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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10권 (49)

카지모도 2025. 8. 1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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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눈물의 비늘

 

"잿물 내라고?"

마당 한쪽 구석에 수북이 모아 둔 재를 삼태기로 퍼 나르느라고 앞자락이 온통

재강아지같이 된 소례를 우례가 묻는다.

"이."

구멍이 둥글둥글 뚫린 밑바닥에 고운 짚을 깔아 놓는 시루에다 콩깍지 재를 켜

켜이 넣으며 소례는 건성으로 대답을 한다. 우례와 소례는 매안 이씨 종가에 누

대로 내려오는 씨종 막손이의 한배 태생으로, 이제 둘다 비부를 얻어 새끼들 낳

고 산 지 십 년도 더 되었는데, 연년생인 형 우례는 침비라 안채로 바느질감 들

고 드나들 일이 많아 행랑 거처를 하고, 계집동생 소례는 휘장 같은 이불 호청

을 비롯해서 온갖 옷가지와 빨랫거리들을 노상 이고 널고 살아야 하므로, 일하

기 활발하게 이씨 종대 대문 바깥에, 마당까지 딸린 호제집 한 칸을 따로 내 기

거했다. 소례네 마당의 한가운데는 빨랫줄을 버팅긴 간짓대가 언제나 높다랗게

솟구쳐 있어 무슨 귀때기처럼 보였다.

"오늘도 빨래 많냐?"

호제집으로 내려온 우례가 손바닥만한 툇마루에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하얀 햇볕에 눈이 시어 눈썹을 찡그린다.

"맨날 그렇지 머."

"아이고, 날 풀려 살겄다. 인자 곧 여름 오겄지. 지난 시안 참말로 추웠제잉. 엄

동에 얼음 구뎅이 꽝꽝 뚜드러 깨감서 그 산데미 같은 빨래를 다 어뜨케 했다

냐. 생각만 해도 새로 심란시럽다."

사시사철 어느 한 때 손금 마를 날이 없어 물 속에 담그고 살며 모진 빨래를 해

대는 소례의 손은 늘 퉁퉁 불어 있어 건드리면 흐물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

것이 항상 우례는 속 아프다.

"머 언지는 안허든 일잉게비? 그렁갑다 해야제. 그러고, 시방은 봄인디, 햇빛도

좋그만, 멋 헐라고 지내간 시안 일을 자꼬자꼬 끄집어다 송군당가잉? 성은 심도

좋네."

막대를 얽어서 튼튼하게 받쳐 세운 삼발이 위에 덩그러니 얹힌 시루에 물을 붓

던 소례가 제 형을 돌아보며 비시시 웃는다.

"웃음이 나오냐...? 그래도 우는 것보돔은 낫다."

시루 밑구멍에서 주루루, 여러 골 낙수처럼 떨어지는 잿물이 불그스름하다. 첫물

이라 그런 것이다. 이 물은 빨래를 삼을 때 쓴다.

"어매, 사돈 넘 말 허네에. 나는 원, 오뉴월에 뻑뻑허니, 땀투셍이 손구락으로 비

누질허는 성이 외나 안되았등만. 더워 죽겄느니 앉은뱅이 맹이로 오그리고 앉어

서, 땀띠가 막 나 갖고잉... 우리는 시여언허게 냇갈 물에 발 당구고 휘여휘여 칼

칼이 빨래 탕탕, 더운지도 모르는디. 인자, 벌써 날이 훅훅, 여름이 다 될라고 헝

게로 나는 셍이 걱젱이여."

첫물 받은 옹자배기를 한편으로 치우고, 다시 훗물을 받으려고 소래기를 시루

아래 놓던 소례는, 우례한테 눈을 찌그려 보인다.

"또 저 소리."

우례가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며 혀를 찬다.

그 눈에 구름 한 점 없이 트인 봄하늘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봇물 어린 하늘

빛이 너무 가련해서, 우례는 날카로운 사금파리에 가슴을 깊숙이 찔린 듯, 한참

을 가만히 앉아만 있다.

"해 참 좋제잉? 나 빨래 잘허라고오."

옹자배기에 받은 첫물은 벌써 한데솥에 부어서 불을 지펴 호청을 삶기 시작하

고, 소래기 훗물에는 애벌빨랫감을 담가 놓는 소례의 손길이 투박하고 굼뜨면서

도 잔꾀가 없어, 우례는 마음이 짠하다. 종살이 누대에 요령도 생길 법하건만,

소례는 어미를 닮았는지 아비를 닮았는지 힘 좋고 우직하기 마치 소와 같아서,

언제 누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가, 이름도 소례라 했다. 퉁퉁하니 크막한 체

구조차 남보다는 실하여 이름 값을 넉넉히 하고도 남는 소례는, 언제 잠깐 잠시

도 쉴 틈이 없었다. 우선 잿물만 해도 빨래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 만들기는

수월치 않아 소례는 노상 콩깍지나 풀을 모아 태워야 했으며, 뽕나무 재 역시

아주 좋은 잿물이 나는 재료라 불면 날아갈까 금쪽같이 아껴 모았다. 모두 다

잿물 받기 좋아서, 상전의 댁 쇠죽 쑤는 아궁이며 군불 때는 부석에 지키고 서

있다가, 재를 긁어내오곤 하였다.

"잡초라고 다 같은 거이 아니네잉. 칠팔월에 독 오르고 성난 놈 썩썩 비어서 말

린 풀이 그 중에 지일이고, 서리를 맞어 부린 것은 벨라 좋들 안히여, 잿물도 심

이 없어, 때를 못 빼. 거 참 요상허제."

그래서 소례는 여름이면 깔담살이한테 소 먹일 꼴만 베지 말고, 잿물 낼 잡초를

듬뿍듬뿍 베어다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나 빨래하는 데 무조건 잿물만 있

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명주처럼 곱고 부드러운 감에는 잿물을 쓰지 않았

다. 명주는 독한 잿물이 닿으면 녹아 버리는 것이라 콩가루를 풀어 빨거나, 팥

또는 두부를 만드는 날이면, 두부 순물을 받아다 명주 빨래를 하였다. 이 외에

쌀뜨물도 긴요하게 쓰인다. 무명은 푹푹 삶아야 때깔이 보얗게 나지만 명주는

귀한 만큼 다루기도 까다로운 것이다. 그런데 삼베 마직은 또 달라서 무명처럼

삶지는 않고 잿물에 여러 번 담가 흔들기만 해서 빨든가, 쌀뜨물에 한 이삼 일

간 폭 흥건히 담가 두었다가 냇가로 가지고 가 두들겨 빨아야 했다. 그러나 모

시는 두들기면 큰일났다. 다 해져 걸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소례는 갖가지 빨

랫감을 눈감고도 척척 가려내어 색 있는 것, 색 없는 것, 거친 것, 고운 것, 질긴

것, 약한 것, 성질대로 우리고, 담그고, 헹구고, 삶고, 두들기고, 주무르고, 빨았는

데. 옆에서 소례가 빨래하는 것을 냇가에서 지켜보던 아랫몰 어서방 아낙이 감

탄하여,

"똑 신들린 무당이 춤 추능 것맹이라."

고, 혀를 내두른 적도 있었다. 빨래는, 빠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만일 옷감에 얼

룩이 묻어 있으면 그것도 반드시 흔적 없이 빼고 지워야 했으니 퀴퀴하고 침침

한 소례의 방 천장과 시렁에는 한약방 약봉지처럼 올망졸망 주렁주렁 오만 것이

다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모두 얼룩때 빼는 식물이며 열매, 혹은 즙을 짜 놓은

병들이었다. 물론 거기에 달아맬 수 없는 물질도 많았다. 우선 오줌을 비롯하여

소금물과 식초는 언제나 상비로 곁에 두는 것이었으며, 녹두물이나 두부 순물도

마련할 수 있을 때를 놓치지 말고 준비를 두어야 했다. 그리고 무 삶은 물, 도라

지 담근 물, 치자물, 매실물 등과 무즙, 토란 삶은 즙, 은행즙, 마늘즙, 동아즙, 생

강즙, 뿐만 아니라 콩깍지 잿물, 쇠뼈 태운 재, 오징어뼈 가루, 조개껍질 가루, 창

포 뿌리 가루, 고백반 가루, 복숭아잎, 오미자, 살구, 대추, 또 덜 익은 초록 매실

을 껍질 짚불 연기에 그슬린 뒤 말린 오매 달인 물도 빠뜨리면 안되었다.

"그저 일허능 거이 기양 재미가 나 죽겄냐?"

말이 없다고 속을 모를까마는 우례는 소례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마디 던진다. 불쌍하고 가여운 생각이 새삼 치민 탓이다.

"조께 놀아감서 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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