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물을 뜯으려도 기운이 있어야지요. 안방에서 마루를 건너오는데도 한식경이 걸린 듯하
오. 뭘 잡수셔야 글두 읽으실 테니 읍내 가서 장이라두 보아오시구려."
하며 그의 처가 보를 던지는데 펴보니 한 묶음의 머리타래였다. 얹은 가체를 즐길 대가의
아낙이 탐내어 사들일 만한 탐스러운 머리카락이었다. 김기는 별반 감동도 없이 수건을 쓴
아내의 머리를 힐끗 올려다 보고 나서 그것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도림골서 읍내까지 시오
리 길을 걸어가는데 흉년의 붉은 해가 중천에 솟아 땅을 뜨겁게 태우고 있었다. 햇빛만이
붉은 게 아니라 말라서 먼지가 풀썩이는 황톳길은 더욱 붉었다.
그는 간장에 물을 타서 몇모금 들이켜고 나온지라 몸이 허하여 땀은 비 오듯 하였다. 읍
내 장거리에 도달했는데 저자는 한산했고 물물교환이 간혹 있을 뿐이었다. 방물은 사치품인
지라 머리타래를 곡물로 바꾸는 일은 하루 종일 가봤자 이루어지지 못할 듯싶었다. 교환은
곡물과 옷감끼리가 고작이었는데 역시 곡물을 가진 자가 교환의 주도권을 잡았다. 누구 하
나 찾아와 거들떠보는 자가 없더니 일찍 파장이 되었다. 그는 들고 있던 아내의 머리타래를
다시 보에 싸들고 읍내를 나서다가 평안도로 나가는 어느 벼슬아치의 내실 행차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댁 하녀가 길을 묻다가 말이 오가게 되어 마침 가체를 구하려던 내실마님이 김기
의 물건을 사게 되었는데 길양식을 내었는지라 쌀 닷 되밖에 내주니 못하였다. 김기는 쌀보
를 들고 먹지 않아도 배부른 마음으로 걸음을 빨리하였다. 오랜만에 쌀을 갖고 보니 문득
같은 처지로 굶주리고 있을 벗들이 생각나서 도저히 집으로 가는 걸음이 가벼워지질 않았
다. 김기는 저도 모르게 같은 훈장질로 고생하는 친구 서선비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마을에는 지사 노릇 하는 또다른 친구도 살았고, 이웃 마을에는 의생하는 선비가 살았
던 것이다. 김기가 서선비의 집에 당도하니 그들 두 양주와 아이들이 차례대로 방에 누워서
기력을 아끼고 있는 중이었다. 김기는 쌀자루에서 두어 되 남짓을 덜어내어 나물죽 끓이기
를 청하고서, 이어서 부근에 흩어져 사는 동접 친구들을 불러모으도록 하였다. 가난으로 서
로의 방문도 꺼리고 적조했던 벗들과 만나 오랜만에 학문에 대하여 토론하고 싶었던 것이
다. 주림 중에 맛난 음식이 있고, 벗이 있고, 또한 학문을 논할 수 있으니 과연 가난이란 벗
들끼리 더욱 다정하게 만드는 또다른 새로운 벗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해서 네 사람의 친
한 동접이 마루에 모여 앉아 고담준론을 나누고 있을 적에, 서선비의 아내는 부엌에서 취사
를 시작하였다. 화제가 자연히 흉년을 지나는 백성들의 곤궁에 관한 걱정으로 번졌다가 다
시 종정의 속수무책인 무능한 정치를 비난하게 되었고, 이윽고 봉산군수의 탐학한 정사를
공공연히 비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군수는 이번 흉년에도 수천 냥을 벌었다는군. 이를테면 환자 갚을 때 붙인 구호미 있잖
은가. 다른 대장을 만들어 머릿수를 많게 하여 빼돌리고 국세는 물지 않는다네."
"그뿐인가, 부호들에게서 진발미를 거두어서 착복했다네. 읍내에 가면 솥을 걸어놓고 멀건
겨죽이나 한그릇씩 나누어주는데, 기민을 구제한다고 흉내만 내는 짓이지. 환난이 거듭될수
록 벼슬아치들은 배를 불리는 게야."
"군역도 그렇지 않은가. 이런 흉년에는 모두 면제해주도록 되어 있건만 불알 차고 나온
놈은 모조리 들어 있어 무명을 내야 한다네."
"그런 놈은 감영에 발고하여 봉고파직을 당하도록 해야 되네."
"그렇지, 우리 같은 유생이 글을 써서 알리지 않으면 누가 군수 같은 높은 벼슬아치를 벌
하겠는가?"
"아예, 감영에 올리지 말고 한양에다 상소문을 띄우지."
"향읍 수령이란 백성의 생사 여탈을 쥔 자리인데, 모두들 다투어 외임을 맡으면 평생 먹
을 자산을 장만하는 데만 눈이 시뻘겋게 되어 있으니 아마도 관제가 잘못된 모양일세."
"잘못된 것이야 우리가 벌써 여러번 치른 과거부터가 썩어 있지 않은가."
"혁파되지 않고서는 사람이 다스림을 받을 어진 세상이 아닐세."
"몇년 동안 조정에서는 상례를 가지고 쟁송을 벌여, 그 남은 피가 파당을 갈라 골고루 젖
어 있다네. 원래 성현께서 예를 논하실 제 사람의 생활에 맞는 규범을 그때마다 적절히 정
한 것이지, 어디 형식에 매이라던가?"
"그렇지... 실제로 사는 일과 멀어진 학문은 형식에 기울게 마련이고, 형식에 기울면 고집
스러워지고, 그러면 정지되어 썩으니, 지금의 현실과 멀어진 학문은 곧 썩은 관료와 손을 잡
게 되게 마련일세, 나는 차라리 학문을 때려치우고 싶다네."
"아니, 백성을 위한 학문을 해야지. 우리가 글을 앍는 동안 그들은 땀을 흘렸으니, 그 글
로써 갚아야지."
"내 재미있는 경험담을 해볼까. 어느때, 옹진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마침 시골 툇마루에서
이슬을 피하게 되었다네. 그날이 마침 제사여. 옳다 잘되었다. 객지에 나와서 술과 고기를
좀 얻어먹겠구나 싶었지. 제사 구경을 하노라니 축문이고 지방이고 뭐고 없더군, 그도 그럴
것이... 무지한 농투성이가 글을 알겠는가, 예법을 배웠겠는가? 이 자가 밖으로 나가더니 두
손을 앞으로 하여 정중히 허리를 구부리며 문간으루 들어선단 말이야. 그러더니 연신 뭐라
고 중얼거리면서 음식을 들었다 놓았다 하더군. 나는 자는 체하구 실눈을 뜨고서 보구 있었
네. 그러더니 제 아내를 끌고 들어가 제상 앞에서 흐드러지게 방사를 벌이는 모양이더군. 생
각들 해보게. 제삿상을 펴놓고 방사를 하다니 그것이 어찌 성현이 가르친 예의인가. 나는 도
저히 참을 수가 없데그려. 잡아서 그 고을 관가에라도 일러 고약하게 상풍한 죄를 다스리겠
다고 결심을 하였지. 그래서 방사가 끝났을 제 일어나 의관을 차려 입었네. 두 연놈이 일어
나더니 다시 제상에 절을 하고 나서 아까처럼 정중하게 두 손을 앞으로 치켜들고 밖으로 나
갔다가 들어오더군. 나는 다짜고짜로 호통을 내질렀네. 네 이 고약한 것들 같으니 무슨 그따
위 제사가 있단 말이냐 했지. 그랬더니, 그자가 하나도 놀라지 않고서 공손하게 절을 하더
군. 즉, 그자의 말에 의하면 높게 배우신 선비와 자기네 같은 불학무식한 것들의 예법은 다
르게 마련이라더군. 그자는 밖에 나가서 제사를 받아 잡수시러 오시는 귀신을 모셔들인 걸
세. 모셔다가 손수 음식을 권하며 꼭 생시에 하던 대로 약주까지 공손히 따라드린 뒤에, 이
제껏 자식이 없어 귀신께서 돌아가실 적에 걱정하시겠으니, 부부 합환하는 것을 실제로 알
려드린 것일세. 그리고는 다시 배웅하고 돌아온다는 얘기였지. 나는 그자의 말을 듣고 문득
화를 냈던 내가 부끄러워지데. 그렇지, 그 앞에 가서 축문을 멋진 문장으로 지어 읽고, 곡을
해대고 절을 연거푸 해댄다고 귀신인들 편할 리가 있겠는가? 아마도 음식이 목에 걸리겠지.
중요한 점은 그 마음일세. 생시처럼 모신다는 그 마음으로 보면 무지한 농군의 제사는 성현
의 가르침을 가장 합당하게 따른 것이 아니겠는가."
"거 훌륭하고 지당한 말씀이로군. 실생활의 사정에 따르지 않은 공론이란 아무것도 배우
지 않은 농부의 지혜에도 훨씬 못 미치는 것일세."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 썩은 정치와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제의 모순에 이르렀을 때, 여태
까지 잠자코 앉아서 김기와 다른 두 선비의 말을 듣기만 하던 서선비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우선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입고 나서 백성도 있고, 나라도 있는게 아닌가. 나는 이
젠 가난한 학문의 길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졌네."
그때에 지사 하는 선비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돌아앉으면서 말하였다.
"조금씩 안락함을 참으며 도를 실천함이 과거를 준비하는 일보다 더욱 중대하고 귀한 일
일세. 몸을 닦음이 보다 원대한 일이요, 벼슬을 하자는 것은 그 수단을 얻자는 뜻이 아니겠
나. 벼슬을 얻어 호의호식 할 생각으로 글을 읽는다면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 학문도 망하
고 몸도 망치며, 가문도 패가해버릴 걸세."
바로 그때에 부엌에서 서선비 아내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서선비를 선두로 모두
들 방문을 밀치며 뛰어나가 보니, 그 아내가 피투성이로 뒹굴고 있었다. 기력이 없는데다 마
침 한여름이라 마른 마무가 없으니 빈 뒤주를 뜯어 식칼로 땔나무를 다듬던 모양이었다. 칼
로 나무를 쪼갠다는 것이 실수하여 선반에 늘어진 제 젖을 찍었던 것이다. 피투성이 가슴에
찢은 옷자락을 싸매면서 서선비가 길게 탄식하였다.
"내 어찌하든 이 가난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는데 서선비의 눈에는 핏발이 섰고 이는 굳게 아물려 있었다. 참지 못한 지사와 의생이
제각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한마디씩 하였다.
"자네는 분명히 선비의 몸을 버릴 인간이니 차후부터는 상종하지 않겠네."
"가난에 여한을 품은 자는 비록 제 처자에게도 사람됨을 잃는 법일세."
그래서 두 선비는 우의를 끊겠다며 훌훌 나가버렸고 김기는 서선비의 독하게 부릅뜬 눈
앞에 멍하니 섰다가 제 집으로 돌아갔다. 그해의 흉년은 곧 전염병을 몰고 와서 아이들이
죽어갔다. 해를 넘기자 다시 환난은 지나갔건만 서로의 마음을 잃어버린 벗들은 다시 모이
지를 않았다. 서선비가 봉산군수와 바둑 친구가 되어 오락가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가운데
김기는 한양으로 떠났던 것이다.
김기는 한양으로 떠날 때 전부터 고리대금업으로 악명이 높던 도림골의 여첨지에게로 찾
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가거나 집안에 긴히 써야 할 돈이 급히
필요할 때에는 으레껏 여첨지의 자모전가로 찾아가던 때문이었다.
여첨지는 앞에도 김기가 말했듯이 원래 내수사의 노비였었다. 소문에 의하면 제 주인을
팔고 면천된 다음에 받은 상금으로 치가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자였다. 즉, 제 주인의 정적인
우의정 대감께 주인의 비위 사실을 고하고 집안이 구몰된 다음에 황해도 땅으로 도망쳐 왔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력은 곧 권력과 잇닿는 세월인지라 첨지의 공명첩을 사들인 뒤에 지방 세력가로
변해버린 것이다. 여첨지의 횡포는 봉산 부근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김
기는 제 집 문서를 들고 여첨지를 찾아갔느데, 만약 그가 벼슬자리를 얻어 돌아오게 되면
그가 심한 행패는 하지 못할 것이고, 빚을 갚아 낼 자신이 있었다. 의외에도 여첨지는 선선
히 빚돈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안장 올린 나귀까지 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은근히 수작
하기를, 만약에 한양 가서 환로를 트시거든 자기의 취재를 도와달라고 하였다.
자기는 다른 것은 원하지 않고, 다만 자비령 남녘의 궁방전의 관리를 맡게 해달라는 것이
었다. 아니면 둔별장이나 고직의 이권을 부탁드린다고 하였다. 여첨지의 뜻은 백성의 곡물
수세를 가로채겠다는 얘기였다. 묵묵부답, 돈만 받아가지고 나온 김기는 만약에 운이 좋아
내직에 품이 높은 벼슬이 떨어진다면 손을 써서라도 그 돼지를 벌하리라 결심하였다. 하나,
그가 두어 달이나 한양서 지체하며 돈을 떼이는 사이에 봉산에서는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었
다. 두 가지의 일이 서로 관련을 가지고 일어나게 되었었다. 지사일을 하던 선비가 봉산군수
의 탐학한 정사를 발고하는 글을 적어 감영에 보냈는데 그것이 군수의 아는 자에 가로막혀
되돌아왔던 것이었다. 지사 선비의 글에는 봉산 유생 대여섯 사람의 성명이 적혀 있어서 모
두들 득달같이 풀려나온 나졸들에 의하여 결박지어져 관가로 끌려갔다.
한양 가서 없는 김기만을 빼놓은 동접 선비들과 평소에 불만이 많던 선비들이 모두 그 글
에 관련되어 곤경을 치르었다. 그때에 서선비가 친구들을 배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형
국을 받는 자리에서 친구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무고를 터뜨렸고, 좋은 이용거리가 생겼다고
믿은 사또가 이 사건을 모역에 관한 것으로 다루게 되었다. 서선비는 곧 풀려났고, 지사 선
비나 의생 선비, 훈장 선비 등등 그의 친구들은 매에 못 이겨 숨지고, 풀려나온 사람들도 반
병신이 되었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달포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일단 어긋난 사람이란
애초부터 그릇된 길을 걷던 사람보다 더욱 악행을 거듭하게 마련이니, 그것은 사람이 결국
제 자신과 싸우게 되는 때문일 것이다. 제 자신이 밉고 부끄럽고 자책으로 견디지 못하는
그만큼, 세상이 온통 자기를 비난하고 있다는 외로움에 싸이는 것이다. 배신하는 자는 스스
로를 쏜다. 그가 행하는 모든 짓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 화살이기 때문이다. 동료
선비들을 무고에 의하여 살해한 서선비는 치욕스럽게도 중인이나 얻어 하는 좌수직을 타내
게 되었다. 아전이 탐욕스러운 고장의 정사가 어지럽기로는 마치 쥐가 가득 찬 대가의 부엌
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선비는 일단 향소의 좌수가 되자 그가 뼈저리게 겪었던 가난의 원수를 갚기 시작하였다. 여첨지는 기한이 되도록 김기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집과 몇뙈기 안되는 밭을 차압하였
는데, 나졸을 거느린 서선비도 동행을 하였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고개를 숙이고 듣기
만 하고 있던 김기의 아내가 갑송이를 향하여 말했다.
"첨지와 좌수가 둘이서 왔었어요. 나졸놈들이 세간살이들을 모두 마당으로 내던졌지요. 저
는 아이들을 달래노라구 정신이 없었고, 어머님이 손이 발이 되도록 여첨지께 빌었어요."
그들은 마당에 끌어낸 세간들 중에서 농짝이나 문갑 같은 좀 깨끗한 물건들은 모두 압류
하였고, 쓰잘 데 없는 옹기와 고리들을 내주는 것이었다.
초겨울의 찬바람이 씽씽 불어대는데 갈 곳도 없는 김기의 가족들은 울부짖으며 사정하였
다. 가족들을 내려다보던 여첨지가 문득 김기의 열일곱살짜리 맏딸아이를 내려다보더니 다
짜고짜로 손목을 덥석 잡아 끌어내는 것이었다.
과년한 처녀의 손목을 잡는 것도 포악한 짓이려니와 이를 말리려던 김기의 아내가 달려들
어 여첨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니 그자는 발길을 들어 아랫배를 내질렀던 것이다. 김기의
노모가 서선비에게 달려들어 웃자락을 붙잡고 호소하였다.
"여보게 자네는 일찍이 내 아들의 친구가 아니던가. 이 늙은 것을 봐서라두 좀 말려주게."
그러나 서선비는 노모의 손을 뿌리쳤고, 김기의 노모는 땅에다 엉덩방아를 찧고 자빠졌었
다. 서선비가 말하기를,
"내 비록 한때에는 친구였다 하나, 관가의 밥을 먹는 이상 사감을 가질 수 없소. 또한 그
자들이 대개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역적임을 아지 못하였으니 이제 와서 어찌 친구
의 우의를 논하겠소이까? 나는 관가에서 나온 좌수이지, 여기 놀러 온 게 아니외다."
행악을 부리는 여첨지보다도 냉랭하고 침착한 서선비가 더욱 끔찍해져서 김기의 가족들은
하릴없이 울기만 하였다. 몸부림치는 김기의 맏딸을 나졸들에게 지워 끌어가면서 여첨지가
말하였다.
"네 주인이 오거든 계집아이를 담보로 데려간다 해라. 빚돈을 따져보니 밭과 집으로는 탕
감하기 어렵겠다. 관가에서도 허락한 일이다. 만약에 다음 기한을 어기면 계집아이는 색주가
로 넘겨버릴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김기 부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했고, 갑송이도 분노가
끓어올라 몇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아니 그렇다면 더욱 우리들이 힘을 합쳐 쳐죽일 생각은 않구, 오히려 구월산엘 한사코
가지 않겠다는 건 또 뭐요. 이놈들을 당장에 때려 죽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온 가족이 자진
하는 게 낫겠소."
"이두령은 모르시는 말씀이오. 노모께서는 가문을 생각하고 계신 거요. 우리 집안이 그래
도 옛날에는 벼슬길에 올랐던 적이 있었고, 몸을 닦고 학문에 정진했던 유생의 집안이지요.
헌데 내가 만약에 구월산에 들어가 녹림패가 되어버리면 우리 집안은 완전히 구몰되고 어머
님 당신 대에 와서 화적의 집안이 되어버린다는 게요. 다시 과거공부를 하여 높은 벼슬을
하기 전에는 이 고장을 떠나는 것은 안된다는 말씀이지요."
"가문은 뭐 말라비틀어진 게요. 요즘 세월은 악독한 자가 득세하는 판인데. 여러 말 할 거
없수. 원수는 갚아야겠는데, 저놈들을 요정을 내면 나리가 무사하지 못할 게요. 이 길로 온
가족을 구월산에다 이사 시키고 그 여식두 찾아와야 될 게 아니오."
"어머님 생전에는 못할 짓이지요."
"염려 말우. 내 우격다짐으루 들쳐업어다 모실 테니."
"여보! 그애를 찾아오셔야죠. 이제 어느 세월에 다시 과거공부를 하실 테유."
"이미 벼슬할 생각은 없소. 다만 어머님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뿐이지."
"이 고장을 떠나자구 말씀드리고 공부는 계속하겠다구 하시면 어머님께서 응낙하실 거예요."
김기의 아내가 애걸하였는데, 그녀는 봉산에서의 생활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다. 김기의
처는 남편이 도적패에 끼였다기에 끔찍하고 두려워서 노모와 함께 적극 만류했었다. 그녀는
갑송이의 험상궂은 몰골에 더욱 놀랐지만, 이제 보니 비록 도적이라 하는 말씨와 행동거지
가 충직하고 인정이 있어 보였다. 김기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뼈에 스밀 정도로 지극한 사
람이었다. 그는 모친이 살아 계시는 동안은 구월산 화적이 될 수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비록 객주에서 갑송이를 만나 부끄럽고 격한 기분에 산채까지 동행은 했었지만 늘 마음 한
편으로는 자기 대에 와서 난신적자의 가문이 된다는 꺼림칙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던 것이
다. 비록 객주에서 갑송이를 만나 부끄럽고 격한 기분에 산채까지 동행은 했었지만 늘 마음
한편으로는 자기 대에 와서 난신적자의 가문이 된다는 꺼림칙한 느낌이 가시질 않았던 것이
다. 한참 동안이나 세 사람의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나서 갑송이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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