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용이와 길산은 영문을 몰라서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의 아낙이 날 찾아왔던 것 같소."
길산이 놀라서 물었다.
"내 아내라니오?"
"장뭣이라는 살인 도적이 참형되었다던 날 밤이었서. 남장을 한 여인네가 내 우거루 찾아
왔었지요. 주인의 넋을 위무하겠답디다."
"묘옥이..."
길산의 눈에 물기가 가득하게 괴었다. 여환이도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묘옥이 찾아왔던
날 밤의 일을 얘기하였다. 둘이서 말바위에 올라 갔던 일, 그 여자가 뛰어내리려는 것을 만
류하던 일, 이제는 아무 곳에도 붙일 데가 없다며 한탄하던 일들을 자세히 말하는데, 길산은
두 빰 위로 굵은 눈물방울을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두 다 있지."
여환이 염주를 헤아리면서 탄식하였다.
"어디루... 간다고는 말 없습디까?"
"글쎄올시다. 낙심천만인 모양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무덤덤히 앉았던 우대용이가 한 손을 길산의 어깨에 얹으면서 두드렸다.
"장서방, 어서 길이나 갑시다."
길산은 주먹을 들어 눈을 닦아냈다.
"스님께서는 앞으로도 사자암에 계실 작정인가요?"
"아닙니다. 저두 곧 그 자리를 떠날까 합니다. 혹시 송도 덕물산 근처루 가게 될지두 모르
겠소이다."
길산이 한참 주저한 끝에 다시 말아였다.
"송도 가시면... 내게 기별을 주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스님과 내가 깊은 인연이 닿은 모양
입니다."
"글세 말이오."
"송도의 배대인 댁이라면 모두들 압니다. 그 댁의 차인 행수루 있는 박대근이란 분께 내
얘기를 하면 소상히 일러줄 것이오."
우대용이가 봇짐을 꾸리면서 재촉하였다.
"자, 같이들 나가지."
셋이서 마루로 나오는데, 원의 중이 다가왔다. 그는 처음보다는 약간 뻣뻣해져 있었다. 학
선이 일행이 떠난 뒤라 얕잡아보았던 모양이었다.
"저것들은 어찌하실려오?"
"여기서 하룻밤 묵게 할 수 없소?"
길산이 물으니 중은 아예 안되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원에서 보통 장사치들도 아니고 저런 걸인을 도저히 재울 수는 없수."
"돈을 두 배 더 얹어 드리면 되겠소?"
"두 배 아니라 열 배가 되어도 안됩니다."
실랑이가 벌어지는 중에 미닫이가 열리면서 봉노에 들었던 아낙네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기한을 좀 면했으니 걸을 수 있습니다."
여환이 묻는다.
"정말 괜찮겠소?"
"예, 따뜻한 국을 마시고 아랫목에서 등을 데웠더니 기운이 나는군요."
아낙네는 계집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쏘이자 아이는 다시 몸을 옹송그리
고 발을 굴렀다. 길산이 문득 계집아이를 내려다보더니 학선이가 내주었던 개털 배자를 벗
어서 들씌워주었다.
"아이구 이런 고마울 데가..."
하는데 이번에는 우대용이가 제 것을 벗어서 아낙네의 얇은 등뒤에 얹어주는 것이었다.
"이러시지 마십시오. 어린 것은 몰라도 저야 괜찮습니다."
"염려 말구 입으시우. 우리는 별루 추위를 타지 않습니다."
여환이 아낙네에게 물었다.
"그래 아직두 해주엘 갈 생각이오?"
"죽으나 사나 해주엔 가야 합니다."
"해주에 간다 해도 도회지 인심은 오히려 시골보다 더하오."
"이 아이를 맡겨야겠어요."
"아이를 맡기다니요?"
"교방에 넘길까 합니다. 그럴 수밖에 저 혼자서는 도저히 굶겨 죽이고야 말겠어요."
아낙네가 눈물을 지었다. 길산이 여환이 대신 물었다.
"어찌하다가 이렇게 두 모녀만 남아 유리걸식을 다니우?"
"땅을 빼앗기고 폐농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살아계실 적에도 끼니를 떼우기가 어렵
더니, 해전에 역병으로 쓰러진 뒤 품팔이로 연명을 해오다가 견디지 못하여 대처로 찾아가
는 길입지요."
곳곳마다 이러하니, 과연 깊은 산 험한 골짜기마다 녹림패들이 들끓을 수밖에 없는 일이
었다. 길산이 받았던 노자 중에서 열 닢을 빼내어 주었다.
"얼마 안되지만 받아주십시오."
걸인 모녀가 백배 사례하였다. 여환과 그들은 네거리에서 헤어지게 되었고, 여환이 길산이
께 안전한 길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이 길로 죽 올라가시면, 선바위 네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도득산 고개를 타고 수철원을
지나면 곧 신천, 문화경계입니다."
"예, 거기서부터는 내가 더욱 잘 알 게요. 곧 추산 마루턱에 닿지요. 그곳은 내 고향입니다."
"언제 다시 만나뵙겠소이다."
"어쩐지 깊은 인연인 듯하오."
그들은 네거리에서 각각 서북으로 갈렸다. 공수원에서 입석까지의 길은 대부분 인가도 없
는 쓸쓸하고 한적한 산길이었다. 창금산까지는 어사천의 상류인 개천을 따라서 길이 계속되
었다. 창금산 고개는 제법 험악하였다. 사방이 바늘끝 같은 전나무숲이었고, 길은 좁고 바윗
돌이 울퉁불퉁했다. 창금산 고갯마루에 오르는데, 해가 서쪽으로 꼴깍 넘어가고 말았다. 고
개 위의 바람은 마치 떼귀신의 울음소리처럼 처연하였다.
"어, 이러다간 얼어 죽고 말겠군."
우대용이가 헉헉대면서 중얼거렸다.
"빨리 고개를 내려갑시다."
길산이가 앞서서 눈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무래두 선바위 가서 묵어 가야겠소."
"앞으로 삼십 리 남았군. 오십 리 길이랬으니..."
우대용이가 헉헉거리다가 더 이상 못 걷겠는지 무릎을 꿇었다. 길산이 되돌아와 그의 겨
드랑이를 끼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정말 얼어 죽는 게요."
"지친 게 아니라, 잠이 와서 못 견디겠군."
"자아, 내 어깨를 짚으라구."
길산이 대용을 부축하여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제 주위는 캄캄한 어둠속이었고, 사
방에 뒤덮인 눈만 희끗희끗 보이고 있었다. 숲과 벌판에는 인가의 불빛 한점 보이질 않았다.
대용이 비틀거리면서 길산의 옷깃을 잡았다.
"내 뺨을 몇대 때려주우. 도무지 정신이 들질 않는군."
길산이 대용의 빰을 호되게 몇차례 갈겼다. 대용이 머리를 거칠게 흔들어보았다.
"좀 낫군."
그들은 가까스로 창금산을 내려와 얼어붙은 내를 건넜다. 멀리 야산 끄트머리쯤에 마을의
불빛들이 건너다 보이고 있었다.
5
탈옥한 지 사흘째가 되어서야 그들은 추산 줄기에 닿을 수가 잇었다. 두 사람은 아직 어스
름한 새벽녘에 추산을 타고 넘어갔다. 광대산에 이르자 길산은 재인말로 내려가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리 재인말의 소나무숲이 내려다보였고 까막내의 넓은 자갈밭과 갈대숲
위에는 흰눈이 덮여 있었다.
등성이 위에 멈춰 서서 한참이나 애타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길산이 말하였다.
"우서방, 미안하지만 저 아래 행보 좀 해야겠소."
우대용이 끄덕였다.
"상관없수. 아무래도 다 저녁때에나 구월산에 당도할 텐데."
그들은 눈에 미끄러지면서 광대산을 내려갔다. 그러나 사람이 살았던 자취란 돌담과 주춧
돌뿐이었다. 마을은 흰눈이 뒤덮인 들판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일 년에 두 차례씩
서낭굿을 벌이던 뒷산 빈터에는 낡은 오색 댕기를 매단 신목이 여전히 거대한 뿌리를 눈 속
에 박고 서 있었다. 길산은 그 쓸쓸한 빈터 위로 바람이 일어 눈가루가 흩날리는 모양을 바
라보았다.
"재인말은 이젠 완전히 없어지구 말았구나..."
우대용이가 이리저리 거닐다가 눈을 발로 파헤치더니 길산에게 말했다.
"이것 보우. 타다 남은 서까래인데, 마을 집에 온통 불이 났군."
"모두 떠난 뒤에 누군가 불을 질렀겠지..."
길산은 서낭굿을 열던 날 밤의 활기에 들떴던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모닥불이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한심자락은 하늘에서 나부끼는 날개처럼 불빛 속에서 어른거렸고, 탈박들은 웃고
울고 성을 내었다. 군무가 빈터를 가득 채울 무렵에 사람들 틈에서 나타난 묘옥이 그의 손
을 잡아 이끌고 있었다. 그는 신목 뒤편에 눈송이들을 가득 얹고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잔솔밭을 넘어다보았다. 길산과 묘옥이 첫 정분을 맺었던 곳이었다. 그는 서낭나무의 둥치를
이리저리 쓸어보았다.
"아래루 내려가볼까?"
"장서방, 어서 산으루 오르지..."
"잠깐만, 까막내를 먼발치서만 보구 갑시다.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으니까. 이 동네는
우리가 몇대째나 살아온 고향이거든."
길산이 앞장을 섰고 우대용이도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뒤를 쫓아갔다. 그들은 타버린
기둥과 부서진 기왓장이 뒹굴어 다니는 마을을 곧장 질러서 까막내 쪽으로 나가는 송림을
향하여 걸었다. 그들은 작은 잿말이 보이는 모퉁이 길에 이르렀을 때, 길산이가 갑자기 걸음
을 멈추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만있자.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아무 소리두 못 들었소."
"분명히 우리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소. 그것두 하나가 아니라 둘쯤은 되는 것 같던데..."
그러나 한참이나 기다렸는데도 나무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뿐이었다. 사방에는 흰눈이 덮인
벌판과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맑게 갠 하늘은 차갑게 새파랬다. 후닥닥하는 소리가 들리
더니 장끼와 까투리 한쌍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때에 하늘 위에서 딸랑거리는 방울소
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 봐, 누군가 있다."
날아오른 꿩을 향해서 매가 일직선으로 쫓아 올라가고 있었다. 방울 소리는 매의 발목에
서 들리는 소리이니, 틀림없이 그 부근에 관원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에 한가하게 매사냥
을 나온 자라면 송화현감이 틀림없을 것이었다.
"너무 내려온 모양인걸."
길산이 중얼거렸다. 대용이도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아까 들었다던 인기척이 그럼 몰이꾼이겠군."
"우리를 먼저 보았을지두 모르지."
과연 재인말의 조밭터에는 송화원이 사졸들과 아전 몇 명, 그리고 기생을 데리고 나와서
매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간단한 차림에 왼손에다 가죽 토시를 두르고 또 한 마리의
매를 얹고 있었다. 매사냥을 나오기 전에 보통 피 묻힌 목화씨를 먹이게 마련이었다. 매가
피냄새를 맡고 목화씨를 먹고 나서는 다시 모두 토해내게 된다. 속이 빈 매는 그래서 배가
고프니까 꿩을 보기만 하면 날아가 덮치는 것이다. 몰이꾼들이 꿩을 공중에 날려 올리면 매
잡이가 손을 위로 치켜올려주면서,
"후여이!"
하고 외치는데, 매는 그 팔목의 내친 힘으로 훌쩍 날아오르는 것이다. 송화현감은 젊은 신
관이었다. 그는 임지로 오기 전부터 구월산 기슭에는 수상쩍은 자들이 출몰한다는 얘기와,
옆고을 문화군수가 화적떼들에게 상투를 잘리는 망신을 당했다는 뒷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
는 문화군수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언젠가는 녹림패들의 근거지를 알아내어 들이칠 작정이
었다.
그는 겨울날의 무료한 한나절을 참지 못하여, 해서의 산혐에서는 아주 흔한 매사냥을 나
오게 되었고, 한두 번 해보는 중에 아주 맛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그가 매를 튀기려고 이제
나저제나 기다리는 참인데 몰이를 나갔던 군사 두엇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왔습니다, 나왔어요."
"이놈들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느냐. 뭐 범이 나왔단 말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재인말에서 웬놈들이 내려와 까막내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뭐라구...?"
"분명히 두 놈인데 산에서 내려오는 모양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다른 자가 말했다.
"하나는 여기 살던 장충의 아들 길산이란 놈이 틀림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안좌수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길산이는 감영에서 참수당해 죽었는데... 그럼 도깨비가 나왔단 말야?"
"그래두 틀림없이 길산인 걸 어쩝니까? 제가 헛봤을 리두 없구요."
젊은 사또는 제 화승총을 가져오게 하였다.
"화약과 연환은 쟁여두었느냐?"
"예, 승에다 불만 당기면 나갑니다."
"마침 잘되었다. 오늘은 화적사냥이나 해보자꾸나. 이방은 저쪽 재인말 뒤의 서낭나무 있
는 곳에 잠복하여 이쪽에서 몰면 막아버려라. 그리고 나머지는 까막내 쪽에서 올라오는 송
림의 좌우편에 숨었다가 덮쳐라. 그리고 통인과 나는 저쪽 광대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을 지
키지. 누구든지 놓치지 말아라. 그리고 절대로 사로잡아야 한다."
매사냥을 나왔던 관원들은 돌연 포도하는 자들로 변하여 곳곳의 요로에 목을 만들고 걸려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산과 대용이 어쩐지 불안하여 까막내 쪽에서 걸음을 돌릴 즈음
이었다.
길산과 대용이 바쁘게 재인말 동구로 들어서는데, 양쪽 숲에서 몰이 하던 작대기와 환도
를 든 사령 네 명이 뛰쳐나왔다.
"웬놈들이냐?"
"이놈들, 꼼짝 말고 순순히 포승을 받아라!"
"어..."
두 사람은 주춤하고 나서 서로 돌아보았다. 사실 그들은 두 사람을 너무나 얕잡아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날래기는 들짐승과 같았고, 모두 한번에 대여섯쯤은 간단히 해치우
는 싸움꾼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대용이가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한판 붙어볼까."
"그냥 달아납시다."
길산이 말하면서 다짜고짜로 몇걸음 뛰어나가 앞장서서 길을 막았던자의 면상을 휘익 돌
려서 걷어차버렸다. 단번에 모가지가 옆으로 돌아가면서 나자빠지는데 이미 터진 코피가 왈
칵 눈 위에 쏟아진다. 길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뛰었고 우대용이도 한꺼번에 달려드는
사령들의 방망이를 팔뚝으로 막아내며 뛰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길산 2권 (28) (0) | 2026.04.07 |
|---|---|
| 장길산 2권 (27) (1) | 2026.04.06 |
| 장길산 2권 (26) (1) | 2026.04.05 |
| 장길산 2권 (25) (0) | 2026.04.04 |
| 장길산 2권 (24) (0) | 2026.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