신 시어른의 말씀이, 지금 당한 이런 일에도 해당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

리. 두 손을 끼고 앉은 채 움쩍도 하지 않는 그네의 뒷등은 검은 절벽 같다. 그

가파른 벼랑에 분기가 받쳐 숨소리조차 스치지 못한다. 자칫 잘못 터질 것만 같

은 탓이었다. 마침 방안에 철재가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설을

쇠어 세 살이 된 철재는 무엇인가 칭얼대며 떼를 쓰다가 콩심이 한테 업혀 겨우

진정이 된 모양인데, 만일 이기채의 눈에 띄었다면 꾸중을 들을 일이었다.

"사내 녀석이 두 발로 의젓허게 저 혼자 걸어야지, 남의 등에 업혀서 그게 무어

냐. 내려라."

막 태어나면서부터 증조모 청암부인의 사랑을 애절하리만큼 독차지한데다가 할

머니 율촌댁 또한 무릎에서 내려놓을 날이 없었던 철재는 한 걸음만 떼려 해도

콩심이 등에 업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거

나 나무라지 않는 일이었다. 철재의 아비 강모는 그보다 더 큰 소년의 나이에도

비가 오거나 날이 궂어 걷기 불편할 대, 혹은 눈 내린 날에는 안서방의 등에 업

히어 시오리 길 보통 학교에 가고 오지 않았던가. 귀한 몸 도령의 발이 찬 비에

젖거나 진흙창에 빠지면 안되는 까닭이었다. 또한 눈 비에 미끄러져 다치면 큰

일이며 날카로운 돌부리에 채이면 뜻밖에 고꾸라질 것이니 위태로워 혼자 걷게

할 수 없었다. 또 꼭 그런 날만이 아니라도 무엇보다 "다리가 아퍼 안된다."

고 하여, 안서방은 강모에게 등을 댔다. 그러니까 안서방은 가마인 셈이었다. 그

런 강모를 나무라지 않았던 이기채가 철재한테는 전에 없이 엄격하여, 작은 일

에도 낯빛을 고치고 음성을 세우는 것이 사람들한테는 얼른 납득이 안되기도 하

였다. 어린아이 하는 짓이라 드나들 때 방문을 잘 닫지 않으면

"노비들이나 하는 짓이다. 네 꼬랑지가 얼마나 길어서 그 문을 아직 못 닫어?

어서 꼭 닫고 와라. 사람은 뒤끝이 야물어야 한다."

하고, 계단이나 뜰을 오르내릴 대 폴짝거리며 뛰면

"경망스럽게 뛰어 다니거나 땅을 구르는 건 염소나 망아지 허는 짓이지 사람이

그러는 것 아니다."

하는 말에서부터

"신발 끌면서 걷지 마라."

"손가락에다 옷자락 감지 말고, 옷끈 물어뜯지 말어라."

"말을 더듬을 만치 저렇게 급하게 빨리 말하다니, 버릇 들면 고질된다."

는 것이며, 배고프다고 얼른 먹을 것 달라 정짓문간에 서서 발을 구르는 철재를

보고 호되게 나무란 일도 있었다.

"그토록 참을성이 없어 어디 장차 장부가 되겠느냐. 한 고비 잠깐 지나면 때 되

고, 때 되면 어련히 밥상 들여올 것을."

"조막만한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그리 노성이시오? 그것이 시늉만 사람이지 아

직 눈도 안 뜬 강아지나 같은 걸. 배고프면 울고, 먹으면 뛰고, 저 좋으면 놀고,

다 그러면서 크는 것이지. 그런 철부지 애기한테 서당 도령 잡지듯이 다그치고

혼을 내니, 원. 저애가 장부가 무엇인지 알 리가 있소? 강보에다 천자문 들이대

는 격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부자지간은 어려워 겸상도 못하지만 조손은 허물이

없어 할아버지 수염도 잡고 논다드마는. 우리 집은 외려 거꾸로요, 왜."

율촌댁은 그럴 때마다 곁에서 은근히 마음이 쓰리어, 내색은 안하면서도 한 마

디 두 마디 접어 두었다가 결국은 이기채한테 말을 밀어내곤 하였다. 그러나 그

네의 속에 꼬깃꼬깃 접힌 말을 다 할 수는 없었다. 강모도 어려서는 다 그렇게

자란 것을, 금이야 옥이야, 긁힐가 티 묻을가, 애지중지. 나는 철재란 놈, 저놈을

보면 지 애비가 생각나서 안쓰럽기 고애자 버금가게 애처로운데, 애비가 못해

주는 몫까지 두배 세 배로 더 잘해 주든 못헐망정, 애기 주눅 들게 일일마다 껀

껀마다 거미줄로 회초리네 그냥. 찡그린 율촌댁의 이맛살을 못 본 척하며 이기채

는 말했다. 마치 겉으로는 말 안하지만 그 이맛살 사이에 끼인 심정 속을 다 짚

어 모는 사람처럼.

"내가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강모란 놈을 그렇게 유약 한심하게 기른 것이 발등을

찧도록 후회가 되고,조상 앞에 면목이 업서 더 그러는 거요. 조상은 오히려 어른

이시니 덜 민망할지 모르지. 백일하에 꾀 벗고 난장에 나앉은 것같이 온 문중이

며 이웃 마을 남원 군내 동제간에 다 드러난 망신을 이제 와서 무얼로 가릴 거

요? 흩어진 콩이라서 주워 담을 수가 있는가, 찢어진 종이라서 풀 발라 붙일 수

가 있는가. 아니면 먹칠한 얼굴이라 물로 씻을 수가 있는가. 무엇으로도 만회가

안되는 망종의 짓을 제 맘대로 저지르는 저런, 위아래도 근본도 분별도 없는 소

행머리를 누가 키워 주었겄소? 부모 잘못이지. 어려서 성정을 바로잡어 줘야 했

던 것을."

"그게 꼭 가르친다고만 된답디가? 자식 잘못되란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다고.

저 타고난 액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타고났다는 게 도대체 뭐요. 성품일 테지. 부처가 성불을 해도 성질은 남는다드

만. 그렇게 업이 질긴 것이 성질이라 허드라도, 자신을 길들이기 나름일 것이요.

사람이 한 번 생각을 하는 데도 다 법칙이 있어야 하고, 한 번 행동을 하는 데

도 다 격식이 있어야 해. 앉고 서는 태도며, 그 의복을 정제하고, 그 음식을 절

제하는 것에 아무 표준이 없으면, 자라서는 더욱 잘못되는 법이요. 고칠 수도 없

게. 그러니 아주 어려서 젖니 날 때 잘 가르쳐야지."

어린아이들이란 경솔하고, 수선스럽고, 들뜨고, 천박한 버릇이 많은데, 이를 귀엽

다 여기어 버려두면 훗날 온갖 행실이 완전하지 못하고, 온갖 일이 굳건하지 못

하여 공명정대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법이라고, 이기채는 말했다. 강모한테는 당

치않은 말씀들이시오. 태어나서 관옥 같고, 자라면서 귀공자요, 신중하고 조용하

여 차라리 칼싸움 전쟁놀이나 한 번 양껏 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강모였습니

다. 그 애가 들뜬 모습 나는 본 일 없고, 손발을 털거나 흔들거나 다리를 내두를

는 것도 나는 본 일 없었소. 큰 소리로 고함치는 격성도 들은 일 없습니다. 가르

침을 배우고 본받는 데야 강모를 당할 사람 아무도 없었을 것이오. 걸어가면 구

슬 소리 나고, 앉으면 부드럽고 온화해서 둘레가 다 은은 해지는 그런 강모가,

거칠고 사납게 마구 자라 패악한 탓으로 이리 떠도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애들이란 그 기상이 영리하고 뛰어나더라도 들떠서 날뛰거나 간사 경박하면 절

대로 안되는 법이고, 바탕이 순박 온후하더라도 잔약하고 무른 데 이르러서는

안되는 거요."

잔약하고 무른 사람. 그 강모가 날을 세워 살을 가르고 깊이 박은 비수는, 지금

효원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차마 고꾸라질 수도 없게 하면서, 가슴을 꿰뚫은

칼날로 곤두서 있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그네는 숨을 들이쉴 때마

다 꼬챙이같이 박힌 칼날에 살속을 베이면서, 쓰라림에 소스라쳐 저도 모르게

손으로 앙가슴을 누르곤 하였다. 손바닥 밑에, 치받친 숨이 벌쩍벌떡 부딪친다.

날에 베어 토막난 숨이다. 숨은 잘리어 질린 몸둥이를 새파랗게 뒤틀다가, 못 이

긴 고통으로 튀어올라 가슴벽을 치며 대가리를 박는다. 대가리 박힌 자리에 검

푸른 멍이 든다. 효원은 그 멍을 토해낸다. 후우우으.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내가 멋 헐라고 무단히 없는 말을 잣어내겄능가이? 죽을라고 환장헌 거 아니

먼. 아이고, 곷니어매는 상놈 상녀르 신세 서런 거 우리보담 더 잘알 거 아녀?

꼭두새복 동트기 전부텀 개 뒤야지 귀얭이도 다 자는 오밤중그장, 대그빡이 벳

게지고 발부닥에 불이 나게, 언제 궁뎅이 붙일 새도 없이 죽어라 일을 해도, 잘

했다 소리보담 베락맞기 이골이 나게, 천허고 천헝 거이 상놈의 것들 인생인디.

없는 말 지어냈다 닭괴기 백숙 찢기디기 짝짝 찢길라고? 언감생심. 못헐 일이제.

나도 첨에는 하도 기가 맥헤서 입이 안 떨어지드라."

우례와 마주앉은 옹구네는, 마침 허드렛일이 있어 원뜸에 올라왔던 것처럼 주섬

주섬 일거리를 걷어들고, 뒤안에서 안마당으로, 안마당에서 디딜방앗간 옆구리로

왔다갔다 하더니, 설핏 해가 넘어가고 어둑발이 내려앉자, 기웃 우례네 행라 쪽

을 들여다보더니

"하이고, 추와라으. 멋 헝가잉?"

하면서 방문고리를 잡아당겻다.

"들오시오."

실밥 뜯어 흩어진 것을 손바닥으로 슬어 구석지로 밀어 놓으며 우례는 일어서는

시늉을 했다. 그네의 검은 머리 낭자에는 흰 무명실을 기다랗게 달고 있는 바늘

이 꽂혀 있다. 그 바늘을 빼서 실패에 꽂는 우례 옆에서 봉출이와 꽃니가 서로

두 다리를 뻗어 맞물리게 끼우고 앉아

"니 다리 내 다리 갓 다리."

곡조에 맞춰 손바닥으로 다리를 탁, 탁, 두드리며 노는데

"시그럽네이잉? 어른 오셋그만. 고만히여어. 이렇게 좀 해 바라. 저만침 가아.이

리 외겨. 이 알로."

우례가 옹구네를 맞았다. 나이 서로 어찌 되었든, 우례는 노비고 옹구네는 상민

이라, 비록 옹구네 행신이 노비보다 나을 것 없더라도 엄연히 면대에 구분이 있

어, 우례는 자신을 낮춘다. 옹구네도 그런 줄은 안다. 하지만 그 둘은 허물이 없

다.

"갠찮히여. 나 발 조께만 녹이고 갈라고오. 한 죙일 동당거림서 배깥에만 있었드

니 발꾸락이."

명색이 아랫목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옹구네는 우선 발가락을 주물렀

다.

"니 다리 내 다리 갓 다리이. "

"좋오을 때다. 시방 안허먼 그렁 거 언제 또 허고 놀겄냐."

어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아까 하던 놀이를 잇고 있는 두 아이를 보

고 옹구네는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리고는

"넘들은 다 개멩해서 핵교들을 댕긴디."

하며 혀를 쯧쯧 찼다. 우례를 옆눈으로 힐금 보면서.

"종의 자식이 문자 속은 알어서 멋 헌다요. 배 안 곯으먼 그만이제."

"아 왜 자가 종의 자식이여? 이 세상에서 봉출이가 누구 자식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 즈그 아부지뿐일 거이네. 참말로 요상한 일이여잉? 상관없는 나도 아는 그

시를 왜 인자가 몰르까아?"

"어찌 모르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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