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수천샌님은 그렁게 참말로 무신 언질 한 마디도 없능가? 개닭 보디끼 봉
출이한테 완전 넘맹이로 허세? 그러든 안허시겄지, 설마. 신분이 웬수라 그렇제
자식은 자식인디. 누구 넘들 눈에는 안 띠여도 속새로는 머 오고 간 끄터리가
있을 거 아니라고?"
나이 우례보다 한 둘 더 먹은 옹구네는 우례를 한쪽에서부터 살살 돌려가며 변
죽을 긁어 두 사람 사이를 조였다. 우례한테 파고들기 위해서는, 우례한테 제일
아프고 서러운 끌텡이를 건드리어 들추며 동정하는 것이 제일 손쉬운 때문이었
다.
"산지기 박달이 자식도 보통핵교 가고, 수악헌 백정 택주네 자식도 책보 둘러메
고 핵교 가등만. 온 시상이 다아는 양반의 자식으로 이씨가문 피 받어난 봉출이
가 무신 죄 졌다고 넘 다 가는 학교를 못 가, 긍게. 시절도 인자는 옛날 같든 한
헌디, 우례나 됭게 신이 짚어서 썩는지 곯는지 암도 몰르게 혼자 전디제, 나만
같어도 진작에 무신 사단을 내도 냈을 거이여."
우례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쭈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문지르고만 있었
다. 뻗은 다리를 두드리며 놀던 두 아이도 어느 사이 어미와 옹구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손을 멈추었다. 방안에는 순간 무거운 침묵이 켜를 이루며 지질
리게 내려앉았다.
"아이, 야. 봉출아. 너 요새는 오수 갈 일 없냐?"
옹구네가 그 침묵을 머리 위로 걷어 내며 일부러 재미가 난 목소리로, 봉출이를
건드리듯 물었다. 그 말에 봉출이는 무색하여 머리통을 긁적였다. 꽃니가 옆에서
오래비 쪽으로 고개를 갸웃 들이밀며 웃자 봉출이는 그 동그란 낯바닥을 쥐어박
는 시늉을 하였다.
"봉출이 오수 갔다 온 일."
은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라도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열너댓 살 장
정이 다 되었지만, 허우대에 비해서 속이 여물지 못한데다가 변통은 없고 욱성
이 있어 성질이 급한 그가, 아직 여남은 살이었을 대 여름한날 있었던 일 때문이
었다.
"봉출아아."
큰사랑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조르르 달려간 봉출이한테
"너 내일 아침에 오수 좀 갔다 와야겄다. 심부름 헐 것 있으니 일찌거니 일어나
서 채비허고 있거라."
이기채는 그렇게 일렀다.
"예."
대답을 하고 물러난 봉출이는 이튿날 꼭두새벽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온데
간데 없이 어디론가 없어져, 하루 종일 우례가 온 동네를 헤매고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 이 망헐 놈이 어디를 갔다야, 긍게, 참말로. 안 그래도 더워 죽겄는디 내가
복장이 터져서 못 살겄네. 아니, 소례야. 너 봉출이 못 봤내? 야 어디 갔능가 몰
라?"
"아까 내동 말헝게로."
"사랑에서 맻번씩이나 찾으싱만, 어쩐다냐. 논에도 없고 밭에도 없고, 뒷동산 밤
나무밭에도 없고."
"그러면 물 속이나 뒤져 바얄랑가."
"빌어먹을 년."
"아 누가 알어어. 덥다고 첨벙 방죽 가운데로 뛰어들으 갔다가."
"지랄허고 자빠졌네."
"또 딴 디 가 찾어바아. 어디가 있어도 있겄지맹, 지가 머 도망 갔으께미? 어매
두고?"
"참, 허는 말마동 꼭."
정짓간에 부지깽이도 헛눈 팔 틈이 없다는 한여름 농사철이라 집 안팎의 종들이
며 호제, 머슴, 놉 들이 모두 들판으로 나가, 고적하리만큼 하얗게 바랜 마당 귀
통이 행랑 그늘에 잠시 비끼며 마주선 우례와 소례는, 서로 하는 일이 다른지라
한자리에 같이 앉을 틈조차 없었는데, 새벽부터 봉출이 찾으러 다니느라고 땀투
성이가 된 우례가, 막 개울에서 한바탕 빨래를 하고 들어오는 소례와 마주쳐 한
쪽으로 끌고 간 것이다. 소례는 머리에 인 빨래 함지를 행랑 툇마루에 내려놓았
다. 소례의 투박한 손이 물에 허옇게 불어 우례 것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소례는 철들기 전부터 이날까지 온 집안 식구들의 치마, 저고리, 바지, 저고리,
속옷, 겉옷, 베개, 홑이불에 버선 수건 온갖 것들을 개울에 가지고 가 빨아 오는
것이 소임이었다. 그리고 그 형인 우례는 침비인지라 그것들을 다듬고 궤매어
바느질하는 것이 평생의 일이었다.
"되지야?"
"시언허지머. 물놀이맹이로. 넘들은 지심매니라고 뙤약볕에 단내가 나는디, 나는
기양 물 속으다가 두 발 당구고, 탕, 탕, 속이 씨연허게 방맹이질 헝게로 한 좋
아? 성보단 내가 낫제. 복더우에 바누질이 얼매나 속 터징가잉. 땀은 뚝뚝 떨어
지제, 바늘은 뿌드렁뿌드렁 들으가도 나가도 안허제, 손구락 푹푹 수심서 열불나
게 우그리고 앉어서 그것 기양 덤벙덤벙 담박질로 건너뛰도 못허고 한 올 한
올. 나, 여름에 성 보먼 젤로 안되얐데."
"니 걱젱이나 히여. 나는 신선잉게."
"겨울에는 그래도 갠찮제."
"아 사철 갠찮다. 야 좀 바, 누가 누 걱정을 허능가 모르겄네, 시방. 겨울 되까
무섭다, 참말로. 얼어터진 얼음 구뎅이에 발 당구고 홑이불 빨래허능 것 생각만
해도 내가."
"좋을 때는 좋은 생각만 허제 멋 헐라고 여름에 겨울 생각 헐 꺼이여잉? 얼릉
가 바아. 불호령 나겄네. 후딱 가서 찾어바아. 여그저그."
소례는 마당의 빨랫줄을 손으로 훑으며 간짓대를 받쳤다. 너무나 부시어 날카롭
게 찌르는 햇볕에 눈을 찡그린 소례가 널어놓은 홑이불에서 물이 투두둑, 툭,툭,
마당으로 떨어졌다. 그 홑이불이 바짝 마르도록 봉출이는 찾을 수가 없었다.
"허 그놈 참. 내가 어제 그렇게 일부러 불러서 말을 미리 일러놨건만, 상전 말을
어디로 듣고 버릇없이 제 멋대로 나가 버린단 말이냐."
먼 심부름 시키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길이 좀 멀다뿐이지 이리저리 들
어가고 나가면서 복잡하게 뒤엉킨 갈랫길이 아니어서, 품앗이에, 두레에, 놉들까
지 사서 부리는 농번기의 일손을 빼내기 어려워, 봉출이한테 서찰 하나 전하고
오라고 시킬 참이었던 이기채는, 해가 중천에 뜨고 한낮이 겨워 해거름에 이르
자, 어이가 없어 이제 더 찾지도 않았다. 드디어 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버린
다음에야 봉출이는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수석수석 흩어진 머리는 땀으로 범벅
이 되어 낙지가닥같이 엉기고, 꾀죄죄한 낯바닥은 먼지와 땀에 환칠이 된 봉출
이는 후줄근히 늘어져 터덜터덜 아랫몰에서 중뜸으로 오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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