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이 고비여, 내일부터는 차츰 미음이라두 쑤어 먹이게." 조니포 첫봉이 형제들은
불타산에 잠입하여 심백이를 혼뜨검내주자 약속한 선흥이가 밤을 넘기도록 오지 않자, 일단
산에 오르는 일은 중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광에 가두어둔 소두령이란 자가 골치였으니,
화승총에 깨어진 머리에 두창이 번져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우선 임시로 된장을 퍼다가
머리에 싸매어주기는 하였으되, 매끼마다 굶길 수는 없는지라 귀찮은 노릇이었다. 세봉이도
수군역을 끝내고 돌아왔고, 이제는 선흥이만 오면 곧 입산을 할 계획이었으니 첫봉이가 은
근히 조바심치는 것은 당연하였다.
"선흥이 자식이 아무래두 집에 가서 무슨 일을 당했나 보다. 약조를 어길 놈이 아닌데..."
"그건 어쨌거나 저놈을 어쩔 작정이우. 공연히 광 속에 터줏대감이나 하나 더 늘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세봉이도 말하였다.
"언니들...저 자식 밥수발은 이젠 도저히 못하겠수." 첫봉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우들
에게 말하였다.
"자 이거 큰 낭패로구나. 저놈을 놓아 보내자니 가는 즉시루 우리 모의를 알릴 게 아니냐.
심백이가 그런 말을 듣구 가만히 자빠져 있지는 않을 게다. 그리구 없애버리자니 불타산 산
채를 영 모르게 된단 말이야. 이번에 잃은 물건을 되찾기는커녕, 앞으루 밀상질은 번번이 저
놈들 때문에 파탄이 날 게여."
"수군 진영에 가서 알릴까..."
세봉의 옅은 말에 둘봉이가 코웃음을 쳤다.
"얘얘, 하나는 알구 둘은 모르누나. 도적을 잡았다구 발고하면 저놈이 수걱수걱 우리 시키
는 대루 말할 듯싶으냐. 대번에 멍구미 밀상 목에 대해서 발설할 게다."
"오늘 하루 더 기다려보자꾸나. 내일두 오지 않으면, 내가 선흥이네 집으루 찾아갔다 와야겠다."
"관밥을 먹거나 곤장에 몸을 못쓰게 되어버렸는지두 모르우." 첫봉이와 둘봉이는 애가
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계에서 삼장수 거간이 돈을 받으러 올 날짜가 임박했던 것이다.
물론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요, 저들 나름대로 뒷보도 든든하고 패거리도 있으니 첫봉이네
형제의 실책을 그냥 보아넘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물주와 거간에 당할 핍박쯤이면 까
짓 거 두 번 저녁 짓고 밤도망을 해버려도 되겠으나 아까운 장삿길은 아예 끊기고 마는 것
이 아닌가.
이튿날도 선흥이는 조니포 첫봉이네 집에 오질 않았다. 첫봉이는 용우물까지 선흥이를 찾
아나섰다. 밤 이경이 되어 둘봉이는 포구의 주막으로 수군들과 돌려태기를 하러 가서 돌아
오지 않았는데, 멍구미 앞바다 갯벌에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들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
기 환도와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대략 칠팔 인은 되어 보였다.
인삼과 은자를 빼앗아갔던 불타산 패거리들은 아무래도 첫봉이네에 잡혀 있는 자가 걱정
이었고, 감히 불타산 패거리에 맞서 싸운 그들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후환은 물론이요,
불타산 인근 마을에 위세를 보이려는 뜻도 있었다. 심백이가 친히 팔팔한 자들만을 골라 산
을 내려왔던 것이었다. 그들은 산골짜기에서 노숙하였다가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조니포를
향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심백이는 삭발한 머리에 회색 승복을 입고 한 손에는 화승총 잡고,
허리에 짜른 칼을 차고 있었다.
"바로 저 집이우."
일행 중의 하나가 심백이에게 첫봉이네 집을 가리켜 보였다.
"불이 꺼졌군."
"지금쯤 곯아떨어졌겠지요."
그들은 잠깐 해변가의 바위 뒤에 몰려서서 부근에 인적이 없는가를 살피고 의논들을 하였
다.
"여기서 진영이 가깝다며?"
"예, 장교 한 놈이 나와 있습니다만 모두 허재비 같은 것들입죠."
"하여간 부딪치면 낭패보기 십상이니 아뭇소리 들리지 않도럭 해라." 심백이가 한 사람을 뽑아내 첫봉이네 집을 염탐하라 일렀다. 그자는 어두운 해변을 따라 조니포마을 어귀로 스며들어갔다.
"오장을 구해내구 형제놈들을 어찌할라우?"
"그 녀석들이 완력깨나 쓴다며? 그냥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터이니 대적하려 들겠지. 모
조리 죽여버려. 그리구 선흥이란 놈두 여태 함께 있으면 몽치로 때려서 기절시키구 사로잡
아라. 내가 몸소 모가지를 베어낼 테니까. 그놈께는 빚이 많단 말이야."
"자칫 실수하면 도리어 우리가 큰코 다치기 쉽습니다."
"염려 없다. 이게 무슨 지겟작대긴 줄 알았니. 기운 믿구 날뛰는 놈의 뒤통수에 한 방만 놓으면 되는 게야. 콩알에 장사 없지. 너희 셋이서 선흥이놈을 맡고 너희들은 첫봉이네 형제를 맡아라. 나는 삽짝을 부수구 들어가서 선흥이놈이 설치기만 하면 총을 놓을 테니까." 이윽고 어둠속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탐 갔던 자의 군호 소리였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어 재빨리 외떨어진 첫봉이네 집으로 다가들었다. 울 밖에 모여 서자 기다리고 있던 정탐자가 속삭였다.
"울을 뜯구 들어가보니, 식구들이 모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안방에는 늙은이가 있고,
윗방은 비었습니다. 뒷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데 누군가 있는 듯합니다. 아마 오장은
광에 갇힌 것 같소이다."
심백이가 졸개들을 나누는데 셋은 울타리 뒤쪽으로 들어가 뒷방을 덮치게 하고 하나는 안
방의 노모를 맡고 심백이 자신과 두 부하들은 광과 윗방 사이의 좁은 길목 양편에 숨었다가
뒷방에서 앞마당으로 나오는 자를 급습하기로 하였다. 먼저 세 놈이 울타리를 뜯고 뒤꼍으
로 들어가서 뒷방의 문을 막아섰고, 심백이와 부하들은 삽짝문을 조심하여 뜯어낸 뒤에 마
당으로 들어섰다. 심백이는 화승총을 거머쥐고 광뒤에 붙어 섰는데, 하나는 툇마루에 올라섰
으며, 두 놈은 윗방 앞에서 뒤꼍을 노리고 서 있었다.
그때에 어린 네봉이는 뒷간에 앉아 있었다. 초저녁부터 배가 살살 아파오는 것을 참고 잠
이 들었었는데, 한밤중에 설사가 터지게 된 것이었다. 네봉이는 두 번째로 일어나 뒷간에 갔
고, 앉아서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울의 싸릿가지가 버석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
다. 희끄무레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는데 가끔씩 번쩍이며 빛을 내는 환도를 알아볼 수가 있
었다. 네봉이는 숨이 턱 막혔다. 떨리는 다리를 버티고 일어서서 간신히 옷단속을 하고는 흙
과 돌로 쌓은 뒷간의 토담 벽을 돌아보았다. 천상 빠져나갈 데라고는 짚이엉을 얹은 지붕
쪽밖에 없었다. 괴한들이 뒷방 문을 살그머니 열어젖히는 것이 보였다.
네봉이는 이미 사태가 글러버린 것을 알아채고 울 바깥쪽을 향하여 지붕의 이엉을 헤쳐놓
았다. 그들은 뒷방으로 올라서자 자고 있는 세봉이를 사정없이 칼로 쑤셨다. 세봉이가 기다
란 비명을 내지르자 도적들은 제각기 세봉이의 가슴과 배를 난자하였다. 비명소리를 신호로
하여 안방 앞에 섰던 자가 달려들어가 비명소리에 놀라 깨어나는 노모를 간단히 해치웠다.
뒷방에서 세봉이의 처참한 시체를 끌고 앞마당으로 돌아 나오는 자들을 보자 심백이는 당황
하여 외쳤다.
"아니...이놈뿐인가?"
"혼자 자구 있습디다."
"형제가 넷이구 선흥이놈까지 와 있다더니 설건드렸구나!" 졸개들이 광 속에서 앓고 있
는 오장을 업어 왔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라. 자칫하다간 우리가 오히려 당하겠다. 인기척을 알구 빠져나갔는지
두 모른다."
심백이는 초조하여 안달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미 가족을 몰살시키기로 작정은
했으되, 씨를 말리지 못하였으니 남은 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는 노릇이었다. 첫봉이와 선흥
이가 장연서는 세상이 다 아는 막역지우이니 가장 골칫거리가 선흥이었다. 설마 산채에까지
야 쳐들어오랴마는 언제 노리고 몰래 스며들지 알지 못할 일이므로 공연히 불안하였다. 집
뒤짐을 하던 자들이 돌아와 다급하게 말하는데,
"누군가 달아난 듯하우."
"뒷간 지붕이 뻥 뚫렸습디다."
"방금일 테니 뒤쫓아가봐라. 잡을 수 없으면 총을 놓아버려."
"군졸들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올 게요."
"달려와봤자, 산마루가 지척이다. 일단 솔밭으로 들어서면 감히 뒤따르지 못한다. 어서 잡
아 죽여!"
졸개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가 조니포의 풀밭 사방으로 흩어졌다. 네봉이는 모래밭을 뛰고
있었다. 둘봉이가 노름하러 간 진영 앞의 주막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멍구미 앞의 움푹 팬
좁다란 만을 빙 돌아서 뛰는데 드디어 그를 따라잡은 도적들이, "저기다 저기!" "이놈, 게 섰지 못할까." 외치며 달려왔다. 한 놈이 무릎을 꺾고 총을 받쳐 겨누고 한 방을 놓았다. 총소리의 여운이 포구 안에 기다랗게 울려퍼져갔다. 네봉이는 폴짝 뛰었다가 이번엔 물을 바라보며 절뚝이며 뛰었다. 도적들이 서른 발짝 가까이 다가들었으나, 네봉이는 주저하지 않고 곧장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멍구미섬을 여러 차례 오가는 머구리이니 헤엄질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총소리를 내어버린 도적들은 물위로 재빠르게 사라져가는 네봉이를 안타깝
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되돌아섰다.
"갯가놈들이니 헤엄질을 따라잡을 수가 있겠수. 놓쳐버렸습니다."
"어서 내치자."
기왕에 임집을 덮쳤으니 맨손은 불타산 패거리의 체통에 관계되는 일이라, 첫봉이네 장롱
을 뒤져서 돈냥과 쓸 만한 가재들을 추리고, 광에서는 장사하다 남은 해물 부스러기들을 거
두어 봇짐을 꾸려서 제각기 메고 나섰다. 가위 첫봉이네 집은 쑥밭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백
이 일행들은 조니포를 빠져나가 불타산에 연이어 닿은 갈재마루를 타고 올랐다. 그러나 심
백이는 어쩐지 뒤가 미적지근하여 못내 개운하지를 않았다.
네봉이는 정신없이 헤엄을 쳐서 진영 근처의 주막 쪽으로 올라갔다.
뭍에 올라서서 걸음을 걸으려 하니 발에 힘이 없고 시큰거려서 디딜 수가 없었다. 네봉이는
그제서야 왼쪽 허벅지가 쑤셔오는 것을 깨달았다. 총에 맞았던 것이다. 방금 셋째 형과 모친
이 한꺼번에 살육당하는 자리에서 빠져나온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봉이는 주막을 향해
서 절뚝이며 뛰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곤 하였다. 그때에 어둠속에서 몇사람이 마주 걸
어오다가 고함을 질렀다.
"웬놈이냐?"
이젠 다 틀렸다고, 네봉이는 기운이 쪽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벌렁
드러누워서 죽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조심조심 네봉이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니...이게 누구냐, 네봉이로구먼."
그들은 총소리를 듣고 포구로 나온 군졸들이었다. 네봉이가 고개를 들어 살피니 벙거지에
더그레 차림인지라 벌떡 일어났다.
"우리 둘째 언니가 어딨어요?"
"응, 시방 돌려태기하느라고 정신이 없더라. 무슨 일이 났니?"
"도적들이 몰려와서...식구들을 쳐죽였어요. 나는 다리에 총을 맞았어요." 그들은 네봉이를 업고 주막으로 갔다. 주막 문을 열어제치자, 호롱불 밑에서 지패를 펴들고 노려보던 사내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아이구 둘째 언니!"
방문턱에 엎어지면서 네봉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몰골을 보니 옷은 흠뻑 젖은데다 왼쪽
다리는 흘러내린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어린 네봉이의 끔찍한 몰
골에 둘봉이는 놀라서 우선 부축하여 어깨를 끌어안기부터 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도적들이 몰려와서 셋째 언니와 어머니를..."
"뭐라구?"
"방금 총소리가 들렸길래 나가봤더니 저 모양이여."
네봉이는 곧 기진하여 혼절해버렸다. 둘봉이가 아우를 주막에 부탁해놓고서 수군 진영의
군사들과 함께 조니포 끝쪽의 집으로 달려갔다. 집 모양은 그대로였으나 마당에 들어서자마
자 둘봉이는 심장이 멎는 듯하였다. 광문이 열려져 바람에 흔들흔들 삐꺽이고 있으며, 안방
의 미닫이가 열렸는데 어둠속에서는 피비린내가 전해져왔다. 장교가 횃불을 밝혔고 집안에
는 음산한 불빛이 일렁이며 내리덮였다. 안방의 문께로 다가섰던 둘봉이가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탄식을 첫마디로 하여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의 등뒤로 몰려 서서 구경을 하는데 불에 비친 안방에는 이불이 온통 피칠이 되
어 있었다. 첫봉이네 모친은 눈을 번 듯 뜨고 있었으며, 어깨에서 허리로 깊숙이 베어진 상
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방바닥에까지 번져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서 깨어 일어나는 것을
위에서 칼을 그어내린 모양이었다. 뒤꼍을 살피러 나갔던 군사들이 이번에는 세봉이의 난자
된 시체를 이불에 싸서 마당으로 들고 나왔다. 한참이나 방성대곡을 터뜨린 둘봉이는 멍청
하게 아우의 시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도적들의 행방을 살펴보아라."
장교는 그렇게 외쳤으나, 소용이 없는 짓인 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너른 천지에
어느 산 어느 골짜기로 숨어버렸는지, 그들을 찾는 일은 전혀 가망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지 사람이 둘씩이나 처참하게 죽었으니 모두들 병장기 꼬나잡고 인근 산과
숲으로 몰려갔다. 한참 뒤에 첫봉이네 집으로 장교와 군사들이 되돌아가보니, 둘봉이와 네봉
이가 대강 시체 수습을 끝내고 마을 아낙네들을 불러다 수의를 짓고 음식을 장만하는 중이
었다.
"사방을 다 찾아보았건만 종적이 묘연하네그려."
"그만두슈. 불타산 패들인 모양인데 만났자 대적하지두 못할 게요." 둘봉이가 은근히 결
이 나서 장교에게 퉁명스레 말하자. 장교는 눈을 번쩍 떴다.
"불타산 놈들인 걸 자네가 어찌 아나? 아무래두 무슨 사단이 있긴 있었구만..." 둘봉이는
실언했나 싶어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여보게 어떻게 된 거야. 불타산 패들이 그 많은 임집들은 버려두고 하필이면 자네 집을
야습한 이유가 뭔가?"
"아 시끄럽소. 환난당한 집에 와서 왜 이리 보채시우." 둘봉이의 꽥하는 소리에 장교는
찔끔했다가, 다짐을 두고 돌아갔다.
"하여튼지 날이 밝으면 진영으루 좀 나오게. 우리두 보장을 올려야 할 테니 자네가 이실
직고를 해야지."
그날 둘봉이는 뜬눈으로 날을 밝혔다. 이튿날 해가 높직이 떠서야 용우물 나갔던 첫봉이
가 돌아왔고, 첫봉이는 거지반 미친 사람이 된 것처럼 눈에 핏발이 섰다.
"음...심백이놈, 사노질해서 연명하던 놈이 이제 내 식구들을 죽이구 얼마나 사는가 보자.
심백이놈의 간을 꺼내어 씹지 못하면 구구히 밥알이나 넘기며 살지는 않을 테다." 서둘러
서 모친과 아우의 장사를 지내니 졸지에 당한 변인지라, 첫봉이네 집은 더욱 을씨년스럽고
황폐하였다. 관가에서 자꾸만 오라 가라 하여 그때마다 구변 좋은 첫봉이가 가서 그럴 듯
이 둘러대었다. 만약 관에다 이실직고한다면 첫봉이네 형제의 밑구린 사연만 드러날 것이요,
실제로 불타산에 군병을 보내어 도적들의 산채를 토벌할 기미라곤 없기도 하였다.
저쪽에서는 백성들의 가산이나 털고 가끔 행인을 뒤짐하는데, 관군과 부딪친 적이 없으니
건드려서 터뜨리지 않겠다는 눈치가 보였다. 거병하면 감영을 거쳐 보고해야 하며, 일단 거
병하여 도적을 친다는 것이 알려지면 승패가 어찌됐거나 장계를 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노
릇이었다. 다행히 토벌한다면 모르되, 오히려 패한다면 상부의 문책은 물론이려니와, 수령의
치적에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찍혀지게 마련이었다. 불타산은 깊은 산이요 멀리 달마산까
지 그 능선이 백여 리에 잇닿아 있었다. 산채를 안다 하여도 협공을 도모하려면 해주와 문
화 관계에서 서로 막아주어야 할 테니 병이 한 고을의 군노 사령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노릇
이었다. 도둑놈 하나에 잡는 놈은 열 놈이라는 얘기가 맞는 일이었다. 그러니 관가에서 이실
직고하라는 것은 형식일 뿐이요, 첫봉이 쪽에서도 그런 것을 모를 바보가 아니었다. 어느 고
을에나 깊은 산이 있으면 수상한 녹림처사가 있는 것은 당연하게 아는 세상이 아니던가.
첫봉이는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고 강선흥이와도 의논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는 부글부
글 끓는 속을 드러내지 않고 갯가에 게나 주으러 다니는 것으로 매일을 소일하였다.
선흥이가 매를 맞고 자리에 드러누운 지 달포가 지났다. 과연 체력이 있는 사람인지라 상
처의 회복이 빨랐고, 뼈를 상한 것처럼 보이던 곳도 대개 아물고 거뜬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선흥이는 앓고 누워 있던 사이에 다른 사람처럼 과묵한 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는 이제
는 눈치나 보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양민의 삶을 내던지기로 작정하였다. 그가 우대용과
더불어 구월산에서 내려올 적에도 자기가 녹림당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
었다. 그저 저자의 왈짜패로 자라난 제 성깔에 맞는 이들과 의리지정을 맺었거니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하여도 국법을 등지고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마음
보다는, 어쨌든 잘못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선흥이는 여태까지와 같은 비굴하고 천대받은
생활을 감내할 듯싶지 않았다. 다행히 관가에서 뭇매를 맞고 나오는 것으로 그쳤지만, 어느
때에 자기 성미를 못 이겨서 큰일을 내게 될지 모르는 일어었고, 설혹 자신만은 몸을 빼쳐
고향을 등진다 하더라도 남은 식구들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었다. 기왕에 양민의 생활을 견
디어낼 자신이 없으면 일찌감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상수일 듯싶었다. 그러나 강선흥은 장
사치로 떠돌기 이전부터 농부의 자식이었고, 그 자신이 넓은 들판 끝에 초가삼간을 짓고 소
를 몰아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농군의 생활을 원해오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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