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59 1992. 3. 1 (일)
어제 어머니께.
할아버지 살아 계셨으면 올해 백세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가야 숙모와 함께 온 아가씨가 뜨거운 국을 쟁반에 받처 들고 들어오다가 국이 엎질러져 J 오른 손을 데이다.
외마디 비명.
어쩔줄 모르는 그 아가씨.
곤혹스러운 상황.
화상정도의 상황이라면 큰일 났을 것, 그비명소리에 놀란 俊이 벌쩍 뛴다.
그러나 화상 정도의 것은 아니다.
그 외마디의 호들갑스러운 비명은 별로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16461 1992. 3. 3 (화)
춘3월 들어서자 날씨는 오히려 쌀쌀하다.
꽃샘추위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英이 어제 입학식.
英이는 제 부모를 닮지 않아 순발력있는 유모어 감각을 갖고 있다. 남 앞에서도 스스럼이 없고.
英이의 사회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구석이 英이게는 있다.
누나에 비하여 俊이에게는 어딘가 불안케 하는 측면이 녀석의 어딘가에 스며져 있다.
표현이 서툴고 스스럼없이 남 앞에 나서는 타잎이 아니다.
이것이 다소 걱정이다.
남 앞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줄 안다는 성격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기득권인데 이 녀석은 이게 부족한 느낌...
오늘 俊이 입학식.
고등학교시절, 어떤 써클활동에 전념하여 좀 더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할수도 있을 것.
16462 1992. 3. 4 (수)
오리엔탈 이사장 불러서 칼라시트 교체공사 협의후 견적금액을 NEGO한다.
4700만원까지. 지불조건에서 걸림돌.
俊이 공교롭게 彦이와 같은 반에 편성된다.
곤혹 스러운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은 비교의식이고 경쟁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어떤 면이다.
그러나 잘 생각하여 보라.
사촌 형제끼리 선의의 경쟁, 도움, 우정.
무엇보다 진한 그 우정이라는 무형의 것.,
새벽, 제 책상 위 스탠드는 그대로 켜 놓은채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俊이 얼굴.
안쓰러움.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세상의 삶.
그 재주를 익히려고 안간힘을 쓰는 俊이의 영혼.
俊아 내 아들아.
바른 자세와 바른 마음가짐과 떳떳한 자기표현.
자세 바로, 정신 바로, 표현 바로.
힘들더라도 해야 살아가는 것.
俊아.
술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
16465 1992. 3. 7 (토)
날씨 다소 풀리다.
俊이 책가방, 한 30KG은 나갈 것 같다.
학처럼 여윈 어깨에 그것을 메고 현관을 나서는 아들 녀석.
英이는 요즘 대학생활의 재미에 점점 빠져 들어가는 모양.
어제도 전화 한통없이 8시 넘어 들어왔는데, 엄마의 잔소리가 한 없이 짜증스러운 포즈 완연하다.
이제 대학생인데 좀 풀어 달라고.
英아. 그 엄마의 걱정이 바로 너를 키우고 있는 것이란다.
16466 1992. 3. 8 (일)
봄은 살금살금 닥아 오고 있다.
고양이의 기지개.
토요일, 퇴근하면서 맥주 마신다.
딸기와 과자 사들고 돌아와 英이와 함께 '사랑이 뭐길래' 보고.
일요일, 편편치 못한 잠을 지낸 아침.
다행하게도 J는 온유하여 일요일의 게으름도 그다지 곤혹스럽지가 않다.
'미션'
무구하게, 폭력앞에서 무저항으로 고스란히 맞서는 사랑, 종교.
신앙이란 그렇게 고스란히 순종하는 것.
순종보다 더 큰 용기는 없다.
英이, 俊이 침대 사주기로.
16467 1992. 3. 9 (월)
어제 저녁 SBS TV의 쟈니윤 쑈에 옛 가수 김도향 출연.
신선처럼 허이연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우고 도인의 길을 걷고 있다는데 동안의 얼굴이다.
그가 인상깊은 한마디 말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 가면서 무언가 이루겠지, 무언가 찾아 지겠지 하고 막연하게들 살다가 그저 그대로 가고 만다.
내가 그 지경이 아닌가.
상승을 꿈꾸고, 어떤 드높은 정신의 고양을 꿈꾸면서, 언젠가는 이루겠지, 언젠가는 그 밝은 불을 마시겠지, 겠지, 겠지...
왜 지금은 아닌가.
폭풍처럼 휘몰아쳐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사로잡아 버리는 그 신비로운 힘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순식간에 거듭남.
타성을 길들여 변증법적으로, 혹은 김도향과 같이 氣의 훈련으로서 도달할수 있는 그것은 썩 주님적이 아니다.
俊이는 침대를 거부, 방이 좁아진다고.
일리있는 말, 대신 스탠드 사달라는 주문.
16468 1992. 3. 10 (화)
퇴근하면서 버스에서 내리니까, 俊이 학원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오두마니 서 있다.
그 모습에 가슴 뜨겁게 솟아오르는 사랑.
그 사랑은 애틋한 아픔이다.
내 원하는바 그것은 俊이의 웃는 인생이다.
새벽.
나의 곤혹이여, 나의 딜레마여.
나의 날개여, 나의 창공이여.
16469 1992. 3. 11 (수)
봄기운 물씬.
시내 나가다.
대청동 가구점에서 英이 침대 예약하고, 국제시장에 가서 俊이 바이오 스탠드 구입하고, 뻐꾸기 시계를 산다.
레코드 구입- 베토벤 현악4중주 '라즈모브스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합창 환상곡,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9번과 11번,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1번,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
여러 짐을 택시에 싣고 돌아 와 俊이 스탠드 조립, 뻐꾸기 시계 조립한다.
구입한 레코드 울리게 하고 덴뿌라 하나 시켜다가 술을 마신다.
유치하게도 기계가 내는 뻐꾸기 소리에 흐뭇해 하면서,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던 뻐꾸기 시계.
돌아 온 J, 쓸데없이 비싼 뻐꾸기 시계 샀다고 잔소리 하다가, 그 소리에 이내 좋아져 버리고 만다.
안방에도 싱글 침대 들여 놓기로 J와 합의.
16470 1992. 3. 12 (목)
현대그룹 정주영씨가 만든 국민당은 연예당을 방불케 한다.
최불암, 강부자, 이주일...
연예인이라서 나쁜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정치적인 이념이 아닌 대중적인 인기에만 영합하여 급조되는 그 정당의 색채가 저급한 것이다.
어제 결국 일찍 회사 나와서 안 방의 침대까지 주문하고 만다.
무엇이 충동적인 욕구로 엄습하면 나는 곧바로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한다.
일종의 조급증일텐데, 그런 다음에 종종 시행착오를 깨닫는 후회..
아이들 방, 책을 꺼내고 책장을 옮기고.
집안의 분위기 변화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새롭고 즐겁다.
앤 타일러 '종이 시계'
늙어가는 부부 일상의 담담함, 늙어서 되돌아 보는 인생.
색이 바래고 퇴락하여 참으로 허허로운 젊은 날의 반짝임들..
좋은 소설이다.
英이는 여대생다운 발랄함이 점점 빛을 낸다.
16471 1992. 3. 13 (금)
어제 일과중, CT용의 차를 타고 CT용, P.Y.범을 사역병으로 데리고 오다.
英이 俊이 방의 가구들 죄다 끄집어 낸다.
2층 침대와 책장을 분할하여 들어내는등, 장정 둘이 있으니까 한시간여만에 후딱 해치운다.
전기 기술자인 CT용은 집안 고장 난 조명들을 모두 고처 놓는다.
俊이 방의 책상과 가구들 온통 흠집 투성이.
俊이는 방구석에 틀어 앉아서 송곳으로 책상을 후벼파고 앉았단 말인지.
자꾸만 안으로만 안으로만 움츠러드는듯한 俊이에 대한 걱정은 때로 부아가 되기도 한다.
무서운 아버지로서 아들녀석의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행위를 제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16472 1992. 3. 14 (토)
아빠가 강력하게 강요하는 써클 활동.
두곳을 신청하였는데 모두 낙방하였다는 俊이, 써클에 들어가기 싫어 일부러 낙방하여 어쩔수 없었다는 자기 변명은 아닌지.
아이들과 부대끼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그것이 끔찍하여 지레 포기하여 버린 것은 아닌지.
俊이가 걱정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아비짜리의 눈에는 비정상으로 비치는 俊이의 성격.
비뚜른 자세, 극도의 표현 부족, 의욕 부족, 자신만의 공간에 칩거하려는 성향.
경증의 자폐증이 아닌가하여 너무나 걱정이다.
그리고 자괴감이.
내 아들에게 나는 무슨 규범의 모델이 된 적이 있는가. 어떤 통찰력을 갖고 어렸을때부터 俊이를 훈육해 본 적이 있는가.
이제라도 엄격함의 채찍을 들어야 한다.
俊이의 올곧은 사회생활을 위하여 조련사로서의 아비이어야 한다.
俊이에게 여태까지 좋은게 좋다고 그저 히히덕거리는 단세포의 아빠였음을 자괴한다.
16473 1992. 3. 15 (일)
어제 俊이와 彦이 하교길 집에 들렀다가 둘이서 가야 인성의원으로 할머니께 갔다오다.
俊이 보다 외향적인 성격의 彦이가 俊이에게 좋은 작용을 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형제로써, 친구로써.
彦이는 학급 부급장이고 俊이는 저축위원이다.
침대 들어오다.
공주님의 침실, 英이 방.
아빠가 사온 침대에 엄마가 사온 예쁜 침구를 펴고, 폭 파묻혀 잠들면 어느나라의 공주님 꿈이라도 꾸어질 것 같다.
정리를 마친 俊이 방도 널찍하니 이제 방다운 방이 되었다.
俊이도 이런 제 방이 내심 흐뭇한 모양.
俊이에게 ORDER를 하나 내렸다.
이번 토요일까지 기타와 같은 악기든지, 스포츠든지 무엇 한가지 배울 것을 결정하여 아버지에게 告하기.
16476 1992. 3. 18 (수)
오히려 한겨울보다 부산의 비바람 부는 3월의 추위가 더 매서운 느낌이다.
英이 어제 동아리 'SEA SOUND'오디션 받았다.
기타치며 노래부르는 동아리.
공교롭게 감기가 걸려서 고음에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고 걱정하는 英이.
英이의 소질과 취미는 전혀 음악 쪽이다.
부모가 여유있었으면 음대에 가야 할 아이.
학원에 간 俊이 책상 설합 검사.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저축위원의 책상 서랍답게 반아이들 학자적금 신청서들이 쌓여있다.
16477 1992. 3. 19 (목)
내가 좋아하는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분위기에 어프로치하는 나의 자세는 어설프다.
차라리 공적인 딱딱한 관계의 분위기에서는 유창한데 말이다.
사람에 있어서도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서투른 반면, 타산적이고 공적인 관계의 상대에게는 매우 능숙하다.
나의 포즈는 내가 사랑하는 쪽의 세계에 대하여는 서툴고 내가 사랑하지 않는 쪽의 세계를 향하여는 세련된 폼을 잡근다.
이런 성격의 일단이 俊에게도 전해 젔을 것.
英이는 오디션 합격.
이제 또 하나 그 아이의 바쁜 세계는 열렸다.
날씨 많이 풀린 목요일 아침.
베토벤 현악사중주 '라즈모브스키'
16476 1992. 3. 20 (금)
英이는 어제 동래 금곡으로 1박2일의 신입생 단합대회에 갔다.
청춘의 피크.
총선 열기는 점점 달구어지고 있다.
影島 역시 재미있는 양상이거니와 곳곳에서의 귀추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사뭇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침대에 자다가 12시경 바닥에 내려와 잔다.
그때까지 俊이 방에는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아, 인간은 결국 다른 모든 이들을 잃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오늘같은 날은 너무도 슬픈 날이다.
미풍이 따스한 물처럼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살랑대며 흘러가는 순간, 매기는 시간의 흐름이 빚어내는 이 모든 일들을 무척 참아내기 힘들다고 느꼈다."
"그 때 아이라는 진짜 낭비라는게 무엇인지를 알수 있었다.
신이여, 그렇습니다. 진짜 낭비는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이들을 사랑하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그는 심지어 이 약하고 좌절해 버린 아버지마저, 가엾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마저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앤 타일러 '종이시계'-
16480 1992. 3. 22 (일)
선거, 연설로써 인물을 선택하는 방법은 잘못되어 있다.
웅변이란 이성적이며 논리적으로 사고를 자극하기 보다는 격동적이고 말초적으로 감정을 자극한다.
토요일의 동삼국민학교 유세장의 열기는 대단하다.
일당을 주고 동원한듯한 사람들이 후보 이름을 연호하며 열기를 부추기고 있다.
노차태, 윤석순, 김형오, 김정길.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용케 J를 만난다.
김정길의 열변에 J는 그 쪽으로 기울여지고 만다.
나는 결정하였다.
신정당의 이영희.
이 놈 저 놈 다 싫은 나는, 당선 가능성은 없지만 깨끗한 이미지의 정당과 사람을 택한다.
올리버 스톤 감독 '살바토레'
엘살 바도르의 군사정권, 잘못된 정치의 끔찍함.
무식하고 비합법적인 정권의 권력일수록 국민의 목숨을 참으로 하잘 것 없게 여긴다.
俊이는 독서실에 가서 밤을 지새고, 9시가 되어가는 여태까지 돌아 오지 않고 있다.
16481 1992. 3. 23 (월)
선거 얘기만이 꽃을 피우는 사무실.
진수에 꼭 필요한 요원이 아닌 관리부의 직원들은 휴일날 군더더기이다.
공연히 사천원짜리 복국들을 축내는 일요일.
JH국 대리와 바둑 한판 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부산의 봄은 정말 한겨울보다 스산하다.
벌써 꺼내 입은 봄옷 사이로 찬바람은 스며들어 英이는 기침을 한다.
나의 기침도 목구멍 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일요일의 연예프로는 웃긴다.
이 웃음은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고, 무위로운 시간의 자조하는 웃음이다.
헛짓는 휴일의 일상에 대한 시니컬한 소리.
내용이 충실하다거나 구성이 치밀하거나 상상력이 기발하여 웃기는 것이 아니다.
월요일 새벽, 싸늘한 새벽 바람이 문틈 사이로 들어와 집안의 공기를 선뜻하게 만들고, 게다가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고 있다.
오늘 SB-387 진수인데, 고생들 하게 생겼다.
16482 1992. 3. 24 (화)
추적거리며 비 내리는데, 선저의 도크 바닥에서는 활대에 WEDGE를 박고, 반목을 제거하고, 독 쇼어를 제거하고, 트리거를 제처서 거대한 선체는 미끄러져 내려간다.
SB-387 고려해운의 컨테이너선 진수.
이른 아침부터 찬 비를 맞아가며 나 역시 우현 쪽에서 일꾼들을 지휘한다.
진수를 마치자 축 늘어지는 몸, 고냥 고대로 푹 고꾸라지고 싶을 만큼 나른하다.
요즈음 P상무의 심기는 좋지 않은 듯, 신경질이 부쩍 심해지다.
16438 1992. 3. 25 (수)
투표 마치고 마루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시버스 리갈을 홀짝거리며 시나브로 취해가다.
모차르트의 천재, 그의 영혼은 음악 바로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언제나 새롭게 아름답다.
잠이 갑뿍 들었다가 자정 넘어 일어나 TV앞에 앉는다.
부산은 민자당 일색이다.
부산- 한심한 도시.
부산의 수준이란 고작 김영삼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김영삼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부산.
김동길, 이주일등 국민당 후보 당선.
이철, 조순형등 당선.
전자는 떨어지기를 바랐고 후자는 당선되기를 바랐던 후보들.
내가 지지하였던 신정당은 고작 당대표인 박찬종 당선만으로 그치려는지.
기성 보수꾼들의 틀, 그 틀을 깨기에는 틀 자체가 워낙 튼튼하고, 깨려는 사람들의 망치질은 너무나 약하다.
16484 1992. 3. 26 (목)
민자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초상집 분위기.
민주당은 비교적 성공적이고 신예 국민당은 예상밖의 성과.
부산은 민자당 일색이고 전라도에서는 그래도 2명의 민자당 당선자를 냈다.
곳곳에 재벌이 급조한 국민당이 당선.
신정, 민중당은 전멸.
웃기는 나라다.
매우 급하고 격정적인 듯 보여도 이 나라 국민은 모두 교활한 보수꾼이다.
기득권자에게 빌붙어 살아가야 하는 천년 묵은 속성을 어쩌겠는가.
이런 나라에 무슨 혁명이 있을수 있을까.
16485 1992. 3. 27 (금)
나는 예전의 그 대상들에 대하여 열정을 갖고 사랑하고 있는가.
예술, 정신, 여인....
작금의 나의 마음밭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은 아닐까.
호오(好惡)의 감정은 모호하기만 하다.
죽어가는 뜨거움.
판타지는 사라지고 리얼리즘만이.....
이제 소박과 성실이 최대의 덕목일진데 나의 품성은 아직 멀었다.
미우라 아야코.
신앙.
소박과 성실.
전혀 뽐내지 않는 거기에 진정한 신앙의 자랑이 있다.
16487 1992. 3. 29 (일)
3월도 끝물이 되었는데 부산의 날씨는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바람은 불어대고, 며칠째 회색수면으로 육체는 곤비하고, 바이오리듬이란 것도 밑바닥을 기는지 기분까지도 우울하다.
그러나 이 우울의 진정한 원인은 정신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내 한계의 절망감에서 오는 것일게고, 내게는 그리 많은 생명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초초로움에서 오는 것일게고, 또는 어머니와 내 형제들과의 담벼락을 향한 답답함 때문일게고, J의 남편에 대한 무례한 언행때문일게고, 또한 내 감각적인 성향때문일게다.
'아만테스'
뭉클함이 있는 영화.
나스타샤 킨스키를 닮은 여주인공 트리니.
관능의 늪에 빠져서 자신을 배신하였을 뿐 아니라, 그 쾌락 자체를 사랑하여 여인에게 돌아갈수 없는 애인에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여 눈 쌓인 광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여인.
관능의 사랑도 치열한 사랑이다.
英이는 동아리에서 황령산 M/T 갔다가 나이트클럽갔다가 돌아온다.
이런 英이의 행적을 알고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딸네미는 순진무구한 것이다.
우중충한 날씨의 일요일.
간 밤에도 잠은 회색빛.
망령들 꿈 속에서 날뛰다.
오늘 PS곤, JN영 등과 산에 오르기로.
16488 1992. 3. 30 (월)
금정산 오르다.
PS곤, JN영과 제법 험준한 코스를 택하여 동문까지 가서 거기서 KH근이 만난다.
산을 오르면서, 숨을 몰아 몰아쉬면서, 다리에 불끈거리는 근육을 느끼면서, 비오듯 땀을 흘리면서, 산을 오르는 행위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산의 높은 능선에 서서 저자거리를 멀리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땀을 들이는 그 기분은 얼마나 뿌듯한 쾌락인지.
산을 오르면서 생각하는 俊이.
호연지기.
형과 함께 俊이와 彦이를 데리고 산을 오르자.
내가 나서서 산행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자는 계획이 솟아난다.
산성 막걸리에 얼근하여 큰 소리로 노래부르면서 산성 길을 내려오다.
월요일 아침.
기분 좋은 뻐근함.
16489 1992. 3. 31 (화)
인간의 業이란 슬프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부르짖는 인간이라는 한계에서의 비통한 신음소리.
인간의 한계가 곧 業이다.
아, 누가 사망에서 나를 구해 줄 것이가.
오오, 나는 참으로 곤고한 사람이로다.
정순모씨 퇴직 송별의 부서장 모임.
총무인 나는 오후부터 설친다.
은행기금중 경비를 찾고, 줌누한 감사패를 찾고, 뷔페식당을 예약하고.
동남뷔페.
두당 11,000원 짜리 음식들, 가격에 어림없이 못미치는 먹거리들의 양으로 서른명 남짓한 사람들은 이내 배가 불러져 버린다.
술들도 많이 마시지들 않고, 2차 없이 끝내고 만다.
정순모씨는 2치를 되게 가고 싶었던 모양인데.
나도 맥주 몇모금.
L.W.규씨 차타고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