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6. 1

카지모도 2016. 6. 25.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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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0  1996. 1. 1 (월)


새해 밝았다.

쥐 해, 丙子年.


英이는 경주행.

J와 俊이는 어머니께.


새해는.

밝았다.


17861  1996. 1. 2 (화)


뒷꽁무니의 찢어질듯한 통증.

혈흔은 비치지 않아 안심은 되지만 똥눌때는 칼로 도려내는 듯이 쓰리다.

배변후에도 오랜시간 그 부위를 우릿하게 통증이 지배한다.


새해 첫날인데 육체의 질척거림이 이토록 피폐하다.

며칠째 연달아 마신 술 탓이다.


정신의 질척거림 역시 마찬가지.

시선은 어김없이 TV화면에 고착되어 있다.

게으름은 혼돈의 정신.


나를 일으켜 세워 자존을 획득케 하실 그 분은 하나님 뿐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나를 붙들고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내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어두운 세력.


기도할 일이다.

능력주시는 그 분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결코 보상이 아닌 내게 주시는 은혜.

밝은 빛, 성령.

그저 기도할 일이다.


꿈- 덩치가 커다란 누군가 대학선배, 바이올린, 바다, 형무소, 대마초가루.


새벽, 화장실에서 읽는 '기적을 외면치 마라'


17862  1996. 1. 3 (수)


연휴의 마지막 날.

홀로 걷는 태종대.

순환도로 윗길의 호젓함.

끼끗한 적요에 감싸인 숲길.

겨울나무들은 그렇게들 의연하게 서있고.


어제의 태종대공원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런 적요와 고즈넉한 한가함이 넘실대고 있었다.

휴일 오후의 겨울 양광이 따순 볕살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곳.

강박이 없는 곳, 나를 다구치지 않는 풍경화.

태종대 입구 쪽은 차들과 사람들이 붐비는데 비하여 어제의 순환도로 윗길은 너무나도 고즈넉하였다.


돌아오는 길, 하리 방파제에서 삶은 게 세 마리 사들고 돌아온다.

어쩔 수 없는 소주를 마신다. 도피의.

도피의 소주, 그렇다. 도피다.

자의식과 강박의 무엇에, 혹은 소외감같은 무엇으로 부터의 필사적인 도피이다.

결코 맛이 있어서 마시는 술은 아니다.


꿈- 뉴질랜드 이민, 삶의 가치 가득한 J와 나. 전날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만들어 낸 내용.


나는 매우 이 곳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17863  1996. 1. 4 (목)


겨울바람 몹씨 불어댄다.

새해 첫출근.

긴장도 잠시, 곧 타성의 분위기에 젖어든다.


좌약을 넣은 뒷꽁무니도 많이 호전, 아랫배의 상태도 꽤 좋아졌다.

아침마다 파이프에 아랫배를 얹어 체중을 싣는 운동이 효과가 있는겐지.


일찍 퇴근하여 돌아오다.

英이, 중학생 영어 아르바이트.

기특하구나.


꿈- 나는 예쁜 서양여자, 보생의원 아랫방, 어머니 서울 다녀오시고, 媛이는 여성 발모제의 효과를 보았다고...

나의 아니무스?


17864  1996. 1. 5 (금)


유진 이오네스크 '의자들'

할멈과 영감, 그리고 실제로는 출연치 않지만 상상으로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의자들은 점점 늘어나 무대를 채운다.

할멈과 영감 둘이서 어처구니없는 대사를 구사하면서 연기들을 하다가 돌연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종장에 등장한 변사는 외마디 소리를 질러대는 벙어리다.

무얼까. 이 퍼포먼스의 은유는.


여전히 진부하기 짝이 없는 경영주의 신년사, 그리고 신년 하례라는걸 치룬다.

그런데 나누는 덕담들은 제법 그럴싸하다.


17865  1996. 1. 6 (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소설 '고욤나무'등 읽다.

사뭇 다른 경향의 작품들.

민중적인 이슈는 사라지고 내면으로, 지극히 사적인 정서로의 침잠이 엿보이는 경향.


노동조합에서 파는 압력밥솥 하나를 산다.


꿈- 일본의 스모선수들, 나는 검사인데 심문받던 여자가 내 성기를 만진다.


17866  1996. 1. 7 (일)


토요일 저녁 8시, J 와 동반하여 서면으로.

S곤, N영, H근 등을 부부동반으로 만나다.

여덟쌍의 부부들, 어울려 회를 먹고.

단란주점의 일실을 빌린다.

노래를 부르고 몸을 덩실거리면서 우정을 과대포장한다.

과대 포장하였을지라도 이런 덩실거림은 즐겁다.


J와 택시 타고 돌아온 시각은 이미 2시가 넘었지만, 베란다 내방에 앉아서 또 몇병의 맥주로서 마감하는 술꾼.


17867  1996. 1. 8 (월)


일요일 10시 넘어 기상하여 J와 태종대를 걷는다.

하늘은 흐리지만 날씨는 온화하다.

아스팔트 순환도로를 벗어난 숲 속의 오솔길.

잘생긴 나무들이 바랜 피부를 드러내고 나무들의 땅에는 메마른 낙엽들이 가득 쌓여있다.


태종대 입구를 나선 때는 이미 1시가 넘었다.

조반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픈 가시버시는 입구의 전주식당으로.

낚지볶음, 나는 그예 소주를 마신다.


월요일- 역시 뒷꽁무니의 사정은 좋지 아니하다.

연일의 술마심.


17869  1996. 1. 10 (수)


부서장회의, 총무부장의 설처댐이 눈에 띄게 줄었고 Sh씨의 포악도 소강상태.

다섯건의 지출 품의도 순조롭게 결재된다.

무언가 다른 조짐이 있는 걸까?


프랑스의 전 대통령 미테랑 죽어 프랑스 국민은 애도헤 잠긴다.

폴란드의 전 대통령 바웬사는 옛 직장인 조선소의 전기기술자로 복귀한다고.

거인의 풍모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란 작자들과는 너무나 판이하다.


새벽.

사도행전 읽다가 뭉클 솟는 감동의 물결.

성경의 그 구절을 읽을때 잠시 성령께서 내게 임재하셨던가.


17870  1996. 1. 11 (목)


퇴근길에 회사 이웃에 어제 오픈한 대형할인매장 TOP STORE에 들러본다.

구색구색 갖춰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품들.

싼 가격으로 고객을 유혹한다.

소비는 미덕, 소비하라 소비하라....


TV 문학프로에 출연한 김승옥.

이제 오십이 성큼 넘어선 모습

예전에 그의 언어는 에스쁘리 가득하여 나를 얼마나 빠져들게 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김승옥은 이제 중늙은이의 추레한 모습으로 나와서 듣기 싫은 어투의 전라도 사투리로 '서울 1964년 겨울'을 얘기한다.


작금의 그 모습은 추레할지라도 '서울 1964년 겨울'의 언어들은 작금의 젊은이들에게도 충분히 신선할 것이다.

김승옥의 언어는 적어도 한세기는 관통할 것이다.

李箱의 언어가 지금도 유효하듯이.


그리고 김승옥은 이제 하나님께 사로잡힌 신앙인이 되었고 신앙은 그에게서 에스쁘리를 앗아갔는지도 모른다.


17871  1996. 1. 12 (금)


관념화하여 정형화된 시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습성.

이것이 늙었다는 것이다.

그 대상에서 이미 오의는 사라지고 없다.

고정관념의 프리즘을 통하여 인식되는 대상에 깊이가 있을리 없다.

깊이가 없게 인식되는 대상이니까 흥미와 호기심이 일어날 이유도 없으며, 당연히 그 대상이 아름다울리도 없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메말라가는 것은 피부나 뼈다귀나 육체의 기능 뿐이 아니다.

정서, 감수성, 호기심, 열정등 그런 가치들이 싸구려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정신적인 메마름이 알지 못할 매카니즘에 의해서 육체적인 피폐함을 더욱 촉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아니하다.

아, 하나님을 깨달아야 하는 또 하나의 당위성이 여기에도 있다.

아름답지 않은 늙음이므로.


주님.

경건을 회복하게 하소서.


17872  1996. 1. 13 (토)


너 자신을 알라.

그러나 인간이 어찌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파악할수 있으랴.


그런데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 속에는 이런 뜻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하나의 대상으로서 파악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이를 먹어서야 인식할수 있는 객관적인 자신의 본질.


어린 시절의 혼돈스런 인식과정에서는 EGO가 만들어 놓은 지나치게 왜곡된 어떤 인식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청년시절 또한 스스로에 대한 과장된 환상은 그를 지나치게 혈기방강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윽고는 자신의 에고와 환상이 점점 스러지는 연륜이 왔을때 그가 마주하는 스스로는 다만'하나의 생명'에 지나지 않게 인식된다.


하나의 생명.

이 하나의 생명이 됨으로 비로소 마주치는 진정한 생명이 바로 하나님.

그리하여 인생이란 결국 창조주께 이르는 도정....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의 생명'이라는 인식은 '하나의 벌레'와 마찬가지로 그냥 끝없는 허무 그 자체일 뿐이다.


俊이 데리고 1박2일 정도의 산행을 마음 먹었는데 녀석은 간밤 새벽 4시에 잠자리 들었다.

다음 토요일로 순연할수 밖에.


17873  1996. 1. 14 (일)


토요일 퇴근하면서 최대리 끌고 다니며 할인마트에서 비디오 사다, 금성제 최신 제품.

그리고 안방에 설치할 중고 TV를 한대 사다.

안방마님 J를 위하여.

최대리의 차에 싣고 집에 와서 전기기술자인 그가 이것저것 설치하여 준다.

집안의 고장난 전등들도 손보아주고.

고맙네.


토요일 저녁, J는 俊이 국민학교 동창들 어머니 모임.

목장원.

J, 俊이와 함께 참석하여 늦게 돌아오다.


17874  1996. 1. 15 (월)


촉촉하게 비 내리는 일요일.

겨울 가뭄이라 미상불 반가운 비다.


英이 빌려온 비디오 '레옹'

킬러와 소녀.

연기도 좋고 캐릭터의 설정도 좋아서 재미는 그럴듯하지만 과장과 작위 가득한 영화.


俊이는 제 방에 문 걸어 잠그고 틀어 박히면 완벽한 단절이다.

때때로 기타줄 튕기는 소리, 괴성등이 문 밖으로 새나온다.

그것으로 무언가 하고는 있구나 짐작할뿐.

그러던 俊이는 오후 친구 생일이라고 외출하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월요일 새벽.

조금전 전화왔는데 학교에서 자고 지금 학교에 있다고.


17875  1996. 1. 16 (화)


여하튼 엉뚱한 녀석.

俊이 느닷없이 오늘 새벽 여행을 떠나겠다고.

彦이와 동해안을 돌 예정이란다.

그저 훌쩍 떠나보는것도 나쁘지 아니하리라.

줄곧 심란한 아드님께서는.


저녁, 英이가 빌려온 '쑈생크 탈출' 英이와 감상.

스테판 킹 원작, 팀 로빈슨 주연.

탈옥영화는 늘 재미있지만, 이 영화는 그 중에서도 썩 잘 만든 영화이다.

아내의 정부를 살해한 누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은행가출신 사나이인 팀 로빈스는 시종 지성적인 자세로 치밀함과 인내함을 연기한다.

늙은 도둑의 출감후 자살 시퀜스에서는 아린 비애도 있고.

좋은 영화다.


비는 그치고 날씨는 차가와 졌다.


17876  1996. 1. 17 (수)


부서장회의.

논의들이야 얼마나 그럴싸한가.

인식의 전환, 개혁, 변화, 투자, 교육.....

그러나 실무자들인 부서장들의 의욕은 있더라도 경영의 벽이 저리 두터워 뚫지 못하는데야 어찌하랴.

무사안일, 경영주의 눈치나 보면서 요령껏 헤엄치면 그만인 것을.

그러나 혹여 모르지.

부서장들의 이러한 꿈틀거림이 아주 거세다면 어떤 분위기가 형성되고 그것이 긍정적인 기폭제가 될수 있을런지.


더부룩한 머리카락, 자르려 하였는데 화요일은 미장원도 이발소도 모두 쉬는 날이다.


英이, 요즘 알바이트시간 두어시간을 제외하고는 노상 집에 박혀있다.

웬일?

싸돌아다니던 아이가 집에 박혀 있으니 한편 가여운 마음도 든다.


俊이는 지금 태백시에 있다고.

俊이 방에서 잠자다.


17877  1996. 1. 18 (목)


비디오를 개비하고 나니까 자꾸 비디오를 빌려다 보게 된다.

英이와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 감상.

요즘 젊은이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듯한 감독의 시각, 도식적인 오렌지족의 묘사, 작위적인 상황설정등,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지만 무난하게 만들었다.

배창호는 제법 능력있는 작가인데.


잘만 킹의 '델타 비너스'

英이와 함께 보기 민망하여 혼자 보는 시시껄렁한 에로 무비.


俊이는 강능에 있다.


17879  1996. 1. 20 (토)


96년도 시설 장비계획 마무리하여 P상무에게 내밀었더니 수리선부의 것은 수리선부로 돌리라고 한다.

모든걸 자기가 휘어잡고자 하였던 사람이 요즘 참 많이 변하였구나.


俊이 제 누나에게 전화하였다.

지금 설악산 비선대에 있는데 일요일쯤 돌아가겠다는.


며칠째 俊이 방의 잠자리.

아들 놈 떠난 공간.


17880  1996. 1. 21 (일)


비디오 '홀로코스트'

야만의 정글을 찍으러 아마존에 들어간 촬영팀.

정작 야만인이라는 인디언보다 그들이 더욱 야만하였다.

너무나 잔인하여 충격적인 장면, 너무나 비도덕하여 또한 충격적인 장면.

다큐멘타리는 아니지만 다큐멘타리처럼 찍은 필름.

그러나 충격적인 영상으로 어필하여 돈 좀 벌어보겠다는 의도가 뚜렷한 상업영화일뿐.


잘 만든 국산 영화 '손톱'

외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때'류.

한 여인의 편집적 광기.


俊이는 오늘 올 것이다.

英이는 어제 모처럼의 외출.


민희라의 찬송가 울리는 새벽.


17881  1996. 1. 22 (월)


일요일.

J와 태종대.

전주식당의 낚지볶음, 노래방.

가시버시의 휴일.


J가 들려주는 말에 의하면 俊이는 학교에서 '95학번 사이코'로 제법 유명짜한 모양이다.

나는 처음 싸이코라는 말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英이는 아비에게 해설한다.

싸이코라는 의미는 '또라이'를 의미하는게 아니고 일종의 '괴짜'를 의미하는 모양이다.

그래, 괴짜라면 얼마든지 좋다.

괴짜란 개성의 특출남이고, 바로 그것이 독특한 나만의 정체성일수 있으니까.

이 몰개성의 시대에는 그것도 필요하다.


俊아.

옛날의 아비도 역시 괴짜로 불렸지만, 실은 지금 고백컨데 아비는 사이비 굇짜였거든.

너는 너만의 세계를 갖는 진짜 괴짜가 되어라.


일요일 저녁, 취하여 쓰러져 잠든 사이 俊이는 돌아왔다.

새벽, 안방을 나서니 전리품인양 더러운 옷무더기들이 마루에 쌓여있다.

녀석은 제 방에서 곯아떨어져 있고.


17882  1996. 1. 23 (화)


俊이는 5박6일의 일정을 태백, 강능, 속초, 설악산, 포항을 밟고 돌아왔다.


J가 사온 책 '치질, 변비 깨끗이 낫는다'

책 속의 글은 대장암, 직장암, 항문암등 무시무시한 언어로 내게 공갈을 친다.


17883  1996. 1. 24 (수)


양귀자 '천년의 사랑' 초반부 읽다.

도를 닦는 사내와 천애고아 여인과의 운명적인 사랑.

양귀자는 때로 웃기는 소재로 소설을 쓴다.


벌써 새해 첫달도 종반으로 치닫는다.

새로움은 간 곳없고 진부한 일상의 늪, 진부한 정신, 진부한 육신..


英이와 俊이.

옛날 그 반짝반짝함은 빛을 잃어 버렸는가.

이제 아이들도 진부함 속에 그렇게 나이 들어 가는 것인가.

아니면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격으로 진부해 빠진 늙은이의 눈에만 내 새끼들이 진부하게 보이는걸까.


17884  1996. 1. 25 (목)


俊이의 모호한 성격.

생각이나 몸짓의 표현이 늘 애매 모호하다.

우유부단하다.

그만큼 내면의 논리가 복잡하여 갈등이 심한 탓일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은데.

俊이의 애매모호함은 젊은 놈으로서 도가 지나치다.

또 홀로 틀어박혀 오직 혼자서만 시간보내기를 너무나 즐긴다.

어찌보면 내면에 침잠하여 무언가에 골똘한 괴짜로서의 정체성일수도 있지만 俊이의 칩거 성향은 심하다.

그리고 아비는 이러한 아들놈의 의사나 욕망의 무엇 하나 단서를 읽어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


俊이에게 자기혁신, 자기계발에 필요한 것은 무슨 계기?

그 계기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아비의 안타까움.


J, 남편에 대한 일상의 뒷바라지의 소홀함이 나는 또한 섭섭하다.

아내가 남편을 대하는 언행의 형식은 아이들에게는 아빠에 대한 권위가 된다.

이것에 대한 배려가 너무나 부족한 아내짜리.


오늘 英이 생일.

어제 알바이트하는 집주인으로부터 저녁대접을 받았던 모양이다.


기도.


17885  1996. 1. 26 (금)


英이 생일.

서울의 무슨 음반기획회사에 다닌다는 동아리 선배가 선물을 보내 왔다.

장미꽃 백송이 다발, 금목걸이, 케이크...

누구일까? 누구일까?

딸년은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고 한사코 도리질하지만 누구일까?

자꾸 캐묻는 아빠에게 딸년이 하는 농담.

저한테 목을 걸고있는 머슴애들이 한둘인줄 아느냐...

하.  하.


俊이는 어제, 3월에 공군 입대한다는 제 친구 천우와 어울려 늦게 돌아오다.


아이들 시집가고 군대가고.

한 세대는 이렇게 고개를 넘는 것인가.

SUNRISE SUNSET....


17886  1996. 1. 27 (토)


차라리 창작하는 편이 난삽한 메모의 문장에서 의미를 추출하는 것보다 훨씬 쉽겠다.

장문의 공문.

P상무의 메모에는 언제나 스스로 의식치 못하는 논리의 혼란이 있다.

그리고 금새 자신이 만든 논리의 모순에 빠져버리고 마는 문장.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않은 저돌적인 행위주의자.

그의 글에서는 의욕과잉이 넘처서 도무지 맥락이 닿지 않은 구석이 너무나 많아 탈이다.


俊이, 또 수학계통 과목의 학점 때문에 은근히 고민인 모양이다.

요즘 녀석의 표정을 보면, 英이의 뀌뜸이 없더라도 아비는 무언가 짐작할수 있다.

수산대학 경영학과 1학년의 과목들이 그토록 어렵단 말인지.

그 따위를 수학하지 못할 정도의 형편없는 俊이란 말인지.

영 속이 상한다.


KKH , 'SEA SOUND' 동아리의 선배.

JH産, 장남이고 여러명의 누나들.

지금은 서울에서 공연기획의 일을 한다.

예사롭지 않은 선물을 보낸 녀석인데...

시큰둥한 반응의 英이이지만 그만한 선물을 보낼 정도이면.

누구일까? 누구일까?


17887  1996. 1. 28 (일)


일찍 돌아온 토요일.

모녀는 함께 미장원에 가고 俊이만 집을 지키고 있다.

넌지시 수학계통의 학점에 대하여 물었더니 걱정할것이 없다고 하는 아들녀석.

시험은 잘 치루었단다.

다시 되묻는 아비에게 아들을 그렇게 못믿느냐고 뿌르퉁한다.

안심.


올리버 스톤 감독의 '도어즈'

JAMES DOUGLAS MORRISON, 그 유명한 락 가수 짐 모리슨의 전기 영화.

그는 나보다 두어살 많고, 스물둘에 데뷔하여 스물여덟에 죽은 무대 위의 미치광이였다.

절망적인 시를 창작하여 읊고, 무대 위에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늘 죽음을 곁에 두고 도덕과 질서의 모독을 표방하였던 남자.

영화 속에서 그는 진정한 예술가연 한다.

불과 20대 초반의 젊은놈이 고뇌하고 자신을 락음악이라는 형식으로 폭발시켜, 관념과 인습과 질서와 관계들을 깨부수고 자유롭자고 절규하며 선동하는 그 내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공감도 없지 아니 하지만 충격적이다.


그럼 나는.

이십대는 혈기가 방강하여 그토록 날뛴다지만 사십대의 나는 냉철한 이성이라도 있어서 절망을 초극할수 있다는겐가.


17888  1996. 1. 29 (월)


일요일.

英이의 친구 은민이 결혼식.

이혼한 부모, 조부모 밑에서 외롭게 자란 아이.

잘 살아야지.


J와 태종대돌다.

팩소주 하나 비우며 아이들에 관하여 여러 얘기들 나눈다.


英이 말마따나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 따위의 소설이 BEST SELLER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양귀자도 과장된 평가를 받고있는 작가중의 하나다.


꿈- 2층 고립된 나의 공간, 아래층에는 어머니 형 媛이, 점주도 보인다.  그 공간을 호랑이가 어슬렁거린다.


17889  1996. 1. 30 (화)


英이 알바이트로 번 돈으로 전화기 사들고 온다.

40만원인가 받아서 전화기 사랴, 동생 용돈주랴, 친구 결혼식 참석하랴, 생일치르랴 오죽 씀씀이가 많았을까?

화요일 새벽, 제 방에서 학교친구 지민이와 함께 잠들어 있다.


'엠마뉴엘 1'

무언가 있는 듯이 선전을 하였지만 그저 그런 한편의 에로영화일뿐이다.

어떤 분위기가 있고, 배경이 있고, 관계의 설정과 갈등구조가 있고, 캐릭터의 미묘한 성격이 녹아있고 하는 문학적인 에로영화는 어디에도 없는지,

문학적으로 만든 성애영화는 없다.


俊이 성적표 공개할때도 되었는데.


J의 정리성 부족함은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것을 지적하면 화부터 내니 도무지 유구무언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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