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흥이 다시 내달으며 달근이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자 그는 뒤로 넘어지듯하다가 팔랑개
비처럼 재주를 팔딱 넘으면서 멀찌이 물러섰다.
"싸움하겠다더니 다람쥐처럼 도망만 다니면 젤인가?"
선흥이 투덜대면서 아예 잡을 생각도 않고 코를 풀더니 둔덕 위로 슬슬 올라가는 것
이었다.
"쳇, 이따위 싱거운 싸움질은 못하겠네."
이때 뒤로부터 달려온 달근이가 뛰어오르면서 선흥의 목덜미를 끌어안아 꺾으려고 힘을
썼다. 힘은 썼으나 선흥이 기운에는 당할 상대가 없는지라 한번 손을 뻗쳐 달근이의 앞섶을
잡자마자 바싹 끌어 앞으로 메다 꽂았다. 달근이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엉치뼈가 으스러졌
겠지만 워낙에 살판에서 곤두질로 익힌 몸매라서 다리를 세워 버티며 일어선 자세였다. 선
흥이 잡았던 앞섶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머리 위로 치켜들어 공중잡이로 한참동안 맴을 시
킨 뒤에 멀찍이 휘익 내던졌다. 달근이가 거꾸로 박히기는커녕 오히려 제 몸을 솟구쳐 껑충
뛰어올라 두어 바퀴를 돌고서 똑바로 서버렸다.
"아따, 거 희한한 재주일세."
"집어던지지 말고 우리 뭐 병장기라두 가지고 싸워보지."
"옳지. 나는 병장기가 따로 없으니 나무나 한그루 뽑아 쓸까?"
고달근이는 강선흥이가 두 뼘 굴기는 좋이 되어 뵈는 나무를 흝어잡이로 수월하게 쓰윽
뽑는 것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강선흥이 나무의 잔가지를 툭툭 쳐내고
중둥이를 뚝 꺾어 손아귀에 쥘 만한 길이로 만들어 쥐었다. 그제서야 고달근이가 허리띠 뒤
에 꽂고 있던 장죽막한 길이의 말채를 뽑았다. 그가 말채에 칭칭 감긴 채찍을 털어내듯 하
고 나서 허공으로 죅 흩뿌리니 쌩하는 날카로운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세 팔 길이쯤
되는 채찍이 윙윙거리며 돌아갔다.
선흥이가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달려드는데 달근이의 휘두른 채찍이 휭 날아가 선흥의 뺨
을 때렸고 붉게 피맺힌 자국이 생겨났다. 선흥이 얼굴을 찡그리고 주춤했으며, 이어서 채찍
은 선흥의 몽둥이를 잡은 손등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어디를 때려주랴. 콧잔등, 귀, 눈알까지 마음먹은 대로 떼어주겠다. 납방울을 떼었으니 망
정이지 달아두었더라면 제 살점이 한움큼씩 떨어졌으리라."
"까짓 당나귀 궁둥이나 두드리는 것으로 내뚝심을 당하겠나?"
강선흥이 앞으로 몇걸음 내닫는데 다시 날아든 채찍이 그의 콧잔등을 호되게 때리고 지나
갔다. 거의 눈마저 네 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날아든 채찍이 강선흥의 사지를 곳곳마다 찟
어놓았다. 분기탱천한 성흥이가 전신에 채찍을 맞아가며 파고들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고달
근이는 여유있게 뒤로 물러서며 채찍을 휘두르다가 채를 잡은 손을 뒤로 뿌리치지 않고서
앞으로 내민 채 힘을 끊으니 채찍의 끝이 몽둥이에 뱀 서리듯 겹겹이 감겼다. 휙 낚아채는
데 그만 불시의 일이라 선흥이는 몽둥이를 놓쳐버렸고, 퉁겨오른 몽둥이가 드놓이 올라갔다
가 멀찍하게 떨어져버렸다.
"자, 이젠 졌으니 굴비두름을 내어놓아라."
고달근이가 곰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떠올리고 양양하게 말했다. 그는 말채를 땅에 늘어
뜨리고서 한번씩 퉁겨 보이곤 하였다.
"잡히기만 하면 병아리처럼 모자기를 비틀어줄 테다."
선흥이 제 결기를 이기지 못하여 두 팔을 앞으로 내뻗고 벽력 같은 고함 소리로 덤벼드는
데, 고달근이는 재빨리 채를 들어 휘둘렀다. 채찍이 선흥이의 안면을 또 한번 후려갈기는 듯
하다가 앞으로 뻗친 손목에 휘감겼다. 선흥이 한번 휘감긴 채찍을 잡자마자 두어 번 틀어서
웬만한 힘에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움켜잡았다. 달근이가 당황하는 기색이 농후해졌고 선흥
이는 채찍을 몇번 당겨보고 나서 껄껄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 마음대루 휘들러보아라."
달근이가 두 손으로 말채를 당기는데 선흥이는 전혀 기운도 쓰지 않건만 꿈쩍도 않는다.
강선흥이가 휙 당기자 달근이의 손에 채가 빠져나왔고, 그는 돌아서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끼놈... 어딜 달아나니?"
강선흥이가 태산처럼 덮쳐 달근이의 몸을 두 팔째로 껴안고 쳐들었다가 땅바닥에 메어쳤다.
"어이쿠!"
강선흥이는 전혀 몸을 사릴 틈도 없이 멱살을 잡아 위로 치켜들었다.
"어디에 처박아줄거나?"
청산내의 모래밭을 두리번대던 선흥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사당패와 묘옥이가 한데
어울려 않은 둔덕 위로 올라왔다. 사당패들은 저희 모가비가 봉패를 당했는데도 전혀 개의
하지 않고 키들대며 웃고 있었다. 강선흥이가 그를 치켜들고 둔덕을 올라 밭고랑을 따라갈
때에야 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가려는가를 알고 배를 잡으며 웃어댔다.
"얘얘, 이젠 좀 놓아다우. 내 상목 쓴 거 물어내라지 않을 테니."
"가만 좀 있어. 좋은 거 먹여줄게."
"뭘 먹여준단 말이냐?"
"난생 처음 먹는 것이니 좋은 보신 될 게다."
"내 잘못되었네. 내려놓아주면 상목 끝동 떼어내어 술 사줌세."
"헤헤, 잘못 요동치면 등뼈 부서져. 자, 조금만 더 가자구."
선흥이가 달근이를 쳐들고 가는 곳은 바로 밭고랑 가에 패어 있는 거름구덩이였다.
명년 봄을 위하여 모아놓은 거름에 더께더께 굳은 딱지가 앉아 두꺼비 잔등 같았는데 물
기라고 조금도 없어 보였다. 선흥이는 구덩이 앞에 서서 달근이를 금방 내꽂기가 못내 아깝
다는 듯이 몇번이나 추스려 보았다.
"거꾸로 박아주랴, 아니면 곧추세워주랴?"
"여... 여보게 상목 다 내줄 테니 던지지 말게. 나는 옷이 단벌이여."
"가이새끼! 옷 버릴 걱정이네. 네 입으루 밥알 들어갈 일이나 걱정하렴."
"던질려면 멀찍이 서서 던져야 힘이 가지 이 사람."
"멀찍이서 던지면 또 메뚜기 사촌 모양 팔딱팔딱 뛸려구... 에라, 실컷 처멀어라!"
인정사정없이 선흥이는 거름구덩이에 고달근이를 내팽개쳤다. 다리와 팔은 위로 쳐든 채
달근이는 궁둥이부터 떨어졌다. 두텁게 덮여 있던 인분의 거죽에 균열이 갈라지면서 속으로
누런색이 드러났다. 드러난 것도 잠깐이요, 진흙에 돌맹이 박히듯 달근이는 아래로 쑥 빠져
들었다가 몸을 가누며 일어나는데 이미 얼굴의 반쯤이 인분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면서 구덩이에서 기어나오는데,
"망할 자식 같으니, 쇠도적눔 같으니, 날아가는 화류병을 콱 잡아다가 자모전가에 맡겨놓
구 이자만 조끔씩 뜯어 대대손손이 물려받을 자식 같으니."
"에, 더럽다 퉤퉤, 무서운 게 아니라 드러워서 너하군 싸움 안할란다."
"이놈아 기왕이면 꺼내다가 저 냇가에두 던져다우."
"별놈 다 보겠네. 아랫녘말에 물맛 버릴까봐 못하겠다."
강선흥이 실컷 놀려대고 나서 휘적휘적 밭에서 나가버린다. 겨우 구덩이에서 기어나온 고
달근이가 엉거주춤 선 채로 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분풀일 했으면 굴비라도 내놓고 가. 우리 식구 길양식 허게."
"언제 네 녀석이 재주 팔았데?"
강선흥이가 사람들께로 와서 지게를 지려다 말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고달근이를 돌아다
보았다. 그는 씩 웃고 나서 웃음판이 터진 사당패의 가운데로 선뜻 굴비 두 두름을 꺼내어
던져주었다.
"똥 처먹은 자식은 주지 말구, 거 색시들이나 먹어라."
"고마워요, 총각."
달근이가 궁둥이를 뒤로 빼고 양팔을 좌우로 쳐들고 엉기적걸음을 걸어오다가 다시 소리
쳤다.
"얘얘, 가지 말아라."
강선흥이는 지게를 지고 둔덕을 내려가다가 돌아보았다.
"왜 불러... 이번엔 오줌이 먹구 싶냐?"
"이름이나 남기구 가거라. 어디 사는 뉘 집 자식이냐?"
"선흫이와 달근이는 서로의 하는 짓들이 별로이 고깝지 않고 시원스러워 인사를 나눌 기
분이 내켰던 것이다.
"장연의 소금장수 강선흥이다. 너는 누구냐?"
"허 이놈아, 장유유서한데 말 좀 놓지 마라, 나는 안성 고달근이다."
"상판대기가 정말 드럽게두 생겨먹었구나."
"이놈 내는 천생이 곰보딱지라서 그렇지만 네 녀석은 꼭 밀물에 걸려나온 망둥이새끼처럼
눈깔은 불거지고 주둥이는 하두 두터워 썰면 세 접시는 좋이 나오겠다."
"누가 재담하재? 나는 간다."
"강선흥이와 묘옥이 함께 둔덕을 내려가니 사단패들이 제각기 한마디씩 떠들었다.
"총각들 안녕히 가시게."
"잘난 서방님 해주서 봅시다."
묘옥이 못내 말을 걸고 싶어하던 애사당을 돌아보고 웃어주니 그 여자는 아예 자지러져
버렸다.
"애고 내 간장 다 녹네!"
강선흥이도 농을 던질 기분이 났는지 묘옥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저년들이 댁네와 정분을 맺으면 맷돌이 될 줄 모르는가베."
중화 시각을 해지점에서 많이 흘려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걸을을 재촉하였다. 해지점에서
해주까지가 칠십 리 길이었다. 미륵한 중턱을 넘어 뱀고개를 지나 돌못에 이르니 먼길을 처
음 걷는 묘옥이 발이 부르트로 물집이 생긱데다 절뚝거려서 자연히 길이 늦어지게 되었다.
워낙 걸음 빠른 강선흥이의 뒤를 좇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수양선의 서쪽 줄기인 문산에서 시작한 돌못내의 굽이치는 물결이 길을 따라서 계속되는
데 왼편은 전나무와 은행나무의 울창한 숲이었고, 숲 가운데 서원의 기와지붕들이 보였다.
그들은 영유벌이 내려다보이는 안장고개 마루턱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해주서 나오는 듯한
장꾼들이 넘어오다가 역시 고갯마루에서 그들의 곁에 앉아 다리쉼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
은 저희끼리 얘기하는 중에,
"자네, 주내방 사거리에 갔었나?"
"아니, 나는 근양문 앞에서 재가에 들렀다가 왔지."
"이 사람하구 주내방 사거리 저자에 나갔다가 차마 못 볼 꼴을 보았네그려."
"사람이 죽었다며?"
"허허 참 목숨이란 별게 아니더군, 칼로 내리치니 모가지가 뚝 떨어지는데, 몇번 꿈틀대다
가 그만이더군."
"그런 걸 왜 보구 섰었나. 나 같으면 아예 얼씬도 않았을 거야."
"군관들이 나와서 기둘을 꽂구 설치길래 뭔가 해서 기다리구 섰었지. 참형받는 죄수가 끌
려나올 줄 알았나."
"하필이면 저자바닥에서 사람의 목을 칠 건 또 뭐야."
"이 사람아 그래야 모두들 구경하구 중죄를 짓지 않잖나."
"아니, 그보담두 사방이 통한 네거리에서 죽은 귀신이라야 발동을 못하거든. 길에서 죽으
면 텃귀신이 못되는 법일세."
"하긴 장사치가 저자에서 참형하는 걸 보구 나면 이문이 많이 생긴다네."
"재수 좋겠구먼. 그나저나 나는 우리 집사람이 요번 산달인데 안 볼걸 그랬어."
하면서 얘기들을 나누니 곁에 앉았던 묘옥의 귀가 번쩍 열리는 듯하였고, 이를 짐작하는
강선흥이도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주에서들 오십니까?"
묘옥이 물었고, 강선흥이도 잇달아 말을 걸었다.
"오늘 주내방서 참수형이 집행되었소?"
"예, 그러합디다."
묘옥이 아득해지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바싹 다가들었다.
"죄수의 이름이 뭔지 아시오?"
"글세... 화적죄를 지었다는... 뭐라든가?"
"사람을 셋이나 죽였답디다. 한 목숨으로는 모자라지. 제 모가지가 서넛 된다면 모르되...
죽어 마땅하지."
"이름은 모르시나요?"
"예, 죽은 도적의 이름을 알아 무엇하겠소. 저자에 죄명과 죄수의 이름이 걸렸는데 자세히
봤어야지."
묘옥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서 바삐 일어났고 강선흥이도 지게를 지고 따라 일어섰
다. 묘옥은 벌써 눈물이 글썽해져서 앞이 보이질 않았고, 마음만 급하달뿐 맥빠진 다리로는
걸음이 걸려지지 않았다. 강선흥이가 묘옥을 위로했다.
"너무 염려 마오. 혹시 다른 사람일지두 모르지요. 또한 판결 송시가 끝났다 할지라도 나
라에서 좋은 일이 생기면 모면할 수도 있지 않겠소. 나두 해주 가면 아는 이가 많으니 어떻
게든 옥바라지에 도움이 되도록 해드리겠소."
묘옥은 억지로 눈물 어린 얼굴을 들어 끄덕이며 강선흥이의 말에 대꾸했다. 그들은 파장
이 되어가는 주내방에 황혼 무렵에야 당도하였다. 드믄드믄 주막의 등롱이 내걸려 있었고
아직 돌아가지 않은 장꾼들과 숙소를 찾는 장사치들로 저가는 시끄러웠다. 그들은 주막에
들어가 국밥을 시켜 놓고 중노미에게 말을 시켜보기로 하였다.
중노미 사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아하여 두 닢의 돈을 주고 나서 죽은 죄수가 누구인
가를 물었다.
"글쎄올시다요. 이름이 뭐라든가... 음. 하여튼지 광대랍니다."
"광대요? 어디 강령이나 운진 아니래요."
"아니오. 옳지 문화에서 나온 광대라구 그럽디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네."
묘옥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장길산... 아니었나요. 문화 광대 장길산."
"맞았어요. 어떻게 아슈? 문화 광대 장길산, 화적 살인 대죄인이라구 그럽디다."
묘옥은 기운이 빠져서 넋을 잃고 앉았는데 강선흥이가 아무래도 안되겠던지 대신 물었다.
중노미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게 느꼇음인지 자기도 침울한 내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연고가 있으면 동강방에 재다 놓구 찾아가도록 하지만..."
"연고자가 없었을 게요."
"그럼 송림방으로 가보우. 차부가 싣고 나갔을 테니까."
강선흥이는 시체가 바닷물에 잠겨 있음을 알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중노미가 엽전 두
닢어치의 얘기를 모두 끝내고 손님 시중을 나섰다. 강선흥이 말없이 술을 마시고 앉았는데,
묘옥이 봇짐을 들고 일어났다.
"저는 이제 가봐야 되겠습니다."
"아니 어디루 가신단 말씀이우. 숙소도 마땅한 데가 없을 텐데..."
"공연히 장사일루 바쁘신데 저 때문에 낭패가 많으셨을 줄 압니다. 저는 해주에 아는 분
이 계셔서 그리루 찾아가 자고 내일 고향으로 돌아갈랍니다."
"내 되짚어갈 제 모셔다 드릴 수도 있는데 그리 서두르시우."
"아닙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내내 복 받으셔요."
강선흥이는 안되었든지 뒤통수를 긁으며 망연히 서 있었다. 묘옥은 누구하고도 제 슬픔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묘옥은 차부가 실어갔다는 길산의 시체를 찾아서 송림방을 향하여 걸었다. 연고자 없는
시체는 바다에 버린다 하였으니 그 근체 어디에라도 찾아가서 길산을 삼킨 물결이라도 만나
고 싶었던 것이다.
해창을 지나다가 수직 군사를 만났다. 묘옥이 사내의 목소리를 꾸며 물ㄹ었더니 그는 아
래위를 훑어보고 나서 되물었다.
"화적놈이 버려진 데는 알아 뭐한다구 물어."
"예, 우리 가형인데 진작부터 마음을 고치지 못하여 식구들의 애를 먹이더니 드디어 관에
잡혀 죽었습니다. 허나 인생이 불쌍하여 재라도 올려줄까 하고 여쭙는 것이오."
수직 군사도 묘옥의 고분고분한 말에 더 이상 까탈을 잡으려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고자가 있음을 관가에 알렸으면 시신이나마 수습했을 텐데, 안됐군."
"예, 소식을 뒤늦게 들었습니다.
"산길을 타구 쭉 나가시오. 마을이 하나 나오고 저길 지나 솔밭을 따라가노라면 깎아지른
벼랑이 나오는데 말바위라고 그러지. 말바위 꼭대기가 바로 기요."
"근처에 어디 절간은 없는지요."
"절이라... 가만있자, 송림방 부근에 사자암이란 암자 하나가 있을거요."
묘옥은 곧 지쳐서 쓰러질 것만 같은데도 간힌히 기운을 내어 산길을 오르니, 저녁놀의 남
은 빛이 멀리 퍼져 있는 수평선이 바라다보였다. 먼 해변 마을에서는 연기가 올라왔고 소나
무와 측백나무 숲에는 짙은 어둠이 덮여 있었으며 바다 위로 검은 수면을 뒤집고 픝어지는
물결이랑의 힌 거품들이 내다보였다. 마을에 방금 켜지기 시작한 관솔불의 희미한 빛들이
들판 가운데 점점이 빛나고 있었다. 묘옥은 새삼스럽게 솟는 눈물을 닦지 않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고향을 떠나던 새벽에 내다보던 중화의 갯가와는 달랐다. 이제는 가슴이
두근거릴 것도, 무서울 것도, 미지의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저 고해와 같은 세상이 그녀의 어
두운 등뒤로 흘러 지나간 것이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길산 2권 (12) (0) | 2026.03.22 |
|---|---|
| 장길산 2권 (11) (0) | 2026.03.21 |
| 장길산 2권 (9) (0) | 2026.03.19 |
| 장길산 2권 (8) (1) | 2026.03.18 |
| 장길산 2권 (7) (0) | 2026.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