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칸과 직선과 빗금들을 그어가며 꼼꼼히 계보를 그리던 도환이 '용'에다
동그라미를 친다.
"도표는 이렇게 그렸지만, 근본적으로 제석과 사천왕은 둘이 아니라 하납
니다. 그러니까 제석, 사천왕, 팔부신장은 다 한 식구지요. 하나의 가족이에
요. 그런데도 가족끼리 제석과 사천왕이 이처럼 엄격한 군대 체제를 갖추
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글쎄요."
"이 식구들은 항시 상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라니요?"
"싸워야 하는, 전쟁을 해야만 하는 대상 말입니다."
"아니, 하늘의 천계에도 전쟁이 있습니까? 그 대상이 누군데요?"
"아수라."
"아수라?"
반문을 하던 강호는 문득 남방증장천왕의 손에서 화염을 뿜어내던 여의주
붉은 구슬에 생각이 미친다.
"제석천과 아수라가 싸울 적에, 제석천의 갑옷 비늘 부서져 떨어진 조각이
곧 여의보주라고 하셨지요? 그 말씀을 들을 때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겼
는데, 그게 서로 툭탁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생사를 건 전쟁이란 말인가요?"
신기한 기색으로 묻는 강호를 지그시 바라보던 도환이 돌멩이 조각을 버리
며, 두 손바닥을 펴 도닥도닥 땅에 그린 도표들을 두드린다. 그대로 두고
가면 영문 모르는 중생들이 함부로 밟을 테니 외람된 일이며, 싹싹 지워
없애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일이라, 이불을 덮어 재우듯이 도닥이어 글씨
를 지우는 것이다.
강호는 그 손길을 결코 그냥 허수히 보지 않았다.
"제석천과 아수라는 십계 속에서 단 한시도 서로 사이가 좋아 본 일이 없
습니다. 이들은 항시 격렬하게 싸워 투쟁하는 관계지요."
제석천은 선신이요, 아수라는 악신이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 치열한 대 아수라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결정적 조건은, 제석이
나 아수라 자체한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힘 가진 천신이 싸움에 상관을 하나요?"
"...이 전쟁의 승패를 정하는 결정권자는 바로 인간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즉, 인간의 한 마음의 작용성을 꿰뚫어본 말이지요. 지옥으로부터 불계에
이르는 열 가지 단계인 십계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마음 상태를 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인간은 일심에, 한 생각속에, 선, 악과
명, 무명 또는 색법과 심법의 모든 세계를 품고 번개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제석천과 사천왕도 다 저의 마음속에 있단 말입니까?"
"그렇고말고요. 내 마음이 괴로운 상태는 지옥의 아수라요, 내 마음이 환희
로 물들 때는 극락 정토이지요. 다만 인간은, 이 십계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제 안에 있는 구분이라 할지라도. 차라
리, 수행을 따라 등급이 정해지는 십계의 문턱보다 오히려 더 오르기 어려
운 것이, 자기 존재의 계단일 거예요."
강호의 눈에 북방다문천왕의 비파가 들어온다.
무지개 계단, 천상의 음계.
"나의 몸을 저 무변광대한 우주의 축약이라 본다면, 이 속에 분명히 십계
현상 모두가 들어 있을 것이요, 이 몸을 진정 우주의 씨앗, 핵이라 본다면,
무한히 확산시켜 나와 세상과 우주까지 두루 다 관찰해 볼 수 있겠지요."
"만일에 그렇다면, 나도 신이어야 할 것 아닙니까?"
강호가 말꼬리 잡는 소학생처럼 응석을 겸하여 질문한다. 그 말투에는 어
림없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결론이 한 자락 깔려 있다.
"왜, 신이 아니십니까?"
하나 도환은 짐짓 엄숙하게 정색을 하고 응수한다.
"예에?"
뜻밖의 응대라 강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목소리를 누른다.
목젖에 눌린 소리끝이 튀었다.
"정신이 있으신가요?"
별안간 밑도 끝도 없이 사납게, 도환이 강호를 을러메며 다그쳤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짐작이 잘...제가 지금 왜 정신이 없겠습니까?"
강호는 낯색이 변한다.
"아, 있으세요오...?"
말끝이 긴 초리를 감으며 내려앉은 것에 비로소 그 말이 농이었던 것을 알
고, 강호도 그만 웃음을 풀어 놓으려 하는데, 농이 아니었다.
"정신이 있으면, 신이 내 몸 속에 있으니, 곧 나는 신이시지요. 정의 신이
정신 아닙니까? 정신이 없으면, 신이 아닐 테고."
딴은 그렇구나. 정말.
강호의 안색에 비치는 마음을 읽으며, 도환이 빙그레 미소를 머금는다.
"불교에서는 정신 활동 자체를 신이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강호는 까닭도 없이 머리 속이 환하게 밝아와, 새로움
에 눈부신 인식의 빛이 경이롭게 비쳐드는 것을 전신으로 느낀다.
"이 정신 활동을 하게 하는 몸, 즉 바탕은 무엇이겠습니까?"
강호가 미간을 모으며 도환의 눈을 진지하게 들여다본다. 그 눈 속에서 대
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도환은 강호의 눈빛을 밀어내지 않고 받는다. 대답
을 채근하지 않는 품이다.
"결국 너는 그 대답을 알아낼 것이다."
하는 믿음이 도환의 눈에 어려 있다.
"마음입니다."
이윽고 강호가 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옳습니다."
도환의 머리위에서 사천왕전에 올린 연등이 분홍으로 풍경처럼 흔들리고,
한 줄기 푸른 향연은 두 사람의 이승을 에워 어르며 천왕의 어깨 너머로
가뭇없이 스러진다.
"마음이 곧 신이로군요."
고요히 고개를 수그리는 강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촉촉한 연두물빛 바
람이다. 바람에는 수풀과 여린 잎과 새순의 갓 태어난 숨 색이 묻어 있다.
그 숨이 닿은 머리카락 눈에서 담록색 맑은 진이 돋아날 것같다. 싱그럽다.
"그런데, 수행력이 곧 힘이라면, 제석천은 아수라와 도무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를 힘을 스스로 가지고 계실 터인데."
강호가 의문에 겨운 고개를 든다.
"왜 둘이 서로 싸우며, 심지어는 제석천이 아수라한테 지기도 한단 말입니
까.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나의 마음을 정관하여 들여다보며 이야기해 보시지요. 옳은 마음이 늘 이
깁니까? 옳은 줄 알면서도 옳은 마음이 약하면, 그른 줄 알면서도 그른 마
음의 세력에 휩쓸리니 경계선에서 회오리치는 것이 인간 아닌가요? 옳다고
해서 옳은 것이 곧 그만큼 힘이 세 그 무엇에도 끄덕없이 쓰러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것을 힘있게 하려면 늘 북돋우고, 그 옆에 모이고, 가
꾸고, 기르고, 충전하여 자꾸만 튼튼하게 가축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옳은 마음을 외면하고, 따르지 않고, 버려두면 무너지지요. 그대로 폐허가
됩니다. 반면에 그른 것에다가는 있는 힘을 다 보태 주고, 꾀를 내고, 밤이
나 낮이나 궁리를 하고, 부추기어 모색하고, 행동하여 힘을 기른다면, 자연
히 그르고 악한 것이 강성해지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의 제석천은 지키는
이 하나 없이, 힘없이 무너지고, 내 마음의 아수라는 벌떼같이 일어나 아우
성치며, 누가 이기고 누가 지겠습니까."
결국, 내 마음은 아수라에 점령당해 버리고 말 것이다.
선과 악은 숙명적으로 싸우게 되어 있으므로, 이기고 싶은 쪽은 늘 전열을
가다듬어 날을 세우고, 무리를 모으고, 힘을 길러 삼엄하게 제 마음을 지켜
야 하리라.
"그것을 넓혀 나가 생각해 보면, 인간세계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만일
에 세상이 부모에게 불효하고, 스승과 선배를 무시하며, 후배를 사랑하지
않고, 약한자를 업수이 여겨 폭력으로 대하며, 제 욕심만 챙기고 도둑질하
고, 거짓말하고, 간음하며, 더럽고 추잡하고 게으른 사람들과 사기꾼으로
들끓게 된다면, 그 수가 점점 늘어가는 것만큼, 아수라 군단의 숫자도 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옥, 아귀, 축생의 세상이 된다.
"하면, 상대적으로 제석의 식구는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전쟁에서는 무엇보다 세력이 되는 숫자가 많은 놈이 이기므로, 제석이 분
하게도 아수라한테 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석과 사천왕은 한 달에 여섯 번 씩 자신의 군대를 점검하려고
중생계를 돌아보며 몸소 시찰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신수장경'에는 이렇게 적었다.
매월 음력 팔일, 사자(심부름꾼)를 아래(인간계)로 파견하여 세상을 둘러보
게 하고, 제왕과 백성, 용, 귀신, 모기, 깔따귀 등 뭇 꿈틀거리는 생령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말을 하며, 몸으로는 어떤 선악을 짓는지, 잘 살펴
보게끔 한다. 십사일에는 태자를 아래 세상으로 내려보내고, 십오일에는 사
천왕 자신이 내려가고 이십삼일에는 다시 사자를 보내고, 이십구일에는 태
자를 또 내려보낸다. 그리고 삼십일에는 사천왕이 다시 직접 내려간다. 사
천왕이 인간계로 내려가는 날은 해와 달과 수, 화, 금, 목, 토 오성과 이십
팔 수 뭇별이 하늘에 떠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하늘무리를 모두 거느리
고 간다.
여기서 사천왕은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중생을 부지런히 살펴서 길흉을 시행하되, 이날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
고, 깨끗한 마음으로 재계를 지키며, 가난한 이들에게 보시하고, 계행을 굳
게 지키는 지계, 온갖 모욕과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의
인욕, 오로지 정법을 믿어 수행에 힘쓰는 정진, 결가부좌하여 속세의 정을
끊고 마음을 가라앉혀 삼매경에 이르는 선정을 행하는 사람들이, 경을 되
새겨서 주변에 그 내용을 설해 주어, 깜깜 무지한 자들을 밝히고 교화해서,
양친께 순종 효도하고, 머리 숙여 부처의 법을 받고, 사등심을 실천하며,
중생을 자비로 길러 주는 자가 있거든, 빼놓지 말고 골라내어 제석께 아뢰
도록 하라.
사천왕의 보고에
"악한 것들이 성하다."
하면, 제석은 근심이 커진다.
보고를 받고 관찰을 다 한 뒤, 제석천은 그가 지닌 권능으로 인간에게 상,
벌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제석천의 뜻은 악을 선으로, 불경을 효순으
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어서, 선과 효순과 평화를 크게 보호하고 기르는 반
면, 그에 나쁜 해를 끼치는 일체의 것을 부수어 없애 버리는 데 있었다.
"이러한 작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법을 널리 펼쳐서 불국토를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제석은 인간계를 수호함으로써, 자신의 군대에 속하는
착한 인간들을 하나라도 더 늘리어서, 언제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대 아수
라전에서 승리를 얻으려 하고, 인간은 자신들의 삶을 온갖 재액과 질병과
병란으로부터 보호하여, 안온 풍요하게 지켜 주는 제석을 받들어 신앙하는,
상호 보완적 협력관계를 이루는 것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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