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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권 (8)

카지모도 2026. 2. 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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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두 알어. 헌데 참, 누가 왔다면서..... 새댁이라든가?" "새댁이 아니야. 너두 왜 들었지.

신천서 다 죽게 된 창기를 구완해 냈다는 소문 말이다." "들었어."

"그 여자가 지금 총대 어른을 보살펴 드리구 있는데 정말 어느 집 규수에 못지 않더라.

하두 참해서 그 여자가 언제 창기 노릇을 했는지 못 믿겠데." "뭐 태어날 때부터 창기가

따루 있겠수? 그게 다 성정 나름이구 사람 나름이지." 하면서 길산은 은근히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새벽녘에 그들은 잠이 들었는데, "문 열어! 빨리 문

좀 열라니까."

하고, 밖에 와 찾는 낯익은 목소리에 얕이 잠들었던 박서방댁이 먼저 깨어났고 뒤이어 길

산이가 일어났다.

"형님 목소리 같은데."

"아니, 저이가..... 무슨 일이 있었나."

두 사람이 달려나가 문을 여니, 온통 땀과 흙투성이의 박서방이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도

리질을 하였다.

"어휴,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냉수나 한 대접 가저와."

박서방은 떠다 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더니 그제사 좀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안악 부처고개에 화적 났네. 그것두 서너 명이 아니라, 수십명이야." "구월산 깊은 골에

화적대가 몇대 있다는 소린 들었지만, 정말인 모양이네." "정말이여. 내 한두 놈씩 고개를

지키는 녀석들은 겁이 안 나더니만 이건 작당이 여럿이더라니까. 점심때 한천을 지나면서

간밤 닭이 울 무렵에 안악 외촌의 부잣집 두 채를 분탕질하고 불을 놓았다는 소릴 듣구두

설마했었네. 헌데 오후 좀 늦어서 부처고개를 지나오는데 포교들이 쪽 깔리구 삼엄하더란

말야. 보니까 고개 아래 장사꾼들의 시체가 즐비한데 거적을 덮어놓더군. 참상이 눈뜨고 못

보겠데. 좀 꺼림칙했지만서두 뭐 내야 신 판 돈 몇냥 가진바에 두려울 것 있겠나. 내처 걸어

서 내고개 능선을 타구 수렛고개를 타넘는 지름길을 택했지. 거기서 말일세..... 아, 그놈들을

딱 마주쳤지 뭔가. 짐들을 지구 숲속으루 떼지어 지나가다가 그대루 맞닥뜨린 거야. 잡혔

지. 그냥 사정없이 쳐죽이려구 달려드는 것을, 나두 지금 관에 쫓겨서 피신하는 중이라구 덤

벙댔지. 그랬더니, 하긴 떳떳한 놈이 밤에 깊은 산길을 돌아다닐 리가 없다구 공론이 돌아가

데. 머리 되는 놈인가가 짐을 지구 자기네를 따라오라더군.

짐을 지구 한참 뒤따르다가 숲이 울창한 골에 들어서자 그대로 산비탈 아래루 뒹굴어버렸

네. 몇놈이 쫓아 내려오는데, 나는 개천으루 뛰어들어가 급류를 타구 내려왔어. 마을이 보이

길래 정신을 차리구 살펴보니 온 정말이더군."

"어디루 가는 길이었을까?"

"아마 구월산 아사봉으루 들어가는갑데."

"구월산에 여러 패거리가 있다는 건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일 아니우. 우리게서두

왜 재작년에 장단서 사람을 패죽이구 달아난 놈이 화적당에 들어 있는데 제 모친을 만나러

왔던 적이 있잖우."

"여하튼 생고생을 했네. 밤길 걷질 말아야겠어."

그들은 근자에 부근에서 일어난 도적들에 관한 소문을 얘기하다가동이 훤히 트고서야 자

리에 들었다.

길산이는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작은 잿말로 올라갔다. 손돌 노인의 초가에 이르러 열

린 삽짝 안을 들어서니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물려진 상이 치워지지 않은 채로 마당의 삿

자리 위에 놓여 있고 마루 위에는 벗겨놓은 콩껍질이 너저분했다. 길산이가 안방 쪽을 기웃

이 넘겨다 보는 중인데 등뒤에서 여자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셔요?"

길산이는 대답없이 돌아서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머리를 곱게 빗어 제머리로 얹어두고 화

장기없는 얼굴은 해말간데 볼이 붉고 이마가 훤칠했다. 무명 옷차림일망정 몸매가 나긋나긋

해 보였다. 길산이는 우물쭈물하며, "저어, 총대 어른 계신지요....."

하며 눈길을 거두었으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묘옥의 시선에 눈을 맞추었다.

"채소밭에 거름을 주고 계신데 곧 돌아오셔요. 좀 앉으셔요." 길산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묘옥의 떨어져 앉아 콩깍지를 까고 있었는데, 길산은 얼결에 말을 붙였다.

"올해 조농사가 아주 실하게 되었는데요. 이삭이 크고 굵어서 평년보다 섬지기나 더 나오

겠습디다."

"예, 환곡 넣을 만큼은 빠지겠지요."

하고 나서 묘옥이 머리를 돌려 이윽히 길산을 넘겨다보았다.

"지난 봄에 신천 교탑거리에서 탈판 노신 적 있으시지요?" "지난 봄뿐인가요. 여러 차례

됩니다."

"그때 구경 나갔었어요. 동행에게 들어서 큰잿말 사신다는 것두 알구, 또 까막내 언니에

게서두 들었어요."

길산이는 공연히 머리를 긁었는데, 대번에 얼굴이 화끈 달았다. 할말이 없어 무덤덤히 앉

았는데, 여자가 부엌 시렁 위에서 삶은 햇밤이든 소쿠리를 내다 주었다. 소쿠리를 길산이 앞

으로 내밀면서 묘옥은 누나처럼 환히 웃었다.

"무료하실 텐데, 이거나 들어보세요."

고개를 들어 눈길을 맞추지 않으려고 외면하며 쩔쩔매는 길산의 순박한 모습을 보자, 묘

옥은 방글방글 웃었다.

"어제 무더리 가셔서 큰일을 치르셨다죠?"

"예? 큰일은 무슨..... 장터에 타관 무뢰배가 행패를 놓아서....." "싸움두 잘하시나 봐요. 벌

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걸요." "총대 어른두 아십니까?"

"그럼요, 전하는 분의 얘길 듣고는 한참 동안 웃으셨어요." "거 참 낭팰세! 꾸중하시겠는걸."

울타리 밖에서 잔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손돌 노인이 들어섰다. 머리와 수염이 온통 하얗

고 허리는 구부정했으나 아직 눈빛이 총총하여 정정해 보였다. 한 손에는 뒤웅박을 매단 막

대와 거름을 비운 나무통을 들고 있었다.

"기간 평안하셨습니까?"

길산이 밤을 입속에 가득 넣은 채 엉거주춤 일어났고, 손돌 노인은 웃는 낯으로 끄덕였다.

"그래, 모두 별일들 없지....."

"예에, 그저 그러루합니다."

"그저 그렇긴..... 타처 사람들을 두들겨 보냈다면서?" "아니..... 저..... 해주서 장꾼들이....."

"거참 얘기만 들어두 재미있더군. 그래 간밤엔 질탕하게 놀았겠군." "아뇨, 까막내서 잤습

니다."

"손돌 노인이 마루에 올라앉자, 길산은 박대근이와 의논한 것에 관하여 대략 얘기했다. 묵

묵히 듣고 난 손돌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상인과 약계를 맺고 연희를 하게 되면 이익은 많겠지만, 마을 살림은 폐하게 될 게야. 그

렇게 되면 일년 사시사철을 뿌리없이 헤매게 될텐데, 이 마을에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

들은 반대할 게다. 더구나 우리는 반은 관에 매인 몸들이 아니냐." "송상 수하루 들어가서

일부는 장사두 하구 일부는 연희에두 나가구 하면 될게 아닙니까."

"아니다, 관의 허락없이 호적을 함부루 송도부에 옮길 수도 없잖은가. 조상적부터 대를 이

어 살아오던 고향을 버리는 것도 그렇구......"

"고향이라야 토방 몇칸에 땅 서너 뙈기인 걸요. 그리고 언제까지 우리네 재인들이 관의

눈치나 보며 살겠습니까. 시방은 세월이 다릅니다. 듣자 하니 거사패도 있고 괴뢰배들도 있

는데, 요즘은 모두 장사도 하며 재주도 팔고 합니다. 이왕 내놓고 팔 바에야 광대 물주인들

어떻습니까."

손돌은 한참이나 상체를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가, "정 그렇다면 젊은이들끼리 상의해서

이번 철에 한번 상인들과 같이 나가보지 그래." "해주 관시놀이에 나가기 전에 문화, 신천,

안악장들을 어디 한바퀴 휘돌아볼까 합니다." "벌이가 괜찮고 그 사람들도 믿을 만하다면

이번 출행 계회가 있을 때 한번 의논들을 해보도록 허지."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왜, 점심때가 가까웠는데 밥이나 먹구 올라가잖구." "아닙니다. 집에서두 기다릴 테구 갑

송이두 돌아왔을 텐데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죠." 길산이가 나오려니 부엌에서 물 묻은

손을 치마폭에 감싸쥔 묘옥이 달려 나왔다.

"아이, 지금 막 밥을 안쳐놨는데 점심 들구 가시잖구." 길산이는 그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손돌네 집을 나섰다. 좀 멀어졌겠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사립 앞의 텃밭 모퉁이에 서서 이

쪽을 바라보고 섰는 묘옥의 작은 몸이 보였다. 묘옥은 길산이가 돌아보자 부리나케 울타리

너머로 사라져버렸는데, 그는 어쩐지 뜨거운 물을 삼킨 때처럼 명치가 후끈거렸다. 큰잿말로

올라가는 양쪽의 숲속에서 벌어진 밤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3

박대근이와 길산이네가 추산 마루턱에서 만나 함께 문화 읍내로 들어가자고 약속한 날이

되었다. 큰돌네 패에서 네댓명, 장충네 패에서 길산이, 갑송이를 위시한 칠팔 명이 일대를

이루어 행장들을 차리고 길을 나섰다. 새벽에 광대산에 올라 등성이를 타고 추산 마루턱으

로 내려갔다.

등성이를 걷고 있는 그들의 아래로 안개가 흩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한 시오리 걷고 나니

까 계곡 옆을 지나는 샛길 쪽으로 포교가 포졸들을 거느리고 앉았다가 황급히 흩어지는게

보였다 육모방망이가 아니라 창과 환도를 가진 꼴이 제법 삼엄하였다. 포교가 바위에 일어

서서 그들을 향해 외쳤다.

"왠놈들이냐?"

그들은 모두 더 나아가지 못하고 뚜릿거리고만 있는데, 재차 고함이 들렸다.

"어디서 오는 놈들이냔 말이다."

"재인마을서 오는 길인데, 왜요.....?"

앞섰던 큰돌이가 대답했다.

"광대들이라구?"

"예 읍내장에 가는 길입니다."

털벙거지들끼리 뭐라구 잠깐 수군대더니 또 외쳤다.

"한 놈씩 이 앞으로 지나가거라. 일일이 기찰해볼 테니....." "온 제미랄 ..... 기찰은 다 뭐

여, 보문 모르남. 뒤져봐야 두 쪽인데 호통질은....." "저 뒤에 막 쳐 놓은 꼴 봐라. 밤새우고

지킨 모양인데." 수군대며 큰돌이 먼저 그들께로 다가갔다. 길 양쪽에서 창끝이 당장 꿰일

듯 노리며 큰돌의 좌우로 불쑥 솟았다. 여차직하면 맞창을 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어! 어유 이거 이러지들 마슈. 공연히 실착했다간 산적꽂이 되겠네." "뒤져봐."

포졸 하나가 잽싸게 달려와 장고통을 멘 큰돌의 아래위를 주욱 흝었다. 전대도 한번 불끈

쥐어 흔들어보고 행전도 주물러본다.

"그 다음....."

하는 식으로 광대들 전원이 몸뒤짐을 당했다. 갑송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왜들 이럽니까요?"

그들의 호패를 일일이 조사하고 나서, "화적당이 출몰한 걸 모르는 모양이군."

하며 포교는 돌아서버리는데 나이든 포졸 하나가 나서서 설명했다.

"이 사람들아, 죽구 싶어서 그래? 큰길루 다녀야지 산으루 떼지어 다니다간 먼 데서 살

맞아 죽는다구."

"화적패가 구월산 중에 드문두문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뭐 가진 게 있어야 낯짝이라두

보지요."

"자그마치 스무명이 떼를 지어 다닌다는데 요사이 자비령 쪽에서 패가 갈려서 구월산으로

옮겨 왔다는 게야."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수작하고서 그들은 등성이를 넘었다. 아래로 송화와 장연서 오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가

보였고, 대근이네 상단이 숲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쉬고 있는게 보였다. 짐 벗은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보상들은 모여 앉아 담배를 피웠다. 박대근이가 마주 나왔다.

"약속을 지켜줘 고맙수. 자, 이건 우선 약조금인데 다섯 꿰미 오십냥이우." "원 이렇게 후

하게 주십니까."

큰돌이가 엽전꿰미를 받아들며 황송해하였다. 쌀 몇말에 하룻밤을 새워 잔치 흥을 돋우고,

부역 대신에 관아에 불려가 갖은 조롱과 멸시로 해내야 되었던 연희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

었다.

"자 모두들 가세."

그들은 술렁술렁 짐을 지고 말에 싣고 하면서 문화쪽으로 내려갔다. 우선 보상들이 앞서

고 뒤에 짐 실은 말들이 따라갔고, 사이사이에 자위하는 장정들이 한 사람씩 끼여 섰다. 길

산이와 갑송이, 대근이는 맨 뒤에 쳐져서 쫓아갔다. 길산이가 말했다.

"헌데 소문 들었습니까. 자비령 쪽에서 산사람들 패거리가 구월산으로 옮겨왔답니다. " "

예, 객줏집에서 들었소. 보나마나 농사짓다 주림을 참지 못해 작당한 오합지졸들이겠지.

그만한 놈들쯤은 스스로 막아낼 준비가 되어 있수."

"만만히 여겨지진 않습디다. 내 매부가 만나서 혼쭐이 빠졌던 모양인데 우두머리의 덩치

가 제법 장하더랍니다."

박대근이가 껄걸 웃어젖혔다.

"장총각답지 않게 겁을 먹는 거요?"

"성님은 우릴 뭘루 보우?"

갑송이가 불끈했고, 길산이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 마을에서도 몇 년 전에 죄를 짓고 산으루 들어간 자가 있었습니다. 헌데, 새루 왔다

는 자들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갑디다. 인명을 가벼이 아는 짓으로 보아 지금 산중에는 그

자들 뿐일 것이오. 기왕에 서넛씩 식솔을 거느리던 자들은 죽었거나 다른 데루 밀려났을 게

란 말이지요."

박대근이가 말했다.

"장총각..... 도적 중에도 큰 도적이 있습니다. 시골 부자나 살상하는 그런 도적이 아니라....."

"큰 도적?"

박대근이가 빙긋 웃었다.

"차차 사귀면서 내 얘기해 주리다."

박대근이는 더 이상 얘기를 계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천읍 외곽인 죽령방 부근에 이르

러 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짐을 풀었다. 대근은 차인 하나에게 부담을 지운 말을 끌게 하고

서 아전을 만나러 관아로 들어갔고, 큰돌이네는 풍류를 잡히며 읍내 장터를 길놀이하고서

죽령방의 풀밭으로 돌아갈 적정이었다.

죽령방의 드넓은 풀밭에는 곧 장을 벌일 준비가 되었고, 각종 연희를 위한 놀이판이 치러

졌다. 피리와 날라리의 방정맞게 들까부는 소리와 장고와 꽹매기 때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앞세우고, 광대들이 더덩실 춤을 추면서 문화 읍내를 빠져나와 죽령방으로 향했는데, 읍내

사람뿐만 아니라 장을 보러 나왔던 장꾼들과 들일 하던 초군 농부들이 호미를 던져두고 그

들의 뒤를 따랐다.

박대근이는 향청에 들어가 문화의 이방이란 자를 만났고, 부담마에 실어온 선물을 바쳤다.

이방은 그것으로는 부족한 표정이어서 파장뒤에 장세 오십냥을 따로 바치리라 했다. 이방은

흡족하여 상방에 통인을 시켜 현감께 아뢰고 개시를 허가했다.

광대들이 죽령방에서 놀이판을 벌이고 새 장도 선다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서 드디어

정오쯤에는 훈련원을 지나오는 길이 사람들로 하얗게 뭬워졌다. 놀이는 오전 한차례 그리고

오후에 한차례 있을 예정이었고, 파장 정에 씨름판을 벌이기로 했다. 박대근이는 갑송이의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우승한 자에게는 젊고 힘센 나귀 한 마리를 내리리라 공표했는데,

그 나귀는 상단의 재가막 옆에 오색실과 조화며 구리방울로 장식되어 매어져 있었다. 읍내

의 장이 무더리에서처럼 몽땅 죽령방으로 옮겨온 형편이었다. 한편에서는 거래가 활발한데,

놀이판 주변의 신명은 이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드높이 부풀어 있었다. 음식장수와 술장수

들이 놀이판의 사방에 와서 멍석들을 깔아놓았고, 관객들은 놀이판 주위에 빽빽이 안고 서

고 했는데, 탈판을 보아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대개는 모두들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신들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춤사위가 바뀔 적마다 사람들 중에 흥이 센 자가 뛰쳐

나와서 광대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하였다.

다음 마당으로 넘어갈 때 길산이는 땀에 흠뻑 젖어 놀이판 뒤의 개복청으로 돌아와 탈박

을 벗고 탁주 한 사발을 마셨다. 박대근이가 다가왔다.

"이만 하면 기천냥 이문은 문제없을 듯하오. 내 당신들게 백냥 더 주리다. 무더리 때보다

훨씬 장이 번성했고 이번 장에는 특히 사슴가죽을 많이 구했소." "씨름판은 어떻게 되었지

요?"

"끝날 때가 되었수."

"그리로 가봅시다."

그들은 연회장을 천사산 쪽으로 보이는 개천가 모래밭에 세워진 씨름판으로 갔다. 낮술을

들이켜서 불콰해진 사람들이 제 동무를 응원하는지 고래 고함을 내지르고들 있었다.

빙 둘러앉은 가운데로 모래를 두텁게 깐 씨름판 위에서 웃통을 벗어 부치고 다리에 샅바

를 감은 두 장정이 황소처럼 씨근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메태기를 쳐버려라!"

"뭘해, 걸어 걸어! 안으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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