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15 1995. 5. 1 (월)
일요일.
거북한 속을 추스르며 俊이와 노닥거리다가, 책을 읽다가, TV를 보다가, 도무지 파묻히지 못하는 낮잠 근처에서 어른거리다가...
저 아래 태종대 가는 도로에는 줄지어 자동차들이 늘어서 거북이 걸음을 하고있다.
"권력이 인간의 욕망이라면 변혁과 혁명 역시 인간의 욕망이다. 전자가 증식으로서의 욕망이라면 후자는 정화로서의 욕망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진 자는 스스로 생명을 끊지 않는다. 그러나 정화로의 욕망에 시달리는 변혁가와 혁명가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수 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증식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정화로 다가간다. 정화의 세계를 움켜 쥐려는 과격한 욕망의 짧은 불꽃이다. 이 불꽃의 모습은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최악의 선택이라고도 말할수 없다. 꿈과 현실을 분간치 못하는 환각적 행위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것은 정화의 욕망이 선택할수 있는 한가지 방법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증식에의 욕망이 들끓고 있는 이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욕망과 대척적인 자리에 서서 육신을 스스로 태운 그들을 가슴의 뜨거움없이 떠올릴수 없다." -완전한 영혼 '정찬'-
노동절, 비내리는 아침.
꿈, 꿈.
17616 1995. 5. 2 (화)
노동절 휴일.
모처럼 추적추적 비내리는데.
뱃구레 속, 무엇? 돌덩이 하나가 턱 얹혀있는듯한 불편한 느낌의 속을 안고, 정신은 저 건너편 무럭무럭 피어나는 무력감에 빠진채, 곁에는 또하나의 돌덩이인 J의 정신을 버거워하며...
그렇게 보낸다.
무엇에 도전할꺼나.
이 무위와 무력감의 늪에 잠겨서.
무슨 대상에 주먹을 자신있게 휘둘러 볼꺼나.
이토록 소외감, 열등감의 실력을 근원으로 하여.
꿈- 고등학교 대학입시의 모의고사, 몇 안면있는 면면들이 없지 않지만 나는 다른 지방에서 온 이방인, 까마득하게 높은 교실, 록 크라이밍하듯 그 시험장으로 올라간다, 회사는 거대한 신조선 선박, 나는 PD성 과 함께 승강사다리로 바닷물을 통과하여 하청업체를 찾아 밑으로 내려온다, 그곳은 뷔페식당, 종업원 아가씨.
날이 샌다.
주 나의 하나님.
계몽주의의 정신으로 나를 견디게 하소서.
17618 1995. 5. 4 (목)
오른 손이 아프면 왼 손으로, 왼팔이 아프면 오른 팔로 英이 문화사 레포트의 자료를 입력.
그 내용은 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의병등 에 관한 것.
덕분에 구한말 역사를 개관한다.
전일 읽은 백범일지와 맞물려, 또한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서기원의 소설 '광화문'과 맞물려 연관된 내용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회사 본관건물의 개수공사 한창.
개수해야 할 곳은 이런 하드웨어 쪽이 아닌데.
폼 잡으려고 점심시간 식당에 나타난 Sh씨 의 조그만 몸통에는 여전히 독선과 자아도취가 뚝뚝 흐른다.
수면이 전혀 달지 않는 것.
이것은 윤활하지 못하는 나의 배변과 더불어 2대 고질.
여기에 눈의 어두움과 팔의 근육 신경통이 추가되고, 입 속의 반란이 기웃거리면 그 컨디션은 최악이다.
양생기간이 벌써 끝나버린 세멘트는 이제 부식하여 그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새벽.
시편 138.
나의 하나님.
안의 것들을 새롭게 하소서.
겉사람은 후패할지라도.
17619 1995. 5. 5 (금)
썰렁한 날씨.
사무실.
넣어 두었던 잠바를 로카에서 꺼내어 다시 주어 입는다.
부산, 봄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걸까. 5월인데도 말이다.
부산사람들의 성정의 거침은 이러한 식의 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레이몬드 찬들러 '기나긴 이별'
테리 레녹스- 냉소적인 캬랙터.
"어떤 대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데는 반드시 일정한 거리가 있다."
실로 그렇다.
이것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
너무 멀면 소원하고 너무 가까우면 지겨웁다.
너무 자주 보면 싫고 너무 격조하면 그리웁다.
어린이날.
오늘 장인의 생신.
17620 1995. 5. 6 (토)
어린이 날.
태종대로 들어서려는 차량들이 영도다리까지 밀렸다.
사직운동장 근처에도 아이들의 인파.
장인 생신.
아이들과 사직동가다.
이제 일어나 거동하시고 신색도 훨씬 나아지셨다.
맥주.
17621 1995. 5. 7 (일)
토요일.
별로 일거리를 만들어 할 생각은 품지 않은채 난잡하고 노오란 환각을 자못 즐긴다.
도착적인 세계.
아편은 해본적 없으나 아마도 비슷한 함몰일 것.
선천적으로 나는 도색적인 인간이다.
일요일 산에 가려하여 彦이를 꼬셨는데, 처음에는 가겠다고 하더니 몇시간 지나자 그예 취소하고 만다.
俊이는 산을 좋아한다.
아들 놈은 산에 가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꿈- 낯선 시골 도시, 내가 우두머리인듯한 우리편과 그곳 토박이들과의 대결 국면, 먼 산언덕에는 P상무가 지휘하는 공사, 발파음과 흙이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이 다친다.
17622 1995. 5. 8 (월)
일요일 이른 아침, 俊이와 버스를 타고 대신동에 내린다.
동아대학교,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이 골목 저 골목 돌아서 구덕산 자락에 이른다.
산을 오른다.
석탄을 계속 던져 넣지만 심장이란 증기기관은 터질 듯 쿵쾅거린다.
곁에서 날렵하게 오르는 俊이의 숨소리는 고르기 그지없는데.
내 아들은 외모로서는 약해보이지만 결코 약한 아이가 아니다.
500고지의 정상에서 俊이는 싸가지고 간 도시락을 먹고 나는 한병의 소주를 비운다.
건너편 승학산을 바라보며 꽃동네를 지나 구덕산을 내려온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가슴에 리본을 단 불자들은 줄지어 절을 찾아 산을 올라오는데.
늦은 오후, 英이와 俊이는 할머니한테 가다.
어버이 날을 맞아.
17623 1995. 5. 9 (화)
이동도서관, 김용성의 소설 '도둑일기' 빌리다.
육신의 감각, 쾌락에로의 경도.
오 육체는 슬프고 정신은 더러웁다.
원칙과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회사.
논리 無, 철학 無, 그러므로 예측은 불허.
질척거릴 수밖에 없다.
전일 등산의 후유증, 오른 쪽 무릎 관절을 비롯하여 온 몸이 뻑적지근.
의연한 俊이는 아비를 놀려댄다.
"약골. 약골"하면서.
꿈- 2공장의 진수작업, 나는 참여치 못한다.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시편 119.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주님.
제게 능력을 끼치소서.
절제와 자긍.
17624 1995. 5. 10 (수)
CNC 절단기, KOIKE로부터 온 승인도면을 해독하느라 끙끙댄다.
그러나 찬찬히 구석구석 집중하여 들여다보고 있으면 윤곽이 떠오른다.
그러나 WATER PROOF DUCT의 내용은 도시 이해할 수가 없다.
한낮, 춘천인가 대구인가는 30도를 넘었다는데.
퇴근길 통근버스가 청학동 고갯마루를 돌아서자 해원에 가득 넘처나는 자욱한 안개.
피부에 닿는 느낌도 서늘하다.
英이는 요즘 레포트한다고 늦도록 俊이 방의 P/C 자판을 두드린다.
이제 꽁지에 불이 붙은 모양인가.
공부하는 자식, 무언가에 열중하는 자식새끼의 모습처럼 보기 좋은 것이 무에 있을까.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편 90 -
17625 1995. 5. 11 (목)
간밤, 곳곳에 강풍이 있었던 모양, 동삼동 주공아파트쪽과 청학동에는 몹시 심하게 불었던 모양인데, 내 집에서는 창문 한번 덜컹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이상한 현상이다.
불과 수킬로 상거한 지점에서도 이토록 틀리다니 참 이상한 현상이다.
오전, 조규룡안과에 가서 왼 쪽 눈꼬리의 결석 끄집어 내다.
의사는 가늘고 긴 꼬챙이로 누꺼풀을 뒤집어 째더니 노란 범인을 체포하여 내게 보여준다.
시원.
비내리는 퇴근길, 최석교 차를 얻어타고 돌아온다.
마루에다 돼지 삼겹살의 전을 차렸으나 아드님이나 마누라님은 거들떠 보지 않는다.
새벽.
날은 개였다.
17626 1995. 5. 12 (금)
오전 英이로부터 전화.
"아빠, 둘 다 됐어요."
운전면허 시험을 이르는 말이다. 둘이란 코스와 장거리.
김용성의 '도둑일기'
김용성은 참으로 밋밋한 작가이다.
재능부족이라기 보다 에스프리가 부족한.
그저 줄거리만 붙잡고 밀어 부치는 스타일.
지문이나 행간의 여운에서, 혹은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풍겨나는 재치와 리얼리티, 이런 것들이 그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썰렁한 봄날씨.
안과에서 돌아오는 길에 밀면 사먹다.
꿈- 김명희의 사생아, 어린쟁이 그 머스마를 나는 말할수 없이 사랑한다, 그리고 그 아이도 나를 생명처럼 사랑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입초시에 오른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사야 58-
17627 1995. 5. 13 (토)
금성하우스, 안성도장, 화신기업.
계약서 도장 받다.
'도둑일기' 하권은 상권보다 훨씬 낫다.
퇴근하여 SJ엽 , 황인수와 술 마시다.
겨우 일어난 토요일 아침.
하늘은 낮게 드리워 잔득 흐리고 내일은 비가 내린다고.
俊아, 내일 산행은 포기해야 할까보다.
17629 1995. 5. 15 (월)
지방 방송국 개국.
서울의 SBS와 연계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의 지방방송이 시작된다.
이제 CABLE TV의 수십개 챈널, 유선방송에, PC통신에다 이제 지방 방송까지.
정보의 봇물시대다.
엘빈 토플러가 얘기한 그 정보화사회가 마침내 도래하는 것인가.
중앙집중권력의 파괴, 그러므로 획일적 사고의 파괴, 주체와 객체의 가치 전도, 다양화와 소량화.
새로운 패러다임의 엄습.
왈 이런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부채질하는 요소일까.
그러나 넘치는 정보 속에는 아마도 쓰레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저녁에 방송되는 '열린 음악회'
연세대 개교 110주년 기념.
억수처럼 내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그들은 끼리끼리 혼연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한 동문의 정의를 과시한다.
이 집단 또래끼리의 획일적인 열광.
편갈라 뭉치기.
얼마나 포스트모던 운운과는 배리되는 현상인가.
휴일.
휴일의 공간은 통제가 되지 않는 의지의 공간.
그 분의 능력을 의지하라.
17630 1995. 5. 16 (화)
전무가 중국에서 돌아 오니까 이 번에는 사장이 일본으로 나간다.
결재는 쌓여 있는데, 도무지 돈푼과 관계가 있는 사안에 대하여는 아랫사람에게 맡겨 두는 법이 없다.
P상무는 P상무대로 의욕과잉으로, 광안대교 공사의 강판과 H-BEAM은 수천톤이나 쌓여가는데, 정작 공사는 언제쯤 착공되려는지 요원하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최순우.
俊이 토익상으로 받아온 도서상품권으로 英이 사온 한권의 책.
우리 조선의 美.
나에게도 연연히 흐로고 있을 나를 키운 자궁에서의 집단 무의식이 있을 것.
우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어린 통찰, 그의 시선이 응시하는 것은 비단 거창한 국보급의 보물들 만이 아니다.
여인들의 하찮은 노리개, 비녀, 장롱과 돌담....
실로 그러하다.
알아야 보이고 보여야 사랑할수 있지 않는가.
안다는 것은 애정이다.
나는 이제 메모광이 되어야 한다.
느낌, 찰라로 찾아 왔다가 금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한줄기 느낌.
그것을 잡아 놓아야 한다.
이제 뇌세포는 그것을 붙잡아 그 주름 속에 기록하여 놓기에는 능력이 부친다.
그 느낌들이란 내 심층에 있는 원형질이 내 쏘는 번개같은 영감일텐데 나는 그것을 당장은 해독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메모광이 되어야 한다.
꿈- 연극무대와 같은 분위기, 분위기의 느낌은 이토록 강렬하게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아무리하여도 생각해 낼수가 없다.
17631 1995. 5. 17 (수)
5월도 중반을 넘어섰는데 날씨는 썰렁하다.
아른한 몸살끼까지 겹처서 더욱 썰렁한 사무실.
오옴 진리교라는 사이비 교단.
일본에 약 1만명의 신도가 있다는데, 사이비 종교가 대개 그러하듯 교주라는 눈 먼 사나이에게 헌신하고 있다.
막강한 교주 중심의 왕국을 건설하고, 드디어는 핵무기까지 보유하려고, 어쩌고.
그런 그들이 그런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향한 독가스 살포는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신비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신비를 보여준 대상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함몰하고 만다.
이성도 진리도 논리도 그 앞에서는 무력하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반드시 신비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맹신이 아니면 신앙이 아니다.
나의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성령에 휩싸인 신비주의, 나는 이것을 구하여야 한다.
8년전, 나를 사로잡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느낌.
그 분도 역시 신비주의.
역사를 관통하는 보편성이 기독교에 부여하는 논리적 당위성과 개인에게 엄습하는 신비주의.
英이가 사무실로 전화, 퇴근할 때 튀김닭 사오라는 명령.
아비에게 자식됨은 이런 것, 이것은 즐거움.
17632 1995. 5. 18 (목)
한국생산기술(주)과의 선각 생산설계 계약서 안을 만들다.
멀지 않은 장래에 조선소에서는 필경 컴퓨터를 이용한 현도작업이 일반화 될거라는 혜안을 가진 젊은이들이 만든 회사, 부단한 연구 개발로 그들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구축하였다.
언제까지나 現尺현도만을 고집하던 대선조선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천리안, 4월 16일 개통하여 4월 30일까지의 사용료가 가입비 만원을 포함하여 4만 2천원이 고지된다.
자그만치 30시간을 썼다는 얘기.
천리안을 탈퇴하고 한달 9900원의 정액제인 하이텔로 바꿔야겠다.
그래야 俊이도 안심하고 쓸 것이다.
주차장 문제로 황부장과 CT용 격돌.
황부장의 오는 말투도 문제이겠으나 CT용 의 우직하고 불퉁스러운 성격도 문제이다.
문제아들을 나는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다독거려 사과를 시켰다.
俊이 12시 다되어 귀가.
제법 술을 마신 모양이다.
새벽 마루에 나오니, 소파에 길게 누워 잠들어 있는 아들 녀석.
17633 1995. 5. 19 (금)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대여섯시간의 수면동안 무수한 꿈의 파노라마의 잔치를 치루었는데, 아니 수면 그 자체가 꿈으로 점철된 듯 한데,
꿈의 액츄어리틱한 느낌은 이토록 역역하게 남아있는데, 꿈의 내용은 새벽에 깨어난 나의 의식에는 남아있지가 않다.
꿈의 흔적, 느낌의 흔적은 이토록 절절하건만.
'명정 40년'
몇 번이고 읽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 맛이 나는 그 분의 풍모.
옛 선비의 기상, 그 호방한 술마시기.
그러나 수주 역시 술꾼 이전에 생활인이기에 술이 깬 아침의 비애스런 감정상태는 나와 여일하였을 것이다.
어제 퇴근하여 어머니께.
거기서 술 마시다.
아, 좁디좁은 정신적 영토 속에 갇힌 형이여.
그리고 이제 팔십을 향하여 그저 슬프고 그저 아픈 ..
그저 결국은 슬프고야 말 어머니여.
술이다.
겨우 몸을 일으킨 아침은, 여적 작취미성이라 주님을 느끼기에는 그저 역부족.
17634 1995. 5. 20 (토)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줄기차게 연락이 온다.
한번도 참석한 적도, 흥미도 없지만 여간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나는 동창회다 무슨회다하는 끼리끼리의 모임이라는 것이 영 마뜩치 않은 것인데.
아마도 내가 이른바 출세를 하여 삐까번쩍한 입장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결국 마뜩치 않다는 것은 일종의 열등의식일 것.
꿈- 회사에서 운영하는 카페, 여사원, 정사, 호텔, 바다, 배..
간 밤에는 비 흩뿌렸다.
17635 1995. 5. 21 (일)
추적추적 비내리는 토요일 출근 길.
통근버스의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
일러서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 간판들, 지붕들, 그리고 저 너머 바다를 내다보면서 간 밤의 꿈의 흔적을 더듬는다.
간 밤의 꿈- 로맨티시즘인가 에로티시즘인가.
성의 대상, 혹은 내 어느 쪽 아니무스의 상념.
토요일 오후.
俊이를 꼬이고 꼬여서 녀석을 데리고 병원에 간다.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하고 해동병원에 가서 피검사 소변검사 X선 촬영을 하였다.
俊이.
화요일 쯤 검사결과는 나온다는데, 아마도 모두 건강할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 나이 또래다운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원래 소식의 습성에서 비롯된 것일게다.
오히려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 심리적인 동인이 있을 듯 싶다.
적극성과 긍정적인 쪽으로의 성격을 창출토록 하는 것이 육체에도 효과가 있을 것.
꿈- 보생의원의 아랫방 곁의 목욕탕, 작은 어머니의 세숫물 배급, 그런데 도무지 세수를 할 수가 없다, 세척강박으로 마음은 초조한데.
그리고 군대의 막사, 재입대, 소총 난사.
나는 하늘을 난다. 은밀하게 즐기는 나만의 능력.
17636 1995. 5. 22 (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최순우.
우리의 깊이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찾을수 있고 느낄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학자나 전문가만이 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선 반도에 태어남을 고마워 하는자, 아비 어미를 사랑하는 자, 조상을 공경하는 자, 고향을 가진 자라면 그들의 영혼 속에 원형질로서 남아있을 그 무엇이 있어서 그들에게는 이러한 아름다움을 추구할 권리와 능력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글쎄.
나는 부적격자라는 자괴감...
17637 1995. 5. 23 (화)
늦봄인가 이른 여름인가.
한낮에는 제법 덥다.
이동도서관 홍성원 소설 '달과 칼' 빌리다.
임진왜란의 시대상황을 살았던 민초들의 이야기.
홍성원, 그는 내가 평가하는 몇안되는 작가중의 하나.
감성보다 남성적 뚝심으로 밀어붙이는 작가.
옛 시대를 재현해 내는 리얼리티도 첫 몇장을 읽었는데 그럴싸하다.
옛것에 대한 깊은 안목과 미의식.
그것은 경험이나 논리로서 얻을수 있는 기능이 아니다.
직관이다.
정능에 살았던 어린 시절.
내게는 정말 가지고 싶었던 미술품 하나가 있었다.
국민학교 옆자리의 아이가 보여 주었던 혁대의 버클.
투명한 플라스틱 안에 그려져 있었던 것은 아주 단순한 그림이었다.
파란 바다와 섬, 초록의 야자수 한그루.
나의 직관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함몰되어 그것을 갖고 싶다는 강열한 욕망에 몸을 떨었었다.
어린 내게는 그것이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아름다운 예술품이었다.
17638 1995. 5. 24 (수)
俊, 검사결과 나오다.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건강체.
간염의 항체도 생겼고, X-RAY에서도 피에서도 오줌에서도 어떠한 이상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당연하고 당연한 사실인데도 기쁘고 고마웁다.
열심히 먹어주면, 이제 살이 좀 쩌주었으면 되는 것이다.
한국생산기술(주)의 젊은 사장 찾아오다.
계약서와 SCOPE 검토, 일단 1억원으로 NEGO.
2002년 아시안 게임, 부산 유치 성공.
이제 부산은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라는 명제에 명분이 섰다.
제발 이 국제적인 행사가 이 척박한 상공업 도시의 면모를 일신시켜 좀 문화적인 쪽으로 진작하는 효과가 있었으면 한다.
퇴근하여 마루에 앉아서 소주를 마신다.
4학년짜리 늙다리 대학생 英이는 대학의 축제 마당을 기웃거리고, 1학년짜리 호기심 많을 FRSH MAN 俊이는 오히려 그런 축제 따위는 아랑곳 없고.
17639 1995. 5. 25 (목)
俊이 생일.
열아홉번째의.
어느덧 대학생이 되어 아비보다 훤칠하게 키도 크고.
아들에게 나는 성숙한 인격, 독립된 영혼, 세련된 자아를 확립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유치찬란한 종족주의, 구상유취한 냄새나 킁킁거리며 맡으면서, 그냥 내 새끼 내 새끼...
그 따위 연민을 성숙된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기나 하면서....
나는 결코 俊이의 이성에 영향을 주는 좋은 아비짜리는 되지 못하였다.
다만 불쌍한 아비는 되주었나 하는... 자괴자탄.
탄탄한 인격의 어른으로서 아들 놈을, 이제 성인의 문턱에서 키워 보려고, 아니 자라게 하려고 다짐하여 본다.
아이들 학교는 지금 축제중.
17640 1995. 5. 26 (금)
俊, 웃기는 녀석.
제 생일 날 아침, 아비 출근하려니까 느닷없이 지리산 간다고 아비에게 고한다.
그리고 나 출근한 후에 배낭꾸려 텐트를 챙긴채 훌쩍 떠났다고.
구례 노고단을 기점으로하여 3박4일의 지리산 종주, 천왕봉까지.
아홉명의 학교 친구들과.
나는 사무실에 앉아서 지리산 그 장엄한 풍경화를 그린다.
얼마나 좋은가, 젊음이란.
훌쩍 배낭꾸려 떠날 수 있는 젊음이란.
땀흘려 씩씩할수 있는 육체란.
지리산, 언젠가는 나도 오르고 싶었던 태백산맥의 마지막 용트림의 거대한 덩어리.
그곳에 俊이는 간 것이다.
중학생, 야구방망이로 어머니를 살해.
순간적인 격동된 상황이 충동적으로 악마를 불러 낸 것이다.
아, 자식이 어미를 죽이다니!
기도.
17641 1995. 5. 27 (토)
俊이 장대한 산 자락에 안긴지 3일째.
엇저녁 전화 속 목소리도 싱싱하다.
노고단에서 경상도 지경으로 넘어와 기상악화로 다시 하산하여 마천이라는 곳에 묵는다고.
오늘 다시 올라 종주를 계속하여 천왕봉 정상에 오를 것이란다.
이것이 다변하지 못한 俊이에게 질문을 퍼부어 알아낸 승즌이의 일정이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워 자다.
운동장같은 자유감.
꿈- 도로, 짐승, 외국여인과 고지에 오른다.
주님.
새롭게 하소서. 감사하게 하소서.
17642 1995. 5. 28 (일)
현업 부서장들과 토요일 오전 현장 순검.
일본이나 삼성조선의 현장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대단한 어지러움이다.
더구나 광안대교의 강판과 H BEAM 등이 널려있어서 더욱 혼돈스럽다.
구석구석 탈의장과 소창고등을 들여다보면 무슨 난민촌의 구석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이런 상태로 안전검사를 어떻게 받아야 할지.
오후 미장원, 여자들 틈에 끼어 앉아서 서너시간의 파마.
俊이, 잠든 사이 12시 넘어 돌아오다.
일요일 9시가 넘었는데 여태 곯아 떨어져 있는 아들놈.
지리산을 다녀 온 것이다.
기도.
감사.
17643 1995. 5. 29 (월)
일요일, 俊의 얼글도 보지 못한채 사무실 나간다.
현관을 들어서자 총무부장의 호들갑스러운 몸짓 말짓, 신모씨가 또 한바탕 뒤집어 엎은 모양.
자기가 지적한 사항에 대한 조치를 하지 않아서 길길이 날뛰었다고.
지레 피곤하여져서 정오 넘어 집으로 돌아 와 버린다.
몇병의 맥주를 마시며 俊이와 지리산 얘기를 나눈다.
산을 좋아하는 俊이.
그런 俊이를 좋아하는 아비짜리.
꿈- 폐가의 보생의원, 약에 혼건히 취한 어머니, 회사를 그만 둔 형, 媛이, 황량한 풍경화.
비는 그쳤으나 날씨는 잔득 궂어있다.
기도.
17644 1995. 5. 30 (화)
부서장들 복도에 도열한 가운데 10여명의 검사관들 들이 닥친다.
노동부 서기관, 대학교수, 의사, 안전공단 검사원들.
한진중공업의 사고 이후 조선소에는 한달에 거의 두 번 꼴로 복새통을 이루는 안전 점검.
회의실 벽에 걸려있는 밀레의 복사 그림을 바라본다.
복새통의 아우성 속에 프랑스 시골 벌판에서 양치는 소녀는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경건하고 소박한 생활.
산다는 것의 한가로운 진지함과 아름다움.
북적거리며 매일처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곳, 이 산업사회의 바람 속에 그렇게 그림은 걸려 있구나.
17645 1995. 5. 31 (수)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뻔질나게 날아오는 유인물들.
얼마전 체육대회를 하였는데 참석자 면면을 살펴보니 눈에 띄는 낯익은 이름들.
강기탁으로부터 전화.
김해공단으로 공장을 확장하여 옮기고, 집도 이사하여 바빠서 죽겠다고.
수협 전무인 옥영재와 함께 하는 공놀이(골프)가 어떻고 하는 얼마쯤의 자랑 뒤에는 그래도 옛친구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배어있다.
옥영재의 소식도 반갑다.
동창들 모두가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 내로라 하는 듯 한데 나는 무언가하는 자괴가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보다도 아련히 밀려오는 회한 같은 것.
그러나 회억이 회억답게 그리워야 할 당위성은 긍정 뿐이 아니다.
회한과 아쉬움, 그것이 있기에 추억인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끝 이렇지요.
관계와 관계가 만드는 그 어줍잖은 마음 밭이란 참으로 피곤한 것이기도.
오늘 또 안전보건 특별 점검.
주 나의 하나님.
새롭게 하소서.
넓게 하소서.
굳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