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76 1995. 7. 1 (토)
어이없이 순식간에 무너진 건물더미.
근 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다처서 구출되었고, 백여명이 시체로 발견되었으나 얼마나 더 그 더미 속에 묻혀있는지 모른다.
SB-405 인도네시아 해군의 무장 TUGBOAT 'SOPUTAN'.
TRAINING SEA TRIAL.
70여명의 인도네시아 군인들.
양복을 입고 있었을때에는 어딘가 남방인다운 촌티가 흐르더니,산뜻한 해군복의 그들은 씩씩한 멋이 넘친다.
70여명의 인도네시아사람들, 조선소 12명, 메이커 7명등을 싣고 군인들에게 SYSTEM을 익혀 주기위한 교육적 시운전 떠나다.
시운전중 TOWING TEST를 하다가 WIRE가 튕겨지는 사고 발생, 1명 중상, 설계부 2명이 부상을 입고 회사 예인선으로 긴급 후송되어 대기하고 있던 앰블런스로 병원으로.
또 저녁에는 영도 해양에 해난사고, 8000톤급 컨테이너선이 충돌로 침몰하였다. 컨테이너 수십개가 해상을 떠다닌다.
항만통제소, 부산항 내항의 출입항 전면 통제.
TUG BOAT 귀환에도 애를 먹어서 10시 넘어 귀환하다.
사고,사고.
곳곳에 널려있어 무슨 기미만 있으면 터지려고 하는 복병들.
英이 떠난지 4일째.
목욕.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정경화의 아르키.
주님.
끼치소서, 주님의 것인 그 평형감각을.
17677 1995. 7. 2 (일)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건물 잔해 더미에 갇혔던 사람들, 그 구조현장을 TV 방송 3사는 무슨 스포츠 중계하듯이 흥분한 어조로 생중계를 해댄다.
진행자의 목소리는 긴박함 가득하여 숨가쁘게 외쳐대고 있는데 정작 구조는 쉽지가 않다.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에 모두 넋을 놓고 있다.
일요일 새벽.
英이 없는 英이 방에서 J는 잠들어 있고.
나는 안방 앉은뱅이 책상을 펴 그 앞에 앉아서 불끄고 어둠 속에 잠긴다.
정신을 깊이 침잠시켜 기도를 드린다.
주소서, 주님.
평형, 긍정, 의지..
그리하여 사랑, 기쁨..
17678 1995. 7. 3 (월)
이른 아침, 장마의 첫비가 내리는 길을 걸어서, 俊이와 함께 중리까지 가서 70번 버스를 탄다.
처음 가보는 대청공원, 자욱한 운무 속에 초여름의 신록은 촉촉이 젖어들고 잔디 밭에 조각품들은 안개 속에 애련하다.
그곳의 시립도서관.
일요일 도서관이라는 곳에 들어앉아 있을까하여 俊이를 꼬드겨 찾아 간 것인데 도서관 실내의 분위기는 학습의 분위기가 아니다.
중고등학생들의 왁자함.
쌍쌍이 끼리끼리 너덧명씩 몰려온 그 애들은 과연 공부를 하려고 온 아이들인지.
그곳에서의 공부를 포기하고 俊이와 다시 버스를 타고 영도로 돌아온다.
그러나 안개 속에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호젓하게 누워 있는 대청공원은 여간 좋았던 것이 아니다.
베란다 내 방에 갇혀 제법 매진하다.
국토이용관리법을 일단 마스터한 시각은 거의 다섯시.
그리고 그 뿌듯함으로 TV를 보면서 한병의 소주를 마신다.
4박5일의 산행을 마치고 英이는 씩씩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넘치는 정력, 돌아오자 마자 다시 학교로 달려간다.
새벽 2시 일어나다.
도시계획법의 진도를 나아간다.
공인중개사, 만만한 시험이 아니다.
17679 1995. 7. 4 (화)
사무실에서의 공부시간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 보아도 마련할수 없다.
짬이 나더라도 공부할수 있는 평정한 마음을 갖기는 도무지 지난하다.
어제 이동도서관 오는 시각, 깜빡 잊어 버려 읽을 책을 확보치 못하였다.
화장실 읽을거리는 집에 있던 문고본, 에밀 루드비히가 쓴 '나폴레온 전기'.
조그만 체구의 자만 가득한 사나이, 프랑스 변경의 코르시카 촌놈.
영웅이란 시대가 만드는 것이지, 스스로 될 수 있는게 아니다.
꿈- 영도 산동네의 좁디좁은 구절양장의 골목길. 카바레에서 치르는 이진구반장의 딸네미 결혼식.
구절양장의 그 골목길은 무언가 상징성이 있음직한데.
소화기 계통의 무엇일 것.
17680 1995. 7. 5 (수)
시계가 0.2 MILE도 되지 않는 짙은 농무.
P상무의 밀어붙이기는 이런 날 예비시운전을 강행한다.
누구라 말릴수 있을까, 그 고집을.
범주해운의 SB-415 컨테이너선은 안개를 헤쳐가며 출항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들자 안개는 더욱 심하여지고, 시운전 나간 선박은 외항에서 꼼짝 못하고 묶이고 만다.
항만관제실에서 입출항을 전면 통제해 버린 것이다.
결국 늦은 시각에 TUG BOAT 두척이 길잡이가 되어 장님 길 더듬듯 바닷길을 더듬으며 귀환하였다.
DOCK MASTER 박성근차장이 사람이 좋아 그렇지, 곤욕을 치룬 입장에서 거센 어필이 있음직도 한데 잠자코 있는다.
英이, 스물을 훌쩍 넘긴 대학 4학년짜리.
밤중에 제 어미와 주고받는 피차 신경질 가득한 대화를 듣고 있을라치면 속에서 뜨겁고 아픈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걸 꿀꺽 삼키다.
한마디 한마디 딸에게 던지는 어미짜리의 어투도 거칠지만, 그를 되받아 치는 딸년짜리는 한술 더 뜬 억센 반발의 가시가 있다.
무슨 피해의식을 자극하는 사안도 아니데 이기적 감정의 가시들이 모녀간에 고슴도치처럼 방어의 창을 곤두 세우는 것이다.
자식의 교육이란 나같은 놈에게는 지난하기 짝이 없는 노릇인가.
실패한 자식 교육인가.
무엇을 꿈꾸는가. 중 늙은이 실패자여.
17681 1995. 7. 6 (목)
연일 안개는 걷힐줄을 모른다.
축축한 장마철에.
SB-415의 공시운전을 순연하고 나니 오히려 안개는 엷어지기 시작.
이런 날 다소의 여유를 찾아 사무실에서의 공부를 시도해 보지만 역시 실패.
수시로 울리는 전화, 방문객, 불시에 떨어지는 ORDER..
시간이야 만들면 되겠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칼을 뽑았으면 한번 멋지게 내려쳐야 할 것인데, 일요일 하루의 학습 가지고는 어림없다.
게다가 퇴화하여 무딘 기억력, 이 무기를 갖고서는.
俊이, 카투사 공부는 좀 하고 있는겐지.
英이, 졸업후의 무슨 취업이라도 준비하는게 있는겐지.
아이들에게 어떤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서라도 나이 먹은 아비의 무언가를 뵈 주어야 한다.
오늘 SB-415 공시운전 예정인데, 여전히 자욱한 안개.
17682 1995. 7. 7 (금)
SB-415 안개 속에서 무사히 공시운전 마치다.
상태도 비교적 양호한 편이고.
문밖에서 기웃거리다가 삐이걱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불청객, 감기다.
아직 본격적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지만 목구멍에는 기침이 고드름처럼 매달려있고, 머리는 이상한 지끈거림을 동반한다.
얼른 약방에 달려가 약을 지어 먹는다.
검찰청에서 불시 안전 점검.
여전한 관료주의, 문민정부라니 당치도 않다.
삼풍이 저지경이 되니까, 엉뚱한데에 이와 같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 따위 지엽적인 적발, 적발을 위한 적발, 그리고 거기에 갖다 먹이는 벌금 따위가 과연 안전을 예방하는데 무슨 일조를 할까.
관료주의적 발상과 타성 하나 고치지 못하는데, 무슨 개혁?
새벽.
감기는 이제 안방으로 들어서려 한다.
어제 약방에서 지은 조제약은 직무를 유기하였다.
17683 1995. 7. 8 (토)
퇴근하며 KJ도 , 김철수, 현영민, 김우찬등과 어울려 마시다.
가득 잠긴 감기를 쫓아낼 양으로.
간밤 俊이 녀석 외박,
걱정이 되었지만 사내녀석은 가끔 외박도 필요하다.
친구 놈들과 뒹굴며 나누는 끝도 없는 얘기들, 술들을 마시고...
겨우 일어나 허겁지겁 출근전의 신변잡사 처리하고 급히 몇 술 입 속에 집어넣고 허둥지둥 통근버스를 탄다.
17684 1995. 7. 9 (일)
토요일, 이제 목소리가 갈라졌다.
俊이는 낮에 돌아와 곯아 떨어져 있고 나 역시 이른 잠자리.
모처럼 실컷 잠을 잤다.
삼풍백화점, 지하의 어둠 속에 갇힌지 열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스물한살짜리 청년이 구조되었다.
그 어둡고 좁은 공간에 갇힌지 열하루라니.
건강하여 의식도 또렷하고, 인터뷰에 응하는 말도 여유가 넘친다.
아, 젊음은 저토록 찬란한 것이다.
아프리카의 검은 거인, 넬슨 만델라.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어머니보다 더욱 나이 먹은 그에게도 찬란함이 어리어 있다.
일요일.
시간이 이토록 넘치는데도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것은 감기 몸살 탓 뿐이 아니다.
17685 1995. 7. 10 (월)
몽롱한 몸살끼에, 늘 시간 시간하고 염불하던 핑계도 무색하게 단 한줄 학습도 이루지 못하였다.
고작 핑계컨데.
묵지근한 두통, 기침과 목구멍의 동통.
거창하게 폼만 잡던 의지의 호령은 종이 호랑이.
그러나 한낮, 문득 창 밖을 바라보면.
말할수없이 부드러운 색감의 연두빛 하늘, 아기의 볼처럼 말랑말랑할 것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는 하늘 자락, 천연스레 누워있는 푸르른 바다.
아, 자연은 저토록 처연하게 아름답다.
아직도 삼풍의 지하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갇혀있을 것이다.
꿈- 지하에 갇힌 상황이 데포르마숑된 그림들, 그리고 기차, 어머니, 시골집, 나를 따르는 가엾은 소년하나, 군대, 명절, 초상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내용은 바라이어티하지만 전체적인 톤은 애틋한 느낌으로 통일되었다.
목욕.
주님의 그것을 다시 훔치자.
17686 1995. 7. 11 (화)
감기 몸살약.
자주 겪으면서도 깜빡하고 만다.
조제된 약 중 어떤 알약의 약리작용은 내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
무어라 표현할수 있을까.
허리쯤을 향하여 어디 먼데서 달려와 감싸 조이는듯한 느낌, 은박지를 저며서 머릿속 이곳 저곳을 쑤셔 박는듯한 그 불투명한 고통.
그렇게 하루를 견딘다.
대동조선은 임금협상과 단체협상 타결국면.
회사는 대동의 타결 수준을 컨닝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꿈- 전쟁전야의 회사 옛 생산부 탈의실, 누군가 파편이 튈 정도로 세차게 종을 치는데.
그 분의 중심, 그 편린을 훔처라.
17687 1995. 7. 12 (수)
최명석이라는 청년이 11일만에 재생하더니, 어제는 열여덟짜리 이쁘장한 여자아이가 13일만에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였다.
어여쁘고 어여쁜 젊은아이들,
얼마나 대견하고 이쁘냐.
얘들의 살아냄은 얼마나 가슴을 치는 예술이냐.
껍데기는 가라.
세상을 이 어여쁜 젊음들로만 가득 채우게 하라.
17689 1995. 7. 14 (금)
내가 올린 지출품의에 대한 사장의 결재거부.
그 정보를 입수한 나는 재빠르게 부전지를 작성하여 다시 비서실에 결재를 들이 민다.
결재는 떨어지다.
나를 비롯한 생산부, 설계부의 많은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엔지니어인가?
엔지니어- 때로 웃기는 단어.
Y부장과 CM흠 만나 마시다.
예전의 성실함,정직함,진지함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저자거리의 교활함만 가득하여 너무나 속물스러워 진 CM흠 .
나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엉너리를 붙지만 나는 그 엉너리를 간파하고 마는데.
김대중, 늙은 너구리.
또 나선다.
지겹디 지겨운 김씨 무리들.
17691 1995. 7. 16 (일)
토요일 오후, 퇴근하는 통근버스 안에서 SJ엽 의 유혹에 넘어가 김한호등과 어울려 맥주를 마신다.
술자리의 대화는 삼풍, 건설공사를 넘나들다가, 회사의 누구 방으로 처들어가 몇사람을 도마에 올려 놓고 씹어댄다.
이윽고는 맥주에 함빡 취한다.
삼풍의 현장.
스물도 안된 여자가 또 생환한다.
17일만의 부활.
우리나라 최장 기록이고 세계 두 번째 기록이라고.
아, 살아난다. 살아난다.
사회가, 제도가, 조직이, 재난이 죽여도.
엉터리들이 죽여도.
살아나는 생명은 있다.
찬란한 하나님의 손길.
일요일.
끼치소서 주 나의 하나님.
17692 1995. 7. 17 (월)
일요일.
공부는 단 한줄도 이루지 못하였다.
아예 책을 펴 볼 마음이 솟아나올 구멍이 콱 막혀있는 상태의 하루.
왼종일 TV 앞에서 눈알이 아프도록 아무 깊이도 없는 오락 프로에 흡사 최면이라도 걸린양 앉아있을 뿐이다.
英이 고등학교 때 의 친한 친구들 찾아오다.
원주, 숙희.
모두 어엿한 숙녀들이 되어서.
俊이에게 과 친구라는 여자아이로부터 전화.
아들놈의 여자친구...
흐뭇하다.
혼미한 꿈-
연휴의 끝날, 제헌절.
장마는 소강상태.
선선한 날씨.
17693 1995. 7. 18 (화)
휴일의 하루.
오전에는 英이와 P/C앞에 읹아서 지뢰찾기 게임에 열중하고 오후에는 TV 앞에 앉아서 시간을 죽인다.
무슨 급박한 쫒김이 없어서인가.
심리적인 나태함은 끝간 데를 모르는구나.
이 미묘한 심리구조를 속속들이 파악하여 조정할수만 있다면 인간은 굉장한 무기를 갖게 될터인데.
그예 술을 마신다.
俊이는 외출하고, 英이와 마루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
17694 1995. 7. 19 (수)
연휴 뒤의 출근.
으레 분위기는 어딘가 어수선하다.
P상무의 설처대는 날개 짓의 바운더리는 더욱 커지게 마련이고 그 내면에는 이틀 동안 놀았으니까하는 묵시의 보상심리가 있을 것이다.
구제할수 없는 일벌레.
형에게서 전화, 복날인데 보신탕 먹자고.
퇴근하여 봉래시장통의 골목집, 성시를 이룬 멍멍이탕 집에서 소주 두병을 마신다.
그리고 형제는 어머니께.
한계는 여기에도 있는 것.
어머니에게, 형에게, 그리고 나자신에게.
나는 뛰어난가.
우수한 감성을 갖고 있는가.
빼어난 느낌을 자랑하는가.
아, 드디어는 스스로의 한계가 스스로를 절망케 하며...
드디어는 그 분께 매달리고자 하는 보잘 것 없는 인간...
동은이 29일날 결혼한다고.
17695 1995. 7. 20 (목)
임금협상과 단체협상.
임금 사정표를 다 만들어 놓고 확정 통보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노사 합의된 사항들은 조합원 전체 투표에서 부결되고 만다.
그런데 그 내용중 내게 반가운 항목 하나 있으니 대학등록금 50% 지원이라는 항목.
연일의 음주로 아랫배는 더부룩하고, 그것이 통과하는 뒷꽁무니는 찢어질 듯 아프다.
육신은 해면처럼 가득 피곤을 머금고 있다.
형이 걱정하는 彦이의 어떤 면.
게으르고 허황되고 유치하고 친구도 없고 비대하고.
아비는 자식이 모두가 못마땅 하다는 동물인가 보다.
내가 보기에는 착하고 멀쩡하기만한 彦이구마는.
꿈- 궤도차에 실려 고공을 질주한다, 높은 곳, 그곳에 내가 있다는 것, 명절 전일의 회사, 회사사람들, 분위기...
높은 곳과 명절전야의 특정장소의 분위기, 무언가 상징체계가 있을법하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가늠해 볼수가 없다.
기도.
17696 1995. 7. 21 (금)
장마철인데 반짝 날이 든다.
제법 매서운 더위.
SB-417 천경해운 컨테이너선 진수.
오후 2시30분 무사히 미끄러져 내려 간다.
ST-95003 해운대 신시가지 강교의 CAMBER 오작.
설치까지 완공된 상태인데, 도로 철거하여 재제작해야 할 판이다.
금성하우스의 안준용은 완강하게 재제작의 공짜 공사를 당연히 거부하고, 죽어나는건 미상불 P상무.
1억도 안되는 공사이지만 사장은 회사의 추가 지출을 용납지 못하고, 그 불똥은 계약관리의 입장에 있는 내게도 튄다.
머리카락 자르다.
俊이 어제 彦이 만나 늦은 시각 귀가.
한밤중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2시.
그 시간에 녀석은 똥을 누고 목욕을 하고..
옅은 수면의 망막 위로 몇 번이나 소스라쳐 번쩍이는 번개의 불빛.
곧이어 하늘에서 포효소리가 들린다. 천둥소리.
그리고 쏴- 거센 빗소리.
빗소리 속에 울리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더욱 감미롭다.
주님의 것, 그 평형감각을 훔치자.
17697 1995. 7. 22 (토)
한진중공업에서의 안전교육.
3일 동안이나 받아야 하는데, 업무를 떠나 있으니 후련하기는 한데, 그 업무라는 것이 걱정되지 않을리는 없다.
노사간 최종 사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기휴가 1일 추가 건이 장애인 모양.
기계사업부의 박봉관대리, 안전공단에 가서 3대의 설치할 크레인 설계검사 합격증 받아오다.
용역을 주지 않고 박봉관, CT용 등이 뛰어 다니며 자체적으로 해결하여 천만원이상이 굳은 것이다.
합격증은 생색을 내기 위하여 당분간 고이 내 서랍에 보관해 놓는다.
공인중개사 시험공부, 7월 들어서는 첫째 일요일 한 5시간 공부한 것 외에 전혀 책을 들춰 보지 못하였다.
초조하다.
며칠째 회색수면.
여릅철에는 더욱 숙면이 어렵다.
3시 30분 기상,
책상 앞 앉아서 부동산학 개론을 좀 들춰본다.
그리고 소리내어 고린도후서를 읽는다.
후패한 옛사람,
아, 새사람을 입자.
17698 1995. 7. 23 (일)
안전교육은 다른 사람에게 대리 출석 확인을 맡겨놓고, 사무실 돌아와 기능직 사원들의 임금사정표 작성, 2시 경에는 현업부서에 배포할 수가 있었다.
컴퓨터의 효율은 이토록 놀라웁다.
퇴근하여 시내 나간다.
젊은 여자애들의 노출된 미끈한 팔다리는 눈을 즐겁게 한다.
허벅지까지 드러낸 미끈한 다리와 허이연 어깨 쭉지.
어떤 젊은 녀석은 귀를 뚫어서 귀고리까지 하였다.
거리 거리마다 넘치는 유행과 상품과, 돈의 물결.
俊이 안경을 맞춘다.
금속테와 뿔테의 두가지.
돌아와 건내 주니 좋아하는 녀석.
그리고 좋아하는 아들을 보는 아비의 즐거움.
맥주에 취하여
모처럼 숙면 이룬다.
태풍 북상중.
그 전초병인 바람이 천지를 휘젓는 일요일 아침.
오늘은 공부를 좀 하여야 할 텐데, 그러나 회사에도 나가 보아야 한다.
17699 1995. 7. 24 (월)
일요일 오전 사무실을 지킨다.
태풍대기, 이런 날 집에 있어봤자 마음이 편할 리없는 관리자들은 어김없이 나와 사무실을 지킨다.
태풍 '페이'의 상륙은 저녁 7시쯤이라고 하여 나는 오후들어서자 슬며시 사무실을 빠져 나와 버린다.
잠결에 들리는 바람의 아우성 소리.
태풍은 상륙하였다.
월요일 깨어난 아침.
바람은 잦아 들었으나 잔득 찌푸린 하늘.
TV를 켠다.
강타 당한 한반도.
수십명 사망 실종, 수십척의 선박 침몰.
태풍은 간 밤에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간 것이다.
17700 1995. 7. 25 (화)
노사협상 후에는 타성적으로 터져 나오는 윗대가리들의 조르기.
긴축, 절약, 생산성...
나의 업무 역시 어수선하다.
저녁나절 한진중공업 안전교육 마지막 시간에 얼굴만 내밀고 수료증 받아온다.
노동부 근로감독관이라는 사내의 강의, 빠른 사투리의 달변이지만 그 인상하며 관료주의적 독선이 뚝뚝 흘러 역겹다.
KR 마산지부장 김형곤씨 몇천만원인가 뇌물받고 엉터리 선박검사하여 구속되었다는 소식.
예전 검사과장 시절 억세게도 나를 괴롭혔던 인물, 그 때도 그는 부정한 검사관이었다.
꿈- 학점을 못따서 졸업이 난망한 英이를 아비인 나는 욕설을 퍼부으며 때린다. 英인 마냥 반항적인 포즈, 그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J.
새로운 내용의 꿈이다.
17701 1995. 7. 26 (수)
오전에 기능직 사원들의 임금 사정을 마치다.
오후, 해운대강교 오작 건에 대한 보고서 작성.
그것으로 P상무와 거세게 부딪치다.
전 벌리고 풍물 잡히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은 온통 자신이면서, 계약 당사자라는 명목으로 내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야비함.
결과가 득이면 자기 공이고 결과가 실이면 부하의 잘못?
우습지도 않다.
자기를 딴에는 열심히 보좌하고 있건만 되돌아 오는 것이라곤 고작 이 따위 수작이라니.
환멸, 회사에 대한 환멸이 먹구름처럼 피어 오른다.
하자, 좀 더 매진하여 공인중개사라는 라이센스라도 따서 어떵거든 이 환멸의 늪에서 벗어나자.
17702 1995. 7. 27 (목)
P상무의 유화적인 제스추어.
어찌하랴.
보고서 다시 만들고 금성하우스에 보낼 공문을 기안하고.
단세포적인 사장의 사고방식과 노망끼있는 Sh씨 의 어떤 감정이 보태진다면 최석교에게 변상이 떨어질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책임을 물어 회사를 그만두게 하거나.
직원의 실수를 조금도 용납치 않는 회사, 아량이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무슨 동기 부여가 있겠는가.
그저 안전 제일주의, 몸조심, 눈치보기만...
일 안하고 그늘에 숨어서 나서지 않는 사람만이 근무하기에는 딱 좋은 회사.
매섭게 덥다.
춘천은 36도에 육박한다고.
고등학교 동창회의 행사, 끈질긴 공세에 나도 거금 10만원을 찬조하고 만다.
17703 1995. 7. 28 (금)
여름은 맹렬하게 타오른다.
불현듯 이상의 한마디 절귀가 떠오른다.
"스무세살이오 삼월이오 객혈이다."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
폐병의 젊음이 맞이하는 봄.
그런데 왜 갑자기 이상의 이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을까?
왜?
왜?
분방한 의식의 흐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어떤 감정모체의 속삭임..
콧수염의 천재, 그의 절귀가 절실하게 떠오르는 까닭은?
17704 1995. 7. 29 (토)
매년 여름이면 되뇌이는 말, 여름의 오르가즘.
아니, 계절의 오르가즘.
진부한 표현이다.
무르익는다, 여름.
이 또한 진부하다.
달구어져 팽창하는 무의식, 그리하여 땀흘리며 신음하는 심층심리.
순식간에 읽어치우는 스튜어디스의 세계를 그린 수기 한권.
어떤 전문 직업의 세계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특색이 있기 마련이다.
스튜어디스라는 전문 직업인, 하늘을 누비며 세계를 내 집처럼 드나드는 그들.
英이를 생각한다.
전문 직업인.
俊이와 彦이 단둘이서 지리산 종주를 위하여 떠난다.
오늘 9시.
彦이의 비대한 몸이 다소 걱정스럽지만 俊이는 이미 지리산의 경험을 갖고 있으나까 사촌형제는 잘 해 낼 것이다.
대견한 녀석들.
오늘 동은이 결혼식.
오후 2시, 가야 성안교회.
갈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17705 1995. 7. 30 (일)
동은이 결혼식.
나는 참석치 못하고 J와 英이 참석하다.
서울서 작은 어머니도 내려 오시고, 상명이 서껀 제 이복누이들도 내려오고 막내 삼촌도 내려 오셔서 제법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고.
잘 살거라, 동은아.
가야숙모, 자식을 짝지우는데 어찌 감회가 남다르지 않겠는가.
잘 살거라 동은아.
俊이 떠난지 하루가 지났는데 전화가 없다.
이미 지리산 그 넓은 품에 들어가 있을테니 산중 어디에서 전화하랴.
토요일 오후, 돌아와 마루에 퍼질러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하리 베라폰데.
카리브해, 흑인, 낙천주의가 넘실대는 햇빛과 파도.
그리고 그가 부르는 아일랜드의 민요도 너무 포근하다.
일요일.
여름, 무르무르 무르 익다.
기도.
주님의 평형감각을 훔처라.
17706 1995. 7. 31 (월)
俊이 떠난지 3일째.
두 녀석 잘 해내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곧장 내려쬐는 베란다 내 방의 볕살을 피하여 俊이 방 책상 앞에 앉는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부동산학 개론 학습.
후딱후딱 진도가 나가서 하루에 독파할 것 같았는데 어림없다.
부동산학 각론, 감정평가이론등을 남겨 두었으니 1/3 정도의 진도를 나간 것이다.
제법 공부하고 난후 사뭇 만족, 포상이 없을소냐.
마루에 앉아서 소주를 마신다.
오늘 내일만 출근하면 어쨌든 휴가다.
휴가기간, 공부하리라.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