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2. 6

카지모도 2016. 6. 2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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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 1992. 6. 1 (월)


유월들어섰으니 이제부터 여름인가.


일요일 오후를 내 방에 앉아서 찬송가를 들으며, 눈으로는 임꺽정을 읽으며, 입으로는 쇠주와 오징어를 씹으면서, 머리로는 나른한 한가함을 뿌옇게 채우면서 보낸다.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김수현의 TV 연속극 '사랑이 뭐길래'는 어제로서 막을 내려서 당분간 주말에는 TV가 재미없어 지게 되었다.


간밤의 꿈은 손철수, 송종구가 등장하고, 나는 J와 함께 서울 거리를 헤매인다. 청와대 올라가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도 만나고.


월요일 아침, 뿌연 광막에 쌓인 대기는 6월다운 후덥지근한 인상파 화가의 그림.


16552 1992. 6. 2 (화)


한낮은 무덥다.

이제 여름을 향하여.

초록의 함성, 계절의 오르가즘을 향하여.

인생의 그 계절은 英이의 계절이다.

英이 분방한 대학생활을 이해하여 수렴하는데 인색한 부모짜리.

바로 그 계절을 통과해 왔으면서도 인색하기 짝이없는 그 부모.

참 어줍잖은 보수꾼들.


꿈- 어머니, 몰락해 가는 보생의원, 넓은 집안은 휑하게 쓸쓸한데, 보생의원 옆의 만화방, 기억 속의 그 암울한 소리가 들리는 꿈.


무거운 머리 일으킨 4시.

목욕한다. 기도.


오페라 갈라.

도밍고와 베르곤찌.

벨 칸토의 기름진 테너, 풍부한 매끄러움.


16553 1992. 6. 3 (수)


서면기업의 K.S.용사장, 현도장에서 앵글을 잡아 찍은 현장사진.

60톤 크레인의 가로빔과 그 아래 선대에서 건조중인 선박의 불워크의 곡선이 조화된, 간결한 기하학적구도의 8x4 흑백사진.

자신이 찍은 그 사진을 내게 보이려고 일부러 찾아오다.

나는 그 사진을 책상 유리판 밑에 깔아둔다.

K.S.용씨, 그는 조선쟁이이면서 음악과 사진을 향한 열정이 있다.


사진- 예전 한때 한동안 미쳤던 사진이라는 장르.

암실의 방.

그 칠흑같은 어둠 속에 틀어박혀 있으면 참 행복한 느낌이었지.

하이포의 시큼한 냄새에 절은채 서서히 나타나는 영상.

그것은 실로 환상적인 작업이었는데.

이제 사진에 대한 열정은 남아있지 않구나.


검사과 P.S.현과장의 사직은 의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내심 갈등이 많았을 것이다.

검사과의 업무라는 것과 크리스찬의 양심...


16554 1992. 6. 4 (목)


英이 학교에서 제법 유명한 모양.

피아노에 플롯에 노래등에 있어서는 독보적.

학문 쪽이 아닌 동아리의 세계.

그러나 英이의 유모어감각 풍부하게 녹아있는, 대학생활의 얘기를 듣는 아비 어미는 즐겁다.


어제 한일환경 P사장 오게하여 계약.

모니터, 허가관계, 준공검사관계등 확연하게 CLEAR되지 않은 상태에서 찜찜한 구석이 있는 계약.


'임꺽정'

홍명희는 참 잘도 썼다.

순전히 그의 머릿 속에서만 창조된 캐릭터들이고 에피소드들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과 필력의 소유자가 아닐수 없다.

언어와 성격과 행동과 풍속과, 때로는 골계가 어우러진 질펀한 재미.

어떤 정돈된 사상이나 가치관, 주제의식등은 전혀 나서지 않은채 한 시대의 옛 얘기를 흐드러지게 펼처내고 있다.


꿈- 연지동 언덕, 휠 체어를 타고 눈길을 활강한다.


16555 1992. 6. 5 (금)


감기약 알약 한 개를 먹고 오후 내내 오심과 이상한 불쾌감에 젖어 일과를 보낸다.

기침약에 대하여 내게는 알레르기가 있다. 아스피린도.

고작 알약 하나에 몸도 영혼도 맥을 못춘다.

침으로 신뢰할수 없는 대상, 인간이라는 것.

히로뽕 한방에, 알약 하나에 뿅 가버리는 꼭두각시.


어머니께 가다.

뜻밖에 거기에 俊이가 와 있다.

간염주사들을 맞고, 반병의 소주를 마시고 비오는 거리를 아들녀석과 함께 돌아온다.

늙은 노인네- 인사를 하면서 잠짓 껴안아 본 어머니의 늙은 몸뚱이.


英이 SEA SOUND 공연 녹음 테이프 듣는다.

어떤 기성 가수들보다 더 참신하게 빛나는 대학의 음악가들.

그 중에서 뱈 코라스를 넣고, 멜로디를 부르고, 반주를 넣는 英이의 모든 소리가 가장 뛰어나다,


오늘 장모님 생신, 그리고 내일부터 이틀의 연휴.


16556 1992. 6. 6 (토)


사무실에서 정말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다.

또백이 이우백형이 두달 전 죽었다.

고혈압.

벌써 화장을 해버려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얼마 전 딸네미 결혼을 치루고 그 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생명이란 이토록 무상하다.


P상무- 그 강철같은 하고잡이의 풀이 요즘 한결 꺾였다.

만성위염, 어제는 항문으로 호스를 넣어 내시경 촬영하고 돌아 와 시무룩.

술도 못하는 사람인데.

담배는 지독히 피지만.

그리고 일, 오직 일만이 취미인 사람.

취미도 없고, 휴식도 가족도 그에게 있어서는 일보다 더 동기가 부여되는 무엇이 아니다.

때로 그가 가엾다.


그러나 암 따위가 아닌 이상 그의 활기는 곧 되살아 날 것이다.

일이 있음으로.


16557 1992. 6. 7 (일)


'WEST SIDE STORY'- 나의 영화, 열번은 보았을 나의 영화.

젊은 날의 꿈. 내 영원한 고전.

감D.은 다시 보아도 퇴락치 않는다.

로버트 와이즈, 레너드 번스타인, 나탈리 웃, 리차드 베이머, 조지 차키리스..... 마리아,토니,아니타,베르나도,치노...


도대체 그윽한 배려의 눈길이 없는 주부짜리, 남편을 능멸하여 직선적인 폭언이 되어 터저나오는 마음본새, 말본새.

두 마리의 개는 시궁창을 뒹군다.

무당의 춤, 울긋불긋한 샤먼의 널뛰기, 그것은 이성 감성 따위가 아닌 카오스의 소용돌이.


일요일, 비내린다.

혓바늘.

기도.


16558 1992. 6. 8 (월)


비내리는 일요일.

태종대 LD찬씨 집을 찾아간다.

더블데크 카세트가 있는 그 집에 英이 공연테이프를 한벌 더 복사하려고.

억세고 생활적인 LD찬씨 부인, 아이들을 모두 의젓하게 키워 낸 공로는 LD찬씨가 아닌 그의 아내 탓이다.

정성스레 끓여준 해물탕에 소주 한병 나누어 마시고 녹음하여 돌아온다.

아이들 빵과 맥주사들고.

英이 공연 테이프 들으면서 식탁 앞에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꿈- 배변강박의 꿈.

프로이트 '꿈의 분석'은 어느 세월 마스터하려는지.

요즘 내 독서는 그저 재미를 쫓아가고 있을 뿐이다.

진지하게 어떤 주제를 천착하는 독서를 나는 점점 기피하고 있다.


비는 개었다.

연휴 뒤의 월요일 아침.

기도.


16559 1992. 6. 9 (화)


대원 쇼트의 김소장 와서 SHOT MACHINE 내부 LINER 교체공사 계약.

고려해운 SB-368 출항.

어제는 흡사 가을 날씨, 기상의 기복이 심하다.


俊이 국어시험.


꿈- 비 쏟아지는 2공장, 媛이와 어머니.

그리고 Y부장과 여사원들 등장.

비는 쏟아지는데 나는 2공장 사무실에서 똥이 묻어 더러운 몸을 씻지 못하여 초조하다.


세척강박- 무엇을 씻어내고 싶은가.

무엇이 심층심리의 무엇을 때묻게 하는가.

무엇에 그것이 오염된 것일까.

나는 새로 태어나고 싶은가.


16560 1992. 6. 10 (수)


大醉-


간밤에 한밤중 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요강에 오줌 누듯이 화장대에다 대고 오줌을 누었단다.

방바닥이 한강이 되고.

도무지 모를 일.

아무리 취하였더라도 내 수면중의 의식이 그정도까지는 아닐터.


잠자다가 무언가 지극히 나답지 않은 비정상적인 무엇을 하였다면 반드시 그 흔적이 의식 어느 구석에 남아있을 터인데, 하다 못해 꿈 속에서라도 그 흔적을 발견할수 있을 터인데.

전혀 모르겠다.

J의 그 말과 방바닥의 흔적은 그것이 엄연한 사실임을 증명하는데, 내 의식의 무엇을 추스려야하는지...


오줌을 누면서 긴장의 방기?


밝은 아침, 부끄럽다.

목욕하여,J의 폄훼하는 소리를 눙치고자 하는 교활을 부려본다.


16562 1992. 6. 12 (금)


종횡무진 전개되는 이야기들.

어떤 규격 속에 가두지 않은 캐릭터, 작가의 대범함.

그리고 홍명희는 조선 풍속학의 대가이다.

우리 조선의 이야깃꾼, 홍명희.

무릇 이야기라면 이 정도는 되야하고 무릇 조선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조선적인 맛은 낼줄 알아야 되느니!

너무나 재미있는 '임꺽정'



꿈- 대신동, 내 오른발은 착한 일을 하였고 왼발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설정, 무슨 선거분위기, 어머니, 회사사람들, 강기탁.


모처럼 마리안 앤더슨의 앨토로 듣는 흑인영가.

깊은 마음 속 현을 묵직하게 긁는다.


16563 1992. 6. 13 (토)


종일 P/C 앞에 앉아서 대기환경 보전법중 비상먼지발생 대상사업장으로 조선업이 지정되려는 법령개정안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한다.

비산먼지발생 공정의 가중치, 거대중량물을 다루는 조선업으로서의 내업화의 한계, 가뜩이나 경쟁력을 잃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법의 규제를 받아 생산성이 저하될 때, 조선업의 존폐 위기까지 초래할수 있다는 논리를 세운다.


임꺽정은 이제 마지막 한권을 남겨 놓고 있다.

후속 읽을거리는 하바드 석학들이 썼다는 '동양문화사'

중국,한국,일본,베트남에 관한 역사서, 이제 그 파란만장한 동아시아의 역사 속으로 침잠하게 될 것이다.


꿈- 알프스의 눈덮인 고산을 등산한다. 고려해운의 박이사와 둘이서. 언덕을 굴러 떨어지고, 유럽시골마을 어느 교회의 동화같은 데코레이션, 그것은 俊이의 솜씨이다.

거기 어느 쪽에 있는 남포동거리, 고급문화적인 분위기, 대중술집들도 예술적이고, 연극패거리들 등장...


16564 1992. 6. 14 (일)


토요일 오후, 돌아와 술을 홀짝이며 비디오 테이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택시 드라이버'

노만 쥬이스 감독의 락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예수의 의미, 기관단총을 멘 로마병정, 탱크에 쫓기는 유다, 격렬한 재즈댄스와 흑인의 노래들.

몇몇 뮤지컬 넘버의 아름다움, 유대평야의 황량함.


로버트 드 니로의 초기 출연작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콜세지 감독.

도시의 밤, 소외의식의 과대망상 청년, 범죄의 도시 뉴욕, 그 청년의 행위는 영웅적(?), 12살짜리 창녀 죠디 포스터.


16565 1992. 6. 15 (월)


'임꺽정' 모두 읽다.

그러나 未完의 원작이 너무 아쉽다.

청석골에 지는 노을처럼 도적놈 임꺽정일당은 자모산성의 한판 싸움을 앞에 놓고 소설은 그만 중단되어 버리고 만다.

북으로 간 작가는 북에서도 속필은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삼국지와 수호지에 손색없는 호걸들의 에피소드, 임꺽정은 도무지 의식있는 의적따위와는 거리가 먼 한낱 도적놈으로 그려져 있다.


英이, 오늘부터 기말시험,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방학이다.

어디서든, 무엇이든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적응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딸네미.

낙천적이며 인생을 포용하는 자세가 아비나 어미짜리보다 훨씬 낫다.


월요일 아침, 목욕하고.

에머슨 사중주단, 보로딘의 현악사중주.


기도.

반복, 반복.

반복의 사슬, 반복의 타성.


16566 1992. 6. 16 (화)


꿈- 아주 어두운 색조의 흑백영화 한편이다.

텅 빈 조선소의 현장은 회사의 그것이 아니다. 한밤중, 텅 빈 접안 선박에서 탈출하려고 애를 쓰는데 제자리에서 맴맴. 갑자기 그곳은 보생의원의 할아버지방이다. 媛이의 경대가 소도구, 형과 작은 어머니, 사촌들.

밤을 지내고 어렴풋 기억속에 남아있는 꿈의 편린들....


회색수면은 아니었다.

꿈과 회색수면과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가 아니다.

꿈의 유발 요소에 따라 편한 잠과의 관계가 결정되는 듯.

육체의 상태에서 유발된 꿈, 이러한 꿈은 회색수면을 유발하게 마련.

그러나 간밤의 꿈과 같은 과거에 축적된 어떤 것들의 무의식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꿈은 회색수면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의 자극에 의하여 심층심리에서 떠오르게 되는 것인지 나는 알수가 없지만.


인간은 그렇다, 인간은 한마디로 기억의 노예.

한 인간의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의 모든 과정은, 아무리 디테일한 부분이라도 하나도 빠짐없이 입력되는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기록지에.

그 기억들이 한 인간의 내면을 결정하고, 한 인간의 퍼스낼리티를 확정한다.

문제는 그 기억을 현실이 인식하는 색채인 것이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당위성이, 어떤 면에서 생겨날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아스케나지의 연주는 스케일이 크다.


16567 1992. 6. 17 (수)


어제 오후, H부장 모는 차를 타고 성분도병원의 YC모 부장부장 문병.

술, 담배, 커피도 하지 않는 사람인데 간염으로 입원, 그도 하고잡이로서 낮밤없는 일중독이 원인이 아닐까. 기독교인인데 일요일도 없이 수리선부를 이끄는 그의 병은 일종의 공상이다.

이어서 동아대학병원으로 LM우 이사 문병.

급성맹장, 맹장이 터저서 복막염으로 대수술.

해동병원에서의 초기진찰에서 맹장염이 간과되어 시기를 놓쳐서 맹장이 터졌단다.


옛날 내가 다니고 연극하던 캠퍼스가 고스란히 조망되는 동아대학병원의 8층.

건물들도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 뒤로 구덕산의 푸른 숲이 울창하다.


16568 1992. 6. 18 (목)


자동용접장의 내업공장, 지붕을 벗겨내린다.

앙상하게 드러나는 목재 트라스의 골조.

사는 것도 이와 같아서 몇조각 번잡한 소유의 입성 조각만 벗고나면 앙상하게 헐벗은 존재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스스로 충동질하는 욕정.

이것 역시 내게는 지독한 타성이고 참담함이다.


퇴근, 英이는 시험중인데도 음악회 가서 10시 넘어 돌아오고, 俊이도 10시 넘어 돌아오다.

아이들 없는 집안의 두 가시버시는 그저 무연하게 관계의 침묵을 유지하면서 TV 앞에 앉아 있다.


16569 1992. 6. 19 (금)


英이 레포트, 채만식의 단편 '痴叔'의 감상문을 쓴다.

한 두어시간 P/C 앞에서 집중하여, 주위사람 눈을 의식해 가면서, 모니터를 어둡게 하여 놓고, 머릿속은 논술코자하는 주제를 놓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사무실에서 애써 만든 글 한편.


단체협약관계로 노동조합 뒤숭숭.

총액임금제 건은 정부에서 어드렇게 수습할려는지.

한심스러운 정책, 노태우, 물태우...


16570 1992. 6. 20 (토)


'동양문화사'.

광활한 중국대륙.

왕조가 일어났다 스러지고, 사상이 꽃을 피고, 문화가 춤을 춘다.

역사를 개관하는 것, 편협된 시각이나 고정관념, 또는 주관적인 오류를 벗어나 조감하는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편협한 역사관의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가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회사에서 행하는 건강검진.

피를 뽑고, X-RAY를 찍고.


동우회.

육고기 뷔페.

먹는 문화, 지천으로 널려있는 먹거리 먹거리들.

이제 먹는 것의 부자유로부터 한국은 완전히 벗어난 모양이다.


토요일, 비는 그쳐 말짱 개여있다.

오늘부터 英이는 시험 끝나고 방학.


16571 1992. 6. 21 (일)


토요일 퇴근하여 다시보는 노만 쥬이스 감독의 뮤지컬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

아이작 스턴의 바이올린 선율이 애잔한 러시아 혁명의 여명기의 유태인 마을.

석양 비낀 붉은 배경에 가파른 경사의 지붕위에서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메타포는 테비에의 마음.

선라이즈 선세트..

성장하고, 헤어지고, 해체되는 가정. 운명적인 유태인의 멍에, 종교, 전통...

몰락하는 것의 애수.


새벽 산에 오른다.

새소리, 숲의 냄새.

2시간여에 걸친 봉래산행인데 만보계는 9400여보 밖에 되지 않는다.

숲 속에 들어가서 무릎 꿇고 앉아 기도.

그러나 누가 볼까봐 타인을 의식하는, 참 담대치도 못한 기도.


16572 1992. 6. 22 (월)


이제 사십도 훌쩍 넘겨서 서로 부딪쳐서 낭비한다는 것은 우리 가시버시 피차의 생명에 대한 모독이다.


비극의 싹은 어디에서 잉태되었을까.

무언가 생명이 억울하여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런 관계에 굴종하여 그냥 대충대충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


그녀 앞에서, 그 직선적이고 여과없이 도발하는 자극 때문에 어느 뉘라서 군자의 폼을 잡을수 있으랴.


어렵디 어려운 명제, 관계의 끈.

문제는 경제이다.

이 방법론에 대하여 피차 심사숙고할 일이다.

기도.


16574 1992. 6. 24 (수)


비내리는데 SB-390은 예비 시운전 떠나고, 나는 회색모래 가득한 머리를 받쳐들고 종일을 이 생각 저생각 우울 속에 잠겨 보낸다.

그러나 조선소의 일이라는 것은 회색우울 속에 잠겨 있도록만 놓아주지 않는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이 명제.

굴종하여 견뎌고 순치되어 대충대충 살것이냐, 사슬을 끊어 더 이상 피흘리지 말고 군자의 흉내라도 낼수 있은 상황을 과감하게 꿈꾸어야 하느냐.

피차의 생명의 엄숙함에 대한 이 모독스런 무엇을 ....


꿈, 꿈, 꿈의 파노라마.


英이- 집안의 침울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즐거워 소백산으로 써클 M.T, 3박4일.

俊이의 허깨비같이 껑충한 어깨....


비는 개다.

소리없이, 내 하나님께 기도.

길을 보여 주소서.


16575 1992. 6. 25 (목)


英이는 떠나고 서늘한 바람 이는 집안.

俊이 성적 올라 학급 6등, 彦이는 조금 떨어져서 학급 4등.

영어는 그대로 2등을 유지하고 수학은 더 떨어지다.

내 방에 앉아서 소주마시며 俊이에게도 두어잔 권하여 마시게 하며 부자간 얘기 나눈다.


사람에게 이해와 애정의 커무니케이션은 언어에서 나온다.

그런데 대화가 불가능한 관계, 그 빙벽 앞에 마주 선 난감한 아득함.


말할수 없이 사무치는 그, 기도.


16576 1992. 6. 26 (금)


이런 저런 사념은 초여름 한낮, 업무와 더불어 곤하게 만든다.

英이 떠난 지 사흘째.

스물 몇 명의 여학생과 열 몇 명의 남학생 한떼가, 그 젊디젊은 젊음들이 산을 오른다.

건강한 기쁨들이 넘쳐나는 떼거리들...


동양문화사, 중국제국의 종장, 청나라에 들어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몇번 듣는 사이 너무 좋은 지독하게 슈베르트적임을 느끼게 된다.

소박하고 청순하고...


16577 1992. 6. 27 (토)


산업안전공단에서 60톤 GANTRY CRANE을 비롯한 크레인 6대와 컴프레셔 4대를 불합격 판정하여 노동부에 통보하였다.

곧 사용중지 명령, 어떻게 해서든 풀어야 일을 할수 있다.


산업은행본점에서는 시설융자건이 결정되엇다고 하는데, 지점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앗다나 어쨌다나, 산업은행의 관료주의는 공무원 윗길이다.

여태까지 오린엔탈 공영 공사대금을 결재하지 못하고 있고, 이사장은 매일 독촉아닌 애소를 하고 있는데.


英이 오늘 돌아온다.


나는 요즘 고통스러운가.


16579 1992. 6. 29 (월)


英이 돌아오다.

며칠 밤을 세웠으련만 딸네미의 젊음은 결코 탄력을 잃지 않는다.

재잘거리며 얘기하는 英이는 노래 부르는 듯 하다.

충청도의 어느 시골역에서 가진 20여명 젊은이들의 미니 콘서트는 얼마나 멋졌을까.


프랑스 영화 '까미유 그로뗄'

오귀스뜨 로댕의 젊은 제자 까미유, 예술가의 이기주의와 광기.

천재의 맞부딪침은 불꽃이 튄다,

이자벨 아자니의 개성적인 연기,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격렬하고 광적인 예술가의 성격과 그 절망을 잘 표출해내고 있다.


일요일 오후3시, 물통을 들고 집을 나선다.

가파른 산길, 곧 끊어질 듯 숨을 헉헉대며 인적 끊긴 비탈을 오른다.

나의 심장은 증기기관, 산마루 올라, 아무런 인적없는 숲의 어두운 오솔길을 걷는다. 새소리, 벌레소리...

2시간 30여분에 걸처서 산정으로 해서 함지골로하여 집까지의 봉래산 산행.

가뭄 때문에 찔찔 흐르는 약수터에 길게 늘어선 물통들, 물뜨기는 포기하다.


꿈- 중학동무 이철주를 찾아 수하동에 간다. 답답함, 버스에서 똥을 싸고, 낯설지만 낯익은 풍경, 언젠가 보았음직한...


16580 1992. 6. 30 (화)


JS영 과장의 도발.

단세포적인 도발에 P상무는 JS영 과장 편을 들어 내게 무언가 주문하는데,나는 마음이 되게 상한다.

JS영 과장의 그 두뇌는 그렇다치고 P상무에 대한 반발 심리가 솟는다.

그러나 나의 어필은 없다.

복종에 길든 샐러리맨.


내게 대화의 재능이 있을법 하지만, 기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내게 대화란 어느 정도 공유한 바탕위에서 이루어지는 커무니케이션이다.

아주 부당하게 느껴지거나, 아주 이질적인 대상앞에서는 아예 대화가 가능하지 아니하다.

나의 의견을 피력하여 설득 하겠다던가하는 염은 싹 가신채 대화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어떤 손해를 끼칠지라도.

이 점은 J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뒤척뒤척.

2시30분에 잠이 깨이고.

내 방에 불밝혀 앉아서 에베소서 읽는다.

느껴오는 주, 나의 하나님.


불끄고 어둠에 잡겨서 기도드린다.


분을 내지 말며... 분을 내지 말며...

사랑과 온유.. 용서...사랑... 사랑...


4시35분.

아직 어두운 하늘.

산에 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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