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만다라
"이번에 사천왕 불사를 모실 때, 단청 올리는 장인이 저 동방천왕 존위
의 무릎을 딛고 서서 일을 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같아서, 참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대무비하면서 우람하고 웅용한 체구에, 더없이 화려하고 찬란하여 기가
질리는 극채색 갑옷을 입은데다가, 험상궂은 귀신의 아가리 이빨과 낯바닥
으로 허리띠를 띠고 무릎을 덮어 장식한 사천왕이 사납고 무섭다 하지 않
을 이 과연 누구이리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머리에 이르면 극대비로, 저토록 숨막히게 휘황하여
"극락의 꽃밭이 저러하랴."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보관의 극미 장엄이여.
그것은 아름다움이라기보다 남루하고 서러운 사바 이승의 멍든 폐장에 사
무친 울음이 숨죽여 토해 낸 절규였다.
어느 만한 세상이면, 먹피를 토해 꽃을 피우랴.
"내 기어이 그 아름다운 곳에 가 닿고야 말리라..."
고. 눈먼 손끝이 더듬어 더듬어 꽃잎 하나 열고, 시리게 하이얀 깃털 학 한
마리 꽃밭 위로 날리며, 비천의 선녀 날개옷 아득히 풀어서 구름으로 띄워
낸 극락의 하늘, 저 그리운 정토.
천 가지 변화로 만 가지 조화를 이루는 이 보관을 사천왕의 머리에 바친
손에서는 종내 진액이 묻어났으리라. 윤회 중생의 생사 고리에 묶인 손이
유정 무정의 번뇌로 으깨져 짓찧인 채, 송진같이 번지는 눈물 대신 진액을
바르며 색칠하는 정토의 꽃밭.
이승의 사바해가 고달프고 서러우면 서러울수록, 눈물의 파도에 매 맞으며
목메이게 사모하던 열반의 언덕, 그 언덕의 물마루 가장 높은 말랭이 사천
왕의 머리 위에다, 이름 없는 장인으로 태어났던 세월의 한 중생은, 그리운
세상을 아로새겨 저처럼 보관에다 한 소쿠리 담아 놓고는, 꽃밭 너머, 언덕
을 넘어, 이제는 꿈꾸던 극락 정토로 홀홀이 떠나갔을까.
한 가닥 연기처럼 이내처럼 허공에 떠 나부끼는 무봉의를 밟고서 사천왕의
등뒤로 사라진 장인의 발자국이 금방이라도 느껴질것만 같아서, 강호는 저
도 모르게 다문천왕 앞으로 한 걸음을 당긴다.
"사천왕은 누구의 신부일까요."
"신부...라고요?"
저렇게 쓸어안아 울고 싶도록 곱고도 정성스럽고 난만하여 풍요롭고 신비
스러운 꽃관을 머리에 쓰고 계시니 말입니다.
강호는 미처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속으로 삼키고 만다.
그는 이상하게도 목이 메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냥 언뜻 보면 무장 같은데, ...저 화관을 좀 보세요"
이번에는 오히려 강호가 도환을 이끌어 가르쳐 주고자 한다.
"혹시 불법 진리의 신부일까요? 사천왕은 남성 신장의 장쾌한 위용에 여성
신격의 극치를 한 몸에 두루 갖춘 하늘이신 것 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오살.
강호의 소견에 도환이 합장한다. 그리고는 손 그림자가 얼비치리만큼 질이
난 단주를 한 알 한 알 세어 넘기며 천천히 말한다.
"사천왕천이 섬기는 하늘은 제석천입니다."
아까 들은 말이 생각나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
"불교의 하늘은 무궁하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지요?"
마디를 짚듯이 묻는 도환을 보고 강호가 대답 대신 미소를 짓는다.
"불교에서는 보통 하늘을 가리켜 이십팔천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저 허공
의 무궁 공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 매긴 그 눈금만큼 이른
깨침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많이 깨친 이는 더 높은 하늘로 가는가요?"
"옳습니다."
"저는 그저 하늘은 하나로 알았는데."
"우선은 인간계에서 제일 가까운 욕계 육천이 있고요, 그 육천을 다 넘어
가면 색계로서 십팔천이 있습니다. 이 스물네 하늘을 모두 넘어가면 무색
계 사천이 있으니, 도합 스물여덟 하늘이지요?"
"제석천만 해도 삼십삼천이라고 하시잖았습니까? 어찌 숫자가 잘..."
"아, 그것은 또 다른 이야깁니다. 제천을 크게 나눈 스물여덟하늘 가운데
욕계 육천이 있고, 그 욕계 육천중 둘째 하늘이 곧 제석천인데, 다른 말로
는 도리천이라고 하지요, 이 제석천이 권속으로 거느린 작은 하늘이 동,
남, 서, 북 여덟 개씩 서른둘인데다가, 제석이 머무신 중심의 제석궁, 즉 다
른 이름으로는 선견궁까지 합하여 모두 삼십삼천이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도 큰하늘 작은하늘이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등급도 다 각각 다릅니다."
"등급?"
"쉽게 말씀 드리자면, 중생에서 부처로 가는 열 가지 단계를 십계라고 하
는데. 그 맨 밑바닥에는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온갖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 지옥이 있습니다. 이 지옥도에 떨어진 중생들이 가장 낮은
것이지요."
"아니, 귀신도 중생에 듭니까?"
"그러믄요. 부처님의 교화 구제 대상이 되는, 이 세상의 모든 생물, 존재,
제유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곧 중생이니까요."
"하아, 몰랐습니다."
"지옥은 벗어날 만해서 겨우 한 단계 올라간 귀신, 아수라들이 사는 곳은
아수라도입니다. 내나야(내내 해 봐야) 이 아수라도 역시 지옥은 지옥이지
만."
"싸움을 일삼는다는?"
"그렇지요. 그래서 이 아수라도에서는 싸움 그칠 날이 없답니다."
"그 위에는 또 무엇이 있지요?"
강호의 눈빛이 흥미롭게 반짝인다.
"아귀계. 아귀들이 들끓는 곳입니다."
"아귀...? 아귀라는 말은 우리 항간에서도 비유나 속담으로 곧잘 쓰이는 말
이 아닙니까, 왜?"
"우리말 어원에는 불교 용어가 뿌리 깊이 녹아 있지요."
"하기는..., 헌데, 아귀라면, 굶어 죽은 귀신인가요?"
"아니, 외려 그 반댑니다. 이승에서 아주 욕심꾸러기로 살던 사람이 죽으
면,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삼악도의 하나인 '아귀도'로 떨어진답니다. 이것
들은 늘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괴로움을 못 이겨 처참하게 울부짖는 귀
신들이지요."
"모골이 송연한 얘기올시다."
"아 우리들도 항용 염치없이 먹을 것이나 탐내는 사람을 가리켜 아귀아귀
먹는다고도 하고, 아귀 같다고도 하잖습니까아."
두 사람은 맑은 눈을 부딪치며 웃는다.
"이 아귀도를 보도시 벗어난 것이 축생인데, 축생도는 제각기 지은 악업의
응보에 따라 끌려온 짐승들의 세계지요."
아, 짐승. 즘생. 중생.
"여기까지가 삼악도라."
"대관절 삼악도라면 어디 어디를 가리키는지...?"
"십계 중에서 세 가지 어둡고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축생 다음이 인간이라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는데요."
"예."
도환의 대답이 의외로 간결하여 왠지 허퉁하다.
"아니 저는 인간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가까스로 짐승
껍데기 막 벗고, 삼악도 겨우 벗어난 중생들에 불과합니까? 하, 이거, 참."
강호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의 어조에는 단순히 던져 보는 농담만이 아닌
각지 인식이 묻어 있다.
"허나, 인간은 우주 십계의 한가운데 중심축이랍니다. 물론 이 인간계에는
인간 이하의 인간도 있고, 보통 사람도 있고, 인간 이상의 인간도 있습니
다. 헌데, 중생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우리 생의 목적이라면, 인간이야말로
용맹정진하여 성불하기에 가장 알맞은, 힘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지요."
"그 힘이란, 노력해서 향상하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럼요.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몸 가지고 있을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
런히 공부해서 깨쳐야지, 어느 한순간에 이 몸을 여의고 나면, 인간으로 다
시 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이 가능성의 시간을 소중히 아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몸이 징검다리로군요."
"그런즉 쓸데없이 몸을 학대해도 안되고, 지나치게 어두어서 몽매할 정도
로 떠받들거나, 몸이 시키는 대로 끄달리어 오욕칠정에 사로 잡힌 종노릇
을 해도 안되고. 오로지 이 몸을 우주의 한 거처, 혹은 수행의 거점으로 삼
아서 무한히 닦아 나갈 정신 활동의 근거지로 존중해야 할 뿐."
"착은 갖지 말라아."
"아무렇든, 진실로 숙생의 죄를 멸하고 윤회 업고의 결박에서 벗어나려면,
그 터전이 되는 몸을 정결히 다듬어 절호의 도구로 써야겠지요. 중생이 인
간으로 나는 것은, 다시없는 천재일우의 복된 기회니까요."
"새겨듣겠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그것은 강호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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