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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권 (21)

카지모도 2025. 4. 28.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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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승이 보기에는 완주 송광사 사천왕이, 흙

으로 빚은 조선 사천왕 존상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으로서, 높이 십삼

척의 위용도 웅장하고, 그 큰 신체 각 부위 균형이며 전체 조화가 놀랍도

록 알맞게 어우러져 큰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굴의 표

정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조각되어, 깊이 패인 이마의 주름살에 미간의 찌

푸림, 우묵히 들어갔다 튀어나온 눈두덩, 그리고 눈자위와 눈밑의 굵은 주

름들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투박한 진흙을 주물러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

어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극채 찬란한 색깔들."

도환은 눈에 비치는 곡두 환영을 바라보듯 감개를 누르며 말했다.

"저는 이 완주 송광사 사천왕을 사천왕의 전형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현존

하는 소조 사천왕으로는 가장 오래된 존상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사천왕 중 북방을 제외한 동, 남, 서방 천왕은 모두 수염이 갈기

를 날리도록 뻗쳐올라가 있었다.

"북방천왕은 대체로 그렇게 콧수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늘어져 인자

한 성품을 나투시지요. 수염 하나로 그처럼 성품을 분별하여 그려내는 손

길을 저는 결코 무심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또한 잠시 이승에 머물

다 간 중생이었을, 어떤 장인 불자의 결곡한 기도와 염원이 사리로 맺힌

것이 바로 저 각처 사천왕의 몸 위에 남은 표정이요, 몸짓이요, 색채였으니

까요."

뼛속에 어린 구슬만이 사리이겠는가.

도환은 다시금 합장하였다.

"제가 본 사천왕 중에서 가장 슬픈 얼굴은 경기도 칠장사의 사천왕 존안이

었습니다."

"슬픈...얼굴이요?"

"참 이상하게도 한번 본 눈빛이 깊이 남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떠하셨길래..."

"곱슬을 나타내려 한 것이었을까. 사위 천왕 모두 부처님 머릿결 같은 나

발로 동글동글 감긴 수염과 눈썹을 하고 있었는데 북방위는 하얗게 고불고

불, 다른 존위는 벽옥...녹옥...남청색으로 푸르렀습니다. 헌데 정작 슬픈 것

은 그 눈빛이었지요. 그 눈은 참말 특별했습니다. 대개는 아무리 무섭게 부

리부리 부릅뜬 퉁방울눈이라 해도 흰자위에 검은 동자를 한 것이 원형인

데, 이 칠장사 사천왕의 눈들은 거꾸로 새까만 자위에 흰 고리눈이었습니

다. 그 흰 고리 안에는 진 고동색 동자가 우물에 빠진 달처럼 박혀 떠 있

었어요. 저는 그 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눈의 검은 자위는 저 신비롭

고 무궁한 우주의 광막한 어둠 같기도 하고, 반면에 무명의 깊은 바다 같

기도 했습니다. 말할 수 없이 엄숙하고 고적하고 비밀스러운 그 검음, 거기

동그랗게 차 오른 흰 눈물, 그 흰 고리 눈물은 사바 예토의 말 못할 고통

과 비애를 다 빨아들이고도 남을 듯 찰랑이고 있었지요. 내, 다안다... 내,

다 안다... 특히나 반눈을 감은 북방천왕의 눈은 슬픔의 극치를 머금고 있

어 더 설웠습니다. 그 목메임을 보셨더라면...참좋았을 것을."

도환의 음성이 박하에 쏘인 것처럼 화하게 메인다.

아아, 어떠한 마음에 어떠한 손길이면 그만하온 눈을 바칠 수 있으랴. 그것

은 사천왕의 슬픔인가, 빚은 이의 슬픔인가.

"저는 내내 여러 존상들 앞에서 두 가지 면을 보고,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그 조상들한테서 자신을 몸소 형상으로 나투신 사천왕의 몸을 보

고, 하나는 천지에 무심한 흙과 나무를 빌어서 빚은 사천왕 형상에다 심혼

을 다하여 아로새겨 넣은, 인간의 꿈을 보는 것이었지요. 결국 신의 몸에

인간의 꿈이 깃들어 환열 흔희로 벅차게 이루어 낸 하늘이 곧 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오로지 강호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눈앞에 선 사천왕도, 사천왕을 지은 장인도, 스님 도환도, 모두 우러

러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여겨져 저도 모르게 경앙심을 토하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나, 이 보검을 든 동방천왕을 좀 보십시오. 웃니가 한 줄로 드러나게 입

술을 꼭 다물고, 붉은 선을 두른 핏발의 두 눈을 부릅뜬데다가, 불꽃같이

타오르는 눈썹은 위로 치켜올려져, 역시 진노한 무장의 형용인 것이 실감

나시지요?"

그것은 정말이었다.

굵은 힘줄이 툭, 툭, 불거져 튀어나오도록 불끈 주먹 쥔 왼손을 허리에 짚

고, 오른손으로는 칼자루를 힘껏 움켜쥐어 금방이라도 보는 이의 간담에

그 시퍼런 칼날을 내리꽂을 듯한 기세의 사천왕.

동방지국천왕의 칼은 허공에 높이 들리어 거꾸로 내리꽂는, 시린 칼빛을

번뜩이며, 가슴띠를 건 듯 스쳐서 무릎 위로 미끄러져 놓인다. 그 긴 장검

의 칼 끝에, 단호한 응징과 결코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진중함이 날카롭고

도 무겁게 머문다.

온갖 불의한 사악으로부터 올바르고 의로운 것을 지켜 주는 불법의 칼은,

범접하기 어려운 기상을 삼엄하게 뿜어냈다.

"칼자루가 곱습니다."

검은 자루와 푸른 칼날을 잇는 이음매를 보며 강호가 말했다.

그 이음매는 둥그런 원형판이었는데 새빨간 바탕에 청옥인가, 푸른 구슬이

영롱하게 박혀 있었다.

천왕의 위의와 격한 분노를 나타내어 아랫입술을 즈려문 웃니는 눈이 부시

게 하얗고 단단한데, 강호가 세어 보니 여덟 개였다.

그 입시울 언저리의 수명과 눈썹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당초문이었다. 진남

색으로 속심을 그리고 가장자리는 벽옥색으로 테를 둘러, 고우면서도 역동

적인 사천왕의 칼끝과 안광이 강호의 심장을 겨눈다.

강호는 눈을 돌린다.

그 눈에 들어오는 존위는 서방천왕이다.

"광목천왕이시지요. 소승이 다녀 본 바에는, 아무래도 이름 그대로, 넓고

큰 눈의 위엄으로 수미산의 서방 정토를 지키는 천신이신지라 다른 존위들

보다는 눈을 더 크게 부릅뜬 것 같았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스님, 저도 아까 공부한 것을 한번 일깨워 보겠습니다. 서

방천왕은 우아랫니가 하이얀 두 줄로 다 드러나게 입을 딱 벌리고 있다,

하셨지요?"

"용하십니다."

"헌데 왜 저렇게 입을 크게 벌리고 계실까요?"

"웅변으로서 모든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는 것입니다."

뱃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와 천지를 뒤흔드는 목소리가 곧 들리는 듯하다.

"서방천왕이 손에 든 지물도 아시겠습니까?"

넌지시 묻는다.

"당과 보탑 아닌가요?"

"허허, 이제는 제가 배워야겠습니다."

"원, 별 말씀을 다. 보고도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많지요."

"참, 하기는 저도 그 동안은 청맹과니였는데."

"마음 없으면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보여도 모르는 것은 어찌합니까?"

"보이면, 이제 알게도 되지요."

"누가 가르쳐 줄 때 말이지요."

"스스로 물으면, 거기서부터가 앎의 시작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횡재를 했군요."

"그러셨습니까?"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엄청난 보화를 공으로 얻다니."

"그건 자신 속에 이미 지혜의 광맥을 지니고 있는 분의 특권이지요."

당치않은 말씀이라는 표시로 강호는 두 손을 들어 가볍게 젓는다.

도환이 파안한다. 그 얼굴에 즐거운 빛이 역력하다.

"여기 보면 무수한 용의 무리를 권속으로 거느리신 남방천왕은, 대개 왼손

에 보주를 들고 오른손으로 용을 틀어잡는 것이 보통입니다. 보주는 여의

주라고도 하지요. 이 여의보주는 이 세상의 모든 소원을 뜻대로 이룰 수

있게 해 준다는 신기한 구슬이 아닙니까? 만일에 이것만 한 개 가질 수 있

다면 무슨 여한이 있으리오."

서방천왕은 왼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려 활짝 편 채, 앞으로 굽히어 벋

으려는 시늉을 하고 있다. 가지런히 깎은 손톱이 하얗게 빛나는 서방천왕

의 두터운 엄지와 가운데손가락 사이에는, 동그란 구슬이 새빨간 주사빛으

로 물려있다. 그것이 여의주였다. 이 여의보주의 한가운데서 화염이 뻗쳐

너훌너훌 붉은 혀가 일렁인다.

"여의주는 어디서 납니까?"

"왜, 하나 욕심내 보시렵니까?"

"두 개라도 섭섭치는 않겠는데요."

"야심이 그만하면 이미 반절은 얻으셨구만요."

두 사람이 웃음을 나누는데, 아까 보았던 계집아이가 팔랑 저 끝에서 비치

는가 싶더니, 이리 안 오고 휘 돌아 나뭇가지 너머 초록 속으로 숨어 버린

다.

"사천왕이 무섭다고 아마 다른 길로 나가려는 모양이지요?"

아이의 갑사 댕기끝이 나풀하며 사라진 쪽에서 눈을 거둔 강호가 다시 새

빨간 구슬 여의주를 바라본다.

"여의주는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오호오, 그럼...용왕의 사리인가요?"

"재미있는 말씀이군요. 헌데, 이 구슬을 가지게 되면 그 어떤 독이라도 이

길 수 있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합니다."

"옛날이야기에도 많이 나오지요, 왜. 구슬의 신통력 같은 것."

"그러믄요. 그게 다 여의주의 변형들일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의주는 제석천

왕이 아수라와 싸울 적에 갑옷 비늘이 부서져 떨어진 구슬이라고도 합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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