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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2권 (11)

카지모도 2026. 3. 2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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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마을을 지나 송림 사이를 헤맨 끝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로 지어진 사자암을 찾아

냈다. 누구 주승에게 허통을 넣을 것도 없이 승려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마침 부엌 봉당

에 질펀히 앉아서 군불을 때고 있는 중이었다. 불빛이 어른거리는 아궁이를 들여다보고 있

는 불승은 몹시 외로워보였다.

"스님."

묘옥이 찾았으나 그는 여전히 아궁이 속의 불빛에 눈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스님."

"무슨 일인지 말씀하시오."

승려는 여전히 아궁이를 향한 채로 조용히 말했다.

"기도를 드려줍시사구 찾아뵈었습니다. 시주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승려가 고개를 돌려 묘옥을 돌아보았다.

"나는 혼자 공부하는 행자라서 염블은 폐하고 있소이다. 암자를 찾지 마시고 수양산의 큰

절루 찾아가보시지요."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저는 계집입니다. 주인이 억울하게 참수형을 당하시고 송림방 말

바위께에서 버려졌다 하온데 넑이라도 걷어갈까 하여 스님을 찾았습니다. 가엾고 한맺힌 혼

을 부처님께서 거두어주시도록 도와줍시오."

묘옥은 다시 깊숙하게 허리를 굽혔다.

"벌써 기도는 드렸소이다."

승려가 그제사 일어나 마주 합장하면서 부엌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저기 언덕길이 환히 올려다보이지요. 가끔씩 감영 전옥에서 나오는 수레가 참

형당한 시체를 싣고 이곳을 지나갑니다 오늘도 지나갔지요."

하더니 승려는 누더기로 기운 회색 장삼을 걸치고 앞장을 서는 것이었다.

"아낙이시라니 그럼 소승이 행보를 하겠습니다. 길안내를 해드리지요."

"스님, 고맙슴니다."

그들이 송림방을 지날 때에 귀신의 울음 같은 밤바람이 부르짖으면서 숲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승려는 가지고 나섰던 싸릿가지 홰를 쳐들고 여러번 부시를 쳐서 불길을 일으켰다.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바윗길이 가파르고 험해졌다. 승려가 뒤떨어진 묘옥에게로 횃불을 높

이 쳐들어 비춰주면서 물었다.

"주인장의 죄목은 무엇이오?"

"예, 감영에 줄을 댄 무뢰배들과 싸웠다고 화적죄를 씌웠어요."

"설령 화적질을 했다 치더라도 별 죄 될 것도 없소이다. 먹지 못해 굶어죽는 죄가 더욱

크지요. 나두 가끔 도적질을 합니다."

하면서 승려는 나직하게 웃었다.

"스님께서 도적질이라니요..."

"우리네는 신선과는 달라서 소나무껍질이나 풀뿌리를 캐먹고 학을 타고 다니지를 못하지

요. 그렇다구 도학 하는 선비처럼 글로 끼니를 때우지도 못합니다. 밭을 일구어서 곡물도 내

어 먹지만 하도 척박하니 농사가 제대루 되어야지요. 그래 가끔 성내 부잣집을 찾아가 도적

질을 한답니다. 재물이 많은 자들은 그것을 잃을까 염려하여 우리네보다 근심 걱정이 많으

니까요. 그만큼 신심도 깊지요. 신심이래야 별게 아니라, 물건인 부처님상이나 부적 따위들

에 꼼작 못하는 것입지요. 소승은 주로 부적을 그려 팔기도 하고 주역도 보아줍니다. 이것이

도적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소. 내 양식감만 조금 남기고는 모두 해남골서 조개 줍고 사는

가난뱅이들게 나눠주는데... 시주 받아 대들보를 올리고 기와를 얹어 찬란한 금불상을 들어

앉힌 절을 지어 무엇하겠소이까. 다 도적질 밑천을 장만하는 짓이지요."

묘옥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승려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하였다.

"이런 저녁에 많이 배우지요."

파도가 때리고 마주쳐 부서지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찬 절벽을 향하여 두 사람은 올라갔

다. 승려에게는 익숙한 길이었는지 습기에 젖어 미끄럽고 비탈진 바윗길을 그는 앞장서서

재빨리 올라갔고, 묘옥은 몇번이나 넘어질 듯한 몸을 가누곤 하였다. 바람으로 횃불의 볼꽃

이 뒤로 바싹 잦혀져서 금방 사그라질 듯 팔딱였다. 말바위에 오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

래로 날뛰는 바다의 흰 물결이 요란하게 벽을 때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바다 저편은 이미

캄캄한 어둠이었는데 괴물 같은 파도가 연이어 몰려오고 있었다. 묘옥은 이 너른 물 밑 어

딘가에 잠겨서 깊은 바다 밑바닥으로 흘러갔을 정든 사내의 덧없는 육신을 생각하였다. 그

녀는 바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서 눈을 감았다. 곁에서 목어를 들고서 나직하

게 읊조리는 승려의 염불소리가 들렸다.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니 시고로 수보리야 보살은 응이일체상하고 발 아뇩

다라 삼먁삼보리일세."

죽은 자에게 넋이 있어 애절한 뜻에 닿는다면 바다 위에서 떠올라이 벼랑 끝에 화답해 올

지도 몰랐다. 그러나 절벽을 때리는 바다의 포효하는 소리만이 들려왔고, 세상의 온갖 찌꺼기

들을 쓸고 핥고 어루만져서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파도는 마치 세월과도 같았다. 묘옥의 가

슴속에서는 이미 첫밤의 더럽고 끔찍한 상처가 닳아져 없어진 것처럼 길상을 잃은 슬픔도

곧 뭉개어져 세월에 씻기어 사라질 것이었다.

"나막 살바다타 아다바로기제 옴 삼바라 삼바라 훔 나모 소로바야 다타아다야 다냐타 옴

소로소로 바라소로 사바하..."

묘옥은 물결에다 제 기구한 몸을 떠내려 보내어 어딘가 아무도 모를 기슭에 도달하고 싶

었다. 그 여자는 순간적으로 벼랑에서 뛰어내리려는 동작으로 몸을 굽히며 앞으로 나섰고

승려가 재빨리 묘옥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억센 힘으로 묘옥을 끌어당겨 벼랑 끝에서 물러

서게 하였다.

"슬픔에 잡히지 마시오."

묘옥은 온몸에서 맥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승려가 염불을 그치더니 차분하게

얘기를 꺼냈다.

"목숨이란 돋는 햇빛에 스러지는 이슬과 같은 것이지만 영롱하게 초목을 적시듯 아름답고

귀한 것이오. 부처님께 마음을 의지하고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일처럼 제 인생을 사시오. 건

강하게 살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나누어주어야 하오. 알고 보면 이렇게도

소중하게 쓰일 목숨을 함부로 저버린단 말이오."

"스님, 저는 더럽고 천한 창기였습니다. 이젠 달리 살아갈 길도 없습니다. 또다시 색주가

에 얹히든지, 아니면 죽든지, 끝으로 니승이 되는 길이 남았습니다. 거두어주시겠습니까?"

"아니되오. 승려와 창기가 무슨 다를 바가 있겠소. 불심은 모두 같은 것이오. 댁네는 진흙

탕에 빠져 있다더라도 본성을 잃지 않을 사람이오. 거짓이 없는 마음과 부처와 같은 평안한

사랑을 행하도록 애쓰며 살아가시오. 댁은 이미 많은 것을 베풀었는지도 모르오. 잃은 것이

아니라 보시한 것이니 찾으려 하지 마오."

"잃은 것은 다시 찾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요."

"잃어버릴 것이 없도록 모두 베풀어버리시오. 남는 게 없다면 얻으려고 안달을 하지도

않을 테니까."

승려는 길게 한탄하듯 웃고 나서,

"이 미욱하고 병든 것이 또 한번 날마다 되풀이하던 법문이랍시고 장광설을 폈소이다. 나

무 관세음보살..."

묘옥은 어느덧 마음이 가라앉아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괴이하게도 사람을 안

정시키고 힘을 내게 해주는 이상한 중을 향해 물었다.

"스님은 누구십니까?"

"까짓 천한 땡중에게 누구냐구 물어 무엇하실려오?"

"스님의 법명을 일러주십시오."

"여환이라 하오."

여환이라는 승려는 다시 목어를 때리며 염불을 외었다. 밀물이 시작되자 파도는 점점 높

아져갔고 벽을 때리는 물보라가 절벽 위에까지 끼쳐 올랐다. 아우성치는 파도소리를 뒤에

두고 그들은 말바위를 떠났다. 송림방으로 되돌아오자 여환스님은 묘옥에게 권유했다.

"마땅한 사처가 없다면 소승의 암자에서 묵어 가십시오."

"아닙니다. 제 염려는 마셔요. 성내에 가서 묵겠습니다. 여환스님의 말씀은 언제나 지니고

살아가겠습니다. 이제 참말 강한 계집이 될 것만 같습니다."

"불쌍하고 천한 것들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부세의 인연으로 뵙고 소승은 물러가오."

승려는 누더기 장삼을 휘적이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묘옥은 송림을 벗어나서 하염없이

산길을 걸었다. 사방 천지로 길은 달리고 있건만 제 초라한 몸을 붙일 산천은 아무데도 없

었다. 묘옥은 문득 해지점에서 만난 고달근이네 사당패를 떠올렸다. 지금쯤은 사금터 부근

마을에서 놀이를 끝내고 쉬고 있겠지. 내일 정오에는 주내방 사거리 저자에서 연희를 놀것

이었다. 정처없이 흘러다니며 이 저자 저 고을에서 노래와 춤을 파는 물풀과도 같은 생활이

떠올랐다. 묘옥은 벼랑 위에서 제 몸을 던저 물의 흐름에 맡기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끝간데 없는 길 위로 떠나보내고 싶었다.

묘옥이 주막 봉놋방에서 장꾼들에 섞여 새우잠으로 설친 이튿날 점심때가 되어서야 고달

근이네 안성 사당패가 주내방 저자로 들어섰다. 저자 임방을 통하여 놀이 허가를 얻어내고

곧 놀이판이 이루어지는데 묘옥은 모가비 고달근이를 찾아갔다. 달근이는 첫눈에 묘옥이 여

자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불알 없는 총각이 왜 날 찾나?"

"저두 패거리에 끼워주셔요."

"그 황소 아재비 같은 미욱한 녀석은 어디다 떼치구 그래."

"길동무였는데 헤어졌지요. 패거리에 끼어주실래요, 어쩔래요."

고달근이는 유쾌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키들키들 웃어대며 묘옥의 어깨를 두드렸다.

"노래나 춤은 할 줄 알아?"

"색주가에서 삼 년을 굴러먹었지요."

"허 그 참 잘되었군 그래. 우리네 거사 한 놈이랑 짝지어주지. 노래나 부르고 팔도강산 유

람을 다니겠다, 가는 곳마다 제 맘에 닿는 대로 님도 만나겠다, 그야말루 봄바람같이 훨훨

날아 다니는 팔자지."

"헌데 소청이 한가지 있어요. 나는 사내라면 딱 질색이거든요. 거사대신 애사당 하나와 인

연 맺게 해주셔요."

고달근이는 찌푸린 눈으로 묘옥을 한참이나 살펴보았다.

"어쩐지 남장을 했더라니... 뭐야, 맷돌이란 말여? 자네가 수동무를 하고 홍령이가 암동무를

한다 이거지. 그럼 행하는 자네가 물어낼 텐가?"

"행하라니요?"

"꽃장사를 해야지. 허나 재예만 출중하다면, 우리 청룡사에 시주나 들게. 홍련이는 자네가

계집이라면 몹시 실망할 게라. 이름이 뭐여?"

"묘옥이에요."

"해주엔 뭣하러 왔나?"

"어디 기방에나 붙일까 하여 왔는데 적당한 곳이 없군요."

고달근이는 맞춤한 사당을 하나 얻게 되어 몹시 흡족한 기색이었다.

"잡가나 춤은 할 줄 알겠지."

"춤뿐인가요, 잡가에 타령에 엮음도 하지요."

"자 오늘은 첫날이나 주막에 가서 기다리게. 아마 저녁때엔 신참례를 톡톡히 치를지두 모

르니 푹 쉬라고."

"내일 떠납니까?"

"떠나야지. 날마다 떠나는 게야."

묘옥은 고달근네 사당패에 끼여들어 남쪽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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