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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권 (11)

카지모도 2025. 2. 2.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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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 마음이 등불을 밝힌 것처럼 화안해지는 것이 좋아서 그네는 웃는다. 그리고

옹구네가 끝내 오갈이 안 풀려 더 길게 따라나올 생각도 못하고 우물우물 물러서던 모습

이 우스워진다.

공배네와 옹구네가 강호를 배웅하고자 나가고 혼자 누운 춘복이는 (사리반서방님이셌

구나.)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이었다.

그리고 처음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기척에서부터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떠올렸다.

(인력거를 끌고 빈 병을 팔어서 마련헌 고학 학비...) 제 손을 쥐고 있던 강호의 손 감

촉이 아직 그대로 남은 것 같은 봉투를 가만히 쥐어 본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정작 쥐어

지지는 않는다.

아앗따아, 방안에서 향내가 진동을 허네 기양.

덜크덕, 지게문을 열고 들어오는 옹구네가 비아냥인지 진정인지 새된 소리를 냈다.

원, 나 대그빡 털 나고 오늘맹인 날은 첨 보겠네. 하이고 그렁게 시상이 딜러지기는 달

러졌능갑서어. 이게 어디 옛날 같으먼 언감생심 생각이나 헐 수 잇는 일이여? 끄집어가

뚜드러 팬 죄인네 집이까지 와서 돈이랑 따악 놓고 가고. 나 이거 어디 가서 말해도 허능

거잉가 아닝가아.

건성으로 주섬주섬 옹배기와 걸레들을 치우는 척하던 옹구네 손이 춘복이 손에 들린 봉

투를 홱, 나꾸어챈다.

이 돈 내가 갖고 있으께. 내일 날새먼 바로 고리배미 비오리네 가서 광생당 진의원 약

좀 지어 오게. 거그다 부탁허먼 바로 연락이 와야제.

(저런 빌어먹을 노무 예펜네.)

갑자기 손바닥이 허전해진 춘복이가 마음까지 무엇을 빼앗긴 사람처럼 허퉁해져진다.

손가락을 꼼질거려 본다.

그러나 그 역시 마음뿐이다.

자개 오늘 아조 정승판서 부럽잖은 호강했네이? 터억 드러누워서 매안이 서방님 문병

받고 부조 받고. 위문 듣고. 사리반서방님이 인물은 인물이여. 매안이 자제 중에 기중 낫

제머.

그랬다가 샐쭉해진다.

아까 그 앞에서 보란 듯이 가시버시 노릇을 했더라면 좀 나았을 것인데. 그 노릇을 제

대로 해 보였으면 나중에 그처럼 강호가

약 짓거든 잘 좀 달여 먹이시오.

하고 공배네한테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까짓 말에 괘념할 옹구네가 아니었다.

약수발 누가 했능가 사리반서방님이 조사를 나오실 것도 아니고, 내가 또 수발을 넘한

테 맡길 사람도 아니고잉.

춘복이 손에서 걷은 봉투를 제 저고리 앞섶 밑 젖퉁이를 헤치고, 꾀죄죄한 치마말기 사

이에 꽂는데 공배네가 들어왔다.

배웅 잘 해 디맀소?

옹구네가 천연스럽게 묻는다.

잔뜩 마음이 상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양양해져서 들어온 공배네는, 희색이 만면한

옹구네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춘행이 이도령 작별허디끼 오리정끄장 갔다 외겼어? 자네 먼 존 일 있능가?

아 그 잠깐 새 존 일이 있으먼 머이 얼매나 그렇게 존 일이 많겄소? 여그 나랑 내나 같

이 있어 놓고는, 무신 봉창 뚫는 소리를 히여?

근디 왜 그렇게 자네가 짓이 났디야? 시방.

사리반서방님 말씀허싱 거 헛들었그만잉. 아까 안 그러십디여? 눈을 딱 뜨고 삼라만

상 산천초목을 보먼, 우선을 내가 그것을 보는 거이지만, 꺼꿀로, 그것들이 내 눈으로 들

으와서 내 속에 찬다고. 그래서 내 꺼이 된다고. 내가 기양 향내 나는 양반을 그렇게 바

짝 한 방으서 뵈입고 낭게로, 눈이 다 환허고 내 가슴이 화안허게 차서 그렁게비요.

저런 사램이 어뜨케 법사가 못 되얐능가 몰라.

공배네는 더 말을 이어 봐야 득볼 것이 없을 터여서 얼른 춘복이 손바닥에 눈길을 떨어

뜨린다. 봉투를 찾는 것이다. 없다.

돈 어디 갔어?

공배네가 까뀌눈으로 옹구네를 노려본다.

무신 돈?

아까 서방님이 주고 가신 돈 말이여.

그걸 성님이 왜 찾소?

머이라고?

저 사람 약값 부조를 성님이 왜 찾냐고요.

아니 이 예펜네가 참말로.

저 사람 약값잉게 저 사람이 안 챙겠겄소? 넘들이 왜 나서서 눈구녁 삐이래 갖꼬 돈을

찾어? 멋 헐라고.

말 다 했당가 시방?

다 안했지만 더허먼 멋 나오요?

니가 감췄제?

공배네가 얼굴이 빨갛게 부풀며 옹구네 콧배기 밑에다 턱을 들이민다. 옹구네는 손으로

가볍게 그 턱을 밀어 버린다.

어따 대고 너짜 붙여어?

그러먼 내놔.

멀 내놔?

도온.

돈?

돈 말이여. 춘복이 약값. 여그, 여그 뇌였던 봉투 내노라고오.

그걸 왜 나한테서 찾소?

이 방안에 너밖이 없었는디 봉투가 온디간디 없이 없어졌잉게 니 소행 아니겄어? 나밖

이 없다니. 저 사람이 송장이요?

이년아. 저 사람이 시방 사람이냐? 숨만 붙어 있제, 눈구녁도 못 뜨는 반송장 아니냐?

응? 아, 천하에 눈구녁맹이로 뜨기 쉬운 것도 저렇게 못 뜨고 자빠져서 꿍꿍 앓고 있는

춘복이가 무신 돈을 어따가 어뜨게 치워 놨겄냐. 심봉사 등쳐 먹은 년에 뺑덕이네가 있다

드니, 니가 꼭 그짝 났구나잉? 저렇게 되야 부린 사람 약값을 다 훔치다니. 그 손목떼기

가 온전헐 성싶으냐? 잉? 콱 썩어 불제. 그게 어뜬 돈이라고. 누가 주신 어뜬 돈이라고

니 년이.

공배네 숨이 넘어간다.

이보시오 성님. 말 좀 물어 봅시다 예.

아이고오오. 저 능청. 저 구렝이. 천 년 묵은 백여수 뱃속에 구렝이가 열두 마리 들앉

었는 년이 바로 너여. 그래. 물어 바라, 물어 바. 머? 멀 물어 본당 거이여? 어디 까락까

락 물어 바아.

성님이 누구시요?

머?

저 사람한테 누구시냐고.

공배네는 억장이 무너져 터진다.

그것을 어떻게 말하란 말이냐. 말하지 않아도 춘복이가 알고, 내가 알고, 온 거멍굴이

다 알며, 옹구네 역시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저 사람 낳았소? 성님이 성님 배 아퍼서 낳았냐고요.

옹구네 낯빛은 차악 가라앉아 찰진 빛을 띄운다.

반대로 공배네는 울그락불그락 술 너무 갑자기 많이 마신 사람 얼굴에 홍반 돋듯이 얼

룩덜룩해진다. 숨이 깔딱 넘어갈 것만 같다. 좀체 이렇게까지는 흥분하지 않는 공배네인

데, 오늘을 쌓이고 쌓인 것이 한꺼번에 터져 걷잡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저 사람하고 몸 섞어서, 가시버시요

퉤에액. 예라이 더러운 년.

공배네는 정말 끓어 오르는 대로 가래를 공구네 낯바닥에 뱉어 주고 싶은 것을 가까스

로 참는다. 어찌 되었던 춘복이 소행이 있으니 저년이 저렇게 말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침을 뱉는 일만은 춘복이를 생각해서 참아야 했다.

머리 끄뎅이를 쥐어뜯으면 뜯었지.

그러먼 피도 살도 안 섞인 성님이 가찹소오, 살 섞은 내가 가찹소?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은 성님도 아시겄지이. 성님이 하도 못 알어들으싱게 내가 이렇게 세 살 먹은 애들힌테

맹이로 일러디리는 거이여어. 인자부텀은 당최 이런 일 갖꼬 왈가왈부 말으시요. 내 한

번 말했잉게로 잉? 딛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는디 내가 자꼬 같은 말을 허먼, 듣는

성님이 좋겄소오. 허는 내가 재밌겄소? 인자 서로 알 만치 다 알었응게 알은 만큼 대접해

줌서 삽시다.

서방님이 너한테 수발을 시기시디야아, 나한테 시기시디야? 그게 벨거 아닝 것 같어도

분명히 짚어얄 거인디, 어디 말해 봐.

아 누구라고 딱 집어서 말씀 허시든 안했지요.

나를 보고 말씀을 허셌잖이여? 나를 보고.

설령 성님보고 했다 치드라도 약 짓거든 잘 댈에 멕이라고 그랬제. 머 돈 집어드는 것

부텀 약 지어 오능 것끄장 어쩌라고 저쩌라고 일일이 말씀 허싱 것은 아니잖에요? 솔직히.

옹구네가 암팡지게 쏘아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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