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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2권 (27)

카지모도 2026. 4. 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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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 체장이로군! 그러면 그렇지."

"저 나장이 우리에게 이것을 알리려는 연유는, 혹시 국문할 때에 우리가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요. 잘 생각해서 해냅시다."

길산이 말하였고, 우대용이도 잠들 생각을 잊고 벽에 기대어 앉아 못내 감탄하는 것이었다.

"대근이 성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구 있었지만, 참으로 처하의 대장부로군!"

"자 일찍 자둡시다. 내일은 먼길을 걷게 될 것 같소."

그들은 짚더미에 몸을 파묻고서도 못내 잠이 오질 않았다. 길산은 아버지와 갑송이의 얼

굴을 떠올렸고, 애인촌의 낮은 돌담이며 광대산 솔숲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는 탐스럽게

피어난 박꽃 같은 묘옥의 희고 둥근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와 벗은

가슴이며 젖무덤 사이의 연비 자국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까막내의

자갈길을 걸어가는 묘옥의 뒷모습을 보고 길산은 큰 목소리로 외쳐 불렀다. 묘옥은 한번 살

짝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고는 재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길산이 온 힘을 다해서 부르짖으

며 따라갔는데, 묘옥은 점점 멀어지더니 고개를 넘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빈 길 위에서

허덕이면서 길산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묘옥이 다시 고개 끝에 나타났고, 길산은 또

뛰어 쫓아갔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묘옥의 옷자락도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묘... 묘옥... 묘옥이..."

길산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눈가에 번져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려왔다. 길산

은 또렷해진 눈을 들어 부옇게 밝은 옥 바깥을 내다보았다. 눈송이들이 탐스럽게 나부껴 내

리고 있었다. 팔랑거리며 날아든 눈이 감옥 창살 앞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빽빽한 눈보

라속에서 문득 묘옥의 자취를 본 듯하여 길산은 상반신을 일으키고 창살앞으로 다가갔다. 그

는 창살을 두 손에 움켜쥐고 애타게 하늘 저 끝을 내다보았다. 눈, 끝없이 날아 내려앉는 눈

송이의 떼가 맞은편 돌벽을 지나칠 적마다 흰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묘옥이 아

니라 무심하게 흩날리는 눈보라였다.

"눈이 오는군..."

어느틈에 깨어난 우야용의 굵다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고, 길산은 흠칫 몸서리를 쳤

다. 길산은 창살을 잡고 앉아서 아무 생각도 없이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에게는 놓여난다는

일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얼마나 그리던 바깥 세상인가마는 그의 가슴속에는 곁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수많은 죄수들의 넋걷이 해주던 자신의 창소리가 꽉 들어차 잇는 듯하였다.

"나는 무거운 짐을 짊어졌고나!"

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온 세상의 옥을 모두 깨치리라. 아니면 나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길산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괴었다.

옥졸들이 부산하게 오락가락하고 나서, 선명한 융복이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칼 차고

주장을 치켜든 나장과 그들을 감영 선화당 앞에 끌어갈 군사들이었다. 옥사장이 맨 앞에서

다가서더니 옥문을 열었다. 차꼬와 칼을 기다리고 있던 길산과 대용은 둔한 동작으로 옥문

을 나섰다. 나장이 주장대 끝으로 그들의 등을 쿡쿡 찔렀다.

도사 학선은 관찰사가 선화당으로 나오기 전에 찾아가 현신하고서 죄수를 압송해가는 이

유를 아뢰야만 했다. 그러자니 자연히 조정의 분위기를 은밀히 꺼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찰사는 주위를 모두 물리고 학선이아 마주 앉았다.

"그래 이번 형옥이 그다지도 큰가?"

"예, 위로는 당상관 이상에서 아래로는 저들과 같이 상놈들도 있는데 팔도에 두루 미쳐

있습니다."

"허허 천인공노할 노릇이다. 요즘같이 성은이 두터운 태평성시에 어찌 모반의 무리가 조정

에까지 스며들었단 말인가."

"이번에 귀도에서 압송해가려는 두 놈은 서북 변방에 나가 있는 몇몇 첨사와 만호에 기맥

이 닿고 있어 몹시 중대합니다. 무장들인만큼 일찍 알아내어 포토하지 않으면 거병할지도

모르옵니다. 그래서 이번 압송의 일을 비밀로 하여 백성들이 모르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소문이 나면 역적들이 일이 틀린 줄을 알고서 북방을 소란하게 할 테지요."

"그렇겠지. 내 다 좋은 수가 있네. 그 관복들을 벗고 하인배 차림으로 가되, 우리 아이들

을 내어줄 테니 교자를 내어 두 놈을 태워가면 어느댁 내실 행차인 줄 알 걸세."

"참으로 묘한 생각이십니다. 그러면 국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사또께 뵈이고 그대로 떠

나겠습니다."

"그래, 헌데 내가 판의금 대감과 병조판서와 내 동문인 지의금과 승정원의 도승지 되는

이들에게 작은 선사품을 보낼까 하니 전달해주겠는가?"

"예, 틀림없이 알아 거행하겠습니다."

"판의금께서는 지금도 목면산 아래 계시는가?"

"아니옵니다. 지난 가을에 작은댁마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집터가 불길하다 하여 사직골

쪽으로 이사하셨습니다. 사또, 이번 저희 판의금대감께서 병조판서 대감과 아주 긴밀한 사이

가 되신 것을 모르시겠지요?"

"긴밀한 사이라니... 뭔가?"

"예, 이번에 두 분은 서로 사돈을 맺으셨습니다."

"음, 거참 경사로군. 그런 경사를 알고서도 내가 모른 척할 수야 있나. 진물을 보내드려야

겠군."

원래 외관이란 삼 년씩이나 조정을 떠나 있으니, 요즘처럼 세력의 판도가 조변석개하는

때에 어느 쪽이 유리한가 모르는 관찰사로서는 서울 소식을 통기하는 사람이 올 적마다 꼬

치꼬치 물을밖에 도리가 없었다. 학선이가 대강 알고 있는 대로 낱낱이 아뢰니, 관찰사도 근

래에 들었던 소식을 확인하고 다시 새로운 소식에 접하였다.

"아뢰오, 죄인을 선화당 아래 꿇려놓았습니다."

문 밖에서 해주도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곧 나가겠다. 그리고 곧 교자 두 채를 준비하고 날래고 걸음 잘 걷는 군사 십 인을

평복으로 나오게 하여라."

"교자 두 채와 평복 군사 십 인을 대령시키겠습니다."

관찰사는 관복을 입고서 뜨락을 건너 선화당에 올랐다. 학선이는 날카롭게 두 죄수의 인

상을 훑었다. 박대근에게서 설명을 들은 대로 하나는 얼굴이 새카맣고 털이 없는 우가요, 또

하나는 갸름하고 가뿐한 몸매에 눈이 어글어글하고 수려하게 생긴 장가라는 자가 틀림없었

다. 관찰사는 선화당 마루에 앉아 있었고 학선이는 계 아래 부복해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들랍신다!"

관찰사의 하명을 나졸들이 사릉장을 들어 두 사람의 턱을 치켜올렸다.

"용모파기를 올려라."

해주도사가 압송장과 함께 들어 있던 용모파기를 내어밀어 올렸고 관찰사는 거기 적힌 인

상에 대하여 알아보려는 듯이 찬찬히 훑어보았다. 교자를 멘 네 사람과 무기를 감춰 가진

여섯 사람 합해서 열 사람의 군사가 선화당 앞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다시 명하였다.

"국문은 폐하고, 모두들 이번 압송의 건은 나라에 중요한 옥송이 일어났으니 절대로 함구

하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해두어라."

모두들 허리를 구부렸고, 학선이가 가까이 다가서며 아뢰었다.

"사람이 많으면 오히려 남의 눈에 띄기가 쉽고, 또한 노중에 경비만 낭비하게 되는 셈입

니다. 제가 데려온 나졸들로 충분하오니 교꾼 네 사람 외에는 모두 물려주시옵소서."

"아니다, 본도에서 압송해 올라가는 중죄인들을 소홀히 다루어 보낼수는 없다. 의금부에서

죄인 인수를 확인해주어야 할 것이니 아무래도 우리 무장이 필요할 것이다."

곁에 섰던 중군이 아뢰었다.

"사실 너무 지키는 자가 많아도 번거롭습니다. 그보다는 무예가 뛰어난 날랜 무사 두 사

람만 차출하여 경비를 맡기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음, 그게 좋겠군. 아뢴 대로 하라."

학선이가 깊숙이 예를 올렸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한양에 닿아야겠기에, 관례를 일일이 찾아 거행치

못하는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오, 괜찮다. 봉물은 틀림없이 가는 대로 자네가 직접 전하여라."

"분부대로 관복을 벗고 내실 행차를 가장할까 하옵니다."

"어서 출발하라."

학선이는 우선 두 죄수의 칼을 벗기고 그 대신에 붉은 오라로 두 팔을 꽁꽁 묶게 하고 차

꼬는 그대로 채워둔 채 가마에 오르게 하였다. 그들은 선화당을 물러나와 객사에 들러서 감

영에서 준비해준 평복을 갈아입었다. 학선이는 갓에 도포 차림의 선비로, 나장은 수노로, 그

리고 나머지는 모두 구종배로 붙이었다. 잠시 후에 역시 갓과 도포 차림의 젊은 장교 두 사

람이 환도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학선이에게로 찾아와 군례를 드렸다.

"군례는 차후로는 절대로 하지 말라. 그리고 집안의 어른에게 대하듯 하면 되느니라. 너희

는 두 교자의 양쪽 옆을 호위하고 나졸들은 봉물을 지키게 하여라."

이르고서 타고 왔던 백마에 올라 천천히 성문을 나섰다. 누가 보기에도 양반댁 내실이 친

정에 나들이라도 가는 모습이었다. 학선이는 행렬의 뒤에서 천천히 말을 몰아 쫓아갔다. 나

장으로 차렸던 아귀쇠가 뒷전으로 처지더니 그의 말께로 다가와 나란히 걸으면서 낮은 소리

로 말하였다.

"성님, 어떻게 할깝쇼?"

"아직 너는 나장임을 잊어선 안돼, 이 녀석아."

"저는 정말 밤새 불알이 저려서 영 고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감영 객사에서 칼 차고

호령하기는 또 이번이 처음이올시다."

"이놈아, 이번에는 어사또보다두 서품이 아래고 연습까지 했는데 무엇이 그리 어렵더냐?"

학선이가 나장을 손짓하여 더욱 가까이 오도록 하였다.

"우리가 어디쯤 가서 중화를 하겠냐?"

"가만있자, 예서 연안까지가 일백이십 리 아니우? 하룻길이니 청단서 중화를 하면 맞춤하

겠네."

"그렇지, 청단서 바루 코앞이 세여울 아닌가. 청단하구 세여울 사이에서 저놈들을 떼어버

리자."

나장이 걱정스러운 듯이 목덜미를 움츠렸다.

"헌데 성님, 환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저 범 같은 무장을 해치울랍니까? 더

구나 교꾼들은 모두 조련받은 군사 아니우."

"내가 시키는 대루만 하여라."

하면서 학선이가 말께서 상반신을 굽혀 나장의 귓가에 뭐라고 잠깐 속삭였다. 나장이 듣

고 나자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귀쇠야, 대처 건달이 주먹 가지구 도모하는 법 보았느냐. 송도 학선이가 까짓 장교 나

부랭이와 붙을 수야 없지."

"성님 말이 참으로 지당하오!"

두 사람이 뒤에 처져서 낄낄거리는 양을 보고 가마의 양쪽 옆구리를 호위해 가던 해주 장

교 중의 하나가 걸음을 늦추었다.

"나으리 무슨 일이십니까?"

"음 아니다, 나장이 재담을 하였기로 웃는 중이다."

"오늘 저녁은 연안 객사서 묵으셔야죠?"

"그래 그래, 행자에서 너희들 여비들 두둑히 내어 술값을 줄 터이니 민박이나 나가거라."

"아이구 나으리, 군무중에 음주하여도 되겠습니까?"

"너희들은 공연히 한양까지 원행을 하는 것이니 필요없이 고생할 건 없지 않느냐? 밤 수

직은 우리 나졸 아이들에게 엄히 서도록 하겠다."

해주 장교가 제 동료에게 의금부 도사의 분별있는 처사를 칭송하였고, 그들은 자기네를

뽑아낸 중군을 원망하였다. 우름내를 건너 석장승으로 나가는데, 눈길이 험하여서 청단까지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그들은 청단골서 관창 부근의 주막에 들어가 국밥을 시켜 요기를 하

였다. 학선이가 나졸 한 사람에게 지시하기를,

"죄인들에게도 한그릇씩 먹도록 해주어라. 원래 우리들 대궁밥이나 주면 주고, 말면 말게

되어 있지마는 아무리 역적놈들이라 하나 인정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길산이와 대용에게도 국밥이 돌아갔는데 그들은 오라를 졌으므로 나졸이 한사람씩 맡아서

일일이 떠먹여주어야 했다. 나장과 겸상하고 있던 학선이가 넌지시 말하였다.

"우리가 떠난 다음에 뒤미처서 오너라. 그리구 상 밑에 그것이 있으니 얼른 수습해 넣고..."

중화를 대강 마치고서 행장을 수습하여 주막을 떠나려는데, 나장이 나졸에게 짐짓 큰 소

리로 투덜거렸다.

"에이 하필이면 막 떠나려는데, 배가 살살 아프구나. 내 일을 보고 급히 쫓아갈 터이니 나

으리께서 찾으시면 그리 여쭈어라."

나장은 급한 듯이 되돌아가 뒷간에 그냥 쭈그려앉아서 그들이 멀찍이 떨어져갔을 때쯤하

여 나왔다. 그가 주모를 불렀다.

"거, 팔팔 뛰는 화주가 있나?"

"예, 있긴 있는데 값이 좀 비쌉니다."

"값은 고하간에 얼른 주게."

"예서 드시구 가실려우?"

"아닐세. 호리병값도 칠 터이니 두 병으루 나누어 주게나."

주모가 술병을 채워서 내밀었다. 나장은 문밖에 나와서 한쪽 병에다가 학선이가 넘겨주

었던 비상을 타넣었다. 나장은 병 무늬를 눈여겨보고서 일행의 뒤를 급히 따라갔다. 일행은

눈이 뒤덮인 들판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는데 멀리 재령으로 올라가는 삼거리가 보였다. 거리

에는 누구의 것인지 기왓장도 떨어지고 현판도 기울어진 쇠락한 정자 한 채가 서 있었다.

일행은 정자 주위에다 말과 가마를 대어놓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나장이 다가서자 학선이가

역정이 일어난 얼굴로 꾸짖었다.

"무엇 하노라구 이렇게 지체하는가. 압송에 나장이 소홀히 한다면 아랫것들을 어찌 단속

하겠느냐?"

"아이구, 점심을 너무 급히 먹었더니 배가 살짝 아파서요."

"세여울서 물이 썰거나 밀리거나 어느 쪽이 건너기 쉬운가도 알아야하고, 또한 때도 맞추

어야 개를 건널 게 아니냐."

나장이 서슴지 않고 웃는 얼굴로 지껄였다.

"제가 다 알아놓았습니다. 주모의 말이 물이 썰면 뻘에 빠져서 도저히 건널 수가 없고, 밀

려야만 나룻배가 뜬다고 하옵니다. 아직 밀 때가 아니랍니다."

"허, 낭패로구나."

"물이 밀 때까지 천상 기다려야 될 터인즉, 속이 차면 분명히 병이 들어 앓아눕게 될 것

같습니다. 소인이 미리 다 알아서 이렇게 화주 두 병을 사가지구 오는 길이올시다."

"안주는 있느냐?"

학선이가 좀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니 나장이 말께로 가서 부담농을 내리고 찬합을 꺼내었다.

"육포에 홍합말림에 아주 그럴 듯합니다."

학선이가 정자에 앉아서 화주 한 잔을 드는데, 과연 설경 가운데 앉은 풍류가 그럴 듯하

였다. 시조도 흥얼대고 무릎도 치면서 학선이가 취흥을 돋우니 누 아래 섰는 사람들도 속이

떨린데다 점심참에 막걸리 한사발 들이켜지 못했으므로 저절로 침들이 넘어갔다. 호리병 반

병쯤이나 좋이 비우도록까지 학선이는 아무에게도 한잔 건넬 생각을 않았다.

"커어, 이렇게 수려한 산천에 좋은 술에 참으로 기생년만 있다면 개골산이 따로 없겠구나."

한 잔 놓고 한참씩 지껄이고 두 잔 놓고 감탄하는데, 아무리 아랫것들이라 해도 은근히

부아가 치밀게 되었다. 학선이가 드디어 제 잔을 허공으로 치켜들면서 말했다.

"자아, 이 좋은 감흥을 혼자서만 누려도 정말 취흥이 아니니라. 그렇지 나장은 한잔 들라."

나장이 소매를 붙잡고 나와 한잔 받아 돌아서서 들어붓는데, 아주 맛나게 입맛을 다셨다.

해주 장교들도 이제나저제나 기대를 하는 판인데, 학선이가 술잔을 내밀었다.

"오, 내가 자네들을 잊었었구나. 한잔씩 차례로 받게나."

장교가 술잔을 내밀어 술을 받으려는데 병이 비워진 것 같았다.

"그 새 병을 가져오너라."

"첫잔은 사양하겠습니다."

"아니다. 의붓자식이 세상에 젤 서러운 법이니, 내 너희들부터 차례로 한잔씩 돌리리라."

학선이가 술잔을 돌려주는데, 앞서 잔을 받아 마셨던 장교들이 갑자기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가슴을 쥐어뜯다가 쓰러지면서 입과 코로 피를 토해냈다. 교꾼으로 따라온 군사들

중에서 아직 술잔을 들지 않은 셋이 멍청히 그것을 내려다보는 중에 학선이가 소리쳤다.

"덮쳐라!"

기다리고 있던 학선의 부하 나장 아귀쇠가 단도를 빼어들어 한 놈의 등을 찍었고 또 하나

는 나졸들의 사릉장에 머리통을 얻어맞았다. 간신히 몸을 빼친 마지막 남은 군졸이 눈이 뒤

덮인 벌판을 바라보고 뛰기 시작했다. 아구쇠가 뒤를 쫓으려는데 학선이는 죽은 장교의 환

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내가 해치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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