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20 1992. 5. 1 (금)
종일 P/C 앞에 앉아 시설계획 마무리.
때로 P/C 게임 테트리스도 즐기면서.
퇴근 무렵 비 쏟아진다.
LD찬 씨와 맥주집.
맥주집에서 남자친구와 술을 마시는 웬 여자아이의 뒷모습, 한 스물남짓 되었을까.
스스럼없이 아주 능숙한 포즈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 광경을 넌지시 바라보는 나는 그 또레의 딸네미를 생각한다기 보다, 옛 어느 한시절의 나와 내 주위의 누군가의 분위기를 생각해 내고는 그 사념속에 잠시 잠겨본다.
여성답다는 것. 여성의 정체성.
그것은 어떤 부드러움이다, 막연하게, 부드러운 어떤 분위기이다.
담배를 피운다고 여성스러움을 잃는게 아니라 그 여자아이의 포즈에서는 오히려 더욱 여성스러움이 풍겨난다.
11시 넘어 돌아와 모자란 맥주 마신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들으면서.
말랑말랑하고 여성적 부드러움 넘치는 멘델스죤의 바이올린.
16521 1992. 5. 2 (토)
미국 L.A 흑인 폭동.
약탈과 방화.
한국인들 상점이 주로 공격을 받았고 죽은 사람도 발생하였다.
시한 폭탄처럼 안고 있는 아메리카의 암, 인종문제.
잡다한 인종이 스프처럼 용해된 것이 아니라 사라다처럼 제각각의 맛과 색채를 지닌채로 그저 버무려져 있는 형국이라고 어떤 칼럼에는 써있다.
L.A에는 한국인들이 된장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채로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다.
모국의 산업사회 그 비뚤어진 이기주의까지 고대로 옮겨 놓은채.
변질된 쇼비니즘, 코스모폴리탄적인 의식을 갖는데에는 한국인들의 의식은 요원하다.
그런 꼬라지가 흑인들에게 증오의 염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16522 1992. 5. 3 (일)
SB-389, 공시운전 만족스러운 컨디션.
접안하는 배를 맞고 토요일 늦은 시각 돌아온다.
일요일의 산행을 생각하고 술은 마시지 않는다.
俊이 성적표.
국어시험 완전실패, 수학은 80점으로 학급 9등, 영어는 60점으로 학급 2등. 종합적으로는 학급 9등, 학년 117등.
백양산 가려하는 오전 8시 30분의 일요일.
오랜만에 듣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
로린 마젤, 빈 교향악단.
16523 1992. 5. 4 (월)
어제 J와 단둘이 긴시간 BUS에 흔들려 성지곡 수원지.
성지곡 수원지로 들어가 백양산 정상을 거처 구포 쪽으로 내려 올 계획이었으나, 웬걸. 모든 산길의 입구마다 감시원이 버티고 서서 입산금지.
삼림욕장까지만이라도 가보려 하였으나 그곳 입구에도 감시원이 손을 내젓는다.
하릴없이 수원지 안의 낮은 산자락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등산 기분을 맛본다.
켜켜이 쌓여있는 낙엽, 쭉쭉 뻗은 리기다 소나무 숲, 싱그런 숲의 냄새는 성지곡의 산자락에도 가득하다.
그러나 이곳 숲속에도,수원지 윗쪽에 놀이터가 잠식하여 청룡열차의 굉음이 숲을 휘저어 놓는다.
무슨 짓거리들인지.
야트막한 동산 하나를 넘으니까, 쭉 곧은 수십미터의 나무들이 도열한 평지, 저 편의 인파가 미치지 않는 호젓한 곳이다.
거기에 자리 펴 앉아서 J는 도시락을 까먹고 나는 가지고 간 매실주를 마신다.
16524 1992. 5. 5 (화)
칼라시트 교체공사 거의 마무리 단계.
오리엔탈 공영은 성실한 시공업체이다.
정산하여 보니까 약 3,400만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하였는데, 나는 가능한한 이사장에게 호의를 베풀려 한다.
이재운 '토정비결'.
소설 동의보감이 공전의 히트를 하니까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아류의 소설들.
그러나 날라리 소설은 아니다.
심오한 역사인식을 펼처 보이는 것은 아니더라도, 특이한 분야인 기철학에 대한 천착은 제법 성실하다.
리스트 '라 캄파넬라' 엑조틱한 정취의 피아노.
늘 절망하는 인간.
늘 살아있는 인간, 아아 늘 밥을 쑤셔 넣는 인간, 인간.
기도.
16525 1992. 5. 6 (수)
어제 장인어른 생신.
俊이는 남고, J와 英이와 함께 택시에 실려 사직동.
어린이 날인데 오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차가 밀리지 않는다.
작은 처남 빼고 모두 모인 처가의 식구들,
나는 혼자 4병의 맥주를 마신다.
얼근하여 죄석버스 실려 남포동으로, J와 英이는 쇼핑, 나는 집으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16526 1992. 5. 7 (목)
형에게서 전화, 대연동 남부 자동차영업소로 옯겼다고.
8일 어버이날, 아이들과 모처럼 어머니 뵈러 가기로.
자동용접장과 의장 내업공장 지붕 칼라시트 교체 공사의 도면을 그리고 견적을 뽑아 본다.
약 4천만원, 오리엔탈의 좋은 인상은 공사를 계속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업에는 성실과 인상이 중요하다.
또 비가 내리고 있다.
부산에는 정말 봄이라는 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 꼬투리가 구질구질하게 투정을 부리다가 막바로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고 만다.
16527 1992. 5. 8 (금)
호우, 퇴근무렵 우뢰소리 내며 내리 쏟아지는 빗줄기.
俊이 어제의 시험은 그런대로 치른 모양.
막연하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잔소리와, 방에 불이 켜있고 책상 앞 붙어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공부하겠거니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 것.
실제적으로 함께 책을 펴보고, 노트를 펴보고,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관심을 표명할 것.
격려와 자극을 줄 것.
俊이 녀석도 겉으로는 이런 적극적인 간섭을 귀찮아 하는 것 같지만, 기실 녀석의 속마음은 이런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3시30분 기상.
다소 선선한 내 방에 앉아서 키에르 게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읽는다.
절망의 변증법, 절망을 통해서만 절망을 자각하고서만이 구원에 이를수 있다.
기도.
16528 1992. 5. 9 (토)
총무부에서 맴돌던 SHOT BLASTING M/C과 소각로의 방지시설 관계서류, 결국에는 다시 내 책상 위에 얹어지고 만다.
환경청 신고를 1주일 남겨놓은채.
기술검토, 협의, 네고등 할 일은 태산인데.
총무과장에게 퍼부어 본들 무엇하랴.
퇴근하여 어머니께.
모처럼 어머니를 중심으로 전 식구들 모이다.
나는 이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어머니를 가운데로 하여 웃고 떠들고 하는 이 그림을,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환한 표정으로 친교하는 이 세계를.
맥주에 얼근하여 11시경 돌아오다.
俊이 오늘 마지막 시험, 한문과 작문.
英이는 곧 지리산행 M/T, 2박3일.
형네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빌려오다.
당분간 읽거리 확보.
16529 1992. 5. 10 (일)
토요일, 한일환경의 P사장 들어오게 하여 방지시설에 관한 기술협의, 총무부서의 어설픔이 곧 드러난다.
무조건 계약하여 커미션이라도 바라고 서두른 양상.
약 5천만원.
오리엔탈공영 이사장 들어와 금일봉, 고마운 듯 당연한 듯 서랍 속에 슬쩍 집어 넣는다.
그리고 P상무에게도 인사하기를 은근히 권하니까 그 쪽의 인사는 이미 마친 후이다.
나는 이제 노련한 여우가 되었나.
俊이는 시험이 끝나 제 친구 J석이와 영화를 보고 10시 넘어 돌아왔는데 녀석의 입에서 술냄새가 난다나 어쩐다나.
J석이 생일이라고 사춘기의 호기심은 술을 마시게 한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듣고 허허 웃는 내가 J는 못마땅하다.
16530 1992. 5. 11 (월)
일요일 회사나가다.
현장을 한바퀴 돌고 P/C 앞에 앉아서 하릴없이 테트리스 게임이나 하다가 삼계탕 한그릇 먹고 돌아온다.
동삼동보다 대여료 훨씬 저렴하고 레파토리 다양한 비디오 SHOP에서 비디오 빌려 돌아온다.
'작은 신의 아이들' 상처받고 비뚤어진 벙어리 처녀의 이야기.
헌신적인 남자, 토마스 하트.
좋은 영화이지만 아카데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여우주연상을 비롯한 몇 개의 아카데미를 받았다.
'파리의 아메리카인'
빈센트 미넬리 감독, 진 캐리와 레슬리 캬론 주연의 뮤지컬.
거쉬인의 원음악을 배경으로 한 지극히 아메리카나이즈한 엔터테인먼트.
즐거움이 있고, 사랑이 있고, 찬란한 춤과 노래가 있다.
뮤지컬에는 원천적으로 낙천주의가 흐른다.
꿈- 보생의원 5호실, 내 방. 잠자는 동안 냅다 싸재낀 똥이 범람한다. 어머니의 도움, 애순이와 간호원 김양 등장.
뱃속이 그다지 불편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꿈은? 아, 그런데 변소는 나타나지 않았구나.
단지 똥무더기만 나타났으니까 위장의 상태와는 별개의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16531 1992. 5. 12 (화)
온종일 무척 분주한 일과.
서울 조선공업협회로부터 갑작스런 FAX, 거기에 답변을 한다고 장거리 전화를 근 한시간여 붙들고 있었다.
대기환경보전법의 비산먼지발생업종으로 조선업이 지정될 가능성에 대하여 빠져나갈 논리를 달라는.
규제와 법도 좋으나 이러한 지엽적인 시각으로는 아니된다.
경제의 눈치나 살피는 환경의식으로는 지구의 환경을 보존할수 없다.
생활양태의 변화, 가히 혁명이라고 일컬어질수 있는 환경을 위한 발상의 전환, 기존의 산업질서를 개편한다는 각오로 임하는 정책의 수립, 이것은 물론 국제적인 규약으로 전세계가 참여하여야 한다.
퇴근하여 마루에 앉아서 소주 한병.
스승의 날이라는 것은 선생들의 이른바, 주머니 채워주는 횡재의 날이다.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염은 의미가 변질하여 아주 개같은 풍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제 밤 KH근이에게서 전화, PS곤이 아파트 사서 입주하였다고.
英이 지리산행은 취소, 오늘부터 축제란다.
모처럼 울리는 베토벤 '에로이카'
한스 슈미트, 비엔나 필.
16533 1992. 5. 14 (목)
오린엔탈 공영 이사장, 공사종결.
세금계산서와 후속공사의 견적서 가져 온다.
새로운 공사는 공사집행 품의 작성하고, 완공 공사는 지출품의 작성하여 즉각 결재 올린다.
한일환경 P사장, 새로 작성한 도면과 제품사양 만들어 온다.
산적한 현안들 빨리 건수를 줄여야 한다.
퇴근하며 전직원과 회식.
꼬리곰탕집, 터무니없이 비싼 음식값, 꼬리찜이라는게 예닐곱점의 고기가 들어가고 감자가 들어간 음식이 한그릇 1만5천원.
간단하게 마치고 그 집을 나와 족발집으로, 차라리 푸짐한 돼지고기가 좋았다.
돌아와 TV의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 본다.
외국영화의 TV 방영에 있어서 우리말 더빙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목소리와 음색과 억양등 원작에 깃든 감정을 충실하게 표현하여야 하는데 '죽은 시인의 사회'의 더빙은 원화를 많이 훼손하였다.
16534 1992. 5. 15 (금)
부산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 아니다.
낮게 구름 드리우고 바람이 분다.
썰렁한 기온은 마치 늦가을의 느낌이다.
'토정비결' 하권 거의 읽어간다.
氣- 자연과 동화하는 질서의 기운.
그런대로 그윽한 논리가 있고,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데 쇠기운이 모자라서 쇠붙이를 쓰고 다닌다던가 하는 작위적인 논리의 틀같은 것도 아니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으로 사람의 체질을 구분하는 논리도 아마 氣라는 것에 있는 듯.
16535 1992. 5. 16 (토)
민자당은 김영삼과 이종찬의 쌈박질.
정주영 국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호호 할아범의 정력은 실로 대단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한낱 돈쟁이의 경륜밖에 더 있는가.
경제가 정치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재벌이라고 해서 무슨 경제적 경륜의 대가일수도 없을뿐더러.
이기택은 김대중과 경선을 선언.
그나마 새로운 이미지는 신정당의 박찬종 정도, 그런데 그는 조직이나 자금에서 까마득하게 뒤질뿐 아니라 보수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지, 게다가 언론에서도 개밥의 도토리 취급이다.
기도.
비가 온다더니 비는 오지않고 햇살을 두텁게 막고 있은 구름만이 음산하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코랄 환타지.
16536 1992. 5. 17 (일)
토요일 회사를 나서 자갈치.
시장, 그곳에는 언제나 살아감의 냄새로 가득차 있다.
일요일, 게으름을 용납하여서는 안된다.
일찌감치 머리감고 세수 해치우고,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울리게 하여 놓고 시편을 읽고 기도드린다.
안개 자욱한 바다, 까치 소리가 들린다.
오늘, '카사블랑카'와 '엑소시스트3' 감상하고,
그리고 임꺽정에 파 묻히기로.
'시는 질긴 기다림이다.
기다림의 끝, 참을수 없는 절정에서 토해내는 짧은 외마디들의 질서이다.
시는 힘든 잉태이고 저 스스로 살아가는 생명이다.
시가 하나의 생명이기에 시와 시인의 삶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때만이 시와 삶은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다.
오랜 기다림이며 잉태라는 점에서, 시는 아무리 사회적 명분이 높은 어떤 목적의식성일지라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시인의 삶의 구체성을 초월하는 어떤 상상력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시는 온 몸의 신열, 아니 생명을 낳기 위한 신열 끝에 겨우 새어 나오는 '생명의 흔적'인 동시에 '흔적으로서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시의 탄생은 '마침내'이다.'
시에 대하여 참 좋은 느낌의 글이다.
16537 1992. 5. 18 (월)
'카사브랑카'
험프리 보가드, 잉그릿드 버그만.
흑백의 톤으로 나타나는 잉그릿드 버그만의 아름다움은 환상적이다.
단순하고 명확한 드라마 트루기, 분명한 캐릭터.
옛 영화에는 진지하며 단순한 감동의,고전적인 어여쁜 로맨티시즘이 있다.
그러나 현대의 영화에 비하여 너무나 리얼리즘이 부족하고 너무나 로맨틱하여 진부한 면이 있다.
현대영화의 표방하는바 리얼리즘은 어떤가.
그러나 그곳에서는 아무리 사실적으로 접근하더라도 과장된 섹스와 과장된 폭력과 과장된 이상심리가 난무한다.
현대의 리얼리즘은 난해하고 모호하고 과장되어서 고전적 로맨티시즘의 어여쁨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임꺽정, 너무나 재미있는 소설.
조선의 정취 가득한 박물지다.
월요일, 아련한 몸살끼.
존 바에즈의 투명한 포크송.
16538 1992. 5. 19 (화)
불쾌한 미열과 기침.
이제 나의 나귀는 몸살감기 정도에도 저항력을 잃어 버렸나.
6시 넘어서 어수선한 사무실을 빠져 나온다.
감기약에 취한 혼곤한 잠...
깨어난 새벽, 몸살끼는 그저 그대로 버티고 있다.
목욕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턴 테이블에 올린다.
9번과 11번, 가장 슈베르트적인 소나타이다.
스비아토 슬라프 리히터의 동경실황 연주 녹음판인데 리히터는 러시아의 슬라브적인 비애가 느껴지는 섬세한 연주이다.
슈베르트의 섬세한 가락을 슬라브의 커다란 손가락이 연주한다.
16539 1992. 5. 20 (목)
방지시설관계, HH기 부장과의 다툼.
퇴근하여 J와 PS곤 의 새 아파트 방문.
JN영 등도 모여 생선회와 고기와 술을 마시고 11시경 돌아온다.
민자당은 김영삼 66.3% 얻고 신승.
데모의 계절, 거리에는 전경이 깔려있다.
英이를 생각키우고 데모하는 학생들이 이제 예사롭게 뵈지 않는다.
또 가스 렌지에서 고무타는 냄새를 진동케 하는 J.
그것을 투덜대는 남편에게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는 사십넘은 여자, 마누라짜리.
16540 1992. 5. 21 (목)
내 기침의 중요한 원인가운데에는 담배가 있음이 분명하다.
어제 하루 종일 세가치의 뻐끔담배를 피웠을 뿐으로 기침은 훨씬 수그러 들었다.
SB-391 진수, SB-387 공시운전.
하고잡이 P상무, 그 사람은 일이 넘쳐나고 넘쳐나서 정신이 없어야 신바람이 나는 사람이다.
임꺽정의 재미.
왕을 중심으로 한 벼슬아치들의 부침, 권모와 술수들.
그 속에서 억센 반골 임꺽정이의 얘기는 무르 익어 간다.
벽초 홍명희는 어떤 사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풍속화를 입담 좋은 얘기꾼으로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문열처럼 어떤 주제를 작가의 생경한 음성으로 역설하는 것도 아니고 황석영처럼 탄탄한 구성으로 비상한 감동을 유발시키지도 않는다.
노숙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세를 시종 견지하고 있다.
이제 4권째로 접어든다.
로드리고 아랑페츠 협주곡.
쥬리앙 브림이 연주하는 기타.
16542 1992. 5. 23 (토)
동남아 어느나라의 영화 '스콜피온 나이트'
할렘가의 뒷골목, 고양이 시취 냄새나는 남국의 가난한 뒷골목.
거기에서 벌어지는 욕정과 간통.
테네시 윌리암스의 어떤 분위기까지도 느껴진다.
에로영화를 이쯤 분위기있게 유니크한 영화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후진국의 수준은 적어도 한국의 에로영화 애마부인 따위보다는 엄청나게 윗길이다.
여배우의 천진한 듯 요염한 뛰어난 에로 연기.
16543 1992. 5. 24 (일)
팀 버튼의 '가위 손'.
20S.기 폭스사의 최신영화.
동화의 세트, 동화의 캐릭터, 동화적인 구성.
동화적인 이야기에 동화스러운 페이소스가 흐른다.
영화를 만드는 요소는 상상력, 에스프리 그리고 돈.
우리 영화에는 이 삼박자가 모두 부족하다.
꿈- 홍수가 지다. 중동중학교의 담장이 물길에 무너지고 건물이 쓰러진다.
어머니, 媛이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도 뵙다.
일요일 새벽, 자꾸 게으러지려는 몸뚱이를 일으켜 세워서 우선 목욕부터 해치운다.
16544 1992. 5. 25 (월)
일요일 오전 11시경, 배낭 둘러메고 J와 둘이 집을 나선다.
고신대 캠퍼스를 가로 질러 길도 아닌 가파른 바위 투성이 계곡을 오른다.
절을 지나 다시 45도 이상되는 가파른 산을 도파 드디어 고갈산 정상.
바다가 드넓은 푸르른 벌판으로 눈 아래 펼처있다.
서쪽으로는 가덕도가 눈 밑으로 달려온다.
능선을 걸어걸어 이웃 봉우리로.
봉래동 쪽으로 하산하여 회사 근처까지 걸어가 비디오 테이프 반납하고 봉래시장에서 J와 향어회를 벅는다.
일요일의 가시버시 산행, 얼마나 좋은가.
俊이 생일선물로 시계를 사가지고 돌아온다.
월요일, 俊이의 열여섯번째의 생일.
기도.
16546 1992. 5. 27 (수)
어제 저녁에도 번개, 천둥 그리고 비.
번개가 하늘을 가를때마다 밤바다가 환히 그 몸뚱이를 드러낸다.
英이는 동아리 공연의 총연습이라고 늦도록 귀가하지 않고,
俊이는 처음에 시큰둥한 생일선물 시계를 팔목에 차고 만족스런 표정 역역하다.
이상한 녀석, 나의 그 시절을 닮은 걸까?
나 역시 괴퍅한 놈, 괴짜로 불리웠는데, 俊이는 좀 다른 측면도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열정같은걸 도무지 내 비치지를 않는 것이어서 걱정이다.
적극성이 너무나 부족한 아들 녀석.
그것이 걱정스러운 아비짜리.
16547 1992. 5. 28 (목)
J는 수산대학교 연주회장까지 가서 英이의 공연을 보고 왔다.
英이가 없었더라면 SEA SOUND의 공연은 불가했을거라는 어미짜리의 허영에 찬 과장.
TRIO로 부르는 노래도 너무나 잘 불렀고, 모든 노래에 키 보드의 반주도 너무 멋젔다는.
나도 빨리 그 녹음이 듣고 싶다.
16548 1992. 5. 29 (금)
英이 국어 과목의 레포트를 대신 작성한다.
김수영의 시 '풀'에 대한 역설적인 비평문.
풀이라는 시의 제재는 민중의식적인 어떤 은유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자아의 메타포라는 논조.
이 시를 쓸때의 시인은 전혀 지사적인 풍모를 내비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패배주의 가득한 시라는 논리를 세워 작성한다.
요즘 실내악이 너무 좋다.
특히 현악 4중주.
베토벤은 이 부문에서도 발군이다.
오월답지 않은 오월도 이제 지나간다.
16549 1992. 5. 30 (토)
세월이 흐르면 살이에 켜켜히 먼지가 끼듯이 하나씩 둘씩 소유물이 늘어난다.
이윽고는 거꾸로 그 소유물의 소유물이 되어서, 존재함에 대하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소유의 삶으로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끔찍한줄을 알면서도 소유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이것은 인간이란 속물의 업이다.
법정 스님은 하루에 한가지씩 소유를 버리라고 한다.
그리고 돌아갈때에는 그야말로 무소유가 되어서 가는...
英이 어제 큰집에 들러 임꺽정 나머지 다섯권을 가져온다.
읽을거리의 확보는 큰 소유물을 갖은 느낌.
16550 1992. 5. 31 (일)
여사원 인사이동.
백화승은 경리부로 가고 건설사업부의 김명희가 오다.
일요일, 뿌연 대기에 해는 뵈지 않지만 온화한 날씨.
산에는 가지 않는다.
'불의 전차'.
좋은 영화.
해럴드 아브라함- 캠브릿지의 유태인 학생, 인종적인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자신을 채찍질하여 육상에 몰두한다.
에릭 피텔- 스코트란드의 선교사, 성실무구한 인간성의 전형.
파리 올림픽의 영국 스프린터들의 얘기.
명예, 열정, 사랑, 사명감 그리고 신념.
가장 긍정적인 덕목과 가치들을 클라식한 영상으로 성공시킨 영화.
그 영화에 등장하는 인격들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열등한 인격인가를 절감하지 않을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