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예전, 중원의 한 나라에 이름 높은 고승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 스님의 수행
이 남다르게 깊고, 용맹정진 온 정신을 다하여 깨침을 얻고자 수도하던 끝에, 드
디어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생불이라 하고 따르며 섬기게 되었다. 그이 이름
이 널리 나고 높아지니 온 나라 안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날마다 친견하
고자 몰려 오는 무리가 물결을 이루었다. 이에 왕이, 어리석은 백성을 홀리어 삿
된 길로 빠지게 하는 혹세무민의 중을 벌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땅히 구실삼을
핑계가 없는지라 골똘히 생각한 끝에, 신하를 보내어 문제를 내도록 시켰다. 문
제는, 그 절의 벽에 붓으로 기다란 선을 한 줄기 그어 놓고
"이 선에 절대로 손대지 말고, 이선이 가늘어지도록 하라."
는 것이었다.
"만일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세상을 우롱한 죄를 엄중히 물을 것이다. 그 죄는
당사자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를 에워싼 무리들도 모두 같은 족속들이니 함께
받도록 한다. 절을 폐하겠다."
이 어명에 온 절의 안팎이 다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우와좌왕 여기
저기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였다. 그러나 누가 무슨 재주로, 한 번 그어 놓은
금을 손대지 않고 가늘게 할 수가 있을 것이가. 이렇게 온 절이 소동하여 나름
대로 꾀를 내고 지혜를 짜도 도무지 무슨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데. 고승은 하루
종일 그 모습을 감추고만 있었다.
"큰스님, 아무리 해도 저희는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소서."
애가 탄 절 식구들이 이마를 찧으며 애원하였다. 이에 고승은
"빗자루만한 붓과 먹물 한 동이를 가져다 놓으라."
하고 분부하였다. 그리고는 이윽고 몸을 나투어 법당에서 나와, 그 커다랗고 굵
은 붓에 먹물을 덤뻑 묻히더니, 눈 깜짝 새, 기와에 그어진 선과 나란히 그 위쪽
으로 금을 한 줄 주욱 그어 나갔다. 그 순간, 원래 있던 선에는 손끝 하나 스치
지 않았지만, 새로 생긴 굵은 줄 때문에, 먼저 있던 선은 그만 가늘어지고 말았
던 것이다.
"과연 고승이시라."
왕은 탄복하고 이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다. 더 아픈 아픔과, 더 굵고
큰 시커먼 먹줄을 제 몸에 부르고 그은 강실이는, 이미 그 홀로 되어, 옆에 춘복
이가 있는 것을 감지하지도 못하였다. 춘복이는 단 한 마디 말도 없고 미동도
하지 않는 강실이를, 일어나 앉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히려 아까보
다 더 멀어저 감히, 차마 손댈 수 없게 되어 버린 강실이를 두려운 눈빛으로 더
듬었다. 절대로 안되야요. 춘복이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부르짖었다. 무엇이
안된다는 것인지 집어 내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아까 참에 본 보름달의 붉덕
물처럼 명치 끝에 치미는 안타까움이 그를 짓눌렀던 것이다. 그 못 이길 것만
같았던 빛의 소용돌이. 허사가 되야서는 안되야요. 그는 다시 부르짖었다. 작은
아씨는 인자 내 사람이여요. 내 꺼이요. 어디로 가먼 않되야요. 가만 거그 있으
셔야 해라우. 가만히. 가만, 거그. 그러나 그것만도 아니었다. 결코 허사가 되어
서는 안되며, 어디로도 가지 말고 거기 가만, 가만히 있으라는 것만도 아닌 안타
까움. 그것은 강실이가 멀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네를 마음에 품고 그토록
염원하고 있을 때는, 가까이서 본 일도 없는 그네가 제 것인 양 가득 차게 느겨
지던 것이, 웬일인가. 지금 이 순간에는 참으로 그네가 자신이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아득히 무감하게 떠있는 것을 절감하다니.
"작은아씨. 인자 작은아씨는 지 사람 되야 부렀응게요. 인자는 지 자식 하나만
낳아 주시먼 되야요."
그 안타까움을 밀어내 보려고 춘복이는 소리 내어 강실이한테 말한다. 그런데
조금도 그 말은 절실하지 못했다. 공허한 울림에 불과할 뿐.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절실하게 빌었던 말인데, 왜 이제 소원을 이룬 이 순간에 강실이는
도저히 자신이 가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을 무참하게 느껴야 하는가. 강
실이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을 성싶었다.
"네 이놈, 죽고 싶으냐."
라든가, 아니면
"천하에 불상놈 같으니라고,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혹은 참으로 그리해 주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가 싶은
"나를 이제 어찌하려느냐."
는 말, 아니라면 그저 다만 흐느끼어 울기라도 해 주었으면, 그것도 아니라면,
춘복이를 쥐어뜯으며 달겨들어 죽이겠다고 포악이라도 하였으면. 그러나 강실이
는 숨소리도 내지않았다. 찌르는 달빛의 사금파리에 몸을 베이고만 있을 뿐. 달
빛은 깊은 자국을 남기며 푸르게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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