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돌은 소향의 집에서 묵었고, 마음 착한 소향은 밤새껏 그 천한 여자의 몸을 씻기고 머
리에 찬 물수건을 얹어주며 간호했다. 열이 차츰 내려갔고 이틎날 아침에는 의식을 되찾았
다. 손돌은 환자를 소향에게 부탁하고 재인말로 돌아가며 나중에 꼭 갚으리라 치사를 해줬
으나 소향은 빙긋 웃기만 했다.
저두 모처럼 활인을 거들게 되어 기뻐요.
몸조리만 잘 시키면 건강해질 것인, 자네가 거두어두고 잔일이나 시키면 좋겠네.
알아서 하죠.
이틀 사흘 지나든 동안에 종처의 고름이 터지고 창이 아물기 시작했는데, 부기가 빠져 수
척해진 여자는 본 얼굴로 돌아오자 수려한 미모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
더니 열흘지나 기동하게 되고부터 소향과 함께 바느질도 거들며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여자는 금년 십팔세이며 이름은 묘옥인데 어릴 적에 김씨 성을 가졌던 적이 있었으며 태
어난 곳은 중화였다. 그 아비는 양인이로서 조부가 유학이었으나, 가업을 세우지 못하여 일
찍이 배를 두어 척 사서 쌀을 싣고 다니며 행상을 했었다. 묘옥이 아홉 살 나던 해의 일이
었다. 네 살과 두 살 짜리 남 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처녀 적부터 중화에서 소문난 절색
이었다. 그 아비의 동무 중에 양서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평안감영에 아는 이가 있어서 현에
나아가 장교질을 다녔다. 그는 진작부터 묘옥의 어머니를 은근히 탐내고 애만 태워왔던 것
이었다.
어느날 밤 대여섯 명의 포교들이 집을 둘러싸고 장삿길에서 돌아온 묘옥의 아버지를 체포
했다. 영문도 모르는 어머니는 어린것들을 감싸안고 땅을 치며 울었고 아버지는 무슨 죄길
래 이러느냐고 고함을 쳤으나 포교들은 모양을 내어 팔을 뒤로 꺾고 목과 어깨와 두 손목을
붉은 밧줄로 꽁꽁 묶었다.
죄목은 그맘때에 대동강 어구인 남포 앞바다를 횡행하며 관선의 곡식과 무역선을 습격하
는 수적 패거리들과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무리 변명했으나 그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다는 장교 양서방이란 친구가 매우 불리한 증언을 했었다. 즉, 거의 십여 년이나 남포에서
부터 해로로 예성강구까지 왕래하면서 한번도 적당들의 피침을 받은 바가 없다는 것과, 그
가 겨우 곡식 행상으로 가산이 꽤 부유하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로서 초도에서
늘 사람이 오가는데 그가 주상들이 수적당들게 바칠 통과세를 미리 거두었다가 내준다는 것
이었다. 묘옥의 아버지는 일단 중화에서 문초를 받고 감영으로 끌려 올라갔다.
평안감영에서는 오랫동안 초도 부근의 수적당에 골머리를 앓아왔던 터이라, 잡혀온 묘옥
의 아비를 엄중히 공초했다.
그가 변명하기를 남포에서 예성강 어귀까지 오가는 동안 그의 배가 한번도 습격받지 않은
것은 원래 장사의 규모가 미곡 몇섬에 지나지 않는 영세적인 소상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습격할 까닭이 없이리라 했다. 또한 가산이 부유하다 함은 말이 안되고 그저 밥술이나 먹는
형편인데, 박한 쌀장수의 이윤으로 오로지 부지런히 여러 고장을 나다닌 탓이라 했다. 그리
고 초도에서 사람이 왕래한다든가 통과세를 걷는다는 것은 전혀 사실 무근인데 간혹 타지방
의 거간이 오면 집에 재우거나 물건을 소개했을 뿐이라며 누누이 밝혔지만 중화군수의 장계
도 있고 하여 용납되지 못했던 것이다. 심한 고초를 겪은 후에 두 달 만인가 있다 풀려나
왔으나 장독이 온몸에 번져 소주에 탄 똥국물까지 마셨고 삼도 달여 먹고 했는데 시름시름
앓더니 반신불수가 되어 누워서 지내는 산 송장이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묘옥이네 모녀는 두 어린것고, 꼼짝 못하고 의식 없이 누워 미음이나 받아 먹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남편을 봉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품팔이를 해야만 되었다. 먹는 것은
밀기울이요, 입은 것은 속곳 위에 겨우 짚 북더기로 살을 가렸다. 이러한 가난 속에서 양장
교가 드나들기 시작했고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어 집안 형편이 풀리게 되었는데, 어느날 밤
에 인기척으로 잠이 깬 묘옥은 남녀가 도란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굵다란 남자의 목소리
가, 그러니 나를 따라서 선천으로 가잔 말일세. 내 이번에 첨사를 따라 진정이 되어 영전
하게 되는데, 자넬 호강시켜주지.
저이야 이젠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나, 그래두 새끼들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걱정말아, 내 달아아서 처리해줄 테니까.
큰년은 이제 장성했으니 어디 좋은 소실자리나 얻어주면 그게 제 복이겠죠만, 새끼들은
참말 흉년에 시루에다 씌워 내다 버리듯 할 수도 없어요.
울기는 젠장..... 그런 걸 복철이라구 하는 게야. 내 소실자리하구 양자자리를 주선해볼 테
니 염려 말라니까.
양장교와 어머니의 목소리라는 것을 묘옥은 대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치가 떨리도록 분하고 서러워서 제딴에는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며 불끈 일어났다.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부엌에 내려가 식칼을 찾아 들고 두 연놈을 찔러 죽이리라 작정을 했는데 안
에서 발짝 소리를 들었는지 사내가 목소리를 죽였고, 그 어미가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밖에 거 누구냐, 묘옥이냐?
묘옥은 칼 든 손을 불불 떨며 한참이니 그러고 서 있었다.
빨리 들어가 자거라. 밤공기가 차겠다.
묘옥은 툇마루에 칼을 떨어뜨리고 토방 앞을 떠나 집 밖으로 줄달음 질을 쳤다. 방 두 칸
에 헛간 하나 있는 집이니 그들이 정을 통하고 있던 곳은 바로 환자의 방이었던 것이다. 의
식 없는 살덩이지만 환자는 미음을 떠넣어줄 때마다 입맛까지 다시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
다. 묘옥은 맨발로 정신없이 동구를 향해 뛰어갔다. 해풍이 거세게 몰아쳐 불어오고 있었다.
묘옥은 단번에 돌아가서 집에 불을 싸질러버리리라 다짐해보면서도, 실상은 어머니마저 아
버지만큼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른 몫의 길쌈과 밭을 매는 당찬 구석이 있었으되, 묘옥이는 누가 보기에도 아직 어린
계집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결에 오리정에서 묘옥은 갯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수가 밀
려나가고 있었다. 소금짐과 미곡을 싣는 배들이 창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안개 사이로 맞은
편의 낯선 야산이 아물거렸다. 묘옥은 해송이 어우러진 언덕에 앉아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
다. 집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쪽으로 결심이 굳어갔다. 이다음에 세월이 오면 꼭 양가
놈의 원수를 갚으리라고 혼자서 중얼거려보고 나서 당돌하게 뱃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는 진
으로 나갔다. 그들은 갯가를 맨발로 헤매고 있는 눈물 흔적의 작은 계집아이에게 곧 주의를
집중하게 되었고, 그중에 묘옥의 아버지와 함께 장사를 다녔던 사공 하나가 대뜸 알아보았
다.
네 웬일로 여기 나와서 서성대느냐?
묘옥은 대꾸 없이 닻줄 박힌 사장에 앉아서 모래만 뿌리고 있었다.
부친은 그냥 그대로냐?
어젯밤에..... 돌아가셨어요.
라고 묘옥은 갑자기 꾸며댔다.
쯧쯧, 차라리 잘되었다. 그런데 여긴 누굴 찾으러 나왔니? 아저씨, 저 배좀 태워주셔요.
배? 네 어머닌 집에 계시지?
저..... 외갓집 가야 해요. 장사 비용두 없어요.
음 심부름을 간단 말이구나. 가만있자, 우리 배는 오늘 떠나지 못한단다. 내가 누구한테
말해줄 테니..... 아무 배나 얻어 타겠니?
묘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출발하는 배가 대동강의 조수를 타고 흘러 급수문을 지나
고 배곶을 지나 옹진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너는 보산나루에서 내려라.
네, 아저씨 고맙습니다.
묘옥을 실은 배는 돛을 올리고 삭시진을 떠났다. 강안으로 흐르듯 지나가는 산천에 눈도
돌리지 않고 묘옥은 모진 결심을 했다. 내 반드시 양가의 목을 베는 날이 올 때까지 무슨
짓으로라도 살아가리라.
옹진에 닿은 배에서 내렸을 때, 묘옥은 두 끼나 거푸 굶고 맨발이었으며 옷 주제도 말이
아니어서 완전히 흉년의 거지 같은 몰골이었다.
수군본영이 있는 붕소리에서 묘옥은 비석거리 앞의 작은 객줏집에 부엌데기 일을 얻을 수
가 있었다. 남자는 배를 부려 경강 상인과 미곡 부리는 일을 하러 다녔고, 주인 여편네는 아
침부터 저녁까지 봉놋방과 술청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는 부지런한 여자였다. 그러나 성격
은 온화하여 묘옥이와 정이 붙자 친딸처럼 대해주었다. 평화스러운 가운데 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기유년에 큰 가물이 들었고 이듬해인 경술에는 온 팔도가 대 기근 가운데 떨어졌
다. 유민은 고을마다 넘쳤고 민심은 흉흉했다. 객줏집들도 모두 문을 닫아 걸고, 남은 곡식
으로 제 식구끼리 연명하느라고 길고도 지리한 여름을 견디었다. 길거리마다 산협에서 몰려
나온 농민들이 가족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서 음식을 구걸하고 다녔는데, 아이들은 아무데나
버려졌다. 이런 중에도 여유가 있는 축은 곡식을 비축해놓고서 모리를 하기에 바빴던 것이
다.
묘옥이가 얹혀 있던 집에서도 관에서 내준 구호용 진미마저 바닥나자 맹물에 진간장을 타
마시며 견디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물로만은 견딜 수가 없게 되어 묘옥이와 그 집 아이
들은 들로 개구리와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고, 메도 캤으며 찐드기흙을 파다가 송엽을 넣어
서 흙떡까지 먹었다. 이러는 중에 강령 고을에 색상이 와서 젊은 처녀들을 사들인다는 소문
이 났고, 정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저희 여식을 팔아 여름을 날 궁리도 하게 되었다. 죽는
일보다는 사람이 살아갈 방도를 취하게 되느라고 객줏집 여자가 강령에 나가서 묘옥을 흥정
해왔었다. 얼굴과 나이가 맞춤하여 묘옥은 다른 계집아이들과는 달리 조 열 되에 팔렸다.
여자란 첫 번째의 남자가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상대가 좋건 싫건 별 관계 없이, 여자는
남자를 알았던 그때의 자기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묘옥의 첫 번째 상대는 어둠과 그리고 수렁에 빠지는 것 같던 치욕 그 자체였다. 오래 굶
주려 몽롱해진 가사 상태에서 그녀는 툇마루의 나무 판자가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헛기
침 소리도 들은 것 같았고 속삭이며 히히닥거리는 여러 사내들의 목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어둠속에서 우람한 사내의 몸집이 장승 도깨비처럼 우뚝 서 있었던 듯했다. 열려진 문으로
어둠 위를 흘러 지나가는 개똥벌레들의 음산한 빛 조각들이 내다보였다. 어둠이 그녀의 옷
을 벗기고 그리고는 덮쳐 눌렀다. 묘옥은 사지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 얼굴을 옆으로 돌리
고 눈을 감았다. 때에 전 베개에서는 여러 사람의 머리카락 냄새가 났고, 그 위에 눈물을 끊
임없이 적셔야 했다. 장승 도깨비 같은 자가 옷을 추스르고 나가자 또다른 몸집이 들어섰다.
묘옥은 이제는 사뭇 눈을 똑똑히 뜨고 올려다보았다. 검정 더그레 자락이 희미하게 보였는
데 그는 들어올 때부터 끈을 푼 바짓자락을 잡고 있었다. 또다른 자가 들어섰다. 그는 묘옥
의 몸을 신기한 듯이 쓸어보기도 하고 손에 거칠게 쥐어 보기도 했다. 묘옥이 드디어 참아
왔던 오열을 터뜨리자 사내가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만, 군역 나와서 내리 삼 년을 여자 손 한번 쥐어보지 못했다네.
오래된 못에서 꿀럭이며 솟아오르는 물방울철럼 그 피로하고 주눅든 음성은 묘옥의 서러
움을 가라앉혔다. 그날 밤에 겪은 네 사람의 사내가 그 여자에게는 동일한 한 사람으로 여
겨지는 것이었다. 묘옥은 이러한 여러 밤을 거치면서 평산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안성골의
잠채하는 금광 주변에 있는 창가에 팔렸다. 거기서 하천 광부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다가 신
천으로 옮겨온 것이 일년 전이었다.
소향은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오히려 모질고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는 묘옥의 흐트러
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래, 이 사람아 참말 모질고 독하기도 허이. 그험한 고초를 겪으면서 자진하지 않구 살아
온게 용하네. 이젠 나하고 같이 살지 뭐. 이것두 인연인데.
묘옥은 바늘을 들어 짧아진 등잔의 심지를 돋구었다. 그리고 동정에 침착헤게 바늘을 꽂
으면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저는 은혜와 원한으로 한 세상을 살아온 여자예요. 길에 내버려져 죽고야 말 천
한 목숨을 살려주신 어른의 은혜에 꼭 보답해야만 합니다. 그 어른께서 늙마에 홀로 계시다
니 삼 년 동안 몸종 노릇이라도 하여 보은하겠습니다. 그리구 언제라도 이 한맺힌 원수는
갚겠어요. 그때까지는 제가 세상에 살아야만 하고, 그래선지 쉬이 죽어지질 않는군요.
소향은 저 연약하고 작은 여자의 어디서 그렇게 서릿발 같은 매서운 집념이 솟아나는지
놀라웠다.
원수는 무슨.....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그 사람들도 이제는 죽었을지두 모르네. 다 전생의
죄이려니 잊고서 음덕을 쌓노라면 나처럼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아닙니다. 제가 작년에 평산을 떠나면서 중화 고을에 들러 수소문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
연놈들은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버려둔 채 선천으로 떠나서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누
운 채로 돌아가셨답니다. 동생들은 경강 상인들이 어디론가 데려갔다는데 종으로 팔아치웠
을지두 모르지요. 들리는 얘기로는 선천서 어머니가 젊은 계집에 밀려 버림을 받았답니다.
아마 저자를 헤매며 유리걸식을 하다가 미쳐서 죽었을 거예요. 양가놈은 지금 관에서 나와
강서엔가 산다는데 아주 대가를 이루었답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태언난 것이 못내 한
스럽지요.
묘옥은 한달 동안 소향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부기도 빠지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더구나 술 없고 사내 등쌀에 시달림 없는 안정을 갖게 되자 한창 나이의 규수처럼 피었다.
소향이 함께 지내자고 달랬지만, 묘옥은 끝내 손돌 어른께 찾아가겠다고 주장하게 되어 하
는 수 없이 심부름하는 자를 딸려서 문화 작은 잿말로 보냈다.
손돌 노인은 찾아온 묘옥을 보자 몹시 당황했다. 남의 눈이야 제 맘이 그렇지 않으니 꺼
릴 게 없다더라도, 우선 지나는 인심으로 가볍게 마음 써준 일로 종을 자처하며 들어선 묘
옥의 고집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꼈던 때문이었다. 묘옥은 손돌 노인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부엌에 들어가더니 그릇을 내어 씨고 걸레로 방의 묵은 때도 벗기고, 쌀을 안쳐 밥도
짓고 그리고는 상을 보아 마루에 놓은 뒤에 호미를 찾아 들고들로 나가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조밭을 매고 돌아와서는 저녁에는 인근에서 바꿔온 면화의 씨를 고르고 물레를 자았
다.
손돌은 적막하고 흉가 같던 집안에 사람의 기척이 생겨나 온통 따스한 훈기가 감도는 것
을 느꼈다. 손돌이 묘옥을 돌려보내려던 생각은 겨우 하룻동안에 부드러운 감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묘옥이 찾아온 이튿날 아침에 손돌 노인은 지게를 지고 서립문을 나서다가 부엌에서 밥을
안치고 있는 묘옥에게 말을 건넸다.
얘야, 내가 솔가지를 좀 쳐올 테니 먼저 밭에 나가지 말구 기다려라.
예 아버님, 아예 진지를 들구 나가시지요.
아니다, 나무가 없는데 뭐.....
손돌은 눈꺼풀이 뜨거워졌다.
손돌과 묘옥의 수양부녀 관계는 그렇게 자연스레 이루어졌던 것이다.
장충의 딸이며 길산의 누이인 박서방댁은 자주 오락가락하며 묘옥과 가깝게 지냈다. 묘옥
의 됨됨이가 전신은 창기일망정 얌전하고 상냥했으므로 누구에게든 인심을 잃지 않았고 공
연히 비쭉대던 마을 아낙네들도 빨래터나 우물가에 끼워주고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게 되었
다.
길산이는 송화 읍내의 색주가에서 박대근이, 갑송이들과 헤어져 혼자서 밤길을 걸었다. 청
송에서 까막내에 이르는 오솔길은 중천에 높이 솟은 달빛으로 구불거리며 뻗어나간 것이 훤
히 보였다. 들판에 희게 피어난 갈대꽃과 소나무잎사귀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소리로 길
산은 취중의 흥취가 쾌적하였다.
"새벽 서리 지는 달에 외기러기 슬피 울 제 반가운 님의 소식 행여 올까 바라더니, 창망
한 구름밖에 빈 소리뿐이로다."
흥얼흥얼 노래하면서 갈대밭을 돌아드는데, 까막내마을의 불빛이 점점이 가물거리고 있었
다. 길산은 내처 큰잿말로 올라가기에는 밤이 너무 늦다 싶어 까막내 누이 집에서 자고 갈
작정을 했다. 까막내와 작은 잿말은 개천의 이편 저편이었는데, 까막내는 주로 갖바치라든가
옹기쟁이, 수철쟁이 같은 장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길산이 누이의 집 앞에 불 꺼진 집은 고요했고, 마루 밑에서 쫓아나온 삽사리가 컹컹 짖
어댔다.
"쉬이, 형님 계시우....."
불은 꺼진 채로 안방문이 열리면서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길산이냐?"
"응, 나야"
"네가 웬일루 이 밤중에 내려왔니?"
"아니 장에서 오다보니 길이 늦었수."
"누이가 삽짝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느이 매부는 봉산 나가셨어. 비단신하구 가죽신 열 켤레를 약조한 날짜에 대이겠다며 황
급히 나갔는데, 여태 안 돌아오네."
"발걸음이 잽싼 양반이니 길 걷기에 늦춰졌을 리는 없구. 뭐 어디서 좀 놀다 오겠지." "
그 양반두 노름 좋아해 야단이다. 그저 개뼉다구만 봐두 골패짝인 줄 알구 덤벼들 거야." "
어머닌 가셨수?"
"낮엔 무꾸리가 모두 끝났대. 올라가셨지 뭐. 저녁은 먹었니?" "자리나 빨리 깔아주어. 피
곤해 죽겠네."
"참, 너 총대 어른 만났뵜지?"
"지난 봄 연희 떠날 때 이후론 통 뵙지 못했네. 여름내 농사 거드느라구 뭐 틈이 났어야
지. 잘됐군. 낼 아침에 인사 문안이나 드리고 올라가야겠네." "총대 어른이 너를 여간만 생
각는 게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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