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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2권 (12)

카지모도 2026. 3. 22.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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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비증비욕

 

송상 배대인네 집은 남산 아래 있었는데 깊은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아흔 간이 넘는 대가

였다. 배대인은 아들 하나를 두고 딸을 셋이나 낳았는데 그 귀한 아들마저 배냇병신이었다.

장성하여 이십세가 넘었건만 아직도 징징 울며 보채고 옷에 멋대로 방분하는 바보였고 가족

들은 배대인이 늘그말에 아들을 보겠다고 산삼을 많이 먹어서 그리 되었다고 말들을 하였

다. 위로 두 딸은 같은 상인 신분의 부잣집에 시집을 보냈고 이제 십팔세로 접어든 막내딸

이 후원 별당을 지키고 있었다. 세 딸 중에서도 막내는 영리하고 정숙한데다가 특히 배대인

이 귀여워하게 된 것은 이재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십육세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배대인 행상단에 차인으로 다니는 자가 있었는데 마누라는 일찍부터 배대인네를 드나들며

여러 가지 잔시중을 들곤 했었다. 특히 귀엽고 활발한 막내딸에게는 유모처럼 정이 각별하

여 설빔도 손수 지어주었고 관등놀이나 다리밟기 같은 때에는 제 등에 업고 나가서 구경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한데 어느해에 삼남 쪽으로 행상을 나갔던 그의 남편이 객줏집에서 노

름을 하다가 지방 불량배의 칼을 맞고 죽어버렸던 것이었다. 과부가 되어 혼자 살아가기에

는 또한 남은 자식이 여럿이요, 늙은 부모가 며느리만을 바라보고 남아 있으니 앞이 캄캄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알고서 막내딸은 그 아비 배대인께로 아나가 백 냥쯤 도와 줄 것을 청

하게 되었었다.

"우리 송상은 돈 알기를 목숨보다 중히 여긴다. 아무 까닭 없고 노력 없는 일에 백 냥은

커녕 일 전도 내어서는 안된다. 그 여편네가 당장 굶어서 죽는 것도 아니니 부지런히 품을

팔아 살아가면 될 것이다."

하며 배대인이 거절을 하였으나, 막내딸은 또라지게 응수하는 것이었다.

"누가 거저 쓰쟀나요, 이자까지 붙여서 한달 안으루 갚으면 되지요."

"이자를 붙인다... 그렇다면 내 백 냥은 내어주마. 그 대신에 담보를 잡아야겠다. 네까짓

게 담보 잡힐 만한 물건이라도 있느냐?"

"예, 있습니다. 제 나이 이제 십육세이오니 이팔이 넘어 성혼을 시켜주시겠지요?"

"그래서..."

"다른 건 몰라두 노리개며 패물은 해주시겠지요."

"그거야 앞으루 몇 년이 지나야 할지 모르지 않느냐?"

"각서를 받으십시오. 만약에 제가 백 냥을 갚지 못하게 되면 혼숫감은 물론 패물도 받지

않겠습니다."

배대인이 어린 계집아이의 소견으로 거래하는 법과 신용을 나누는 일과 바른 일에 열을

내는 것을 보고 은근히 마음속에 기특하여 응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찌하나 시험해보고

싶어서 두말 없이 각서를 받고 제 딸에게 돈 백냥을 내주었다. 막내딸은 돈을 가지고 사랑

에서 나가더니 거의 갚을 기한이 차도록 한번도 나타나는 적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긴 이번 일로 네가 이재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이다음에 살림 경제를

꾸릴 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배대인은 아예 백 냥이 돌아올 것은 바다지도 않고서 기한이었던 날을 맞았다. 그날 저녁

에 계집아이가 맨손으로 들어왔다. 배대인은 짐짓 얼굴에 노기를 꾸며서 꾸짖었다.

"이년, 돈 백 냥을 어찌 할 테냐?"

"아버님 너무 서둘지 마시고 고정하십시오."

하더니 뒤에 감추고 있던 어음을 펴서 내미는데 백이십 냥짜리가 아닌가. 배대인은 그것

이 가짜인가 하여 이리저리 뒤적였으나 낯익은 거래인의 수결이 있으니 틀림없는 어음이었다.

"누가 만들어주더냐. 네 어미가 곤경을 면해주려고 만든 모양이구나."

"아니올시다. 제가 아버님께서 꾸어주신 백 냥으로 삼백오십 냥을 벌어 그중 원금을 제한

이백삼십 냥에서 이백 냥은 이천 아주머니 주막을 열 밑천으루 드리고, 삼십 냥을 제가 부

린 차인들 행상비로 지불 하였습니다."

배대인은 놀라고 궁금하여 딸에게로 바싹 다가 앉으며 은근하게 묻자, 막내딸은 빙글거리

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돈을 얻어 나가는 즉시루 사람을 시켜서 요즘 시중 약재 중에서 가장 헐값인 것이 무엇

인지 알아오게 하였지요. 납가새 풀뿌리인 택사가 지천인데 한 근에 이 전이요, 두 근에 삼

전, 엿 근은 오전이라구 하데요. 재가에 남아 있는 아버님 차인들 중에서 다섯 사람을 임시

로 고용하여 송도 곳곳에 있는 약국에서 택사를 사들이게 했어요. 약국 주인들은 얼씨구나

하고 모두 털어내 주었지요. 열흘 동안이나 이렇게 사들이구 나니까 택사가 완전히 동이 나

버렸어요. 며칠 있다가 약국을 돌아다니며 택사를 찾으니 한근에 여덟 돈으로 값이 뛰었어

요. 택사를 약간 덜어서 풀었는데 약국에선 두어 전의 이문 때문에 다투어 사갔지요. 고의로

약간을 내어서 그 값에 전부 거두어들이니까, 일년 중에서 서너 근 팔릴까 말까 하던 택사

가 거래가 활발해진데다 동이 나고 품귀해지니 다시 열흘 뒤에는 한 근 값이 이십 전으루

올랐지요, 매번 사나흘 또는 대엿새 사이를 두어 번갈아 차인들을 바꾸어 많이 사들이고 적

게 내니 값이 나날이 올라가 한달 사이에 한 근 값이 오십 문이나 되었습니다. 그저께부터

차인들이 약국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선전하기를 지금 시골 약국에서는 택사가 급히 소용되어

값을 묻지 않고 많이 사들이려 한다구요. 그리곤 마바리에 싣고 나간 돈꿰미를 내보였답니

다. 약국 주인들은 단 한 근의 재고도 없는데 현금을 보고는 모두 애가 달아서 이런 판국에

택사만 있었다면 이득이 클 텐데 공연히 팔았다며 아쉬워했다지요. 그래서 바로 어제부터

택사를 삼사십 전 가격으로 냈더니 약국 사람들은 씨가 말랐던 뒤끝이라 반가워하고, 게다

가 시골 약국에서 급히 구한다는 소문에 너도 나도 사들이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백 냥으로

삼백오십 냥을 벌게 되었습니다."

배대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딸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나서 조금도 기쁜 빛을 띠지

않으며 말했다.

"백 냥으로 삼백오십 냥을 벌어들인 것은 잘한 노릇이다. 그러나 이문 이백오십 냥에서

성실한 노력이 깃들지 않았으니 이러한 재물은 뿌리가 없어서 또한 쉽게 나가버릴 돈이니라."

"한달동안 차인들이 저자를 헤맸는데 성실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인 말씀이십니까.?"

"첫째, 속임수를 쓰지 않았느냐. 헛소문으로 거래를 활발하게 하여 일단 이문을 보았으되

신용을 잃어 다시는 그런 이들과 거래를 트지 못할 것이다. 장사는 신의를 쌓아올리지 않으

면 도적질 같은 짓으로 지탄박게 되는 게야. 둘째로, 싸고 헐한 약재를 택한 것이 잘못이다.

부는 풍족한 자에게서 얻어야 하고, 일반 가난한 자들의 원망을 받으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쉽게 취하여 쓰는 약재를 매점하였으니 피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

다. 끝으로 셋째는 상도를 타락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런 축재가 알려져 그 방법이 널리 퍼

지면 시장은 마비되고 말 것이니라. 허나 그 용은 그릇되었으되, 취재는 제법 잘하였다."

이리되어서 배대인은 그의 막내딸을 팔푼이 아들보다 훨씬 믿음직스럽게 여겼던 덧이다.

또한 파주 박진사의 서자라는 박대근이가 상단에 나타나 유능한 수완을 보여서 행수를 시킬

적에, 배대인은 그들이 좋은 배필이 될 것이라고 은근히 작정해두었다. 인품도 그러려니와

허우대도 멀끔하여 누가 보기에도 믿음직했고, 자신이 늙어 더이상 사업을 하지 못할 적에

는 데릴사위로 집안을 맡기려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배대인의 대근에 대한 신임은 두터

워져갔으며 주위 친척들이나 상단 사람들도 모두 박대근이를 젊은 주인처럼 여기게끔 되었

었다. 박대근이가 갑송이와 더불어 몇사람의 치인들에게 엎혀 초주검이 되어서 나타나자 배

대인네는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배대인은 박대근의 상단이 제법 높은 이득을 올리고 돌

아왔지만 관원들과 다투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몹시 노하여 대근이를 따라갔던 늙은 차인들

을 단단히 꾸짖었다. 갑송이과 박대근이는 바깥 사랑채를 썼는데 갑송이도 외로웠고 해서

둘이 한방을 쓰면서 몸조리를 하였다. 그동안에도 박대근이는 갇혀 있는 길산이 염려되어

잇달아 사람을 해주로 보내서 기별을 알아오게 했었다. 그리고 은밀히 교제용의 돈냥과 물

건을 감영 쪽에 들이밀었던 것이다.

한달 만에 갑송이는 약간 절뚝이며 걷게 되었고, 박대근은 오랫동안 쉬고 좋은 약재를 달

여 먹은 효험이 있었는지 전보다 더욱 원기 왕성해졌다. 먼저 보냈던 차인에게서 해주 길산

의 소식이 없어 궁금하던 중에 방자를 놓아 보냈더니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때는 이

미 늦가을에 접어들어 정원의 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아침 저녁으로 지붕과 담에 두터

운 서리가 덮였다. 갑송이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마당에 나와 공연히 정원석을 이리저

리 옮기며 기운은 썼고, 박대근은 오랜만에 병서를 읽으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해주

서 돌아온 자가 중문 안으로 들어서자 갑송이가 와락 달려들어 그 소매를 잡는다.

"그래 어찌됐다든가?"

"서방님 어디 계십니까?"

"이 사람, 우리 길산이가 아직 무사헌가?"

갑송이가 손목을 잡고 무지막지하게 흔들어놓으니 방자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손목 부러지우. 장총각은 무사하니까 내 손목두 좀 무사하게 해주오."

마당이 시끌덤벙하여 미닫이를 열었던 박대근도 그 말을 들었는지라,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그래 참수형 집행은 연기가 되었는가?"

"예, 해주서 머무는 김차인 말루는 형방이 적극 손을 써서 대시수로 머물렀답니다. 헌데...

장총각 이름으루 다른 참형수가 죽었지요. 시방 해주서는 장길산이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합

니다."

대근과 갑송이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박대근이는 중얼거렸다.

"음, 계획한 대루 되었군."

"나두 이젠 전보다두 더욱 힘꼴이 땡겨서 못 견디겠으니 파옥하러 가십시다."

벌써부터 길산을 만날 생각과 담장 안에서 썩는 나날이 좀이 쑤시고 진력이 나 있던 갑송

이가 신이 나서 말했다. 박대근이는 방자를 놓았던 자에게 두둑이 주어 보내고는, 갑송이와

겸상하여 반주를 들면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였다. 형방과 옥사장에 손을 써서 다른 참형

수로 일단 죽음을 바꾸어놓았으나 길산의 목숨이 몇 달 연장되었을 뿐이고 차일피일 끌다가

감영에서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즉시 죽는 몸이라 시각을 지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감영의 옥을 친다는 것은 무리일뿐더러 큰 난리이니 조정에서도 가만

있지는 않게 될 것이오. 다만 내게 한가지 꾀가 있은즉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는 참이

었소."

"어떤 꾀유?"

박대근이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하였다.

"내 차차 알려주리다. 헌데 아우님 다리는 어떻소?"

"쳇, 돈닢만한 흉터만 남았지요. 이젠 나무둥치를 한꺼번에 서너 개 뽑아 보일 수가 있수."

"좀이 쑤시는 모양이지. 어떻소, 요 며칠 상간으루 구월산에나 좀 다녀오지 않겠소?"

박대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송이는 벌써 달려내려가 신이라도 꿸 태세로 궁둥이를 들

썩이며 말했다.

"아이구, 우리 성님이 오늘에사 내 심사를 조금 알아주시네. 가는 길에 아주 해주 들러서

길산이 얼굴도 보구 재인말두 휘둘러보구 오지요."

"안되오. 해주 쪽으로는 절대루 가지 마오. 섣불리 거기 들렀다가 주내방 패거리에 들키기

라두 한다면 길산이도 아우도 모두 위험할 테니까. 신가네 패거리가 우리 얼굴을 알고 있거

든. 아예 연안길을 가지 말구 평산길루 돌아서 문화루 들어가오. 그리구 재인말에 갈 때에도

절대루 낮에 닿도록 하지 말구 밤에 들어가오. 장총각이 화적으로 몰렸고, 아우님은 잡히지

않았으니 필경은 두 아우님네 부모님께서 곤경을 치르고 있으리다. 내가 구월산 가서 마감

동이를 찾아보라는 것은, 그의 도움을 얻어 옥에 갇혔을 부모님을 꺼내어 안돈 시켜 놓으란

얘기외다."

조목마다 옳은 얘기를 하는 고로 갑송이는 잔뜩 풀이 꺾여 맥없이 중얼거렸다.

"우리 길산이는 그럼 어찌됩니까?"

"글쎄 내 앞으로 한달 안에 장총각을 살려낼 터이니 염려 말래두. 식구들 일은 감동이와

의논하면 능히 해낼 수가 있을 거외다."

"내일 당장 길을 떠나겠수."

"아니.. 그전에 아우님이 한 번쯤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 며칠 더 있다가 떠나기루 하우."

"내가 송도서 만날 사람이 어딨수?"

"언제 기운 겨루어보겠다던 내 아우 강선흥이 생각 안 나오?"

"그 아이가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우리 객주에 들르는데, 이번 달에는 틀림없이 송도엘 올

게야. 선흥이두 만날 겸 우리가 그동안 집구석에서 밥만 죽여왔으니 흠뻑 놀아볼 겸해서 며

칠 더 있다가 떠나오. 그리구 오늘 저녁에는 나하구 어디 갈 데가 있소."

"어디 기방에라구 데려갈려우?"

"허허, 아우님이 한달 동안 박혀 지내노라구 도인이나 된 듯싶구려, 우선 사람 하나를 만

나 보구 기방에 놀러 가도록 허지."

박대근이와 갑송이는 그날 저녁에 의관 정제하고서 청교방으로 나아갔다. 주막에 들러 박

대근이 술청 안을 휘둘러보다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젊은 사내들에게

말을 걸었다.

"느이 사또 어디 갔느냐?"

"예, 행수 어른 나오셨수? 학선이 성님두 요샌 죽을 맛입니다요."

"어째 사또 나리두 그리 죽을 맛이라면, 우리네 따위 천한 백성은 하나두 살아남지 못하

겠다."

그들은 박대근이의 곁에서 눈을 부라리고 섰는 갑송이가 못내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그들

은 갑송이가 중앙에서 나온 무슨 포도부장쯤이나 되는 줄 여기는 눈치여서 대근을 밀어내고

슬슬 꽁무니를 뺄 태세들이었다. 대근이가 곁눈질로 갑송이를 쳐다보고 나서,

"맘들 놓게. 내 아울세... 학선이 있는 델 좀 가르쳐주어."

"가르쳐주었다간 우리가 경을 칩니다요."

"갑자기 그 성님을 행수께서 무슨 일루 찾으십니까?"

하고 그들은 발뺌들을 하였다. 박대근이가 주모에게 청하여 다시 약주 술에 고기 닷 근을

내오게 하고 나서 말했다.

"내 한턱 쓸 테니 잘들 마시게나."

"어유 이거 무슨... 술을 이렇게까지..."

"내가 학선이를 찾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 때문이야."

박대근이가 말하자 두 사내는 영리한 눈을 반짝이며 서로 마주보고나서 다른 하나가 지그

시 눈을 감고 끄덕여 보였다. 한 사내가 앞장을 서면서 말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학선이가 죽을 맛이라니 또 뭘 저지르구 몸을 피하는 중인가?"

"그게 아니라, 고용을 사는 중입니다."

"아니... 깍정이로 이름나서 뺀뺀한 사또가 고용을 살다니 거참 천지개벽할 일일세. 그간에

마음을 고쳐먹구 일손을 잡았단 말야?"

"글세 따라와보시면 안다니까요."

그들이 안내하는 자를 따라서 청교방을 벗어나 성내로 들어갈 때, 어언 주위를 살피니 홍

등이 즐비하게 걸려 있고 풍악소리가 일어나는 못골 근방이었다. 송도 또한 돈 흔코 계집

흔한 고장이라 기방이 유명한데 못골의 기루에는 절색이 많았었다. 박대근이가 무엇을 알아

챘는지 싱겁게 웃읍을 터뜨렸다.

"또 노름빚에 몸이 잡혔구먼."

"이거 큰탈이 났습니다. 이번에는 자그만치 백오십 냥이니 못 살아두 이삼 년은 살아야

탕감이 되겠네요."

몸집 작은 사내가 약삭빠른 눈을 굴리며 호소하는 눈짓으로 대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박대근이는 그의 말이 구실일 뿐 사실은 학선이가 다른 기생을 물고 기둥서방으로 들어앉아

투전판의 자릿세를 받는다는 것을 대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몸 잡은 년이 언년이냐?"

"헤헤헤 그야 행수 나리두 아다시피 춘래 아니겠습니까."

"허, 그 서방에 그 계집이로다."

사내는 등이 내걸린 대문 앞에 이르러 길게 불렀다.

"이리 오너라!"

안에서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성맞춤으루 되었네. 사람도 찾고 기방에도 오게 되었으니 오늘 아우님이 놀 복이 터졌

구려."

박대근이가 말했으나 갑송이는 뭔가 심사가 틀렸는지 툴툴거리며 받았다.

"보아하니 건달 오입쟁이 녀석을 만나려나 본데, 그따위 것들하고 우리넨 성깔이 맞지 않

아 난 갈라우. 요담 강선흥이가 오면 그때나 놀지요."

"선흥이두 좋겠지만 이학선이란 놈두 제법 재미나는 놈이니, 아우님은 곁에서 꼴이나 보

며 노시게."

계집아이가 대문을 열더니 앞서 있는 학선의 부하를 보고 대뜸 코방귀를 뀌어버렸다.

"쳇 지까짓 게 뭔데 오너라 가너라야."

"예끼 년! 내 등뒤에 누가 오셨나 봐라. 배대인댁 서방님이시다."

"에그머니 행수 나리 오셨네."

하며 하녀가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서며 대근이 물었다.

"학선이 예 와 있는냐?"

하녀가 새침해져서 말했다.

"허구헌 날 뒷방에서 나오지두 않구 지내시는데 우리 아씨 속을 얼마나 썩이는지 몰라요."

몇패거리가 와 있는지 방안이 제법 화들짝하니 웃음판이 벌어져 있었다. 그들은 장지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박대근이는 윗목에서 가야금 줄을 고르던 춘래에게 인사를 건넸다.

"평안하오. 무사한가?"

"서방님 어서 오십시오."

"선래손들 좀 조입시다."

먼저 와 앉았던 자들이 아무 소리 없이 자리를 내며 물러났고, 잠시후에 졸개의 전갈을

받은 학선이가 부리나케 달려나왔다. 좋은 옷을 입고 돈피 배자까지 걸쳤는데 신수가 멀끔

하여 과연 송도의 이름난 건달 값을 할 만하였다. 키는 중키에 콧날이 번듯하고 칠흙 같은

수염이 멋지게 늘어져 있으며, 눈은 총명했고 입에는 언제나 냉소가 흐르는 듯한 인상이었

다. 학선이는 벌써 댓돌 위에서 방안의 사람들 얼굴을 재빨리 확인하고서 그중에 갑송이가

낯선 얼굴임을 알고는 잠깐 노려 보았다.

"자네 오랜만일세. 요즈음 깨가 서 말이라며?"

"성님 오랜만이우. 내 요새 몸값 치러내느라구 밤을 날마다 새워 몰골이 말씀이 아닙니다."

"밤마다 골패쟁이들 셈판해주느라구 벌이가 짭짤하다든데."

"에이... 거 밤참 심부름하느라구 붙어 앉아서 행하 받아먹는 돈이니 오죽하겠습니까?"

"함께 술 한잔 어떤가?"

학선이는 아직 낮잠이 덜 깼다는 듯이 선하품 시늉을 해 보이면서 일부러 관심이 없는 체

해 보였으나, 송도의 이름난 차인 행수 박대근이의 용건이니 몫이 클 줄을 알아 적이 궁금

한 기색은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뒷방에 아직 투전 손님이 들지 않았으니... 그리루 자리를 옮깁시다. 우린 호젓한 델 좋아

하는 성미라서."

"두 손을 들면 딱 소리가 나는구먼. 그렇게 허지."

그들은 학선이의 안내로 뒷방에 둘러앉았다. 잠시 후에 춘래가 왔으나, 학선이는 눈초리를

날카롭게 뜨고서 슬쩍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누가 투전판에 계집을 끼운대. 이 방에 아무두 들이지 말어."

술상이 들어오기까지 박대근이는 장사 나갔던 얘기만을 늘어놓았고, 학선이도 천연스레

맞장구를 치고 앉았다."

"사실은 내 자네에게 부탁할 말이 있네."

박대근이 학선이를 향하여 말했다.

"내게 부탁할 일이라면 뭐 좋은 일은 아니겠군."

학선이는 눈을 교활하게 빛내면서 대근이와 갑송이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자네 요새두 벌이가 신통찮을 땐 가어사 노릇을 하는가?"

"에이 그야 벌써 오래 전 이야기입지요, 요즈음은 관에서두 어찌나 까다로워졌는지 여간

해 속지를 않습니다. 그저 예전에 한양서 판서 댁에 청지기로 있을 제 눈 귀 동냥한 지식으

루 제법 대감 흉내를 냅니다만, 고작해야 속는 것들이 시골 양반이나 아니면 말단 하리들입

죠. 그래 부탁할 일이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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