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5. 4

카지모도 2016. 6. 25.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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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85 1995. 4. 1 (토)


俊이 신체검사.

2종 합격.


28년전, 내가 받았던 을종합격과 같은 급수.

나는 그때 영도초등학교 신검장에서 똥구멍을 까보이기도 하며 초장의 군기란 것도 경험하였었지.

그리하여 낭만이라는 오해 속에, 어떤 도피심리로서 병무청 아가씨에게 돈을 써가며 지원 입대하였었지.

계급장의 구별도 못하고, 중대가 뭔지 소대가 뭔지,고참이라는게 뭔지, 그 따위 것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은채 그 낯선 세상으로 걸어들어 갔었지.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채 부딪쳐 나가는 것이 상책일런지 모른다.

俊이에게도.


퇴근하여 술.

정시영, CT용 등과.

김명희가 개업한 화장품 가게 들러서 英이 화장품을 사 돌아오다.


17587 1995. 4. 3 (월)


암시- 환각이냐 환상이냐.

그 노오란 색감은 청결한 주님의 색감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슬픈 세계.

그 덫에 걸리면.


英이는 1박2일 신입생 환영회가고 없는 일요일.

俊이는 친구와 외출.


난 P/C 앞에 앉아 전화선을 연결시키고 MODEM을 작동시켜 P/C 통신을 공부한다.

S/W '이야기 6.0' 의 FUNCTION은 어렵지 않게 습득이 가능하지만 실제 BBS 연결은 여의치 못하다.


밤늦게 英이 돌아오고 俊이는 잠시 들어왔다가는 금새 또 외출.

고등학교 선배들과 모임이 있다고.

나는 밖으로 도는 이런 俊이가 너무 기쁘다.


어쩌면 나는.

俊이의 내성적이고 비활동적인 어떤 면을 안타까와 하고 있지만 그 시절, 나 자신은 어쩌면 지금의 俊이보다 더 한 고립장이였을 것이다.

다만 겉으로 그렇지 않은척 폼 만을 잡고서는.

그 아비에 그 아들인데 어쩌랴.


17588 1995. 4. 4 (화)


출근하여 한시간여 몇가지 사안을 처리하고 버스타고 동삼동의 치과에 들르다.

3시간여를 갈고 긁고 씌우고.

마취된 오른 쪽 턱, 볼따구와 잇몸과 혀의 그 생경한 감각, 마치 남의 것들을 접촉하는 느낌이다.


치과를 나서서 점심으로 돈까스를 사 먹는데 마취가 풀리지 않아서 감각이 없어진 혀를 씹었던 모양이다.

혀에도 잇몸에도 상채기.

조물주께서 통증이라는 감각을 주신 이유.

완벽한 경보장치임을 알겠다.


俊이 늦은 귀가, 레포트 때문에 늦었다고.

제법 공부를 시키는 교수도 요즘 있는 모양이다.


꿈-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식, 그런데 두 분은 멀쩡하게 방안에 정좌하여 계시면서 자신들의 장례식을 기다린다. 작은 어머니와 외숙모의 복합된 이미지, 어린아이의 울음, 어머니의 회초리질, 그 아이는 나와 俊이의 복합된 이미지.


시편 읽고.

기도.


17589 1995. 4. 5 (수)


이제야 봄이 왔는가.

코발트 빛의 하늘, 온유한 햇살.

따스함 가득한 대기.

조물주를 느낀다.

생명의.

축복의.


어떤 절망적인 기분에 빠진 사람이라도 봄의 촉감, 봄의 향기 속에서는 순간적으로 나마 이런 느낌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손길은 사랑이라거나 삶의 모습은 축복이라거나 하다 못해 이 빌어먹을 세상은 그래도 한번쯤 살아 볼만한 곳이라고.


아침 저녁의 선선함과 항구도시의 특유한 바람은 때로 앙칼지기도 하지만 이제 봄은 온 것이다.

생명의 꿈틀거림.

이제부터 무르익고 무르익어 생명의 절정을 향하여 숨가쁜 향연이 벌어지고, 이윽고 쇠잔하여 서서히 서서히 정적의 늪으로 잠겨 갈 것이다.

섭리의 순환은 이토록 어김이 없고녀.


토요일, 일본어 한자사전 구입하고 비디오 테이프 빌려 돌아오다.


俊이 대학생활에 차츰 익숙해지는 듯한 모습이 완연한 듯 하여 얼마나 흐뭇한지.

그리고 英이는 졸업에 대비하여 제 나름으로 무언가 시도하는게 있는듯하여 이 또한 흐뭇하다.


17590 1995. 4. 6 (목)


식목일.

일본어 단어들을 취사선택 하여 입력, 단어집을 만든다.


슬금슬금 익힌 俊이의 P/C 실력은 제법 학교의 또래중에서는 뛰어난 모양이다.

녀석은 어느새 파일 하나에 우리나라 산에 관한 자료들을 D/B로 구축해 놓았다.


마루에 앉아서 소주를, 소주를 마시고 난후 입가심 맥주를 마시면서 '미세스 다웃파이어' 본다.

여장의 로빈 윌리암스는 과연 뛰어난 배우이다.

예전 '투시'의 더스틴 호프만과 비견되는.

영화의 내용중 미국에서의 이혼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

아이들은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만 한 쪽 부모와의 정을 나눌수 있을 뿐이다.

법정이 접근금지 해 버리면 아예 자기 자식에게 접근조차 불가하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그런 면에서 아직은 행복하다.


아, 무릇 부부들이여.

갈라서고자 하였으면 수백번도 더 갈라섰을 가시버시들은 그래도 아이들 때문에 붙어 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가치관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꿈- 외갓집 큰누나, 외나무 다리...


오늘 신입사원 ORIENTATION.


시편.


17591 1995. 4. 7 (금)


신입사원 ORIENTATION에 들어가 생산관리의 강의.

머리를 짜내어 구상해 낸 주제인즉슨, '생산관리 측면에서 본 조선업의 특성'

십여명 둘러 앉은 그들 중에는 두어달 전에 입사한 사장 아들도 끼어 있다.

연대 경영학과, 미국유학.

나이도 꽤 들었는데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수리영업에 배치되어서 말단사원으로 변소청소도 하는둥 성실 겸손한 면모를 보여 주었던 친구이다.

1,2공장 현장 투어도 인도하다.

강의나 현장 투어중 사장아들이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


이번 일요일은 부차장회의 등산.

제법 많은 인원이 참가할듯하여 무언가 푸짐한 선물을 마련 하고자하는 총무인 나와 달리 회장인 한상혁부장은 돈 쓰는데에는 소극적인 자세.

어떤 조직을 운영하는데에는 결단과 실행의 추진력이 곧 리더쉽으로 변화한다.

그것이 독선적일지라도 때로 그것이 조직원들을 편하게 하기도 하는 요소 또한 없지 아니할 터인데.


아득한 몸살끼.

P상무의 요즘 심기는 썩 좋지 아니하다.


17592 1995. 4. 8 (토)


치과, 보철 끼우다.

아무렴 본시 제 이빨만이야 하겠는가 마는 이딘가 어설프고 시린 느낌.

그런데 하룻밤 자고 새벽 이빨을 닦으니까 보철은 풀석 빠져 버리고 만다.


동아건설 광안대교 케이션 제작공사.

건설공사의 떠들썩함.

트레일러 여나문대가 중량초과로 영도다리를 건너지 못한채 포항으로 도로 돌아가는 판.

동아건설, 강원산업과 트레일러 기사들은 모두 내게 전화를 해대고 나는 교통정리를 하며 혼이 쏙 빠진다.


17593 1995. 4. 9 (일)


풍이형 죽다.

아직 마산고모님은 꾸부정한 할미꽃으로 건재하신데.


풍이형 그렇게 살다가 죽어 버리다.

그렇게 어줍잖은 포즈로, 잔재주의 교활과는 담을 쌓은채 그렇게 서성이시다가 가시는구료.

간암.


부차장회의의 山行일은 신봉수차장에게 맡긴채 마산으로 달려간다.

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형수는 뒷좌석,

마산 파티마병원 영안실.

그곳 일실에 대머리진 커단 얼굴의 선량한 사진 앞에 꿇어 안는다.

뜨악한 사촌들 잠시 마주 앉고.

광주누나, 할머니 다운 년륜으로 늙어 있다.


풍이형, 최동석씨.

예비군 훈련 보초 서러 가면서 외투를 빌려 입던 한겨울 그때의 형.

아랫방 앉아서 파라다이스 사과주를 나누어 마시던 형.

언젠가 회사로 나를 찾아와 맥주집에서 한껏 취하기도 하였지.

그리하여 어진 아내를 얻으시고 총명한 아이들을 나아 키우시고, 암이라는 사실을 아신지 불과 닷새만에 가셨다.

그나마 고통없이 가셨구료.


하룻밤 세우려고 하였으나 광주누나를 비롯한 명이 문이등 고종사촌 형제들 가득하여 상청은 외롭지 아니하다.

형과 형수와 토요일의 정체된 도로를 달려 부산에 돌아온다.


기도드리는 일요일 새벽.


17594 1995. 4. 10 (월)


산자들과 죽은자들의 경계는 이토록 확연하다.

산자들은 일상에 함몰되어 히히덕 허걱거려야 하고 죽은 자는 너무도 선명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아, 죽음이란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소름끼치도록 확연하다.


일요일.

어차피 불참하기로 한 총무인 나, 부차장회의 산행은 아랑곳 않은채 집에서 뒹굴다.

俊이 빌려온 조정래 '아리랑' 제1권을 읽는다.

방영근, 지삼출, 감골댁, 백종두, 장덕풍, 장칠문, 하야가와,요시다...

일제는 서서히 한반도를 잠식한다. 그 앞잡이들은 어찌보면 시대의 선견자들.

조정래적인 소설의 감동은 뒤에나 가서 있을랑가.


월요일 아침.

출근하면 여러 가지 사안이 나를 기다린다.

사무실 가면 광안대교 케이션 공사의 잡다한 아우성이 확 밀려올 것이고, 훌러덩 빠져버린 보철을 끼우기 위하여 치과에도 가야하고, 어제의 불참한 산행에 대한 뒤처리도 하여야 하고, 고약을 사다가 어깨쭉지에 붙여야 한다.


17595 1995. 4. 11 (화)


치과, 바깥쪽의 높은 부분을 갈아 낮추니까 한결 편하다.

이빨이란 아래 윗니가 마주처 기능을 발휘할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멧돌짝마냥 아래짝과 위짝의 요철이 꼭 들어맞아야 하는 것.

위쪽이 튀어나온 부분은 아래쪽이 들어가야하고....


건설공사 난리를 치루다.

임원이라는 사람들의 자기도취적 개인 플레이.


흐리고 며칠째 을씨년스러운 날씨.


꿈- 병원 교회, 김정효의 길가 목로술집.


17596 1995. 4. 12 (수)


SS우, 차몰게하여 중앙동 해광빌딩의 건설부 사무실 찾아간다.

홍차장의 떠벌림, 그러나 너무나 어설퍼 그것이 건설의 일 스타일이라면 골치 아프게 생겼다.

금성하우스 안사장 불러 계약 종용하였으나 계약하기를 거부.


무라까미 하루키 '태엽 감는 새'

유니크한 작가.

사소하고 작은 것, 정일한 것, 그런데서 아주 특이한 정서를 유발케 하는 솜씨.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한 글하는 고수이다.


여자다움- 친절한 몸짓과 다정한 말씨와 상냥한 눈빛.

그리고 상대를 향한 그윽한 배려의 마음씨와 섬세한 손놀림.

한 마리 수컷을 기필코 사람으로 만들어 행복케 하여 주는 절대 조건.

남자의 불행과 행복의 줄타기는, 삶과 죽음의 줄타기.

여성다움을 소유하지 못한 남성은 죽음과 다름 아닌것을 본능적으로 인식하는 여성.


英이 운전면허 시험 미끄럼.


17597 1995. 4. 13 (목)


鄭과 姜의 멱살 드잡이 싸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저급한 싸움을 유발케 하는 것은 평소의 감정.


치과에 가서 몇시간 공정의 작업으로 잇빨공사 최종 종료하다.


"태엽감는 새는 실존하는 새요.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잘 모르오. 나도 실제로 그 새를 본 적이 없으니까, 소리만 들었을 뿐이오. 태엽감는 새는 주변의 나뭇가지위에 앉아 조금씩 세계의 태엽을 감는거요. 끼익끼익하는 소리를 내면서 태엽을 감소. 태엽 감는 새가 태엽을 감지 않으면 세계는 움직이지 않아요.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훌륭하고 복잡하고 거대한 장치가 빈틈없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생각하오. 허지만 그렇지 않소. 사실은 태엽 감는 새가 여러 장소로 가, 가는 곳곳마다에서 조금씩 조금씩 태엽을 감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거요."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모처럼 문학을 읽고 있는 것이다.


J, 어제 팔공산 갔다오다.

英이 다음 운전면허 실기시험은 5월 11일.


시편읽는 새벽.


17598 1995. 4. 14 (금)


암시, 선정적인 암시.

그리고 상상.

어둡고 나근나근하고 달콤달콤하고.

그러나 숨이 차고 연옥과 같은 고통이 연상되는 나락.

그 세계.

슈미즈입은 중년유부녀의 하얀 허벅지.

姦夫를 기다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에는 이런 암시가 전혀 없지만 나는 나의 암시를 만들어 내어 작위적으로 그 속에 잠긴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극히 섬세하면서도 도발적이다.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의 냄새도 섞여있다.


부쩍 건설공사에 열을 내는 P상무.

단지 그의 하고잡이 성품에 기인하는 바도 있겠으나, 야망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건설부까지 장악하여 다소 실추한 오너의 신뢰를 만회하려는.


英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8시가 넘어야 돌아온다.

흡사 출퇴근하는 직장인처럼 하루도 어김이 없다.

이제 4학년짜리인데 FRESH MAN마냥 그저 짤짤거리고 히히덕거리며 뜻없이 돌아 다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은 아비짜리의 마음.

토익을 공부하는 목적은? 계획은?


어깨의 종기 드디어 터졌다.

膏藥이 듣기는 잘 듣는 모양이다.


17599 1995. 4. 15 (토)


비 흩뿌리다.

영도의 봄은 마냥 을씨년스럽기만.

이러다가 불쑥 무더운 여름이 문을 두드린다.


P상무의 설침.

광안대교 공사에 대한 의욕은 지나치다.


어깨의 종기에서는 고름이 빠지기 시작한다.

고약 덕.

문제는 이런 종기 따위가 아니라 육신의 세포 조직이 노쇠해 가는 것이다.

추하지 말고 좀 깨끗하게 늙어가자 아무리 안간힘을 쓰더라도 몸뚱이는 추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

벗은 몸을 거울에 비추어보면 아, 추하다!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일찍이 아폴론와 같은 몸매를 가져 본적 없지만, 탄력을 잃은 살가죽과 축 늘어진 뱃구레하며, 떡판처럼 넓데데한 낯작에는 눈동자마저 빛을 잃었다.

배꼽 아래에는 그래도 남자라고 늘어진 좆대가리가 출렁거린다.


아, 육체는 그럴지언정, 주님이시여 정신은 그러하지 말기를.

반역하라, 육신에 담긴 정신이여.


17600 1995. 4. 16 (일)


토요일 오후, 훤한 한낮의 퇴근.

한낮.

이 정적.

강박처럼 닥아오는 술의 유혹.


내 심층의 심리에는 한 폭의 풍경화가 있다.

陽光 가득한 한낮의 광장이나 너른 운동장, 아니면 정적의 넓은 도로.

바람도 없고 적요만이 넘실대는 공간.

당연히 그 공간은 텅 비어있어야 한다.


옛날에.

정능의 2층 창가에서 여름날 정오에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저 멀리 미아리쪽에는 서라벌 예술고등학교의 고딕식 지붕이 보이고, 적요의 햇빛 가득한 행길은 그냥 텅 비어있었을 뿐이었다.

그냥 그냥 텅 비어있는 한낮.

아마도 조름에 겨운 개 한 마리가 저쪽 처마 그늘 아래에서 게으른 하품을 하고 있었을 것.

햇빛 가득한 적요의 공간, 그것을 자신의 밖으로서 내다보는 소년은 인생이 행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흘러 오십줄을 바라보는 그 소년은 토요일 오후 버스 창 밖의 그 풍경화를 보고 마음이 사무처서는 이제야 배워 버린 수법인 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시지 않았다!

위대할사! 의지여.


일요일 새벽.

어제 술을 마시지 않으니 일요일 새벽의 몸과 정신이 이토록 좋은걸!

나는 어제 그 한낮에 알아 차린 모양이다.

이 새벽이 더 좋았고 이 새벽이 더 가치있다는 걸.


17601 1995. 4. 17 (월)


내가 선택한 여자와 내가 이룩한 가정.

이것이 바로 나의 가정이다,


내가 선택함, 여기에 왜 한점 오류가 있지 아니하겠는가.

애당초 완벽 비스무리한 어떤 그림은 그릴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나는 이것을 스스로 폄하거나 훼하여서는 아니 된다.

긍정과 적극은 바로 나에게서 나오는 것.


내가 나에게서 도피할수 없듯이 나는 가정에서 도피할수 없다.

이것은 온전한 나의 것이다.

나의 업이다.


천리안 통신 개통.

세상, 그 다양함 들여다 보기, 이제 俊이도 나도 아웃사이더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영향자로서 그 세계로의 잠입을 꾀하는 것이다.


홍정욱, 스물세살, 하바드 최우수 졸업, 배우 남궁원의 아들, 아버지를 닮아 잘생긴 외모.

그가 쓴 '7막7장'이라는 책을 읽는다.

자신과 야망, 그리고 도전, 싸움과 승리.

빛나는 젊음이다.

그 부모의 뒷바라지도 희생적.


"오라! 삶이여. 내가간다."

자신감, 정열.


俊아 너도 떨처 일어서거라!

못난 부모의 음습한 자의식을 깨부수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 가거라!


17602 1995. 4. 18 (화)


뚜렷한 목표.

이것은 단지 이성과 의지만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하며, 열정을 유발케하는 동기도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 가능성에 대한 신뢰.

스스로의 우월감 또한 중요한 요소다.

홍정욱이라는 젊은이, 그는 위의 것들을 모두 가졌을뿐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는 완벽한 환경 또한 소유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받은 교육, 인간의 고상함과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한 가족주의, 그리고 훌륭한 인격의 고양을 위한 의도적인 부모의 헌신적 노력. 최선을 다하여 뒤를 받처주는 경제력.

아아. 그것은 부모의 자식을 위한 헌신이었다.


소질과 소양과 환경, 서로서로 동기부여하여 에스컬레이트되는 그 결과가 성공이 아니면 무엇이랴.


英이와 俊이.

나는 아이들에게 부끄럽다.

그리고 옛날 나의 치기.

'나는 始祖가 되리라'고 구사하였던 그 무식 가득한 언어가 또한 얼마나 부끄러운지.

고상한 가정은 전통이 만드는 것.

고상함을 경험치 못한 부모가 어찌 고상해 질수 있겠는가.

나도 그러하며 J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고상하지 않음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포기하여서는 아니 된다.

도피할수 없는 生.


신을 믿으며 좀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에 의지하여 고상함을 배울수도 있다.


꿈,꿈,꿈.


새롭게 하소서.


17603 1995. 4. 19 (수)


'부모는 자식이라는 화살을 쏘아 올리는 활이다'


나는 英이에게 활이 되어주지 못하였다.

역시 俊이에게도 활이 되어 주지 못하였다.

내게 경제가 없으니 물질적인 지원은 물론 풍족할 리가 없다.

가치관이 이토록 부박하니 어떤 가치 하나 정립하여 주지도 못하엿다.

감정의 중심이 없으니 아이들에게 무슨 정서적 안정 하나 주었으랴.

도덕적인 원칙이 있어서 때로 버릇없는 언행에 대하여 단호한 다스림이나 있었던가.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마음씀의 기울임, 朝鮮적 부모의 마음 기울임의 일반적인 업적.

단지 필부필부로서 자식에게 쏟는 정성 하나는 갸륵하였는지?

이것 하나라도 제대로 있었을까마는.


이제 英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

내 슬하를 떠나야 하는 때, 그 아이에게 가치있는 무엇 하나 그 아이의 마음밭에 뿌려 주었음을 자신할수 있을까.

곧 군대에 갈 俊이에게 나는 어떤 중심 하나 심어 주어 군대생활의 지표 하나 있게 하였는지.


요즘 그렇다.

J 에게 무릎 꿇어 엎드려 애원하고 싶은 심정.

중심을 갖자. 의미를 갖자.

우리의 삶을 가꾸자.

변하자, 변하자.


신앙.

십자가에 양팔 벌려 피 흘리시며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 보시는 그 분.

그 고통과 희열 곁으로 닥아가는 것은 정녕 이 가정에는 요원할 것인가.

이제 우리가 획득해야 할 유일한 가치는 그 분 밖에는 없다.


17604 1995. 4. 20 (목)


俊이의 버릇없음.

아침에 두드려 깨우는 아비에게 '아버지, 이게 무슨 짓이냐'고?

그러한 말버릇에 흥분하여 야단치는 아비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식 앞에서 아비를 폅하는 J.

명색 가장이라는 체면에 못을 박아 버리고 만다.


어제 SB-415 진수.

KK곤 과 4월말 쯤이면 중국으로 돌아가게 될 김순철씨와 더불어 술을 마신다.


나도 중국, 그 넓은 대륙, 그 낯선, 뿌리깊은 그 땅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


목요일, 그예 오늘 회사는 빼먹기로 한다.


17605 1995. 4. 21 (금)


회사를 빼먹은 한낮의 적요 속에 잠겨 맥주를 마신다.


장정일 '너에게 나를 보낸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이런 류의 것인가.

잘은 모르겠으되 장정일은 누군가의 시시한 아류는 아닌 것쯤이야 알수 있겠다.


봄은 왔다는데 부산, 특히나 영도의 봄은 바람이 판치는 세상이다.


아지랑이, 다소곳한 햇살, 푸른 언덕, 풀밭 속 고개를 내민 패랭이 꽃, 옥빛 하늘과 솜이불처럼 마냥 포근할 것 같은 뭉게구름은 어디에.


일찍 잠자리 기어든다.

꿈- 어머니와 어딘가에 소풍, 김선생님도 출연.


새벽 몸을 일으켜 퇴폐한 때를 민다.

부르흐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정경화의 아르키.


기도.

진부한 육신, 진부한 정신.

그리고 진부한 정욕 한웅큼.


17606 1995. 4. 22 (토)


미국 연방정부 건물에 차량 폭탄 테러.

수십명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

신문에 난 사진.

파괴된 9층짜리 건물, 흡사 영화의 세트처럼 극적인 파괴 모습이다.


일본에서는 요코하마의 지하철에선 또 독가스 테러.

오늘 조간에는 요코하마 쇼핑센터에 가스 테러.


테러는 이제 중동 어느 도시의 얘기가 아니다.

경제적 풍요를 자랑하는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일본의 안방도 안심할 곳은 못된다.

도둑 하나를 백명의 경찰이 잡기가 힘든 것.


나는 은밀하게 테러를 꿈꾼다.

곳곳에 얼마나 빈틈이 많은지.

도시란 노출된 사회.

은밀한 성행위까지 유명짜한 배우에 의해서 대중 환시리에 화면에서 실연되기도 하지만, 익명으로 숨어 버리기에 또 얼마나 쉬운 공간인가.

익명끼리의 공간.

호적초본이나 주민등록증에나 나타날 뿐이지, 마주치는 모두는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익명이다.

테러는 너무도 쉬울 것이다.


비가 내린다.

제법 많은 봄비.


꿈- 패티김, 손철수, 조낙영, 왕성규, 조그만 문화주택에 어린 俊이와 처제, 그리고 주임이 등장.


비는 그치고 안개 자욱한 토요일 새벽.

기도.


17607 1995. 4. 23 (일)


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 새' 완독.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섬세한 사랑, 알 듯 알 수 없는 관계들.

분명한 듯 아련한 캐릭터의 표정.

독특한 감수성의 작가.


토요일, 낮게 드리운 하늘. 퇴근하며 청학동 고개를 넘어도니, 아 ! 자욱한 안개.


'태백산백' 비디오 테이프 빌려 집에 들어선다.

장대한 조정래의 소설에 1/100 에도 못미치는 내용인데 씨나리오는 이것저것 많이도 주워 담으려고 하여 밋밋하기 그지없는 영화가 되어 버렸다.

평면적이어서 감동이 없다.

주마간산으로 소설의 겉모습반을 훑어 지나갈 뿐이다.

염상진의 이글거리는 이념의 열정도 없고, 염상구의 속물적 캐릭터의 폭력과 재미로움도 역부족.

또 김범우의 캐릭터는 무언가? 안성기가 연기한 그것도 영 마뜩치 아니하다.

임권택이라는 감독은 아무래도 다소 과대평가 받고 있는 것 같다.


한밤, 윗층의 12시 넘어까지 쿵쾅거림.

英의 늦은 귀가.

완벽한 C급 수면,


꿈- 어머니를 향한 뜨거운 질투의 심술이 있는 대학생의 나. 뜨거운 물이 담긴 세수대야, 씻으려하여도 옷이 벗겨지지 않는다. 장소는 보생의원인 듯 한데.


17608 1995. 4. 24 (월)


흐린 날씨, 일요일.

멀리 태종대로 향하는 도로에는 제법 자동차의 행렬이 붐빈다.


俊, 제법 시험공부에 여념이 없는 모습.

그런데 서울서 친구 지석이 내려왔다고 만나려 나가 일요일 공부는 방해를 받고.


英이, 교회도 빼먹은채 피아노 악보책 서너권 들고 집을 나선다.

선배 결혼식의 반주를 맡았다나.

그러고 보니 俊이 방에 있던 키 보드도 사라졌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 한밤중 돌아오는 英이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볼수 있었으면 하는 조바심.

대학 4학년, 이제 철부지 소녀는 아닌데, 그 아이의 세상을 도통 알수가 없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제 어미도 마찬가지.


일요일, 마루에 앉아서 소주를 마신다.

J는 미장원에서 머리에 수건을 둘러쓰고 집에 와 앉아서 함께 조지 포먼의 권투 타이틀 방어전을 본다.

마흔 일곱의 복서, 스물 일곱의 도전자.

늙은 챔피온은 겨우 방어에 성공.


꿈- 미우라 소각기, 김기창, 우이동 종점 산자락의 음식점들, 야쿠르트 아줌마, 가죽줄 시계 사은품..


새벽.

기도.


17609 1995. 4. 25 (화)


월요일의 회사.

P상무, 그 특유의 억지스런 몰아부침으로 현업의 관리자들을 볶아댄다.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춤을 추다가 문득 돌아보니 아무도 흥겨워하지 않자 왜 즐거워하지 않느냐고 악을 써대는 꼴이다.


이동도서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반납.

몇 년전의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수철 '어름의 도가니' 와 김영민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 빌린다.


직수굿이 앉아서 한가지 주제를 안고 천착하는 것.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산만해 지지는 않을 터인데, 힘이든다.

감성과 집중력의 방정식은?


어렵다, 옛날 영화를 보았던 그런 마음은 이제 꿈과 같은 아련한 망각 근처에 사라져 가는 감동.


이제 그 대상.

성서, 통신책, 꿈책, 일본어, 중국어...


시간이 있을때 한가지 대상을 정하여 파고들것.


꿈- 귀신이 나옴직한 폐가, 바닷속 헤엄치는 서너마리 고래의 그림자가 음산한 벽에 비췬다.


여호수아.

기도.


17610 1995. 4. 26 (수)


육체의 쇠잔인가, 정신의 질곡인가.

피로하다.

중식이후의 일과중 한때.

살인적인 조름이 덮친다.

극심한 피로감과 함께.


형에게서 전화.

피로감과 더불어, 김순철씨 송별회식과 주말 친구들 만나기로 하여 술을 삼가자고 마음 먹었으나 형인데 어쩌랴.


개고기집에 마주 앉는다.

늘 허영의 화장이 짙은 형.

허영의 가면을 쓰고 이런저런 얘기.

회사의 퇴사 압력, 직장을 떠난후의 빵집운영 운운하는 그 마음을 아무리 꾸며본들 내 모르랴.

회사를 그만 두어야할 나이.

아, 그렇구나. 이제 형도 쉰을 훌쩍 넘어섰고나.

우리는 이제 늙어 가는구나.


어머니의 경제적 도움을 기대하는 형이라면 나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형수가 경제적인 어린애라면 J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아, 그렇구나. 인생을 그렇게 시큰둥하게 여기는 동안 이제 우리는 노후에 이르렀구나.


나, 시큰둥하게 여긴적은 한번도 없건만.


17611 1995. 4. 27 (목)


사장과 Sh씨 중국 출장.

소프트웨어적인 창조능력이 결핍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돌다리를 두들겨 보는 것.

안전빵 제일주의.


화신과의 ST-95001 계약서작성 품의.

대준건설과의 기본계약작성 품의.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 다 읽다.

철학박사라는 김영민의 글쓰기는 매우 건방스럽다.

김용옥적 오만이 뚝뚝 흐르지만 영화에 대한 그의 시각은 옳다.

그리고 '서편제'에 대한 그의 비평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확실히 임권택은 과대포장되어 있는 영화작가이다.


김순철씨, 이제 중국으로 돌아간다.

관리부 직원과 그의 송별연.

나는 시종일관 맥주 몇잔으로 버틸려고 하였는데.

종장에는 흠뻑 취한다.

설계부 사람들 만나 어울려 노래방까지.

김순철씨와 어깨동무하고 부르는 선구자.


자본주의에 잔뜩 오염되었을 것 같지만 영리한 김순철씨는 취사선택을 할줄을 안다.

번쩍거리는 네온 따위에 적어도 쉽게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그는 결코 오염되지 아니 하였다.

그의 중국, 소박하고 장엄한 대륙.

나도 가고 싶다.


17612 1995. 4. 28 (금)


연 이틀의 과음으로 육체는 困憊하다.

정신에 종속된 육체라는 사실을 이제 전면 부인하려는가.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정신은 육체보다 상위계급, 당나귀를 부릴 수 있는 권세가 있다.


톨스토이도 말하였거니와.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자연력에 대한 통제뿐 아니라 자기육체도 통제 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라는 질그릇 속에 간직한 그 보배는 자신이 보배임을 자각하지 못하여 그저 갈수록 후패하는 질그릇에 갇혀서 함께 신음하는 이것을 어찌하랴.


신앙- 피조물의식, 질그릇 의식.

그러나 보배의식, 고귀의식, 권세의식.

겉사람과 속사람.


俊 시험 끝나다.


17613 1995. 4. 29 (토)


질그릇.

극심한 변비, 혹은 아주 심한 항문 협착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독수리 잡고자 기를 쓰는 화장실.

조금이라도 밀어 내려고 식은 땀을 흘린다.

그리고 나는 아랫배에 남아있는 그 잔변감을 도무지 참을줄 모르는 것이다.

청결예배, 세척강박과 같은 심리기제.


그러나 또한 하루에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화장실에서의 시간이란 내 독서의 시간.

이것으로서의 화장실은 내게 가치있다.

참으로.


야적장 10톤 크레인 설치 품의와 실행예산.

건설공사 2건의 도장공사 계약.


퇴근하여 유선방송에서의 영화 '폭풍의 언덕'을 우연히 보다.

줄리엣 비노시가 캐시 역을 맡은 영화.

히스크리프는 적역이나 비노시의 캐시역은 어울리지 않는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내게 늘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히스꽃 가득 핀 들판과 바람. 운명적 사랑의 격정, 악마적 심리.

모더니즘이란 무엇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무엇이랴.

문학이 주는 감동의 고전은 영원한 고전이다.


17614 1995. 4. 30 (일)


토요일.

저녁 8시, 남포동의 호정횟집.

상곤,낙영,황근 만나 대취.


상곤이의 흑백사진 작업실.

포트레이트에 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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