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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51, 完)

카지모도 2025. 1. 18.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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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지금이 바로 그때여

 

거멍굴을 검은 널판처럼 숨막히게 짓누르는 어둠은 오늘 밤도 어젯밤처럼 하

찮은 상민과 하천들 멱을 조이며 깊어지는데.

당골네 백단이의 오두막에는 여전히 백정 택주와 대장장이 금생이가 번갈아가

며 지키고 앉아 까부라지려는 등잔불을 연신 돋우고, 춘복이의 농막에는 옹구네

가 아직 그대로 남아서 씨근거리며 미영베 떨어진 것으로 춘복이의 피 터진 자

리를 닦아 내고 있었다.

"오살 노무 예펜네. 저년을 기양."

공배네는 속에서 부뚜질이 치밀어 금방이라도 머리꼭지까지 터져나가 버리게

생긴 속을 가까스로 눌러서 참고는

"야가 시방 마느래 다된 시늉을 허네 아조. 누구 앞에서?"

한 마디, 발을 굴러 쏘아붙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피잉하니 내려와 버린 농

막인지라, 옹구네가 그곳에 자빠져 있는 한 내 발로는 던지러서 못 올라간다.

싶어 어젯밤부터 이제나 저제나 그네가 제 집으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던 공

배네는 그예 못 참고 고샅으로 나선다.

옹구네는 벌써 이틀밤이 깊도록 아예 집안 불고하고 농막에 늘어붙어 잠시 잠

깐도 춘복이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 옹구네가 와 있었그마잉. 여그서 밤 샜소? 나는 또 야가 어쩌고 있냐 싶

어 디다보로 왔제. 조께 어쩡가아? 디지든 않겄소?"

택주가 어젯밤을 만동이와 백단이 오두막에서 꼬박 밝히고는 새벽녘에야 겨우

정신을 돌린 듯 농막으로 왔었다.

그는 옹구네가 춘복이를 거의다 벗겨 놓은 모양새로 번 듯이 눕혀 둔 채, 미

영베 걸레를 옹배기에 빨아 가며 꼼꼼히 상처마다 닦아 내는 것을 보고는 순간

당황하여 계면쩍은 낯색을 하였다.

"어서 들외겨. 밤새 고생했지라우? 이 사람도 꼭 죽을라다 살어났그만. 그래도

아직 젊은디요 머. 어쩔랍디여? 터지게 뚜드려 맞는 디는 이굴이 난 뼉다구 아

닝게비? 이께잇 살덤벵이 조께 찢어징 거는 담배씨 붙여 노먼 제절로 아물 거이

고."

옹구네가 마치 춘복이 아낙이나 된 양 스스럼없이 택주를 손님으로 맞이하며,

도무지 낯가릴 것도 없이 익숙하게 그 몸을 만지는 것에, 택주는 쇠털 덮인 낯

바닥을 두껍게 구겼다.

그리고 짚이는 바 있다는 표정으로 대장장이 금생이한테 돌아와서는, 만동이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하앗따아, 그 예펜네, 비우도 좋고 솜씨도 좋등만. 까무로옴헌 낯빤대기 따악

치키들고잉 내가 들으가도 외눈 하나 깜짝 안험서 보란 디끼 조물조물, 넘의 총

각 떠꺼머리 온 몸뗑이를 기양 내가 머 괴기 만지능것보돔 더 살갑게 손 안 간

디 없이 주물름서 자빠졌드랑게. 아조 사나놈 양가랭이를 처억 벌려 놓고

지집은 그 욱에 엎어져서. 참 볼 것을 보제 못 보겼데 원. 어어이고. 내."

툇.

(침 튀어. 거그서 못 뱉고 왜 여그 와서.)

벙어리 금생이는 손을 휘저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넘어진 짐에 쉬어 간단 말도 있는디, 아매 자빠진 집에 시집갈랑갑지. 멀, 재

수있는 놈은 자빠져도 떡판으로 자빠진단디.)

"거 전에 금생이네 얌례를 그리로, 춘복이한테로 말이여, 짝지어 주고 잡어서

공배성님이 무척이나 애돌애돌 허잖었어 왜? 그때보톰도 우리만 몰랐제 저것들

이 속새로는 저러고 지냈이까?"

(그 속을 누가 알어? 들으가 봤간디?)

"그리 안 예우기 잘했제, 사참허네. 큰일날 뻔했그만그려. 숭악헌 것들한테 끼

여서 무신 꼴을 당했을란지."

(에이. 시끄럽다. 다 지내간 일 갖꼬는. 거그다가 여울라고는 당초에 맘도 안

먹었든 일을, 먹고 헐 짓이 없어서 들쳐내 헛심을 빼능가잉?)

금생이는 말을 못해도 상대의 입 모양을 보고 알아는 듣는다.

택주는 평소에 자불자불 무슨 말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쩐지 농막

에서 부딪친 두 사람의 모습은 석연치가 않았다. 그리고 웬일인지 그것을 본 마

음이 몹시 언짢았다.

아이 딸린 홀어미 과부가 턱없이 주제넘게 떠꺼머리 총각허고 살림 붙었다는

것만 가지고 엇눈을 떠서 그렇게 보인 것일까.

내가 왜. 내가 머이 어쩌서 숨어 살어야냐? 그 동안 숨을 만치 숨어서 너므이

눈에 띄이께미 숨 쥑이고 살었잉게 인자는 낯 내놓고 살 때도 되얏지. 천하 없

는 복송씨 껍데기도 땅속에 묻어 노먼 삭고 썩어서 싹이 나고. 밀봉을 헌 술독

아지 뚜껑도 술을 익힐 만치 익힌 뒤에는 홰딱 뜯어내 부리는 거이 세상 이치여.

재 넘으면 베려. 뜸딜이다 밥 타고. 아조 요때다 싶을 때를 놓치먼 안되제 암

먼. 앙 그래 봐라, 어치케 되능가. 복송씨, 살구씨, 수박씨. 호박씨들 모조리 다

벌거지가 파묵어 불고, 천하 명주 이강주라고 시어 터져서 개도 안 먹게 되야 부러.

나는 그런 멍청헌 짓 안헌다.

지금이 바로 꼭 그때여. 아조 마침 바람 불고, 비 오고, 천둥 치고, 번개 치고,

온갖 구색 다 갖촤서 핑계도 좋아. 바람 분 짐에 거풍허고. 비 맞은 짐에 빨래허

고, 천둥 친 짐에 약쓰고, 번개 친 짐에 콩 구워 먹으먼 오직이나 옹골지꼬잉.

근디, 내가 시방 그러게 생겠다, 내가아.

옹구네는 마치 작두 탄 무당처럼 신이 올라 두 눈이 번들번들, 두 손은 펀듯

펀듯, 온몸이 간지럼타듯 꼬이며 팽팽하게 튀어서 쉿쉿, 움직일 때마다 바람 소

리가 났다.

하이고, 참말로 옹골져 죽겄네.

너 없으먼 내 못 사는 건 못 산다 치고, 얼매나 까직이고 잡었는지 밤마동 내

가 시퍼렇게 손톱을 갈고, 저걸 내가 어뜨케 패쥑여어, 싶드니마는 거 참 알다가

도 모르겄네. 꼭 무신 귀신이 시킨 것맹이로 원뜸에서 딱 끄잡어다가 실컨 패주

능고만잉. 니가 더 직사허게 맞어야지 그것 갖꼬 되겄냐 싶드라고. 니 살 터질

때 내 살 아까워서 눈물이 다 씸뻑 나기는 나드라만, 아조 삼 년 묵은 체증이

내리가디끼 속이 씨연허고 분이 풀린 것도 사실은 사실이제. 허 참, 손 안 대고

코 푼다드니, 아 이 옹구네 원한을 원뜸에 율촌샌님이 풀어 줄지는 또 몰랐네.

그렁게 율촌샌님이 내 심바람헝거이제. 앙 그럴랐으먼, 엉뚱허게 죄도 없는 사람

을 왜 헛짚어 갖꼬 뚜드러 팼겄냐. 패기를, 조사도 안해 보고.

여자가 그 마음에 한을 품으먼 오뉴월 염천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앙그리여? 그

거 다 헛소리 아니라고오. 내 가심에 원한 맺힌 것 하늘이 아셧지맹. 그렁게 니

가 강실이란년한테 장개를 갈 때 가드라도 나를 살살 달개감서 가랑게. 그년한

테 미쳐서 눈에 뵈능 거이 없드니 자알 했다. 자알 했어.

그뿐인가.

까마구 날자 배 떨어진다등만, 사나놈은 디지게 맞어 뚜드려 터지고, 지집년은

넝쿨째로 굴러 들으와 내 손아구에 콱 잽혔으니 이게 웬일이여, 긍게로. 뒷골 여

시가 나를 돌아봉가아 어쩡가. 왜 그러잖이여? 무슨 일을 허자먼, 뒷골 여시가

돌아바도 돌아바야 그 음덕에 성사가 된다고. 내가 이런 날이 오기를 빌었제. 이

연놈을 숨도 못 쉬게 오그려서 내 물팍 아래다 꽉 눌러 놓고, 나도 내 세상 좀

한 번 살어 봐야겄다. 절대로 기양은 안 죽어, 아 참새도 죽을 때는 짹 허고 죽

는다는디, 내가 되야 가지고, 시르르 맹색 없이 눈물바람이나 험서 물러날 것 같

으냐? 어림없다.

강실이란 년 죽고 사는 것은 인자부텀 내 손에 달렸제. 흥, 내가 너를 살려 주

마, 목숨을 붙여 주제. 느그 둘어서 살게도 해 주고, 니가 머 이뻐서도 아니고

멋도 아니고, 너 있어야 저 멀대 같은 사나가 여그 있을 거이기에 그러능 거여.

아이고, 속 터져.

그러나 어떻게 만세상 사람들한테 춘복이와 자신이 강실이보다 먼더 만난 음

양이요, 하늘이 아는 내외간이며, 자신이 큰마누라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리느냐

가 문제였다. 아차 때를 놓쳐 버리면 그야말로, 벼락맞을 반상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처녀 총각이 어우러지는 마당에 자기 같은 헌계집 처지로 어디다 감히 혀

끝 한 번 내밀 수가 있겠는가. 안될 일이었다.

강실이가 춘복이의 머리 속에만 들어 있을 때하고, 실제로 이렇게 옹구네 집

의 방에다 눕혀 놓은 것하고는 천양지판 상황이 달랐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기가 도무지 쉽지 않아서, 논바닥 갈라지는 가뭄에 가슴

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던 옹구네는, 그만 뜻밖에도 쏟아지는 빗속에 천둥을 빌리

어 뱃속이 터져 나가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쾌재.

춘복이는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도 제 힘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온 몸뚱이 터지지 않은 곳 없도록 두들겨 맞은 피투성이가 되어. 장독이

무섭게 올라 가지고 신음하면서. 그는 농막에 버려진 것이다. 아니, 통째로 옹구

네 앞에 던져진 것이다.

됐다.

차지하자.

이제 너는 내 것이다.

옹구네는 입안에 신물같이 고이는 회심의 미소를 남모르게 삼키며 농막으로

보란 듯이 치고 들어가, 춘복이를 독차지하고, 공배네는 얼씬도 못하게 하면서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살려 주겄다.

지극정성으로 귀신도 감복을 허게끔 돌보고 살펴서, 온전히 다 낫드락끄장. 아

무 손도 못 대게 허고 오직이 내가 너를 살려내야제. 고생이 되먼 될수락 좋겄

지. 그러먼 니 빚이 더 무거질 팅게로, 무거지고 무거져서 천산같이 무거우먼 그

것을 지고는 니가 어디로도 못 갈 거이다.

니가 지대로 일어나고 걸어댕길 때끄장 불 때 주고, 밥 해 주고, 피ㄸ어 주고,

똥오짐도 다 내가 받어내 주고 헐 거이다. 부모도 형제 동기도 마느래도 허기

쉽잖은 일, 내가 다 허고말고.

언제 어느 때 누가 와서 방문을 벌컥 열어 불지라도, 아니면 등잔 불빛 배어

나는 지게문에 비치는 그림자만 바라볼지라도, 옹구네의 지성스러움에 탄복하고

놀라서 감히 무어라 딴 말 붙이지 못하도록, 남에게 비칠 저를 생각하며, 그네는

온밤 내내 잠도 안 자고 앉아서 꼬빡 새웠던 것이다.

"아이, 옹구야. 늑 어매 도망가 부렀냐? 너 밥도 안 주고?"

공배네는 새벽부터 해나절이 다 갈 무렵까지 옹구네를 기다리다가 입술이 다

바터서, 실없이 옹구를 붙들고 한 소리 한다.

"가서 찾어와, 참말로 이러다가 어매 잃어 부릴라."

은근히 그가 농막 쪽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공배네는 옹구를 부추긴다. 그러나

옹구는 시무룩해서 들은 척도 안허고 발부리로 고샅의 돌맹이를 톡톡 건드리며

차기만 할 뿐이다.

"인자 내가 장사 한 바꾸 돌고 요담 날짜에 꼭 와서 작은아씨를 뫼시고 갈 거

잉게. 그때끄장만 여그다 뫼세 두시요잉. 이게 쥐도 새도 몰라야 헐 일인디, 일

이 참말로 굉괴시럽게 되야 부렀네요. 어쩌야여 긍게로."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심으로부터 발을 동동 구르는 기색이 역력

하던 황아장수는 종종걸음으로 오늘 새벽 날이 밝기도 훨씬 전에 거멍굴을 빠져

나갔고, 옹구네 집에는 기진을 한 강실이만 백지처럼 혼자 누워 있는데, 놀란 공

배네가 발바닥이 질척해지도록 서성거리며 마당에서 고샅으로, 고샅에서 우물가

로, 우물가에서 농막 쪽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옹구네

는 지금 이렇게 한밤중이 겹도록 도무지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공배네는 더 못 참고 안 떨어지는 걸음을 쩌억 쩌억 떼어 놓으며 농막으

로 무겁게 걸어간다.

"성님 외겨?"

아니나 다를까.

어젯밤보다 훨씬 더 당당해진 옹구네가 미영걸레를 옹배기에 담아 들고 막 방

문을 나서려다가 마침 문짝을 열어젖히는 공배네를 맞이한다.

"자네 나허고 이애기 좀 허세."

"들으가기여. 못 올 디 외겼소? 머 새삼스럽게 내외허니라고오?"

공배네는 이기가 찬다.

이건 납작없이 덜미를 뒤잡힌 꼴이다.

"아이 옹구네. 이리 좀 들와 바. 그거 거그다 놓고."

공배네와 엇비켜 토방으로 내려서는 옹구네 뒤꼭지에 대고 공배네가 기세를

세우려고 목청을 돋우며 잡아채듯 말한다.

"아 진물이 자꼬자꼬 나서 ㄸ아도 소용이 없네요잉. 저러다 덧나먼 어쩌까아.

가만 있어 바. 이거 얼릉 후딱 빨어 갖꼬요. 시방 걸레를 하도 여러 개 베레 놔

서 이거 안 빨먼 하나도 없어어. 그렁게로."

"이리 들와 보랑게 그러네? 사람 말이 말 같잖헝가? 헐 말이 있단 말이여."

"누구 숨넘어가요? 왜 그리여? 성님이나 나는 손구락 한나 안 다쳐서 뽈랑거

리고 돌아댕기지만, 저 사람은 시방 내가 안 받어 주먼 지 똥오짐도 맘대로 못

히여. 조께 지달르시오. 내 이거 시암에 가서 빨어 와양게. 집에 머 바쁜 일 있

으먼 갔다가 니얄 오시등가."

옹구네는 탁, 소리가 나게 발을 구르며 동네 새암으로 나가고, 공배네는 뒤쫓

아가 그네의 머리끄뎅이를 잡아채고 싶은 두 손의 손톱들을 손바닥이 패이게 그

러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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