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사천왕천보다 높은 하늘인 도리천의 임금이신 제석천왕도, 아수라같
이 못된 놈한테는 할 수 없이 당하십니까?"
"아, 아수라란 놈은 아예 높고 낮은 것이 없이 무조건 상대가 보이면 대가
리 디밀고 덤벼들어 싸움을 거는 나쁜 귀신 아닌가요."
"그 정도 망나니라면 차라리 귀엽다고 해야 할지."
"글쎄올시다. 허허, 또 한편 이 여의주는 중생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는
부처님의 공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의. 뜻과 같으니, 네 마음 먹은 그대로 모두 이루어지이다.
황홀한 축수가 아닌가.
강호는 용의 혓바닥 같은 여의주 불꽃을 올려다본다.
이 여의는 그대의 여의가 아니라, 나의 여의로다.
사천왕의 불타는 여의주 잉걸은 뜨거운 화염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용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을 좀 보십시오."
"놀랍군요."
남방천왕의 오른손으로 그 목을 숨이 막히게 틀어잡은 용은, 황금빛 몸통
에 붉은 비늘이 찬란한 용왕이었다.
등줄기에는 광채 나는 푸른 남빛 줄이 들어 상서로움이 더하고, 이마위 정
수리에 돋은 뿔과 옥색 눈썹, 검푸른 턱밑 터럭, 그리고 고사리의 회오리
같은 붉은 수염들이 너무나 극사실이어서 강호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포효하듯이 혹은 비명을 지르듯이 커다랗게 벌린 주홍색 입 속에 돋아난
송곳 이빨들이며, 저 피가 돌아 감촉이 느껴지게 생생한 혓바닥의 괴로운
뒤틀림.
용왕은 온몸의 힘을 목에 모으고 숨이 눌리지 않으려 모가지를 곧추 뻗쳐
세우는데, 사천왕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간 몸통은 팔목을 감고 용트림하며
팔뚝 갑옷을 몸부림으로 휘감는다. 그러나 그 꼬리는 순종을 뜻하는 것일
까. 동그랗게 제 몸에 감아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 자태는 거의 교태스럽
기까지 하였다.
머리에는 뿔이 있고 몸통은 거대한 구렁이와 같으나 네 다리에 날카로운
발톱이 있는 용은,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지상의 연못 속에
잠기면서 천변만화, 온갖 조화를 다 부리어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으되.
남방증장천왕 손아귀는 그 신비롭고도 경외로운 용의 왕을 지렁이 한 마리
처럼 움켜쥐고 부리면서 마음껏 다스리니.
천왕의 강강하옴이 오죽하시리오.
용이 싯벌건 입을 단말마처럼 소리 죽여 벌린 옆에, 서방천왕이
"아아."
저 깊은 창자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함 호령을 토하고 있다.
서방천왕의 이마에 나무뿌리처럼 솟구쳐 뻗친 힘줄이 그의 괴력을 느끼게
하는데, 짙고 검은 눈썹은 바람을 받은 갈기처럼 곤두섰고, 두눈의 꼬리는
눈썹을 따라 관자놀이까지 찢겨 올라갔으며, 수염 또한 터럭끝이 모두 소
리를 일으키게 뻗치었다. 선지같이 붉은 입을 목젖과 혓바닥이 그대로 보
이도록 크게 벌린 서방천왕의 흰 이빨은 쪼롱쪼롱 우아랫니가 다 드러나와
눈이 부시다.
"저 오른손에 잡고 있는 깃대는 당이지요?"
주칠한 창대 끝에 나팔꽃이나 초롱꽃을 거꾸로 씌워 놓은 형국의 깃발이
미풍에 나부끼어 흔들리는 것을 보며, 강호가 복습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헌데, 실은 이름만 알고, 내용은 잘..."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이것은 불,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는 장엄
불구로서, 중생을 지휘하고 사악한 마군을 굴복시키는 깃발이지요. 옛날 고
구려와, 신라에서는 군사 조직의 기본 단위로 이 '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왕자가 전쟁에 출정하면서 그 위용을 나타내고 점령지를 널리 과시하여
알리기 위해, 군기로 쓴 것이 당이랍니다. 그런 연고로 볼 때,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불국 영토를 상징하는 징표, 혹은 선언으로 이 당을 세
웠다고 봐야겠지요."
"얼핏 투구 같기도 합니다. 깃발 모양이."
범련사 당의 위꼭지는 세 갈래가 뾰족하게 날카로운 은빛 삼지창이었다.
그리고 마치 꽃봉지를 사선으로 자른 것 같은 깃발의 겉자락은 다홍색이고
속빛은 연도가 선연하였다. 엉뚱하게 새각시 치마폭처럼 보이기도 하는 당
의 봉긋하고 풍요로운 깃발은 주름이 흐드러져, 정토에서 부는 바람을 받
으며 물결인 양 쏴아 한쪽으로 쏠리어 흐른다.
그런데 이것을 흙으로 빚었다니.
당은 사천왕보다도 키가 커 단청 올린 천왕문 천장을 찌르려 한다.
서방광목천왕이 왼손 손바닥을 공손히 펴서 다소곳이 받든 것은 보탑이었
다.
그는 푸른 난간에 심홍색 몸체를 한 오층 보탑을 하늘 높이 치켜올려, 천
왕이 지키는 이곳이 신령스러운 땅인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보탑
의 꼭대기에는 딸기같이 빨갛게 앙징스러운 연꽃이 봉오리로 맺혀 있어서,
그만 저절로 미소가 번지게 하였다.
이 모든 사천왕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하늘하늘하여 허공에 무지개 그림자
처럼 떠 있는 한 줄기 띠옷인 천의를 걸치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선녀옷이라고 해야 할 이 천상계의 옷자락은 바느질한 흔적이 없는
무봉의로서, 서리같이 하이얗게 곱기도 한 옷고름을 길게길게 풀어 놓아,
이 우락부락하고 거칠게 과장된 사천왕의 몸을 감싸서 휘날리게 하였다.
이 날개옷 천의도 사찰마다 방위마다 그 빛깔이며 모양이 서로 달라서 담
백한 연옥색, 혹은 녹색, 혹은 치자빛, 아니면 살구색, 또 진남색이거나 노
랑에 보라 남빛 섞인 것들이 형형색색 용솟음치면서 휘늘어지고, 늘어졌다
가는 치솟아 선계의 나부낌이 실로 신묘하다고, 도환은 말했다.
그것은 또 사천왕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어 숨는가 싶다가 어깨
위로 분수처럼 힘차게 뿜어져 올라가 날개가 돋친 것같이 보이기도 하였
다.
이 천의는 용의 꼬리라고 해야 할까, 파도의 물마루라고 해야 할까, 접히고
펼쳐지는 자락의 갈피마다 연꽃 무늬, 당초 무늬, 구름과 물결의 무늬가 스
며들었다가 피어나며 함께 치솟으니. 인간의 정성이 어쩌면 이에 이를 수
있으랴. 붓끝이 지나간 자국마다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드디어는 이 하늘
이 사천왕의 등뒤에 광배로 드리워진다.
이 날개옷 광배에서는 불꽃의 소용돌이가 일어 활활 진주홍 화염으로 타오
른다.
강용 무쌍한 사천왕의 몸을 감고 나부끼는 천의는 그지없는 모성으로 세상
을 쓰다듬는데, 그 천의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지엄한 불
꽃의 칼날, 성스러운 화염이 이글거린다.
"사천왕은 남성인가요, 여성인가요."
터무니없을는지도 모르나 문득 강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도환은 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보관을 좀 보시면..."
대답이 얻어질 것이란 말인가.
과연.
사천왕의 머리 위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땅히 장수 무장으로서 투구를 쓰고 있어야 할 머리에는 감히 상상 조차
도 할 수 없었던 보관이 씌어져 있었으니.
그 찬란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검은 머리를 쓸어 올려 조인 보관의 테는 적황색 금띠를 두른 흑록대였는
데, 거기 노란 꽃술에 남빛과 벽옥색, 빨강, 주황이 겹겹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꽃송이가 송이송이 붙어 있고. 그 위로는 푸른 꽃심에 흰 꽃잎,
붉은 꽃심에 푸른 꽃잎이 벙울벙울 만개했는가 하면 구름인가, 물결인가,
꽃순인가, 짙은 녹옥 바탕에 감고 풀며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문양들이 천
상 비경을 이루었으며, 수수십 꽃봉오리가 수줍은 듯 자지러지게 만개하여
향기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거기에 꽃분홍 모란이며 연분홍 부용과 연꽃봉
이 봉황새 날개를 받쳐 주니, 암수 짝의 날개를 천 년이나 만 년이나 날고
가게 펼치어 접을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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