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90 1992. 4. 1 (목)
월차수당의 지급방법에 대한 부당함을 성토하는 괴유인물이 돌다.
P/C로 찍어낸 그 유인물의 작성자는 관리직 사원이 분명하다.
노조원이 아닌 관리직 사원의 회사에 대한 울분의 표현인 것이다.
범인을 찾는다고 각 사무실의 프린터를 조사하고 다니는 총무부 직원들, 短氣의 HH기 부장.
그를 短氣라고 군시렁거리는 나 역시 부서장회의에서 거품을 무는 HH기 부장에게 그 문제에 관하여 입도 벙긋 못한다.
여성다움- 그를 향한 갈망은 이제 하나의 강박이다.
강박은 데포르마숑되어 여러 가지 이미지의 환상을 창출한다.
16492 1992. 4. 3 (금)
퇴근하며 어머니께 가려고 족발집 들렀는데 술마시고 있던 인사과장 만나다.
소주 몇 잔 나누며 듣는 몇가지 중요한 회사의 정보.
족발 꾸러미와 딸기 바구니 들고 어머니께.
인성의원에 환자가 없다고 의기소침하신 어머니.
늙은 고용의사는 환자가 없으면 공연한 자격지심으로 불편하다.
형은 용인에 며칠간 교육받으러 간다고 부산하고.
彦이는 밤 9시에 씩씩하게 독서실로 향한다.
매일 12시에 돌아온다고.
10시 조금 넘겨 돌아온 집, 俊이는 이미 잠에 떨어져 있고나.
새벽.
모처럼 듣는 드볼작의 첼로협주곡.
피에르 푸르니에.
16495 1992. 4. 6 (월)
일요일 아침.
알 수 없는 답답함.
俊이의 옛날 책가방을 배낭으로 메고 집을 나선다.
지하철타고 온천장에 내려 식물원 옆을 끼고 돌아 산을 오른다.
헉헉거리며 남문에 도착, 다시 산성 마을 지나 동문까지.
거기서 능선을 타고 원효봉지나 북문에 도착하고 범어사거처 지하철 범어사역까지의 산을 걷는다.
5시간여에 걸친 논 스톱의 걷기.
홀로 오르는 산.
날다람쥐가 이 나무가지에서 저 나무가지를 건너뛰어 나른다.
거암이 버티고 선 산록, 금정산은 참 넓고도 넓은 산이다.
북문가는 능선에서는 계곡의 창공을 행글라이더가 떴다.
땅을 박차고 날개를 벌려 공중의 연이 되는, 이카루스의 후예들, 그들은 어쩌면 자유의 어느 언저리쯤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북문에서 땀을 들이며 막걸리 몇잔, 범어사 계곡에서 또 몇잔.
집에 도착하니 5시.
2시30분경 눈이 떠지고, 뒤척이다 4시에 벌떡 일어난다.
목욕하여 어제의 땀을 씻어낸다.
모차르트의 피아노를 울리게 하고.
유다서, 시편을 읽고 내 방에서 드리는 기도.
16496 1992. 4. 7 (화)
부산의 봄이라니.
황사로 뿌연 하늘, 불어재끼는 바람.
겨울보다 더 마음들을 시리게 한다.
일요일의 홀로 산행한 다리와 허벅지의 뻐근함이 그나마 스산한 날씨 속에서도 어떤 충일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중공의 컨테이너선 2척 건조계약.
업무량은 내년도분까지 거의 확보되어 가는데, 심각한 것은 일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오늘 SB-386 예비시운전인데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러나 내려다 보이는 먼 바다에 파도는 없다.
잘하면 출항할수 있을 것이다.
내 방에 출근준비 마치고 기도.
보로딘 현악4중주.
16497 1992. 4. 8 (수)
강석경의 소설 '숲속의 방'
여대생의 방황과 자살.
세척강박적 결벽증을 갖고 있는 그녀는 민중운동의 아웃사이더로서의 사이비엘리트의 자괴감에 빠지고, 현실적인 안주형의 순응주의에도 동화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가정의 보수적인 속물주의를 또한 경멸한다.
그녀는 거리로 나가 스스로를 방기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우정도 사랑도 그 무슨 현상도 그녀가 안주할 진실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書評을 보면 주인공의 이런 삶의 진실은 제3의 삶이라는 것에 있으며, 처절한 그 방황은 바로 회색지대에 그 진실이 있다고 하였다.
제3의 삶이라는 것보다 나는, 주인공 소양의 그 방황은 년전에 읽은 '수렁에서 건진 내딸'이라는 일본사람의 수기에서 읽은 그 소녀의 방황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문적인, 사회적인, 문화적인 의미에서의 지성이 괴로워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방황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감성이나 정신분석 심층심리 감각적인 그런 방황이어야 그 캐릭터는 비로소 개성이, 살아있는 개성이 부여된다고 생각한다.
英이를 생각한다.
16498 1992. 4. 9 (목)
내 방에 앉아 소주잔 기울이며 샤갈의 그림 속으로 빠져든다.
술이 올라와 고양된 감성은 샤갈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그의 동화와 그의 고향과 그의 소망을 이해한다.
아아, 내게는 고향의 그림이 없는가.
아니 없을 리가 없지.
내 머릿 속에 고향의 그림이 있다.
한겨울-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는 추운 아침, 펌프에 뜨거운 물을 부어가면서 한참을 아래 위로 저어야 물이 올라와 펌프는 작동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침녁의 켄터키 옛집의 노래소리, 외갓집 작은형이 불렀던가.
한여름, 고즈넉한 대낮의 행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절정의 충일함에 숨이 멈추어지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대낮. 그대낮의 정적에 나는 그만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
2층집을 지을적에 젖엄마는 바람이 났었나.
로타리부근에는 구루마의 아이스크림 장수.
찬물 가득한 양동이 위에 띄어 진 여름과일의 색감.
앞니빠진 중강새로 媛이와 찍은 꽃밭 속의 흑백사진.
나라서 그릴 소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내게는 고향이 없다.
현란한 기억의 색채들이 춤을 추는 것보다, 그 완벽한 관계의 아름다움을 신뢰할 고향의 마음이라는 것이 없다.
꿈- 군대, 훈련소, 군의학교, 육군병媛...
아침 식탁, 아이들과 둘러앉아 성경을 읽고 모두 고개를 숙인다.
俊이는 어제 저녁 아비에게 반항의 몸짓을 하였다.
16500 1992. 4. 11 (토)
김성동 '만다라' 다시 읽는다.
부처란 무엇?
고유명사 아닌 보통명사, 누구라도 도달할수 있는 개념이 바로 부처이다.
젊은 영혼은 그 모호한 개념을 향하여 피흘려 자신의 존재를 바친다.
智山의 허무, 방황과 자학의 정체는 또 무엇?
부처라는 관념의 세계와 거기에 도달치 못하는 범속한 자아의 인식과, 그 괴리 때문에 안주할 곳을 잃고 쓰잘데없는 자의식 속을 헤매는 인물.
그의 그런 자의식 속의 진짜 핵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질곡에서 괴로워한다기 보다, '숲속의 방'에서의 소양이나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의 방종한 딸과의 공통분모적인 요소, 즉 지극히 개성적인 심층심리의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智山이는 전혀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PP갑이 산 책 두권 빌리기로.
토마스 해리스 '레드 드래곤'과 '블랙 선데이'
재미, 진짜 엔터테인먼트.
16501 1992. 4. 12 (일)
설계부 김광수 차타고 양정 백조예식장 가던중, 범내골부터 끝도 없이 정체되어 있는 차량의 행렬.
차를 버리고 헐레벌떡 지하철역으로.
겨우 시간 맞춰 예식장 도착.
방태표 이사 따님 결혼식.
조선업계의 많은 인사들의 면면을 만난다.
토요일 오후 '레드 드래곤'에 푹 파묻히다.
16502 1992. 4. 13 (월)
일요일, J와 산행.
몸살끼 자욱하여 찌뿌드드한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J를 휘몰아 집을 나선다.
이른 아침 문을 연 남포동 도시락 집에서 두시락 두개 사 챙겨 넣고, 지하철올라 범어사 역에 내린다.
계곡의 물소리는 봄의 노래, 그 노래를 들으며 범어사를 지나 북문까지 헉헉거리며 오르는 가시버시.
북문의 너른 산록에는 귀가 시리고 손이 시릴 정도로 山頂의 봄바람은 차가웁다.
옛 성벽 밑에서 바람을 피하며 도시락을 까먹고 다시 능선을 타고 동문까지.
산을 타는데에는 보기보다 지구력이 있는 J는 내처 남문으로 해서 하산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몸살끼가 있는 나의 다리는 무거워서 산성마을 입구에서 봉고타고 내려오자고 한다.
3시간여에 걸친 산행.
J도 만족하고.
걷고나서의 그 뻐근한 만큼의 피로감은 바로 그만큼의 뿌듯함이다.
동삼동와서 삼창파크 아래의 2층 미용실에서 머리카락 자른다.
돌아 와 목욕하고, 산행의 뿌듯한 피로와 머리카락 자른 후의 개운함으로 몇잔의 맥주가 없을소냐.
편한 잠 이루다.
16504 1992. 4. 15 (수)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 '레드 드래곤'
이것도 역시 '양들의 침묵'과 흡사한 분위기의 이상심리가 만들어 내는 범죄이야기.
좌우간 푹 빠지게 할만큼 재미가 있다.
부서장회의 석상에서 몇몇 독선적인 떠벌이들의 무식함에 기가 질린다.
정치 얘기에서 비약하여 역사에 이르는데, 가장 유식한척 떠들어 대는 치들의 엉터리 지식들과 오류 투성이의 역사인식.
그 허구를 사뭇 진지하게 남앞에 떠벌리는 그 용기는 차라리 가상하다.
나는 그 열변 앞에서 멀뚱한 표정으로 침묵할 뿐이지만 그러하지 못하고 때로 생경한 언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나 역시 수양이 부족한 까닭이다.
예수께서도 같은 뜻의 말씀을 하셨거니와, 극락과 지옥은 바로 마음 속에 있다는 부처님 말씀은 진리이다.
실존의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마음먹기 달린 것.
가정- 아무리 가까운 핏줄이라도 결코 그의 내부에 완벽하게 합일할수 없다는 처절한 고독감과 합일하여 완벽한 관계라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상태.
16506 1992. 4. 17 (금)
본격적인 칼라시트 교체공사.
전번의 구주산업에 비하여 매우 성실한 시공자세.
퇴근하여 TV 앞에 앉아서 국악을 듣는다.
내게도 흐르고 있을 조선의 정서.
고려가요 '정읍사'
어느 달밝은 밤의 옛그림이 떠오르는 듯 하다.
국악가요라는 노래.
줄타기 남사당의 딸, 도망간 어머니를 향한 恨.
恨- 그 恨이라는 정서는 분명코 내 심층심리의 영토에서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내 심층심리의 어떤 색깔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을 나는 알고 있다.
俊이, 영어시험 학급에서 2등.
9시 넘어 돌아 온 英이 대학 첫 시험 잘 치렀다고.
16507 1992. 4. 18 (토)
수산대학 실습선, O.E.C.F의 자재공급의 난맥상과, 정책상 설치유보장비 공급의 한계를 정하는데도 어설프기 짝이 없어 그 배는 2공장 선대 한쪽에서 선각공사는 이미 완공이 되었으나 녹이 슬고 있다.
이런 정책적인 문제의 해결은 아랑곳없이 공정만 다그치는 P상무의 어거지.
그러나 어찌하랴.
기실 그러한 어거지가 현장의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을.
동우회의 모임.
웃고 떠들고 마시는.
16508 1992. 4. 19 (일)
일요신문에서 의부를 살해한 여대생의 공판 기록을 읽는다.
국민학교 5학년때 의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그 후 계속해서 변태적인 시달림을 받아오면서, 심지어는 어머니와 한방에서 의부와 어울리기도.
그 의부라는 인물은 고위 공직자.
견디다 못한 그녀는 의부를 살해하였다.
악인은 존재한다. 극렬한 악의 마음을 갖고 태어나는 인물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런 악인은 살해당하여 마땅할 만한 충분한 하나님적인 당위성이 있다.
16509 1992. 4. 20 (월)
까닭모를 英이의 심통 때문에 속이 상해 있는 J를 부추겨 일요일, 산을 오르다.
금정산, 연속 네 번째의 등산.
가파른 호국사 코스로 하여 촛대바위거처 동문입구, 다시 야영장 지나 남문까지.
보광사 뒷편의 야외 파전집에서 J는 도시락까고, 나는 막걸리.
그리고 적요한 푸르른 숲길을 도파 하산한다.
다시 금강공원 지나 온천장으로 가 J와 남녀탕 따로 들어가 목욕.
지하철타고 만원버스 흔들려 돌아온다.
월요일 아침, 뻑적지근한 팔다리의 기분 좋은 피로감.
슈베르트 교향곡 5번이 울린다.
16510 1992. 4. 21 (화)
俊이 적성검사는 인문사회계열로 나타났는데, 英이 말인즉슨 적성검사따위는 하나도 고려할 건더기가 없다고 한다.
사실 열여섯짜리의 감추어진 적성이 그런 피상적인 검사로 확연히 드러날수 있겠나 싶다.
나의 경우를 보아도,
자연계열 안에 인문적인 요소가 있고, 인문계열 속에 자연과학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
도대체 인문이다 자연이다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마땅치 않다.
언어니 수리니하는 단편적 써넣기 만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더욱.
나는 나의 아들이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분명하다.
자신이 사랑할수 있은 직업, 보람을 느끼고 즐겁게 영위할수 있는 직업,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는 직업을 갖는 사람.
속물인 아비는 그래서, 안정된 전문직업인으로 俊이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화요일 새벽, 기도 드리는 속에 그러나 俊이를 속박하는 아비가 되지 말게 하소서한다.
16511 1992. 4. 22 (수)
정보의 홍수.
볼거리, 읽을거리,들을거리,느낄거리, 게다가 먹거리까지.
무엇을 취할 것인지, 무엇이 약이 되고, 도움닫는 정보인지 실로 그 취사 선택에 어려운 바 있는 세상이다.
이른바 매스 미디어.
집에서 받아보는 두가지의 신문, 조선일보와 국제신보.
두 신문을 실린 기사를 모두 꼼꼼하게 읽어내려면 아마도 2시간은 족히 걸려야 할 것이다.
대충 훑어보고 팽개치면 무슨 숙제를 하지 않은것처럼 떨떠름하다.
신문읽는 원칙- 정치기사는 대충 훑어볼 것, 계도적이고 캠페인성 기사도 역시.
사회면은 비교적 꼼꼼히, 문화면도 관심있게, 칼럼 사설등은 제목을 보고 결정하고.
그 이외 내 숙달된 선택감각이 찾아낸 기사 이외에 모두를 미련없이 그대로 버릴 것.
내 감각이 간과하고 지나간 그런 것들은 쓰레기같은 정보이다.
오후늦게 비 쏟아지다.
김태곤씨 차타고 돌아오니, 아무 연락없이 俊이가 돌아오지 않아서 어미는 학교로 하교길의 길목으로 찾아 다닌다.
막내를 향한 어미의 걱정스러움. 아직 어린애로 보이는 아들녀석인 어미.
그러나 나 역시 걱정 안되는바는 아니었다.
16512 1992. 4. 23 (목)
날씨는 이제 봄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언뜻 새파란 하늘이 구름사이로 내비친다.
풍성한 인간성.
소인배들의 재재거림을 능히 수용하여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대인의 풍모.
언제나 소인배들보다 높은 곳에서 사물을 관조하는 시각.
그러면서도 그는 소인배들을 경멸하는 법이 없다.
지극히 너그럽게 모든 것을 수렴하고 애정을 기울인다.
소인배들은 때로 그의 폭을 재려하지만 곧 그들은 이를 포기하고 만다.
넉넉하고 넉넉하여 소인배들의 자로서는 그를 측정할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슬퍼하여 통곡하는 눈물은 있을지언정 절망의 어두움은 없다.
그에게는 즐거워 환호작약하는 哄笑는 있을지언정 쾌락에 순간의 존재를 내맡기는 오르가즘의 키득거림은 없다.
풍부한 인간성, 대인의 풍모.
나는 그러고 싶다, 정말 그리 되고 싶다.
16513 1992. 4. 24 (금)
J의 마음 속, 남편에 대한 선입관은 부정적인 것으로 고착되어 있다.
無能, 無禮, 無知, 無恥한 보잘 것 없는 이미지로만 점철되어 있는 하나의 OBJECT.
때로 J의 표정이나 언뜻 비치는 언행의 편린에서 이를 감지하고 나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난다.
닮고 싶은 것은 대인의 풍모이나, 아내짜리에게서는 아무리 해도 소인배가 약여하니 참 아득한 노릇이다.
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 하였거늘, 修身도 그렇거니와 齊家도 역시 내게는 아득한 피안이기만 하여라.
16514 1992. 4. 25 (토)
퇴근하여 직원들과 술.
CT용과 김철수의 충돌.
못남과 이기주의가 합쳐지면 말릴 길이 없다.
결국 내 대갈일성으로 수습은 되었으나.
나는 시건방지게도 술벗이 없음을 서러워 한다.
술마시며 어울려 즐길만한 수준의 대상이 없음을.
저자거리의 張三李四보다 높은 의식과,지식과,정서와,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고상한 품격의 사람들.
이는 건방스럽다기 보다는 나의 비겁함 쪽일 것이다.
피흘려 싸우며 사랑하고 부대껴 살아가는 이 살이의 현장에서는 이리도 서툴면서.
그러나 아무런 언어가 없어도 충만하여, 그 눈을 들여다 보면서 술잔을 뒤집을수 있는 그런 상대는 진실로 그리웁다.
토요일, 간 밤에는 술에 젖어 잘 잤다.
J, 오늘 S형 어머니의 차타고 Hw선생님, 성근엄마등과 함께 남해 보리사행.
英이는 어제 시험 끝나서 오늘 가지산행 M/T.
부자만 오롯이 남아 있어야 하는 토요일이다.
16515 1992. 4. 26 (일)
어제 J, 무사히 남해 다녀오고, 英이 무사히 가지산 다녀오고, 俊이는 J석 이와 제 방에서 공부하다가, 저 혼자 안방으로 건너와 엄마 곁에서 잠을 자고.
英이는 일요일새벽 아직까지 아빠에게 얼굴도 보이지 않은채 목욕탕으로 가고, 나도 나흘만에 물을 뒤집어 쓰고나서, 俊이에게 흰 머리카락을 뽑게 하면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듣는다.
일요일 아침, 오늘 산행은 취소.
사무실 나가 보아야 한다. 시설자금 융자 서류들과 칼라시트 공사.
하나님 나의 아버지.
넓게 하소서.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가질수 있는 풍성한 감성.
대인이게 하소서, 군자이게 하소서.
16516 1992. 4. 27 (월)
사무실 근처의 비디오 가게의 대여료는 동삼동보다 저렴하다, 비디오의 구색에 있어서도 비교가 안된다.
'개벽' 금년도 대종상 작품상 수상.
임권택감독, 도올이라는 김용옥각본, 이덕화가 동학교주 최시형 역.
해월 최시형 의 후반일대기, 단순명료한 사상 인내천, 하늘님이 곧 나이며 또한 너이다.
조선 말기 외세가 발흥하는 분위기를 배경으로 화면은 때로 그림처럼 아름답게, 때로 국산영화치고는 제법인 몹씬을 연출하면서 막바지에 몰린 동학의 흰옷입은 사람들을 그려낸다.
매우 충실한 영화지만 에피소드가 부족한 느낌.
이덕화의 강렬한 눈빛과 묵직한 대사는 좋았다.
꿈- 회사사람 HB화, KC수, JS영등이 등장하는 예전 서울의 삼선교 언덕 부근, 내가 사람을 죽였다. 시체를 숨기고 전전긍긍, 완전범죄는 성공하였는지...
충동적이고 절망적인 기분에서 사람을 죽였고, 도주와 은폐.
편한 잠은 이루지 못하고.
꿈에서 벗어나자 말자 돌연 꿈 속에는 등장하지도 않은 어머니에 대한 무심함에 소스라처 놀란다.
꿈 속에 이 은유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16517 1992. 4. 28 (화)
삼십 몇등한 彦이, 백 몇등한 俊이.
彦이보다 성적이 떨어지는 俊이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 비교의식에 참담해 하는 아비짜리의 편협함이 문제이다.
그 편협함과 옹졸함이 俊이를 나무라게 한다.
彦이를 은연중 빗대어 나오는 아비의 잔소리가 俊이는 역겨울 것이라는 걸 연후에나 깨닫게 된다.
腦에는 將腦와 卒腦가 있다.
이것은 머리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理解의 깊이를 두고, 내가 지어낸 말이다.
나는 卒腦이다.
다자이 오사무.
섬찟한 순수와 감성.
천재다.
그에 비하면 이문열은 참 생경하고 작위적이다.
연극배우 박정자.
울림 좋은 목소리로 패티김의 노래를 부르는데 참 좋다.
16519 1992. 4. 30 (목)
꿈은 꾸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아니하고 간밤의 수면은 달콤하였다.
일어나 俊이를 깨우고, 빗방울 후두둑 듣는 새벽을 나서 산에 오른다.
그 좋던 소나무 숲은 모두 버혀지고, 부르도자로 밀어부친 산자락은 벌건 흙의 속살을 드러내고 신음하고 있다.
2백만호 주택건설이라는 허울, 집없는 사람들의 서러움을 풀어 주겠다는 정책은, 산을 헐고 바다를 메우는 아무런 당위성이 될 수 없다.
왜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 밖에 없는 자연을 어떤 절대불가결한 이유도 없이,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 파괴해야 한단 말이냐.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