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소이다. 이제 나으리의 마음을 알았으니 더이상 권하지는 않겠고, 녹림패의 의리를 고
집하여 칼을 뽑지두 않겠소이다. 그러나 다만 가족들의 정상이 딱하니 조용하고 아늑한 마
을에 이사를 하여 안돈시켜드리리다."
"이두령의 은혜를 두 번이나 입었으니 어찌 다 갚겠소."
"자, 이 밤을 타구 어서 가십시다."
세 사람은 언덕을 내려갔다. 김기의 노모가 놀랄까 하여 갑송이는 멀찍이서 걸었고 김기
가 노모를 업었다. 김기의 처는 누더기와 사금파리만 남은 세간이 버려지는 것을 안타까워
했으나, 갑송이가 인도하는 마을에는 집도 있고 땅도 있다 하여 아이들만 들쳐업고 뒤를 따
랐다. 갑송이는 만동이네 집에 들러 일꾼을 내어 들 것을 만들어 김기 노모를 편히 모신 뒤
에 구월산으로 오르지 않고 산아래를 돌아 수렛고개의 토막으로 향하였다. 갑송이는 구슬리
고 달래어 김기의 가족을 끌고는 나왔으나, 산채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우선 김기의 가족
을 은율 탑고개에 안돈시킨 다음에 김기를 설득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토막에 당도한 것은 동이 훤히 밝아서였다. 만동이네 일꾼들을 거기서 되돌려 보
냈는데, 혹시 지형과 요소를 알아 관에 밀고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토막에서 아침을 지
어 먹고 나서 졸개들을 내어 들 것을 지게한 뒤에 은율 탑고개로 내려갔다. 노모는 답답한
토굴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흰 눈벌판과 평화스럽게 연기가 오르는 마을의 굴뚝들을 대하자
한결 가벼워진 듯 희희낙락하였다. 김기가 갑송이의 둥뒤에서 웃음기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두령이 기운만 장사인 줄 알았더니, 또한 모사이시구려."
"나는 한번 마음먹은 것은 꼭 해내구 마는 성미지요."
"이두령, 봉산을 떠나올 제부터 나는 알구 있었소. 부처고개를 넘어 오며 작정을 해두었소."
"무슨 말씀인지..."
"어머님을 속이더라두 살아 생전에 편히 모셔드리고 싶소이다. 이미 나는 관을 거역하고
녹림패에 발을 담그었던 사람이오. 그동안 믿음을 갖진 못했으나 기왕에 이리되었으니... 구
월산으로 가더라도 원행장사를 나간다구 어머님께 거짓소리를 해야 합니다."
그제서야 갑송이도 얼굴이 환해져서 웃음을 머금었다.
"염려 마오. 우리 모친도 계시고 길산이네 부모님도 계시니 이웃하여 친척같이 지내시리다."
그들이 탑고개를 넘어 나한암을 돌아 괴뢰배마을로 들어서니, 이미 먼 곳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 몇 명이 살피러 마주 나왔다. 그들은 이제는 갑송이를 제 동네 사람으로 여기고 있
어 인사말들을 건네며 반겼다. 새로 지어진 재인말 사람들의 집들 쪽으로 다가서니 큰돌이
며 광대들이 새로 오는 가족들을 동네 사랑으로 모셨다. 아무리 장한들이라고는 하지만 백
여 리를 밤과 한나절에 걸쳐 걸었으니 몸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김기네 식구들은 따뜻한 구
들과 아늑한 이부자리에 누워 쉬는데, 모두들 다시 사는 듯이 즐거워하였다. 특히 그의 노모
가 산천경개가 좋다 하여 자꾸 뜨락으로 나가려는 양을 보고는 김기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김기는 집이 정해질 때까지 사나흘 탑고개에 머물기로 했고, 갑송이만 된목이골로 돌아갔
다. 모두들 궁금히 기다리고 있다가 수렛고개 소두령의 전갈을 받고서 마감동이는 느긋해져
있었다. 갑송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감동이는 여첨지네 자모전가와 집을 들이칠 것을 제
안했다. 우선 김기가 돌아오면 상의하여 거병하기로 의논을 하고 나서, 갑송이는 봉산 읍내
쇠전거리서 만동이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였다.
"그 녀석이 요새 잠채잡이를 하여 가산이 풍족하다네. 천동이가 평안도에 나가 있다는군."
"뭐...쇠요, 금이오?"
"금두 있다더군. 풀뭇간이 제법 그럴싸하던데."
갑송이는 만동이가 요청했던, 잠채를 호위해주고 재물을 나누자던 이야기를 덧붙였다. 감
동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우리 형세가 그 정도까지는 못됩니다. 산마다 숲마다 터가 다른데 남의 목을 잡으
려면 우리가 팔도에 두루 걸릴 것이 없어야 될 겁니다. 만동이가 아직 녹림당의 물정을 몰
라서 그러지요."
"그럴 거 같데. 이제 산채를 올린 지가 얼마나 됐게? 하다못해 자비령과 멸악산까지만 세
력이 닿는다 해두 일세의 활빈도가 될 텐데."
"우리가 기실 활빈도를 자처하고는 있으나, 아직은 형세가 조금 자라난 화적에 지나지 못
합니다."
"차차 커지겠지, 뭐."
"길산이 성님이 나오시면 송도 행수 성님과 의논하여 각처에 산채를 나눕시다."
"길산이는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을 모르고 있을 거야."
하면서 고개를 쳐드는 갑송이의 눈은 금방 어두워졌다. 밖에서 쉴새없이 바람을 불어대더
니 드디어 한밤중부터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부터 이틀 동안이나 눈이 펑펑 쏟아졌고 사흘째 가서야 말끔하게 개었다. 눈이 강
산같이 덮였는지라 된목이골은 마을의 자취도 없이 사라진 듯하였다. 나무들도 온통 눈송이를 뒤집어썼고, 골짜기는 펑퍼짐하게 변하였다. 지붕만이 남아 마을의 흔적을 드러낼 뿐이었다. 두령부터 졸개에 이르기까지 방안에서 뒹굴던 산채 사람들은 모두 뛰어나와 눈을 치우고 길을 내느라고 아침부터 소란을 벌였다. 졸개들은 덫을 놓으러 간다고 설쳤고, 오만석이도 고기맛을 보겠다며 졸개 몇을 끌고 사냥을 나갔다. 갑송이는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나서 탑고개에나 다녀오겠다고 작정했다.
"월정사를 들러 탑고개에나 다녀올까?"
"눈이 많이 쌓였을 테니 며칠 있다 내려가도록 허시잖구."
"도무지 답답해서 원. 김선비는 왜 안 올라오는 거야. 어서 봉산을 들쑤셔버리구 싶은데."
"사냥이나 나가실라우?"
"우리네는 먼저 나갔으니, 우리두 아이들 몇 명 데리구 실토봉 쪽으루 가봅시다. 큰 짐승
이 걸리면 다행이구, 없어도 사슴이나 노루새끼쯤은 만나겠지."
"그럼 슬슬 움직여볼까."
갑송이와 감동이가 각기 장창을 하나씩 꼬나들고 궁수 두엇을 거느리고서 된목이골을 나
섰다. 골짜기에는 눈이 많이 쌓여서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으나 등성이에 오르니 바람 탓인
지 별로 눈은 깊지 않았다. 이 등성이에서 저 등성이로 오르내리며 그들은 특히 골짜기 쪽
이나 얼어붙은 개천 가녘을 살피며 뒤져나갔다.
"여기 있습니다."
아래편에서 족적을 살피던 졸개가 외쳤고 모두들 미끄러지며 비탈을 내려갔다. 과연 큼직
한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으며 다시 그 자취가 실토봉 북면 골짜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눈이 그친 뒤이니 얼마 안됐을 게다. 바싹 쫓아라!"
그들은 발자국을 따라서 오 리는 좋아 될 만큼 걸었다. 골짜기가 후미지고 제법 험하였다.
잣나무와 향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가운데를 들어서는데 무엇인가 거친 숨소리가 들리며
오른쪽으로 내달아 튀었다. 거의 송아지만한 멧돼지였다. 어금니가 한 뼘도 넘게 솟아나와
있었다. 감동이가 외쳤다.
"크게 둘러싸라!"
갑송이는 별로 흥이 나질 않았으나 기왕에 나선 김이고, 또한 실물을 보니까 잡아야겠다
는 생각이 들어서 멧돼지가 달려간 쪽의 등성이로 뛰어올라갔다. 멀찍이서 아래로 내몰려는
생각이었다. 갑송이가 등성이에 올라선 갑송이는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갑송이가 등성
이에 올라서며 무심코 실토봉 남면의 분지를 내려다보니 웬 사내하나가 부지런히 아사봉 쪽
으로 걷고 있었다. 작은 봇짐을 등에 짊어졌고, 가죽 배자 간편한 차림에 개잘량까지 덮어썼
는데 가끔씩 멈춰 서서는 주위 지형을 살피는 것이었다. 꼴을 보아 초행일시 분명한데 이런
겨울철에 삼 캐는 놈도 아닐 테고, 구월산 깊은 골에 민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놈은
분명히 관에서 나온 정탐꾼인 듯하였다. 그는 감동이를 손짓하여 부르고 나서 낯선 사내를
손가락질하였다.
"틀림없이 기찰포교나, 응모한 정탐꾼인 듯 하네."
"하여간 나오긴 잘 나왔수. 놈이 아사봉 기슭에 이를 때 잡아 죽입시다. 우리가 먼저 가서
지형이 좋은 곳을 지켜야겠수."
"사로잡아야 허네. 죽일 땐 죽이더라두 뒤를 캐봐야지."
마감동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한가지 꾀가 있소이다."
그들은 멧돼지 잡을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졸개들을 거두어 아사봉 쪽으로 바삐 움직
였다. 그들은 된목이골로 들어서는 산기슭에서 양쪽의 숲에 눈구덩이를 파고 숨어서 낯선
사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감동이가 한 졸개에게 낮게 속삭여 무엇인가 지시했고, 졸개는 길
가운데 나아가 눈밭에 엎어져 있었다. 잠시 후에 입김을 길게 헉헉 토하면서 사내가 나타났
다. 어슬렁대며 올라오던 사내가 길 위에 자빠진 사람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는 다시 헛기침을 뱉고 나서 자빠진 사람 곁에 다가서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더니 손으로 흔들어보았다.
"여보쇼, 여보 죽었소 살았소. 정신차리슈. 안 일어나면 갈 테요."
그래도 자빠진 졸개는 죽은 듯 널브러져 있는데, 갑송이와 감동이는 놈의 하는 짓거리가
우스워서 어금니를 꽉 물고 참았다. 이제 졸개가 가슴에 감추고 있는 단검을 사내의 배에
들이대면 양쪽 숲에서 뛰쳐나가 적당히 몽둥이 찜질을 한 다음에 묶어 데려갈 작정이었다.
한데 어떻게 된 녀석인지 그는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침을 퉤 뱉는 것이었다.
"압다 그러면 누가 구해줄 줄 알구. 나두 모르겠다."
혼자 투덜대면서 다시 길을 가는 것이었다. 감동이는 제 꾀가 어긋난 것이 못내 서운하여
곧 득달같이 쫓을 자세로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사내가 우뚝 멈추는 것이었다. 감동이는 재
빨리 다시 눈구덩이에 엎드렸다. 사내는 사람이 쓰러진 곳으로 되돌아왔다. 옳지 그러면 그
렇겠지. 아무리 금수 같은 놈이라도 이런 산속 눈밭에 쓰러져 얼어 죽어갈 사람을 버리고
갈 수는 없겠지. 감동이는 사내의 동작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 녀석은 슬슬 돌아가서는 한쪽
발로 쓰러진 자를 지그시 밟고서 행전을 벗겨내리는 것이었다. 산채의 졸개들은 대개 토끼
나 사슴 가죽으로 무릎 아래까지 덮이도록 행전을 치고 있었다. 사내가 돌아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발로 밟힌 자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드디어 꿈틀대기 시작했다.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행전을 벗기면서 중얼거렸다.
"살아나는 척한다구 놀랠 줄 알구. 하여튼지 행전을 얻었으니, 이제 겨울은 머리부터 발끝
까지 모의 일습으로 따뜻하게 보내겠군."
쓰러진 자의 털행전을 벗기려 하니 어이없고 무도하여 도적들이 보기에도 기가 찰 정도였
다. 참다 못한 갑송이가 얼결에 소리를 질렀다.
"어... 저 도적놈 보아라."
일어나려고 버둥대는 졸개를 한 발로 지그시 누르고서 개잘량 쓴 객은 껄걸 웃어젖혔다.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저 뒤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보아라. 거기서 똥 싸니? 궁둥이 얼
기 전에 어서 일어나려무나. 행전 뜨뜻해서 좋겠네!"
그자는 발길로 거짓 쓰러졌던 자를 탁 내지르고서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마
감동이가 멧돼지를 노리던 장창을 비껴들며 외쳤다.
"게 섰거라!"
개잘량은 씩 웃어대며 돌아선다.
"왜 그래, 뒷지 주랴?"
갑송이도 힝 웃음을 날린다.
상대편이 느긋하게 나올 때에는 한쪽도 느긋해지는 반면에, 전의는 차차 고조되는 법이다.
마감동이는 외치기는 하였으나 놈의 짓거리가 그리 만만한 놈은 아닌 듯이 보였다.
"자아 섰다. 어쩔래? 그 털토시 벗어 주겠니? 어이 육실허게는 춥네. 느이는 산속에서 토
깽이나 잡구 사는 놈들일 테니 털 달린 것 있으면 이 대처 한량에게 좀 다우."
갑송이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어슬렁어슬렁 길손에게로 걸어갔다.
"농담은 그만둬라. 너 어디서 뭣허러 여길 왔느냐?"
"토끼 잡으러 나온 창으루 나를 찌르겠다는 네놈들은 뭔데?"
마감동이가 창을 곧추세운다.
"이놈이 맞창이 나구 싶어 안달났군. 성님, 아예 모가지르 비틀어서 눈구뎅이에 장사를 지
내주슈."
갑송이가 털배자를 벗어서 슬그머니 아래로 떨어뜨린다. 개잘량은 뒤로 몇걸음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이거 왜 이러느냐. 나는 지금 점심을 굶어서 기운이 쪽 빠진 사람이여."
그제서야 둘러섰던 졸개들과 마감동이가 픽픽 코웃음 소리들을 냈다. 아마도 갑송이의 기
세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린 게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갑송이가 팔짱을 끼고서 상대를 찬
찬히 훑어보았다.
"혓바닥만 미꾸리처럼 살아가지구 팔딱대더니 왜 어디 아프냐?"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을 뱉었다.
"쳇 또 사람 하나 죽이게 되는군. 아예 죽더라두 내 원망 말어라."
"그래 누가 뒈질지는 조금 있으면 알게 된다."
사내가 깊숙이 눌러 썼던 개잘량을 벗었다. 더벅머리가 어깨 너머로 축 눌어졌다. 총각은
좀 쑥스러워졌는지 겸연쩍게 입을 헤벌리며 웃었다.
"난 또 뭔가 했더니 젖내 나는 강아지새끼로구나."
"머리만 올리면 다냐. 너두 상판을 보아하니 이삭 팰 철인데."
총각이 웃통을 벗어 던지며 투덜거렸다.
"어이 추워. 귀찮아 죽겠네."
몸집이 우람하여 갑송이와 비등해 보였으므로, 역시 총각놈이 믿는 구석은 있었겠다고들
여겼다. 총각이 좌우로 팔을 휘둘러보더니, 의연하게 갑송이 앞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뭐야, 맨손이여?"
"그럼 맨손이지 네까짓 것에 작대기라도 들란 말이냐?"
"죽고 살기루 싸우겠는가?"
제법 살기 띤 어조로 총각이 말하자 갑송이는 어이가 없어서 껄걸 웃었다.
"그래 죽을 때는 죽더라도 네 기운 자랑이나 보자꾸나."
"너부터 보여다우."
총각은 허리에다 두 팔을 얹고 버티고 서서 갑송이의 약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갑송
이는 전혀 성낸 기색 없이 점잖게 꾸짖었다.
"허, 이놈의 버르장머리 좀 보아라. 그 더펄머리 올리구 나면 어른대접 해주지. 좆밥도 가
시지 않은 녀석이... 아주 후레자식이로구나."
"맺은 놈이 푼다고, 너희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으니 어디 힘자랑을 해보려무나. 괜찮으면
내 엎드려 성님이라구 빌겠다."
갑송이는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서 말했다.
"너두 똥깨난 뀐다는 모양인데, 어느 촌바닥에서 무뢰배 노릇이나 하였구나. 그러니까 싸
움판의 예의두 모르지."
"에이 귀찮아. 좋다, 그럼 두 눈구녁으루 똑똑히 봐두어라."
총각은 연신 귀찮다고 투덜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굵기가 세 뼘은 되어 보이
는 나무둥치를 눈짐작해 보았다. 그리고는 길 옆에 박혀 있는 한아름드리 바위를 툭툭 차보
더니, 두 손으로 잡고서 끄응하면서 번쩍 치켜들었다. 갑송이가 팔장을 낀 채 흥미있다는 듯
주시하고 있었다. 마감동이와 졸개들은 놈이 느긋하게 큰소리치던 대로 과연 힘이 센지라
어쩐지 불안해졌다. 총각이 바윗돌을 머리에 쳐들고 서너 걸음 뛰면서 대번에 나무둥치를
향하여 내팽개치니, 육중한 소리가 들리면서 나무가 휘청하며 휘어진다. 총각이 갑송이 쪽을
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갑송이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것두 기운 쓴다구 마빡에 힘줄을 세우며 지랄일세."
총각이 휘어진 나무에 상반신을 기대고 어깨로 힘껏 치니까 우지직 거리면 나무가 반대편
으로 넘어졌다. 중동이가 딱 부러진 것이었다. 갑송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하였다. 너는 바위까지 쳐들구 법석을 떨었지만 내 정말 기운을 보여주지."
갑송이는 부러진 나무 곁에 섰는 비슷한 굵기의 소나무를 견주어보았다. 두 손으로 휘어
잡고 몇번 좌우로 흔들어대니 밑둥 근처에 눈이 쏟아져 내린다. 갑송이는 나무 밑에 기운
쓸 발디딤을 만드느라고 우선 눈을 이리저리 헤쳐놓았다. 맨땅이 나오자 발뒤꿈치를 콱 박
고 서서 두 팔로 나무를 얼싸안았다. 등과 어깨에 구불구불한 근육이 곤두섰다. 한참이나 힘
을 쓰는데 눈을 헤집으며 흙덩이들이 솟아올랐다.
"에에잇!"
한꺼번에 기운을 쏟으니 나무가 뿌리째로 뽑혀 올라왔고, 갑송이가 안았던 팔로 비틀어버
리는데 뿌리 끊어지는 소리가 투두둑거렸다. 갑송이는 뽑힌 나무를 쳐들어 머리 위에서 이
리저리 돌려 보이다가 멀찍이 던져버렸다. 호흡이 약간 거칠었으나 갑송이는 곧 가라앉히고
서 총각의 앞에 돌아섰다. 총각은 기세가 좀 풀려 있었다. 그러나 오기는 아직 남았는지라
아까보다 훨씬 자신 없어진 어조로 중얼댔다.
"뚝심 센 소가 어디 날랜 범 이기는 것 봤남."
"그래 뭘루 상대해주랴?"
"씨름으루 하자."
총각이 두 손바닥에 침을 뱉어서 쓱쓱 비벼보면서 말해다.
"이놈아, 이런 눈구덩이에서 무슨 씨름이야? 주먹다짐으루 네 골통을 계란 으깨듯 할 터
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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