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문을 열어주며 바삐 외치니 이경순은 짐작이 빠른 사람이라 무슨 위급한 일이 생긴 줄
은 알고서 쨉싼 걸음으로 앞서가는 이방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두 사람이 산성 아랫길
로 빠져나와 인가가 없는 강변에 나서자 그제서야 이방은 걸음을 늦추며 입을 떼엇다.
"자네 옥에 그대루 앉았다간 마누라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서울 전옥서의 남칸 귀신
이 될 뻔하엿네."
"서울이라니..."
"자네를 명일 아침에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영이 떨어졌다네." 이경순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 눈치엿다. 이미 옥 안에서 편안히 지내기는 하엿으나,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느라고 스
스로 시달려왔던 터였다. 그런 불안이 실지로 닥치고 보니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헛허 하는 수 없군. 자네 그동안에 많이 도왔네. 집에는 알려두었나?" "내가 자네 부인
께 밤도망할 준비를 시켜서 양화루 나가도록 해두었네." "고마우이. 내가 없어진 뒤 자네께
해가 미치지는 않을까?" "내가 그래서 지난 며칠간을 칭병하고 꼼짝두 않았네. 옥사장에
게는 돈냥을 두둑히 주어서 피하도록 했지."
이경순은 워낙 깊은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허겁지겁 달려왔으므로,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
를 갖지 못하였다. 다만 고작 생각이 닿은 것이 월송골 박씨 과부 집에 숨겨둔 묘옥이 일이
었다.
"참! 내가 데려온 사당 아이두 함게 가도록 해두었나?" 이방은 이 어리석은 친구를 마음
속으로 한껏 비웃으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정말 실성한 사람이로고, 이런 곤경을 당해서도 고작 창부 따위의 걱정이나 하는가.
늦바람에 터럭 세는 줄 모른다더니, 자넬 두고 한 말일세. 자네 부인은 애간장이 달아서 산
지사방을 헤맬 판인데 참으로 말 못할 사람일세."
그러나 이경순은 이방의 핀잔을 듣고는 더욱 묘옥의 일이 걱정이 되어 펄쩍 뒤었다.
"아니 그러면 나만 안전하게 달아나고, 사지에다 그 철없는 것을 버리구 간단 말인가. 안
되겠네... 내가 잡히는 한이 있더라두 월송골에 가봐야겠네." "그 아이는 이미 여길 떠났어."
이경순은 그 말에 맥이 탁 불리는 것 같았다.
"어디루... 보냈다던가?"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자네 안전을 위하여 부인과 의논하고 배를 태워 보냈다네." 이경
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방은 한편 그의 몰골을 곁에서 바라보니 이왕에 죽을 목숨이라
인생이 가여웠고 또한 스스로의 죄책감도 덜고자 하여 한마디 말을 던졋다.
"그 계집이 자네 신세를 그르쳤네. 이미 엎질러진 물인, 모두 훌훌 털어내고 다른 고장에
가서 소문없이 사소."
이경순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하였다. 양화에 가까워 인가의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강가에 이르자 두 사람은 등불이 흔들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게 누구요?"
"전생입니다. 이방 어른이슈?"
전생이가 등불을 흔들며 서 있었고, 경순의 아내가 곤두박질치듯 앞으로 달려나왔다.
"우리 쥔어른두 오셨나요?"
"여보, 나 여기 있소."
경순이 나서니 아내는 그의 소매를 부여잡고 흐느꼈다.
"예서 삯만 주면 배는 얼마든지 있을 걸세. 어서 떠나시게." 이방은 이 난처한 자리를 빨
리 피하고 싶어서 벌서 돌아갈 기색을 하면서 재촉하였다.
"여러가지루 수고가 많았어. 내 사분원은 자네가 맡아서 잘 운영하도록 하시고, 내가 일
년쯤 뒤에 찾아갈 테니 토지나 처분하였다가 돌려줄 수 있겠나?" 이방은 속으로 맹랑하여
말없이 섰고 그의 처가 허리를 떠다밀며 말하였다.
"아이고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어서 가십시다." 경순은 이방과 손을 마주 잡고 작
별을 하였고, 전생이는 한손에 화승총을 들고 등에는 부담농과 보퉁이가 얹힌 지게를 짊어
지고 앞장을 섰다. 경순과 그의 아내는 나란히 그뒤를 따라갔다. 이방은 어쩐지 그들의 비명
이 곧 들려올 것만 같아져서 수렁에 빠지고 넘어지고 하면서 오히려 제가 달아나듯 하였다.
한편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그들을 해치려는 자들을 만류하여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예 내친 김이라, 그저 오늘밤은 평생에 처음 꾸어보는 악몽이거니 하며
입을 악물었다. 그의 눈앞에는 참혹한 시체와 더불어 높은 마루에 정자관을 쓰고 앉은 모습
과 조생원의 아들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창골서부터 도장댁과 전생이의 뒤를 밟아왔던 털벙거지 세 사람은 그들의 수작하는 양을
보고 미리 앞질러 도사공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나룻가를 막고 엎드려서 기다리고
있었다. 등불이 흔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첫째로 이경순이었다. 셋이 한번에 달려들어 이경순은 난자하고,
다음에는 병신인 전생이와 아낙네는 별 저항없이 단칼에 베어버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전생이가 짊어진 지게에 부담농이 얹혔고 그것은 적지 않은 돈냥일 것이라는 말을
형방에게서 들은 뒤라 살기가 등등하였다. 그들은 세 사람이 지나자마자 이경순의 등뒤를
덮치기로 하엿다. 하나는 날이 시퍼런 환도를 빼어들고, 또 하나는 짜른 칼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한팔 길이의 꺽쇠 달린 쇠도리깨를 지니고 있었다. 이제 경순의 무른 살이 온통 박
살이 날 판이었다. 전생이가 지나고, 이경순이 좀 떨어져서 그뒤를 따르는데, 등롱을 든 경
순의 처가 바로 뒤에 처져 있었다.
이경순이 맨 뒤에 서는 것이 기중 편이한 표적이 되겠으나 까짓 기왕에 죽을 목숨들이니
한꺼번에 두 목숨을 해치울 작정을 하고서 포졸들은 벌떡 일어났다. 인기척에 놀란 경순의
처가 뒤를 돌아보며 으악 소리를 지르는데, 대저 살기라는 것은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쪽으로 뻗치게 마련이라 비명소리에 따라서 칼날이 도장댁의 연약한 등줄기로 파고들었다.
그참에 이미 등불을 굴러 떨어지고, 경순은 몸을 날려 한 키는 족히 넘는 언덕 아래의 강물
속으로 첨버덩 뛰어들었다. 칼 든 자가 주춤주춤 하다가 아무래도 어둠을 가늠할 수 없는지,
"저놈부터 죽여라!"
외치고 전생이를 향하여 달려드는데, 이미 사이가 떴으니 가만히 서 있을 그가 아니었다.
지게를 벗어 던지고 옆구리에 총포를 낀 채 냅다 뛰었다. 한 놈이나 노리면 될 것을 뛴 놈
찾으랴 강물을 살펴보랴 우왕좌왕 하는 중에 이미 넘어진 지게에서 부담농 두짝과 보퉁이가
던져져 있는 것을 보고는, 애초에 재물에 욕심이 앞섰던지라 사람 죽이는 일보다도 재물 챙
기는 이리 급하여졌던 것이다. 그들은 다투어 하나씩 짊어지고는 애꿎게 베어버린 도장댁의
쓰러진 몸을 타넘고 되돌아 달아났다.
물속에 처박혀 잡초 사이에 간신히 머리만 내밀고 있던 경순은 발자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비탈을 피하여 모래밭 족으로 헤엄을 헤어나갔다. 그는 이것저것 돌아볼 사이 없이 우
선 칼 맞은 아내에게로 달려가 목을 끌어안아 무릎에 뉘는데 울컥 솟아난 핏덩이가 하반신
에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여보..."
고개를 뒤로 떨어지고 이미 기맥은 사라져버린 도장댁은 애처롭게 눈만을 번듯하니 뜨고
있었다.
"전생아! 어디 있느냐?"
그는 아내의 목을 팔에 안고서 소리쳤다. 어둠속에 숨어 있던 전생이가 달려나왔다.
"아씨는 어찌되셨습니까?"
"너 총포 챙겨 나왔느냐?"
"예... 한자루 가지구 나왔습니다."
이경순은 아내의 머리를 내리놓고 전생이에게 화승총을 빼았았다.
"장약 어딨느냐?"
전생이가 앞 전대 아래 차고 있던 쇠뿔 약통을 건네주니, 경순은 연신 떨리는 손으로 탄
환을 장전하였다.
"나으리..."
"너는 시신을 거두어 저어기 풀숲에서 기다리구 있거라. 어찌하든 날이 새기 전까지는 돌
아올 게다. 날이 새어서도 오지 않으면 숲에 양지바른 자리를 골라 묻어주고, 너 혼자 떠나
거라."
이경순은 음울하게 씹어뱉은 것이었다.
"나으리... 저두 갈랍니다."
전생이도 울먹이며서 나서는데, 경순은 그의 가슴을 떼밀어냈다.
"아니다. 저 사람을 노중에 혼자 내버려둘 수야 있겠느냐. 내가 해뜨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거든 기다리지 말아라."
경순은 총을 움켜쥐고 뛰어가는데 솟구쳐 나오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
시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손목을 부여잡으며 반겨주던 아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허
무하게 목숨을 잃은 아내를 보자, 애간장을 태워준 자신이 얼마나 몹쓸 사람인가 뉘우쳐지
는 것이었다. 옥을 나서자마자 아내 걱정은 고사하고 묘옥의 일부터 물은 일이 얼마나 매정
하게 여겨지는지 몰랐다. 자식 못 낳은 설움이라면 남정네인 자기보다도 아내 쪽이 훨씬 서
럽고 서운했을 터이었다. 평생을 따라다니며 분원 일으키는 데 조력하여 초년 고생을 겪었
고, 이제 밥술이나마 먹게 되니까 자식 낳을 걱정으로 경순이 외방으로 나도는 것을 참아내
던 아내였다.
"가엾은 사람..."
경순은 자꾸만 흘러내려 앞을 가리는 눈물을 연신 소매로 훔쳐냈다.
그는 포졸들이 뛰어간 방향을 따라서 몸을 숙이고 달려나갔다. 강변에는 질척한 수렁이
군데군데 패어 있었고 잡초가 허리만큼씩 자라나 있었다. 강물 쪽에는 별빛이 내려앉아 반
짝였으나, 모래밭을 지나 잡초 사이로 뚫린 길은 앞가늠을 할 수 없도록 캄캄하였다. 저쪽은
부담농과 피륙 보퉁이를 나누어 짊어졌을 테니 맨몸으로 뛰는 경순과는 걸음에 차이가 날
것이 뻔했다. 얼마 안 가서 물을 밟는 듯한 찰박거리는 소리를 듣고, 방향을 짐작하기 위해
서 경순은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길 아래편의 모래밭 쪽으로 뛰어가는 사람의 거뭇한 모습
이 느껴졌다.
경순은 허리를 잔득 구부리고 모래밭으로 내려섰다. 군데군데 물이 괴어 있고 물먹은 모
래땅이라 뛰기에 좋도록 편편하였다. 어깨에 부담농을 짊어지고 뒤뚱거리며 뛰어가는 자의
등이 보였다. 경순은 거리를 눈짐작해보고 나서 멈춰 서서 총을 겨누었다. 십 보 밖에서 간
장 종지를 박살을 내는 솜씨인지라 경순이 놓은 총은 그대로 상대를 거꾸러뜨리고 만다. 요
란한 방포 소리와 함께 포졸이 앞으로 다리를 꺾으면서 쓰러졌다. 잽싸게 달려간 경순이 발
로 놈의 가슴을 밀어놓으며 살펴보니 머리 한가운데를 얻어맞은 자는 그대로 숨이 식어 잇
는 참이었다. 경순은 다시 비탈 위로 올라 잡초 사이로 간간이 달리고 또한 멈추어 귀를 기
울여 보면서 총에 장약을 재어 넣었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 가운데 들리느니, 도랑물이 강으
로 흘러드는 소리와 가끔씩 먼산 들녘에서 울부짖고 있는 소쩍새 울음소리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흡을 목구멍 너머로 연신 눌러 삼키면서 온 신경을 두 귀에 집중하엿다.
가까운 곳에서 풀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 과연 어둠속에서 흰빛이 번쩍 빛
나며 한 놈이 경순의 왼쪽을 급습하였다. 얼결에 치켜든 총신에 맞아 칼날이 쨍 하는 날카
로운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칼날에 경순의 드러난 왼쪽 팔이 자상을 입었고,
그는 오른편으로 급히 몸을 숙이고 몇발짝 물러났다. 포졸은 급습에 실패하자 상대의 방포
를 피하는 길은 간격을 주지 않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다시 환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
경순은 미처 총을 겨눌 사이도 없이 총대를 비스듬히 쳐들고 좌우로 몸을 피하였다. 칼날이
총신에 부딪칠 때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더불어 불빛이 반짝였다.
포졸이 단칼에 벨 수 없음에 마음이 급박하였는지 분을 내면서 두손에 잡은 환도의 머리
위로 번쩍 쳐들고 고함을 내지르며 나서는데, 금강보운의 자세였다. 운래가 금강보운 세에는
수두로써 곧장 찔러 가슴을 노리는 것이 공격이요, 양각양천으로 맞받아냄이 방어인데 경순
은 검술을 모르는지라 뒷걸음질로 급히 물러낫다. 물러나는 경순에게 틈을 줄 상대가 아닌
지라 재처 같은 자세로 달려드니 뒷걸음질치던 경순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뒹굴고 말았다.
이제 칼날이 떨어져 이경순의 해골이 두 쪽으로 갈라지려는 찰나에 충구를 앞으로 내밀면
서 경순은 얼결에 내질렀다. 총구에 목을 찔린 포졸이 지탱하지 못하고서 혼절하여 경순의
몸 위로 태산처럼 무너져 내려와서 덮쳤다. 경순은 포졸을 옆으로 밀어내고 비틀거리며 간
신히 일어나 앉았다. 경순은 곁에 넘어진 상대의 멱살을 잡아 치켜올리는데 그자는 잠시 후
에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왔다.
"누가 시켰느냐?"
경순이 거칠게 흔들어대자 그자는 나약하게 쿨럭이며 기침을 터뜨렸다, 그때마다 입속에
서 피가 흘러나왔다. 경순이 거칠게 흔들어대는 것이 몹시 괴로운 모양이었다. 이경순은 그
자의 머리를 내려놓고 곧 내려찍을 듯한 자세로 총을 번적 치켜들고는 중얼거렸다.
"대갈통을 부숴주랴?"
"사, 살려... 주."
"누가 보냈냐니까."
"혀... 형방... 나으리가."
"그러면 이방은 관계없느냐?"
"있소..."
경순은 부글부글 끓어오는 마음을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면서 벌떡 일어났다. 포졸은 헐떡
이면서 간신히 손을 쳐드는 시늉을 하였다.
"사, 살려... 주오."
이경순은 총대로 그의 머리를 두어 번 내리쳤다. 경순은 그의 몸 위에 침을 퉤 뱉어주고
서 돌아섰다.
"이런, 도적놈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경순은 그제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눈치채고 울분의 이를 갈았다. 일단 그를 도우려는 듯
싶던 이방이 자신의 남은 재산을 탐내어 혐의를 걸어 탈옥시킨 듯이 하고서, 후환을 없이하
려는 의사였음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세 놈이었는데..."
이미 둘을 줄였으니, 남은 하나를 처치해야 하건만 한도 가진 자와 싸우느라고 많이 지체
되엇던 것이다. 경순은 다시 장약을 재려고 허리에 찼던 소뿔 약통을 찾았으나 싸우는 사이
에 어디다 떨어뜨렸는지 보이질 않았다. 땅바닥을 더듬거리다가 드디어 그는 총포를 내던지
고 일어섰다. 그 대신에 그는 환도를 주워 들고 다시 여주 창골을 향하여 뛰었다. 앞서 달아
난 마지막 한 놈은 어디 숲에라도 기어들었는지 마을이 다 나오도록 보이질 않았다. 무엇보
다도 경순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미운 것은 친한 동무라고 믿어왔던 이방이었다. 그래도 아
전붙이란 중인이니 아무리 자기가 장사치라도 그만은 경순에게서 여러번 도움을 받았고, 시
골 토반들께 대하는 것과는 달리 두터운 우정을 보여왔던 것이었다.
"내 이놈을 죽이지 않고는, 아내의 눈을 감길 수가 없구나."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기
진맥진한 경순은 강가로 내려가 강물을 펴마시고 우선 타는 듯한 갈증을 면하였다. 시각
은 아직 깊은 밤중인지 파루가 되려면 먼 것 같았다. 그는 산성 아랬길을 휘돌아 사람들의
눈을 피하느라고 논밭길로 질러서 곧장 이방의 집을 바라보고 뛰었다. 객사거리 앞에는 늦
게까지 투전하는 자들이 가끔씩 소피를 보러 나와거나 바람을 쐬러 나오는 적이 있었고,
인적이 있는 줄을 아는지라 경순은 그곳을 피하여 마을의 좁다란 골목을 비집고 빠져나갔
다. 동네 개들이 컹컹 짖어대고 일시에 여러 곳에서 짖어 경순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엿다.
이방의 집 토담 밖에 이르러 고개를 기웃이 내밀이 동정을 살피는데 그가 기거하는 건너편
사랑의 등창문에 불빛이 내비쳤고 창호지에는 사람 그리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흥, 저 죽을 생각은 못하고..."
아내의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자 경순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환도를 입에
물고 토담을 뛰어넘어갔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이방 혼자 촐촐하게 앉아 소주를 들이켜는
중이었다. 아마도 일을 저질러 놓고서도 심기가 불안하여 여태 잠들지 못하고 술로 잠을 부
르려는 모양이었다. 경순은 슬그머니 문고리를 당겼다.
"어...?"
이방이 술잔을 든 채로 고개를 드는데, 경순은 와락 뛰어들어 문을 닫고 환도를 똑바로
이방의 코앞에 겨누었다.
"꿈쩍 말아라."
한눈에 보기에도 경순의 몰골은 참혹하였다. 전신에 진흙과 피투성이요, 상투는 흐트러져
산발이 되었고 독기를 내뿜는 두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더구나 자상을 입었던 왼팔
에서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왔다. 경순은 칼을 켜눈 채로 소반 위의 소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고는 음산하게 속삭였다.
"어째... 내가 죽은 줄 알고 조상 술을 마셨는가?"
이방은 완전히 핏기가 가셔서 입술만 간신히 달싹이며 물러나 앉았다.
"자... 자네 이게 무,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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