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름다운 사천왕
사천왕 각위의 키와 몸집, 그리고 팔이며 다리길이, 그것들을 들어올려
뻗치거나 구부리거나 내린 모양, 또 앉거나 선 자세에 맞추어 먼저 나무로
기본틀 뼈대를 만든 다음, 새끼줄을 촘촘히 감고는, 그 위에 진흙을 발라서
살을 입힌 뒤, 있는 솜씨와 염원을 다하여 표정을 짓고, 옷을 빚어, 색색깔
로 온갖 문양 놓아서 채색한 조상은, 보면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
엄청나게 과장된 것 같으나 질박해서 단순하고, 장난스러운가 하면 한없이
장중하고도 두려우며, 놀랍도록 섬세한 사천왕의 얼굴과 몸과 옷. 그리고
손마다 들고 있는 갖가지 장엄구.
"사천왕상은 대개 흙으로 빚은 소조가 아니면 나무로 깎은 목조예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본 비율은 이쪽 저쪽이 거의 반반이었습니다. 옹기처럼 굽거
나 청동 같은 쇠붙이로 만든 존상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 동방천왕위는 나무와 흙의 쓰임새가 부위 따라 섞인 듯한데
요?"
"바로 보셨습니다. 이러는 경우도 많지요. 가령 몸은 흙인데, 손에 들고 있
는 지물인 칼이나 비파는 나무로 만든다든가, 머리에 쓴 보관의 정교한 장
식물은 나무로 깎아서 철사로 잇는 등."
"아, 예에."
그칠 줄 모르는 강호와 도환의 대담이 점점 더 진진해지는데 사람들은 쉬
임없이 천왕문으로 들어와 우뚝 솟은 사천왕 앞에 허리를 깊숙이 굽히고,
합장하고, 중얼중얼 염불하였다.
사천왕의 갑옷은 견고하고 찬란했다.
수미산 산악같이 떡벌어진 어깨를 적갈색으로 덮은 어깨 갑옷에는 구슬 같
은 쇠징이 동글동글 조밀하게 박혀 있고, 그 어떤 화살이나 창검도 결코
뚫지 못할 황금비늘 가슴 갑옷, 귀면 장식이 날카로운 이빨을 허옇게 드러
낸 배 갑옷, 철판으로 만든 토시처럼 단단하게 넓적다리를 휘감아 싼 넓적
다리 갑옷, 청룡과 황룡, 적룡의 비늘이 광채 찬란한 켜를 이룬 팔뚝 갑옷,
그리고 뚱그런 두 눈을 이글거리며 송곳 이빨 우아랫니 앙다물어 거품이
일어나는 귀신의 사나운 낯바닥으로 무릎덮개를 한 소삼, 그 아래, 철기둥
이 무색한 다리 갑옷.
이 무장만으로도 이미 천하에 다시 보기는 어려운 장수의 용강 무쌍한 위
용이 아닌가.
그런데 이 무거운 갑옷들은 결코 투박하거나 둔중하지 않았다.
종류마다 각각이 생김새 따라 극세밀로 붓끝 터럭 한 올도 빗나가지 않게
칠한 청, 홍, 황, 흑, 백에 녹색 조금 섞은 색, 흰색 조금 섞은색, 더하고 덜
한 농담과 배합이 서로 받쳐 주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안겨들어 감싸
면서 피어나 흐드러지기도 하는 갑옷들은, 무늬 무늬, 인간의 마음이 바칠
수 있는 모든 색채를 손 끝에 담아 헌상해 올린, 기도의 잔치였다.
그러니 이 갑옷은, 그냥 갑옷이 아니었다.
어깨에 총총 징으로 박은 구슬 모양, 가슴에 띤 요의에 수놓은 매화 문양,
벌집인가 아니면 별인가 사방연속 새김들이 형형색색 촘촘히 수놓여 박힌
갑옷과 갑옷의 사이 이음매는, 옥색 구름 흐르는 감청 하늘이 당초문으로
곱게 물려, 그가 한낱 지상의 장수가 아니라 저 하늘의 사천왕천 왕인 것
을 진심으로 알게 하였다.
갑옷 속에 입었으나 겉으로 살짝살짝 드러난 녹옥색 속옷은 아마도 사천왕
의 평상복이리라.
안에다 받쳐입은 옷들은 복잡하고 엄장하고 현란한 갑옷에 비하여 아주 얇
은 비단이나 명주 같은 느낌을 주면서, 단순한 곡선으로 간결하게 벋어내
리는가 하면 뭉게구름의 끝자락인 듯 소매 끝에 비치기도 하고, 다리갑옷
대님 맨 발목에 조롬조롬 주름잡힌 물결처럼 흘러내리다가 바람을 받아 나
붓 뒤집히기도 한다. 속옷 끝은 손등에도 살폿 덮인다.
그러니까 사천왕은 부드러운 평상복 위에 견고한 갑옷을 입고, 또 그 위에
오색 끈이나 띠를 둘러 갑옷을 고정시키며, 권위에 넘치는 온갖 치레들을
화려 장엄하게 하는 것이다.
(내 어찌 이만한 세상이 있는 것을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을까.)
가슴속이 뜨겁게 뒤흔들리는 감동과 흥취가 목울대를 쳐, 강호는 그만 탄
식을 토하고 만다.
"사천왕은 정말로 아름다우십니다."
한숨으로 터져 나오는 강호의 일성에 도환이 합장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사알.
"사실, 소승이 짚신 감발을 하고 발바닥이 닳도록 전라도와 경상도를 다
더터 충청도, 경기도까지 헤매면서, 사천왕 모신 절의 천왕문을 찾아 친견
하러 다닐 적에, 단순한 의무감이나 호기심만을 따르는 객짓이었다면 아마
몹시도 지쳤을 것입이다."
그러나 도환은 가는 곳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봉안된 사천왕의 장쾌 무
비하면서도 지극히 섬세하고, 화려한데다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순후 질박
한 면면에 놀라, 그만 저도 모르게 그 사천왕이 이끄는 불국토 법열의 땅
으로 빨려들어간 채, 황홀하게 흠뻑 대취해 버리곤 하였으니 오로지 신비
스러울 뿐이었다.
"사천왕은 조선에 단 한 위도 같은 상이 없습니다."
동, 남, 서, 북 각 방위 천왕의 신모가 서로 다른 것은 물론이고, 같은 이름
의 북방다문천왕이라 할지라도 그를 모신 사찰마다 특성이 있어 비파의 생
김새며 사현을 누르고 튕기는 손가락의 모양과 위치, 또한 얼굴 모색에 눈
썹, 눈, 코, 입술, 이빨, 수염의 형태가 다 각각 하나같이 달라서, 빚는 손,
바치는 마음이 인간을 넘어 정토와 십계에 사무치나니.
"모양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색깔도 앞앞이 기기묘묘, 눈물이 나리만큼 정
교하고 정성스럽게 다릅니다."
눈썹 하나만 보더라도 천편일률적으로 무조건 시커멓게 먹칠한 솔잎처럼
곤두선 것이 아니라. 선운사 북방은 완연히 웃음진 주름의 노안에 어질고
부드러운 흰 눈썹 다보록이 눈을 덮어 나부끼는데다가, 수염도 맑은 은실
다발을 빗어 내린 듯 투명하였다. 같은 흰 눈썹에 흰 수염이라도, 통도사
북방은 뭉게구름같이 봉글봉글한 눈썹에 정자관을 거꾸로 붙인 형국의 수
염을 달았으며, 능가사 사천왕의 눈썹은 모두 꿈틀꿈틀 누에 같았다. 그리
고 적천사 북방은 도환이 본 사천왕 중에서 가장 부처님 상호를 많이 닮
아, 남면에 눈썹자위는 도도록이 언덕만 지었을 뿐 따로 그리지는 않았지
만, 그 자애 위엄이 각별하였다. 쌍계사 북방은 푸른 얼굴에 쪽빛 무명실
타래를 굼시르르 꼬아 붙인 눈썹이 연민으로 묵근하고. 불갑사 북방은 찌
푸린 듯 가늘게 좁은 눈썹머리가 꼬리로 갈수록 치솟다가 퉁퉁하게 내려앉
으매,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용서해 버리는데. 턱수염은 마치 먼 바다 위의
안개 속에 뜬 삼각섬 그림자들 같았다. 그리고 완안주 송광사 북방은 가장
사천왕다운 장엄 용맹의 풍모로서, 눈썹 터럭 한 올 한 올 힘차게 박아 세
운 것이 잠비 수염과 함께 어울려 서슬 푸른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러나 그 서슬을 누그리며 중생을 달래는 것은 코밑의 수염이었으니 터럭이
길어 여덟 팔자로 드리워진 숱이 짙고 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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