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약조가 무슨 소용있을까 싶게 분명한 부모 자식 정리를, 그 오랜 세월 동안 의심
없이 품어 안고 나누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나는 저 사람허고 몸 섞어서, 가시버시요.
뻔뻔스러운 낯바닥을 반짝 치켜들고 혹자 박힌 주둥이 야불야불 지껄일 때, 내 어찌
그 년의 주둥팽이를 번개같이 후려쳐 납작하게 못 만들었을까. 다시는 입 뻥긋도 할 수
없게 짝짝 찢어서 뭉개 놓았대도 시원치 않을 것을. 엉겁결에 다그치는 대로 밀려
당하고 만 제 꼴이 생각사록 분통 터져 공배네는 아까부터 공배한테 원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지 속으로 난 자식도 품안으 자식이라고들 않등가아? 하물며 덜썩 큰 넘으 자식,
저 혼자 큰지 알고 지 멋대로 지집 붙응걸 인자 와서 어쩌자능 거이여어, 내비두어야
제.
그 속도 온전할 리는 없겠지만 공배는 맞장구치다가 불 일어날 것이 눈에 보여 짐짓 혼
연한 척한다.
아니, 가가 왜 넘의 자식이여? 내가 가를 어뜨케 키웠다고.
공배네가 검붉게 충혈된 눈을 까뀌같이 치뜬다.
흘러간 공은 돌아보들 말어. 배추 벌거지가 배추 속잎 다 뜯어먹고 크지만, 지 날개
돋으먼 두 번도 더 안 망설이고 후루루 날러가 불잖이여? 나비 되야 가부리능 걸
배추가 어쩌겄능가. 손이 있으니 붙잡을 수가 있어어, 발이 있으니 쫓아갈 수가 있
어? 헐 수 없제. 그저 구녁 숭숭 뚫린 잎사구나 너실거림서 시름을 달래고. 원망을 말
어야여.
마음이 스리고 중치가 상하는 것을 겨우 누그리며 아낙을 달래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
이 공배는 에에잇. 하더니 땟국 절은 나무재떨이에 곰방대를 두드린다.
머? 피도 살도 안 섞인 성님이 가찹소오, 살 섞은 내가 가찹소? 하이고, 야 야. 던지
럽고 추접시러서 나같은 사람은 차마 그 말 입에 담도 못허겄다. 어쩌다 걸려도 똑
그렇게 걸렸능고. 부모 복 없는 놈이 지집 복도 지지리도 없어 갖꼬오. 그년이 나보
고 안 그러요? 부부는 일심동체란 말 성님도 아시겄지이? 내비두랑게 그러네이.
그년이 눈꾸녁 값 허니라고 인자 춘복이 꼭 잡어먹고 말거이여. 그게 비얌눈 아니
요? 거그다가 막 울고 난 것맹이로 물끼가 번들번들. 춘복이란 놈은 황소 두께비 상호
라 그년 앞에서는 옴짝도 달싹도 못허고 오금 붙어, 날 잡어 잡수우.
허, 거 참. 그렇게 되라고 비능가? 말이 씨 된당만 기양.
씨 안되먼? 일은 이미 글렀소. 그노무 씨가시(씨앗)는 싹이 터서 노오랗게 꼬실라지
는 판이라고요. 시방.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춘복이를 양자로 들인다는 문서라도 한 장 만들어 둘 것을.
정이면 되었지 상놈의 처지에 읽지도 못한 문서는 받아다 무엇에 쓰랴. 물려줄 성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비 전답 재산이 있는 것도 안닌 바에. 그저 서로 오며가며 한평
생 오순도순 밥 먹었냐 잘 잤느냐 따숩게 또닥이면, 부모 없고 자식 없는 설움 덜고
의지하며 그에서 더 바랄 나위가 없겠길래. 문서같이 겁나고 거창한 것은 아예 꾸밀
생각조차 못했었다. 또한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어느 하루 혼자 남아 천
애고아 되어 버린 춘복이를 거두면서, 어매. 아배로 부르라 시키지도 않았다.
어거지로 묶어 매어 무릎 아래 잡아 두지도 않았다.
울안에 핀 풀꽃이 이름 없다고 남의 꽃이랴. 순리따라 자연이 된 관계는, 설명하지
않아도 어느덧 세상이 다 아는 풍경으로 어우러 졌는데.
그렁 거이 그게 잘못이였등게비여. 사람들 맴이 어디 모도 내 맘 같어야제? 내가 그
놈 멕이고 입히고 코 떼어 줄 때는, 뒷공 바래는 맘 눈꼽재기만치도 없었지만, 정 하
나 묻어 두고 그렇게나 좋등마는.
묻는다고 다 낭구 나능 거이 아닝게비지 머.
내가 무신 천도복송이 열리기를 빌었소?
개살구사 달리든 뿌랭이가 썩든, 탓을 허지 말어. 팔짜 소관잉게.
궁글어 온 독이 백힌 독 뽑아 낸다드니 똑 그 짝 났그만. 아조, 죽쒀서 개 준 꼴이
되야 부렀어. 아이고, 그만도 못허제이. 개는 원 나중에 복날 잡아먹기라도 허고, 심
심풀이 푸접으로 데꼬나 놀제. 개만도 못헌 년.
공배네는 어떻게 짓씹어도 씹히지 않는 옹구네 소행머리와 말뽄새 때문에 열이 받쳐 벌
컥벌컥 자리끼를 들이켠다. 이빨 빠진 사기 대접을 밀어 놓는 그네의 속이 이번에 후들
후들 한속 든 것처럼 떨린다.
지년이 무신 염치로 나한테, 니 배 아퍼서 저 사람 났느냐고 물어? 묻기를. 나는 아
들 낳아 봤다아, 그 겅가? 오살할 년. 그말 헐 직에 아조 배야지를 따악 내밀고는 배장
군 시늉을 험서, 유세허는 꼬라지라니. 참, 볼 것을 보제 못 보겄등만.
그것이 공배네는 서러웠다.
어쩌다가 금쪽 같은 내 자식을 어려서 죽이고는, 눈먼 딸년 하나도 더 못 낳아 본 갈
치 배 납작한 평생이 안그래도 골수에 사무치는데, 속지르기로 작정하고 내리꽂아
쏘아댄 것이 분명한 옹구네 말에 밑창부터 뒤집혀 버렸던 것이다. 마치, 커다란 항아
리에 흙탕물을 담아 두면 찌꺼기가 아래로 가라앉아 윗물이 우선 말갛게 보이나, 지
푸라기 한낱만 슬쩍 집어넣어 콕콕 쑤셔도 그만 순식간에 다시금 모조리 흙탕물이
되고 마는 것처럼, 공배네는 자식 잃은 아낙의 설움이 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다가,
별것 아닌 덧거리 말에도 남모르게 속이 뒤집히곤 하였는데, 무던한 성품에 좀체 내
색을 안하니 곁엣 사람은 얼핏 눈치를 채지 못하고 넘어가기 쉬웠던 것뿐이다.
그래도 나한테는 우리 춘복이가 있잉게. 머 꼭 지 뱃속으로 나야만 자식이간디? 외
나 부모 자식 정리는 낳은 정보돔 키운 정이 더 크다고 않등게비. 옛날보톰도.
공배네는 나이 들어 구부정한 무릎이 텅 빈 공배를 보기가 몹시 민망하고 면구스러
울 때도, 혼자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랬던 것을, 옹구네는 정통으로 도끼날 내리쳐, 여지 사정도 없이 공배네 가슴을 장작
패듯 빡 쪼개서 흙탕물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항아리 바닥까지 박살을 내버린 셈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깨지고, 쏟아지고, 허사가 되면서 그 그릇 깨진 조각들은 날카로운
이빨을 단도같이 세운다. 공배네는 제 가슴 깨진 조각날에 살이 베이어 아픔을 못 견디고
깍지 낀 팔을 부둥켜 안는다.
그런 아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배는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근디 거, 오루꿀댁 작은아씨가 몸 가지셌다능거이 대관절 무신 소리여? 나 암만 생각해
도 이게.
옹구네가 춘복이를 독차지하고 주무르는 것이며, 사리반서방님이 주신 돈, 약값을 가로
챘다든가 하는 것 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엄청난 사건이라, 공배는 오히려 지금 공배네가
분을 못이겨 길길이 뛰는 것보다 더 큰 걱정이 되는 일이었다.
참말이까, 그게?
공배 말에 공배네가 딴 정신이 든 사람처럼 얼른 대꾸한다.
아 그렇대요, 긍게. 그년이 그러대.
먼 그런 일이 있이까잉.
긍게 내가 자다가도 인나 앉겄다고 안 그럽디여? 천지가 개빅을 헐일이제 이런 사람
궁리로 어디 짚어 져?
아이고오. 무서라.
공배의 얼굴에 두려움이 낀다.
근디 누구 애기란 거이여?
그 말은 안 허대애.
그리여잉.
공배가 고개를 주억인다.
항아장시가 언지 온댔다고?
말로는, 늘 오는 때 가늠해서 뫼시러 오마고 허등마는.
하루 이틀 개법게 댕게오실 행장이 아니드람서? 보따리도 묵직허고.
보따리도?
아, 안 그랬어? 작은아씨 짐이 예사시럽지가 않더라고. 항아장시 둥덩산 봇짐보돔
더 크먼 컸제 작든 않겄드람서 왜. 암만 비접을 가신다고는 허드라도 쉽게 못 오실랑
가, 보 따리가 벨라 크고 무거 뵈드라더니. 그 보따리 봉게로 옹구네란 년 말이 맞기는
맞등갑드람서어? 그리여. 맞어. 그랬었다.
그 쪽제비 같은 년이 여시맹이로 그걸 알어보고는 날강도짓을 또 헝거로이구나. 내 고
에! 이게 다 이년 이 뀌미고 지어낸 일이그만.
공배네는 정신이 펀뜻 들었다.
틀림없이 옹구네가 그 짐보따리를 가로채려고 그렇게 있는 말 없는 말 지어 내어 못들을
소리 엮어대며, 저희 집에다 강실이를 잡아 가둔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네는
벌떡 일어선다.
어디 가?
내가 그 생각을 못했어.
어디 가냥게, 또?
공배는 아낙이 다시 옹구네한테 따지러 농막으로 쫓아 올라가려는 줄 알고 반무릎을
세워 주저앉힐 태세를 하며 채묻는다.
작은아씨를 이리 뫼시고 올라고.
머이여?
생각해 봇시요. 괭이한테 생선을 맡긴 꼴이제, 거가 어디라고 작은아씨가 지신단 말
이 요? 잠시 잠깐이라도. 어림없제, 나중에 내가 삼수갑산을 갈망정 이대로는 안되겄
소. 얼릉 서둘러야제. 아이고.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8권 (40) (0) | 2025.03.11 |
---|---|
혼불 8권 (39) (0) | 2025.03.09 |
혼불 8권 (37) (0) | 2025.03.07 |
혼불 8권 (36) (0) | 2025.03.06 |
혼불 8권 (35) (0) | 2025.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