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2. 2

카지모도 2016. 6. 24. 00:03
728x90




16430 1992. 2. 1 (토)


기침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니까 혓바늘이 창궐한다.

2시경, 잠결에서도 혀의 쓰라림 때문에 눈이 뜨여지고, 무수한 좁쌀 반란군이 들고 일어났음을 깨닫는다.

무시로 나를 찾아오는 게릴라.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고, 정신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데.

육체라는 당나귀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다.

뽐내고 난폭하게 굴어서 셋방살이하는 정신을 핍박한다.

그리하여 주인인 정신이 육체의 학대에 굴복하면 영혼은 그만 갈 곳이 없어져 버린다.

영혼마저 오염될수는 없으므로.


육체를 이길수 있는 정신, 셋방살이로서가 아니고 당당하게 주인으로서 당나귀를 부릴수 있는 정신.

성삼문, 프란치스코, 쉬바이처, 간디...


오늘부터 연휴.

俊이 고등학교 배정.


모차르트 '엑슐타테 유빌라테'.


16431 1992. 2. 2 (일)


연휴전날의 근무, 혓바늘 고통 때문에 시종 아구를 굳게 다문채 인상을 쓰며 보내다.

명절 전의 어떤 설레임의 분위기.

그런데 상여금은 퇴근시각이 임박해서야 지급된다.

사장이 부재하여.

빗발치는 항의, 고향에 갈 기차표를 사놓은 사람들, 명절 돈 쓸일의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발을 구르는데.

이런 스타일의 대선이 바로 대선조선의 한계이다.


俊이 남고등학교 배정.

또하나의 도정에 접어 든 아들 놈.

彦이도 남고에 배정받았다고.

사촌끼리의 선의의 경쟁, 격려, 우정.


16432 1992. 2. 3 (월)


연휴 첫날, 작정하고서 게으름의 늪에 무연하게 잠겨보는 것도 자족의 즐거움이 아닐손가.

안 방에 TV 들여놓고 왼종일 누워 게으름을 부린다.

겨우 잇발이나 닦고, 눈꼽쟁이나 뜯은채로.


'다이하드2'. 만화같은 황당한 액션영화.

주인공은 초인이다.

불루스 윌리스라는 처음 보는 배우인데 그 인기가 대단하다고.


'사랑의 기적' 로빈 윌리암스가 정신과 의사역, 로버트 드 니로가 전신마비의 환자역.

헌신적인 의사, 진지하고 좋은 영화.

그런데 어딘가 드라마 트루기적인 모호함이 있다.


英이 종일을 교회에서 보낸다.

6시경 돌아와, 잔소리하는 아빠에게 아직도 자유를 속박하는데 대하여 불만을 토로한다.


저녁 먹은후 J와 英이 俊이, 할머니 뵈러 갔다 오다.


김수현 드라마의 재미는 가히 마술적이다.

'사랑이 뭐길래' 식구들 둘러앉아서 깔깔거리며 본다.

김수현이 뭐길래...


연휴 이틀째의 월요일, 비 내리고 기온 약간 떨어지다.


16433 1992. 2. 4 (화)


어제, 비오는 거리를 英이와 둘이서 거닐다.

명절 전날이라 붐비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한산하다.


俊이 바지사고, T기의 스웨터 사고, 俊이의 소형 스피커 사고, 英이는 아빠의 생일 선물이라며 레코드 2장을 제 지갑을 열어 산다.

푸치니 '라 보엠 하이라이트' 로돌프를 베르곤찌가 불렀고, 미미를 테발디가 불렀다.

'부르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사운드 트랙' 트랄라의 바이올린 선율의 애잔함이 있는.


그리고 부녀는 유나백화점의 스카이라운지를 올라가서, 두 손쓰는 점심을 英이에게 사먹인다.

광복문고에 들어 가 책 한권 산다.

로망 롤랑 '크리스나무르티의 전기'.


부녀는 호프집 들어 간다. 생전 처음 술집에서 딸과 마주 앉는 것이다.

조끼를 들고 부딪치며 나누는 부녀의 다정한 얘기들.

당구장에 가고 싶어하는 英이를 데리고 몇군데 당구장 들어가 봤더니 대만원.

빈 당구대가 있을지라도 그 자욱한 담배연기와 욕지거리 난무하는 저급한 분위기에 英이에게 당구라는 오락을 선뵐 생각은 싹 가셔버린다.


아침, 설날.

비는 맑게 개였다.


16434 1992. 2. 5 (수)


설날, 평소 정체되는 도심이 뻥 뚤려서 차는 시원스레 빠져 나간다.

다소 도진 기침, 처가에 가다.

노처녀 두 처제를 비롯한 전 처가 식구들 둘러 앉다.

S.기의 귀여운 재롱, T기는 장손다운 의젓함이 있고 코 밑에 거무스레한 수염자욱도 보인다.

정종마시며 스필버그의 'E.T'를 본다.

다시 보아도 재미와 가벼운 감동.


정종에 얼큰하여 돌아오다.

늦은 시각 찾아 온 오세건.

클래식 매니아인 녀석과 끊임없이 나누는 음악얘기들, 늦도록 노닥거리다가 돌아가다.


연휴 4일째.

8시 넘도록 일어나지 않는 전 가족의 게으름.


낮- 안방에서는 아이들 제 엄마와 트럼프 놀이를 하고있고, 나는 늦은 세수 마치고 마루에서 음악을 듣는다.

비발디.


16435 1992. 2. 6 (목)


俊이가 녹화하여 놓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본다.

아마 다섯 번 이상은 보았을 영화, 이제 중년 고개를 넘어서 다시 감상하지만 옛날의 그 감동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

너무나 잘 만든 영화.


연휴- 무위의 시간 보내기, 창조성없는 정신, 이 게으름을 반추하다 보면 까닭모를 어떤 허무함이 몰려와 나를 휩쌓는다.

동기가 부여되야만 도는, 팽이.

때려야만 도는.


5일째의 휴일.

아이들은 개학하여 학교에가고, 나는 俊이 방 침대에 뒹굴며 삼국지를 읽는다.

유비는 드디어 한중왕이 되었다.


16438 1992. 2. 9 (일)


제법 쌀쌀한 날씨, 토요일.

일본 연수자들 선정하여 추천서 작성.


형에게서 전화, J희 시어머니 별세하셨다고.

J희의 남편 BS천은 내 동기동창이다.

그리고 媛네 회사 주주총회에 필요한 인감증명 부탁.


토요일 오후 퇴근하며 미장원.

약 4시간을 여자들 득시글거리는 그곳에 앉아 머리에 무엇을 뒤집어 쓰고 버틸수 있는 배짱.

나도 이제 뻔뻔스런 나이가 되었다.


거기 앉아서 뒤적이는 여성잡지에서 읽은 기사 하나.

얼마전 사형집행 당한 '한나'라는 여자 사형수.

남편을 청부살인한 여자인데 교도소 수감 8년동안 기독교로 회심하여 천사와 같이 살다가 그렇게 갔다는.


16440 1992. 2. 11 (화)


어제, 英이 수산대학교에 가서 등록금 고지서 받아오다.

75만원, 우송되지 않은 것은 동산파크를 풍산파크로 기록되어 도로 반송되었단다.

사립대학에 비하여 엄청 저렴한 학비, 英이는 가난한 부모에게 이 또한 효도를 한 것이다.


13일은 英, 영도여자고등학교 졸업식.

14일은 俊, 해동중학교 졸업식.


오랫동안 경건을 잃고 있다.


16441 1992. 2. 12 (수)


이문열의 '삼국지'

어제 대미를 맞는다.

백여년에 걸친 중원대륙의 전쟁, 무수한 英웅호걸들, 못난 사람, 간특한 사람 모두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촉나라도 위나라도 오나라도 모래성처럼 스러져 버렸다.


급격한 시력의 노후화, 조금만 어두우면 아무 것도 읽어 낼수가 없다.

노인네처럼 눈을 내리깔고 턱을 들어 읽을 것을 멀찌감치 거리를 두어야 겨우 해독.


J는 英이 데리고 시내 나가 쇼핑, 신입 여대생의 무엇 무엇들.

물건 사는데는 눈썰미가 대단한 J이지만 남편 것을 고르는데는 영 젬병이다.

나 이외에 대하여는 모든게 솜씨꾼일법 하지만 나에 대하여만은 그 솜씨가 발휘되지 않는다.


16442 1992. 2. 13 (목)


퇴근 무렵의 나른한 기분은 어떤 조갑증을 동반한다.

그 조갑증은 한잔 술을 손짓하는 것이다.

맥주 몇잔.


따뜻한 날씨.

엘빈 토플러의 관찰력과 혜안있는 통찰력에 압도 당하면서 '미래의 충격'을 다시 읽는다.

이제 사람의 의식과 관계와 개념등 모든 것의 변화가 가속화 된다.

예전의 백년이 현재의 1년으로 압축되고 이것은 점점 가속화 될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것, 인류가 다하도록 가져 갈 그것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눈이 휙휙 돌아가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 그래도 영원히 변할수 없는 몇몇의 그 무엇.

나는 그렇다, 그것을 천착해 보아야 한다.

그곳에다 나를 걸어야 한다.


오늘 英이 졸업식.

이제 英이는 무한한 자신의 가능성 앞에, 혹은 험난한 정글 앞에 마주 선 것이다.


부석부석한 컨디션을 모처럼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맴으로서 다소 相殺코자하는 안간힘.


고개 숙여 기도.


16443 1992. 2. 14 (금)


어제 英이 고등학교 졸업식.

졸업식 마치고 제 대학에 가서 제 과 선후배 상견례가 있었던 모양.

딸네미가 얘기해주는 내용중, 자기소개 할 적에 제법 재치도 있고 스스럼없이 하였다는 그 얘기를 듣는 아비는 英이의 사회생활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보는듯하여 너무나 흐뭇하다.


오늘 俊이 졸업식.

이제 완만한 비탈을 올라선 고갯길, 눈 앞에 준령 하나가 버티고 섰다.


俊이에게는 현명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경력자.

사춘기의 뾰죽한 예봉을 능란하게 피할줄도 알아야하고 자의식 과잉에 대하여는 그 치료요법에 있어서 또한 명의가 되어야 한다.

언제나 뚜렷한 목적의식을 견지하도록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한다.


홍콩 컨테이너선 MASTER SCHEDULE 작성하여 넘기다.

H부장 귀국.

잔득 싸들고 온 숙제거리들.


제법 쌀쌀한 새벽.

푸치니 '라 보엠'


16444 1992. 2. 15 (토)


어제 俊 졸업식.

J가 참석하였는데, 俊이의 다소 괴퍅한 성격의 일단은 졸업식 마치고 제 엄마를 내버려두고 혼자서 냅다 집으로 달려가 버리는 그것에서도 나타난다.

결국은 조양아파트 앞에서 붙들어다 다시 학교로 데리고 올라가서 겨우 몇장의 사진을 찍었다나.


英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俊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아주 특출하지도 않지만 남에게 뒤지지도 않게 자라주고, 더욱 국민학교부터 여태까지 두 녀석 모두 개근하였다는 사실은 나의 그 시절에 비추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오후에는 P/C 앞에 붙어 앉아서 여러 FORMAT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짜는데 열중하다.

집중함으로 육체의 곤비함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고마운 이 원칙.

그러나 집중하는 대상과 그 방법론이 문제이다.

대상이 무가치한 것, 말초적인 것, 찰라적인것과 집중해 가는 과정이 비자의적인 것, 억지로 끌려가는 것, 비창조적인 동기에 유발된 것이라면.. 이것들은 부정적이다.


3시에 눈이 떠지고 그것으로 그만 수면은 끝이 나 버린다.

어떤 구체적인 내용의 꿈을 꾼 것은 분명한데, 전혀 기억할수 없고 어떤 이미지의 덩어리만이 막연하게 머릿속을 채우고 있다.

푸르스름한 청색의 이미지.


토요일, 오늘 모처럼 가족들과 점심회식을 계획해 보지만, 글쎄 모두들 여건이 맞을런지.


16445 1992. 2. 16 (일)


토요일, 나의 권속들 거느리고 함께 외식은 하지 못하다.

모두들 이유 가득하고 핑계 넘치지만, 요는 남편이나 아빠와의 외식이 썩 즐겁지는 않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랴.

술마시고 잔소리하고....


진폐 때문에 공구실에 근무하고 있는 김영태씨를 다시 SHOT장으로 보내려고 그를 불러다가 설득하다.

처음에 완강하게 거부하더니 결국 나의 설득에 넘어가고 만다.

나는 옳은 일을 한 것일까?

합리적이고 타당한 조치라고 할지라도 보다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그를 보낸다는 것.


퇴근하며 책 한권 사다. 리차드 해리스 '양들의 침묵'

여간해서는 이런 대중소설의 신간은 구입하지 않는데, 이 책은 너무나 내 흥미를 자극한다.

서스펜스, 잔인, 이상심리등으로 점철된 엔터테인먼트.

몇페이지 읽어 본바, 원작은 썩 괜찮은 듯 싶은데, 번역이 영 치졸해 보인다.

서걱서걱 생경한 문투, 무르 녹아서 매끄럽게 편안한 번역이 아니다.

원작을 충분하게 곱씹어 소화해 내지 못하고, 인기작이니까 짧은 시간에 졸속 번역한 냄새가 풍겨서 고려원이라는 출판사의 명성이 아깝다.


'사랑이 뭐길래' 공허한 말장난을 위한 내용, 대사를 먼저 만든후에 뒤따르는 드라마 트루기라는, 그 정체가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재미는 까르르 까르르....


16446 1992. 2. 17 (월)


간 밤에는 참 잘 잤다.

묵직한 이불을 두채씩이나 덮어서 그런지, 알맞게 젖은 알콜때문인지 단 잠을 이루다.


英이- 흰 부라우스에 검정 후로아 스커트. 얼마나 예쁜지.

그러한 여성적인 의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패션이다.

그렇게 차려 입고 교회에 간다.

찬양대 지휘자 곁에 서서 플륫을 부는 英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나는 그 광경을 볼수 없었으나 그 그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뿌듯하다.


俊이는 천우와 영화 보러가서 8시가 훨씬 넘어서 돌아 온다.

성룡나오는 중국영화 보았다고.


버스비 인상.

170원에서 210원으로.

공공의 교통사업은 공공사업이 되어야 한다. 나라에서든 지자체에서든.

도회생활에서 교통이란 가장 중요한 사회간접 자본이다.

불친절, 난폭운전등 우리나라, 특히 부산의 버스 택시의 횡포는 참 어처구니없을 정도인데 요금만 올리다니.


월요일, 싸늘한 새벽.

내 방 찬 대기에 잠겨 기도드리는 아침.

불르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흐르고.


16447 1992. 2. 18 (화)


P/C 로 여러 종류의 포맷과 프로그램들을 구상하고 로직을 만든다.

때로 자부컨데, 내 창의성은 다소 뛰어난바가 있다.

이러한 자만에 빠질때마다 나의 중요하였던 시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시절의 아쉬움이 솟는다.

그 때 내게 누구 한사람의 인도자가 있어서 내게 조그만 동기를 부여해 주었더라면하는.


그러므로 나는 나의 아이들, 英이와 俊이에게 하나의 동기부여자가 되어야 한다.

아이들의 미래, 앨빈 토플러에 의하면 이 산업사회에서 이제 곧 정보사회로 진입한다는데 더욱 필요한 전문직업인, 자부와 능동적으로 발휘되는 능력, 보장된 창의적인 삶의 영위를 위하여.


오늘 英이 오리엔테이션.

아이들에 투사된 나의 설레임. 대학, 정열, 낭만, 진리.... 창공에 나부끼는 깃발! 청춘!


16447 1992. 2. 19 (수)


만월의 보름, 어제 아침에는 오곡밥에 귀밝이 술.


英이 오리엔테이션.

필수교양, 선택교양.... 배움의 자유로운 선택.

대학- 부디 英이의 충일한 대학생활을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아비의 마음.

창조적인 인생을 설계하라, 적극적이며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의 질을 가꾸는 英이의 인생.


조울증의 반복, 숙면한 다음 날은 수면장애.

나의 회색수면은 내 일상의 DETAIL에 있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간밤의 회색수면의 원인을 나는 가리사니를 잡을수가 없는데, 무엇인가?

방안의 온도? 이불의 경중? 위장의 상태? 장의 상태? 낮에 내게 작용하였던 숨겨진 어떤 강박? 심층심리의 그 무엇? 내 실존의 그 무엇? 한?.... 무엇인가.


늦겨울 열리는 동쪽바다, 그 풍광은 저리도 장엄한데.

오랫동안 주님을, 나의 존재주를 머리 숙여 묵상..


16449 1992. 2. 20 (목)


부서장 회의에서 유별나게 돌출되는 몇몇 인격들.

부족한 사고의 수준, 조야한 가치관은 형편없는 독서량에서 나오고 지식이란 대부분 신문에서 얻은 그것.

그들이 흡수하는 것은 실은 정치적 선정주의의 그것이다.

대부분의 세상의 원리를 잘 안다고, 가장 지성인인양 설처대는 현대인의 모습들은 아마 대부분 이러할 것이다.

유교적인 윤리관도, 전통에 대한 자부심도, 그렇다고 새로운 것을 수렴하는 아량도, 별 것도 없는 사이비 보수주의자들.

다만 이기주의, 즉물주의, 황금 제1주의, 맘몬의 숭배자들.

결국 가련한 허무주의의 인생.


오늘 SB-388 출항.

英이 오늘 수강신청.


새벽.

나를 지배하는 것은 공평함이 되어라.

공정한 마음, 가라 앉는 마음, 들뜨지 않는 마음.


내가 입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그 분을 찾지 않더라도 그 분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16450 1992. 2. 21 (금)


'뉴 킷스 언더 블록'이라는 락 그룹의 내한 공연에 수십명의 소녀들이 열광하다 깔려 다치고 한명이 죽었다.

당국에서는 주최측 사장을 구속하고 차후 이런 공연은 허가하지 않는단다.

短見, 참으로 단견.

근본적인 문제점은 파악하여, 어떤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위기감은 느끼지 못한채 늘 미봉책으로만 땜질하려 한다.

청소년 문화의 부재, 아이들의 더운 가슴을 터뜨릴 무슨 공간이 존재하는가.


俊이가 밖에 나가면 고작 갈 곳은 영화관 뿐이다.


회색 수면과 꿈, 꿈.

낮의 내 일상보다 밤의 세계가 더 바라이어티하다.


새벽, 푸치니 나비부인.

레나타 테발디와 카를로 베르곤찌.

일본 갔을 때, 나가사끼 공원에서 만났던 동상, 나비부인.

나비부인의 배경과 주인공등을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로 하였다면, 아마 쇼비니즘의 卒腦들은 무슨 식민사상 어쩌구하며 아우성을 처 댔을 것이다.


오늘 SB-389 진수.


16451 1992. 2. 22 (토)


어제 10시, SB-389 수천톤의 거대한 덩어리가 유연하게 바다 위로 미끄러져 내려가다.


'양들의 침묵'의 재미.

잔인한 이상심리와 콤플렉스등이 버무려진 소설적 구성의 재미 때문에 빨리빨리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이다.

가장 맛있는 쪽은 남겨 두었다가 가장 나중 먹는다는 내 특유의 인색함으로..

번역이 치졸하더라도 원작의 재미가 이를 덮고도 남는다.

이 영화 역시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

감동이나 휴머니티 넘치는 명작의 향기는 없고, 추악한 이상심리만 가득한 내용인데, 현대는 점점 분산되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난해해서 무슨 정신분석적인 냄새를 풍겨야 명작연하는 것인지 모른다.


東友會- 동삼동 거주하는 회사의 대리급 이상의 모임.

중리의 횟집에서 소주마시고 삼거리 목화그릴에 와 맥주로 마감하다.

김만철의 유모어, 배꼽을 잡고 웃다.

내게는 그런 재치의 순발력이 없다.

근엄한 무엇도 없으면서.

만철이 녀석의 그 능력이 부럽다.


16452 1992. 2. 23 (일)


토요일, 일찍 퇴근하여 J를 불러내 봉황맨션 앞의 족지미 보쌈집에서 족발과 동동주 먹는다.

모처럼 가시버시 마주 앉아 외식.


그리고 맥주 사들고 돌아와 녹화된 '만딩고' 감상.

좋은 영화인데 나는 검둥이 노예의 참혹함과는 상관없이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의 정취를 상상한다.

거기에는 내게 언제나 여름의 한가로운 평화의 이미지를 불러 일으킨다.

썸머 타임이 느리게 불러지는 그 한가한 정취...

켄터키 옛집--------


일요일 마냥 늦잠.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또 극적으로 금메달 추가.


잔득 흐린 날씨, 오후 빗방울 듣는다.


16453 1992. 2. 24 (월)


잠자리 들면 펼쳐지는 또하나의 세계.

꿈- 북쪽 사람들이 내려오고 어머니,형,나는 그 안내역.

영선동 산동네의 어느집 맑은 우물, 회사의 아가씨가 두레박 그릇을 씻어달라는데 그 그릇에는 수많은 지렁이가 달라붙어 꿈틀거리고 있다.

서울 자하문고개의 왼편 경복고등학교가 英이 대학교인데 비가 쏟아진다.

고색 창연한 그곳이 뻘물에 덮힌다. 나는 그 캠퍼스를 청소해 주려한다. 그런데 그곳 학장인지 사감인지로 등장한 어머니의 불공정함, 편파적인 어머니의 차가운 눈빛에 꿈 속에서도 가슴에 피를 흘린다.


교회인이 되자.

그리하여 다시 한번 그 분을 껴안자.


16454 1992. 2. 25 (화)


월요일, 각 내업공장의 칼라시트 교체공사 도면을 완성하고 공사내역을 작성하다.

회사의 생리, 인색하지 않아야 될 곳에는 지극히 인색하고, 낭비하지 않아야 할 곳에는 또 헤프기 그지없다.

개혁이나 도약, 어떤 변화도 한사코 거부하는 보수성이 가득한데도, 발생되는 사안마다 사주의 뜻에 따라 결정되어야하는 무원칙성이 또한 난무한다.

이런 풍토에서의 처세는 어쩌면 너무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창의욕과 자기실현 욕구는 때로 답답하다고 답답하다고 몸을 뒤틀고 있다.


J, 英이 데리고 나가 정장을 사준다.

J의 눈솜씨.


16455 1992. 2. 26 (수)


진공청소기까지 산업은행 시설자금으로 해결하려는 치사함.

벌써 2월 말인데 시설계획은 몇번째의 수정을 거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엘빈 토플러 '미래의 충격'

초산업사회, 와해와 재구성, 가치관의 변혁과 삶의 양태의 혁명.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러므로 英, 俊이에게 나의 경험적 지혜 따위는 투사하여서는 안된다.


16456 1992. 2. 27 (목)


에릭 시걸의 '닥터스'

의사, 직업의식.

하버드, 전통에 깃든 학구적 보수성에 허덕이면서 젊은이들은 의사가 되기 위하여 정진하는 과정.

미국이라는 나라, 양들의 침묵의 S.기말적인 혼돈은 하버드와 같은 굳건한 보수성 덕분에 상쇄되고 있다.


대학- 그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단어인가.

내게 한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갈곳은 단연 대학이다.

내 고등학교 시절, 누군가 인생의 고귀한 가치를 일깨워 주었더라면 나의 대학은 좀 더 달랐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인생 역시 달랐을 것이다.


고마운 J, 거금 10여만원을 지출하고 한약 한재 지어준다.

기침과 위장에 좋다는.


술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데 가장 힘든 조건이로군.


16457 1992. 2. 28 (금)


의사란 대부분 돈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이 내게는 있다.

그러나 '닥터스'를 읽으니까 그들에게도 어떤 사명감, 봉사의식이 있었구나하는 의사를 향한 긍정적인 시각이 눈 뜨여지는 듯 하다.

의사가 되기 위하여 그들이 쏟는 노력은 보통의 수준이 아니고,그들의 소망은 다만 부귀에만 있지는 않을 터.

사람들의 건강이라는 이념이 조금이라도 용해되어 있을 것이다.

'닥터스'를 읽고 있노라면 의사에 대한 내 고정관념을 좀 바꾸어야 할까보다.

적어도 미국, 하바드 출신의 의사들에게서.


나는 俊이가 한의사가 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있는데, 俊이는 능히 할수 있을 것이다.

녀석의 적성에도 맞는듯하고.


俊이 교복입은 모습.

양복에 넥타이, 학처럼 껑충한 목, 가는 몸매.


고교생활을 건강하게 치뤄내다오 하는 간구.


英이, 오늘 예비대학, 뒷풀이때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한다나.


술은 안마시고, 그래서 더욱 회색수면.

그러나 견뎌내자.

술마시기 따위 내 분방한 욕구를 참아냄으로써 나는 개량되고 내 정신은 상승한다.


16458 1992. 2. 29 (토)


J의 언어에 대한 습성, 직설적인 언어의 화살이 주위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그녀의 의도된 폭력은 아니다.


기교를 부리지 못하는 성격 탓이고 그 배후에는 진솔하고 솔직한 품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제 英이도,

그리고 나도 이를 이해해야 한다.

마음들을 열면 모두 이해할수 있다.


오늘 할아버지 기일인데, 저녁 모임 갖기로.


며칠째 술은 마시지 아니한다.



'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 > 部分'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2. 4  (0) 2016.06.24
1992. 3  (0) 2016.06.24
1992. 1  (0) 2016.06.24
1991. 12  (0) 2016.06.23
1991. 11  (0) 201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