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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권 (10)

카지모도 2025. 2. 1.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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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야. 절대로 니가 돌아와서는 안되야.

춘복이는 감은 눈을 꺼풀 속에서 부릎뜨며 주먹을 부르쥔다.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해. 눈 좀 떠 보아. 억지로라도. 눈뜰 기운만 돌아오면 다른

것도 따라서 회복이 되지. 점차. 눈뜨는 기운이 첫째야. 그러니 몸에 힘을 눈에다 모으고

눈을 떠.

강호는 춘복이 손을 붙들고 지성껏 이야기한다.

(누구시요...?)

아플 때일수록 눈을 뜨고 있어야 해. 눈을 감어 버리면 더 까라지고 기운이 없어서 못

써. 아무것도 안 보이면 회복이 더디어. 눈을 뜨면 내가 무얼 보는 것 아닌가? 해도 보

고, 달도 보고, 별도 보고, 삼라만상, 산천초목, 들짐승, 날짐승 다 보잖는가? 그런데 눈

을 뜨면 그 순간, 내가 무얼 보는 순간, 이번에는 또 그 온갖 것들이 거꾸로 내 눈 속으

로 생생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야. 한세상이. 살어서. 생기운 펄펄 넘치게.

(누구시까아...)

그러니 눈을 떠. 눈을 뜨고, 보아. 눈감고 있으며, 생기운은 못 들어오게 닫어 버리고

아픈 기운만 종횡무진 몸 속에서 치닫게 하는 것이니. 살려거든 꼭 눈을 떠. 알었지?

아이고, 까깝해라. 누구냐고 물어 볼 수가 있어야 누군지를 알제.

강모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나,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매안의 자제들은

이상하게도 언어 음색들이 얼핏얼핏 비슷하여, 이인가 하면 저이인 경우가 더러 가다 있

지만, 그것은 아마 그들과 춘복이가 한자리에서 긴 이야기를 해 본 일 없고, 또한 그 자

제들이 노상에서 객담하고 떠드는 일이 없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춘복이가 노상 매안에

가서 엎드려 산다 해도 주로 놉일 하는 거친 자리가 대부분인 터라.

하지만 어쨌든 춘복이로서는 매안에서 이렇게 자기를 찾아와 준 것이 너무나 뜻밖이었

다.

처음 방문이 열리며 서방님이 오셨다는 옹구네 말을 들었을 때는, 덜컥, 아직 덜 맞은

매가 남었능게비다, 싶었다.

(아조 쥑여라, 쥑여. 이께잇 거 내가 아까울 거 머 있냐. 여지도 없이 쥑여 부러. 냉게

놓고 찔끔찔끔 소일 삼어 패지 말고.)

아예 자포자기의 양심까지 생겼었다.

그러다가 오기 분통이 받쳤다.

(왜, 사화허로 오셌소? 병 주고 약 주네.)

흥. 누가 사화를 해 주어? 어림없다. 내가 죽기를 한사코 원한갈먼 느그 문중에다 내가

못헐 일도 없는 놈이여. 느그만 덕석 있고, 느그만 몽뎅이 있고, 느그만 패는 놈 있는지

아냐? 느그가 양반 무선지만 알고 상놈 무선지를 모르능게빈디, 내가 상놈 무선 본때를

뵈어 주마. 꾀벗고 달라들어 맞붙기로 허먼, 느그는 잃을 것 많어서 무섭겄지만, 나는 잃

을 것 없어서 무설 것도 없는 놈이여.

눈감고 널부러진 중에도 춘복이는 여차하면 끌어다 댈 강실이를 머리 속에 볼모로 틀어

쥔 채, 자기를 찾아온 사람한테 빈틈을 안 주려고 칼을 세웠다.

그러다가 순간, 강모인가 싶어서 전신의 갈기가 곤두섰다.

그런데 지금은,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이 궁금하였다.

내가 별다른 것은 못해 주고, 여기 돈을 약간 놓고 갈 터이니 장독 풀리는 약이나 한

첩 써 보게. 아주 약소하네만, 거저 생긴 돈도 아니고 부모한테 탄 것도 아니야. 내가 낯

선 땅 남의 나라에서 인력거 끌고 빈 병 팔아 고학하며 아깝게 모은 학비야. 내가 왜 이

런 말까지 다 하는고 하니, 우리가 서로 나눠 씀직한 돈이란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 그

러니 다른 데 쓰지 말고 꼭 약을 지어 먹어.

강호는 교복 윗저고리 단추를 풀더니 안주머니에서 누런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춘복이

손에다 제 손 대신 그 봉투를 쥐어 준다.

약 짓거든 잘 좀 달여 먹이시오.

강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공배네한테 이른다. 강호로서야 옹구네 내막을 알 리도 없거

니와, 춘복이 걷어 기른 사람이 공배 내외인 것은 매안에서도 다 아는 일인지라 당연히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공배네는 아까부터 목이 메어 울먹이느라고 감사하다는 말씀도 무엇도, 다 명

치에 얹혀서 아무 대꾸도 못하고 말았다.

춘복이 손을 잡고 지성으로 말을 이르는 모습이며, 돈을 꺼내어 쥐어 주던 것, 옹구네

를 젖히고 자기한테 약수발을 명하던 것들이 자꾸만 눈물겨워 공배네는 (아아, 양반은

다르시다.)

느껍게 이 말만을 삼키었다.

강호가 춘복이를 대하고 있는 동안, 그 낯뻔뻔한 옹구네마저 단 한 마디 말은커녕 침조

차 제대로 못 삼키게 오갈이 들어, 구석지 한쪽에 숨죽이고 앉아 있게 하는 그 위엄과 기

품, 그리고 이토록 사람을 눈물나게 하는 온화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이 아

직 젊고 적은데.

공배네는 강호를 배웅하러 나서면서도 그 생각만 하였다.

아까 그렇게나 부글거리던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라앉아 그네는 이대로 어디만큼까지

라도 강호를 따라 가고 자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나이로야 춘복이보다도 아래인데, 이 늙은 사람이 물색 없이, 그 깃에 기대어 의지하고

싶어지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아까 물을 때 봐 두었으니 이 길은 혼자 갈 수 있겠소. 아픈 사람 있는데 들어가

보아.

강호의 말에 공배네가 펀득 정신이 나서 묻는다.

어디 들렀다 가실랑가요?

응.

지가 뫼시고 가지요. 이게 널룹도 안헌 질이 기양 움푹짐푹 해 갖꼬요, 첨 가시는디 무

단히 발이라도 삐시먼 안되야요.

공배네는 그가 지금 만동이와 백단이를 찾아서 당골네 집으로 가려 하는 것을 알고는

눈치 빠르게 앞장을 섰다.

아이고오, 등이라고 있었으먼 참말로 좋았을 것을.

그것을 공배네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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