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29 1995. 12. 1 (금)
悔恨.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또 12월을 맞는다.
하다 못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줄 아는 혜안 하나 닦아 놓지 못하였다.
또는 인간을 향한 신뢰나 긍정의 철학도 획득치 못하고 오히려 인간에 대한 환멸의 염만 잔득 북돋은채.
이 썩은 공간을 벗어나 저 높은 곳의 밝은 불을 마셔라.
보오들레르가 외친다.
流水의 세월이여.
17830 1995. 12. 2 (토)
생각의 씨앗, 관념의 근원, 인생관이 정립된 그 언저리.
하나의 기질적인 문제.
비관이냐 낙관이냐, 긍정이냐 부정이냐,
어디에 기인하여 그런 관념이 형성되는 것일까.
천래적인 성격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기질일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경험과 느낌의 축적이 만들어 놓는 기질일까.
두려워 하는 것.
비관과 부정.
발상의 전환이란..
밝은 쪽으로만 인식하는 그 재주.
고루하고 진부하고 도식적이고 상식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는 것.
책을 읽고, 남의 말을 들어 지식으로 습득하여 기질을 고치기에는 너무도 나의 그것은 발뜃꿈치처럼 굳어져 버렸는데...
어디선가 베풀어주시는 직관으로 껴안아 나를 개선하는 것.
그것.
신앙.
제법 겨울맛.
전두환 소환.
英이는 내일 서울로.
KAL 시험.
17831 1995. 12. 3 (일)
英이 토요일 12시 새마을호로 서울가다.
일찍 회사를 나서 삼겹살 한보따리 사들고 俊 혼자 지키는 집으로 돌아온다.
식물성 식성인 俊이 마루에 앉아 삼겹살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보는 아비짜리는 흐뭇.
전두환, 노태우와는 다른 당당함으로 소환을 거부하고 합천으로, 그러나 곧이어 구속영장을 들고 따라온 수사관들에게 사이에 붙잡혀 앉아서 안양교도소로 압송.
김영삼, 좀 덜렁대게 웃기는 구석이 있다.
17833 1995. 12. 5 (화)
나는 요즘 들어 부쩍 무슨 강박에 빠져있음을 느낀다.
심장의 박동이 빠르고 높아졌으며, 매사에 자신감을 잃고 조그만 일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어떤 형태의 꿈꾸어 보는 장래의 그 색채도 절망적인 회색의 영상이 되어..
내 실패한 역정의 삶이 역시 그 종말도 무참한 실패로 끝날 것 같은 예감.
이런 기분에 휩싸여 연말의 각종 업무를 명쾌하게 처리해 나가던 작년까지의 기백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왜 이러느냐?
정신을 차려라.
왜 이러는가?
도피처만, 눈을 히번득거리며 공포에 질려 쫓기는 짐승처럼 그저 도피처만 찾아 두리번거리고.
왜 그러느냐.
英이, 9시 넘어 도착.
서울의 씽씽함을 묻혀 돌아오다.
부산역에서 해후한 네식구.
17834 1995. 12. 6 (수)
아, 어디가서 열정 한줌 주울거나.
어디 가서 낙관의 가능성 한조각 얻을거나.
어디 가서 한바가지 희망의 목숨물을 떠 마실거나.
내게는 이제 어떤 풍성함도 남아있지를 아니하다.
나이 먹어 점점 각박해지는 환경만이 더욱 나를 옥조여 올 뿐이다.
싱그러움, 그 행복의 느낌을 다시 한번 더 맛볼수 있었으면.
이청준 '서편제'
남도의 한.
그 한이 내게 없어 그 한이 얼마나 그리운지.
그것은 고향이고 목슴이고 근원이고 관계의 사랑인 것을.
비극일시 분명하지만 그것은 바로 사랑의 농밀한 목숨인것을.
나는 그 한조차 지니지 못한 팔자일지니 이 얼마나 부박한 목숨인가.
저물어가는 한해.
어쨌든 살아내기는 하였으나 또 새로운 한해, 그 살아낼 일이 아득하다.
주님, 내가 뿌린 씨의 업보들을 도우소서.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것들을 이제는 그만 용서하소서.
17835 1995. 12. 7 (목)
이미 애정과 흥미를 상실한 업무가 효율이 있을리 없다.
그저 부담으로 쌓이는 연말 업무 업무의 사안들...
생각사록 한심한 회사.
57억원을 주고 임대하였다는 고속도로의 휴게실, 그것으로 이른바 유통사업본부라는 조직이 생겼다.
조선소에 웬 유통사업?
유통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인가.
어디에나 프로페셔널이 있게 마련인데.
조성기 '통도사 가는 길'
역시 시시한 작가는 아니다.
크리스찬, 신과의 밀월과 갈등을, 절망과 소망을, 사랑과 미움의 신앙의 역정 그 터널을 통과하여.
조성기는 변호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지금 그의 소설이 도달한 곳은 신앙적으로 어디 쯤일까?
자신의 아니마를 천착하고 꿈틀거리면서, 절집 또한 좋아하여 불경을 읊조리면서, 무속의 세계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조성기...
꿈- 나는 살인범, 옥죄어 오는 수사망, 媛이, 육군병원, 영도 끄트머리 격랑의 바위안벽, 정능의 박의원, 나는 쫓기며서 누군가를 죽도록 폭행하고...
17836 1995. 12. 8 (금)
회사 버스에 20여명의 직원들 타고 울산으로.
현대중공업과 현대 미포조선의 현장 견학.
버스 차창밖에는 아침녘의 들판이 누워있고, 때로 스치는 낮은 지붕의 오막살이집과 뜨락의 키작은 나무의 풍경화.
그 풍경화를 마주치노라면 그 옛날 가난하고 소박하였던 시절의 아름다운 관계의 정이 사무치게 밀려든다.
여행-
아, 여행이 있었구나.
낯선 고장,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
그러나 그 낯선 것들을 낯설지 않게 나를 적셔줄 여행이라는 것이 있었구나.
현대중공업.
이런 견학을 기획한 것은 앞서가는 조선소에서 한수 배워 오라는 의도이다.
그런데 그 수준의 격차가 너무나 크고, 이것은 현업의 관리자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경영과 자본의 문제이다.
TOP들이야 말로 견학이 필요하다.
17837 1995. 12. 9 (토)
예전같으면 크리스마스 캐롤이 흥겹고 어딘가 세밑의 술렁거림같은 분위기가 있을법하지만 작금의 세태는 그렇지 아니하다.
예전에는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함께 살아내고 또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이웃간의 서로 부비는 따순 살갗을 느낄수 있었건만.
아니, 이것은 세태의 탓이 아니고 순전히 내 내면의 황량함 탓이다.
나이 먹어 늙으면 늙을수록 풍성하여 지는 사람도 있다던데 나의 나이 먹음은 이토록 각박하다.
부차장 회식.
하리의 횟집에서 실컷들 생선회를 먹고 단란주점에 가서 실컷들 떠들다.
젊은 여자 아이들이 노래 부르는 무대에 늙다리들이 부비고 끼어들려는 것은, 추하다기보다는 하나의 슬픈 몸짓이다.
겨우 일어난 토요일.
17839 1995. 12. 11 (월)
아, 일요일 나태의 늪에서는 정녕 기어나올수 없단 말인지.
이불 속에서 비비적거리다가, 눈꼽을 떼며 밥을 먹고는, 종일을 멀거니 TV앞에 앉아 보낸다.
그러다가 밤을 맞아 잠자리 기어들면 그것으로 하루는 끝.
의식은 썩어 냄새를 풍기고 에스프리란 아예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다.
J역시.
방구들지고 누워있지 않으면 그녀 역시 TV 바라보기.
俊이는 제 방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를 하는겐지, 음악을 듣는겐지 완전 단절된 상태.
그리하여 술이 없는 일요일의 나는,
지독한 우울의 늪을 절망이 어른거리는 예감의 그늘 밑에서 허우적거리며 비몽사몽의 터널을 지나 다시 월요일을 맞는 것이다.
늘 옆구리 허전하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일까.
어여쁜 봄처녀인지,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마왕인지 그것은 모르겠으되...
꿈- 영도의 산마루 은밀한 언덕배기에 백악의 신전이 있다, 옛날 무슬림의 유적...
17840 1995. 12. 12 (화)
회사, 흥미가 없으니 열의가 날리 만무하고, 열의가 없으니 하루의 일과는 마냥 지루하다.
그러나 봉급쟁이의 관성이란 또한 어쩔수가 없는 것.
꾸역꾸역 사안들을 처리한다.
부가가치가 높은 사업이나 장사.
K.P.E 의 김영호사장, 허여멀금하게 살찐 삼십대 초반의 그에게는 고유의 KNOW HOW를 보유한 자신감이 흐른다.
선각 생산설계, 한 척의 선박에 대한 그것이 1억2천만원.
무슨 원자재가 투입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기술력으로 적은 인원을 운용하여 짧은 시간 안에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무슨 무슨 장사.
하루에 몇 개를 팔고 이윤이 얼마, 한달이면 얼마, 재료비 인건비 경비의 원가를 계산하고,,,
부질없이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
요는, 요는 그렇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뛰처나가서 현장을 부딪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 몸으로 겪은후 출력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자의식에서의 탈출.
암시, 자기암시.
그리고 신앙.
주소서!
17841 1995. 12. 13 (수)
퇴근하여 광어회 사들고 어머니께.
늙어 늙어, 어머니는 점점 좁아진다.
무언가 토로코자 하는 자식의 마음 같은 것은 아랑곳이 없으시다.
아들 놈은 마음 한자락 털어놓지 못한채 그저 물끄러미 그런 어미를 바라보면서 술잔을 비울 뿐이다.
삶이란, 더불어 사는 삶이란 가혹한 것.
자유란.
두려움인것.
조성기.
그는 단편소설로 실험정신을 키우는가.
그의 기독교는 지금 어디 있을까.
17842 1995. 12. 14 (목)
SB-420 삼성 타그보트의 BOLLARD PULL TEST를 위하여 한진중공업으로부터 TENSION METER를 임대하여 KC원 등이 끙끙대고 싣고 왔으나 M/E TROUBLE로 무산되다.
연일 따뜻한 날씨.
노태우 전두환의 구속과 비자금, 군사반란등의 수사로 떠들썩하고, 정치판은 바짝 긴장들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도 한다.
나이를 먹으니 이 세상의 구조란 의외로 튼튼치 못하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이것도 일종의 지혜일까.
17843 1995. 12. 15 (금)
사람 사는 세상 무엇 하나 완벽한 것이 있을까.
정치도 법률도 사회 문화도 교육도 모든 인문적 분야에서 아무리 역사적인 임상을 거쳤다고 뽐내지만 완벽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원한 실험.
현상의 이면에는 언제나 변수가 도사리고 있으며, 상황에 대한 당위성의 최선이라고 큰소리처도 진짜 최선이란 없는 것.
이러한 인문적인 세계에 비하여 과학의 세계는 얼마나 명징한가.
거기에는 엄연한 진리가 존재하고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절대성이 있지 않은가.
누가 보더라도 보편 타당한 법칙에 의하여...
아이들 시험.
이제 올해의 종장이 닥가 오는데, 나는 아직 사직서를 아니 쓰고 있다.
요행주의, 노예근성, 겁쟁이....
주님.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오니 이를 도우소서.
17846 1995. 12. 18 (월)
일요일 한낮, 세수도 않은채 한편의 영화를 본다.
몇 번째 감상하는 페데리코 페리니의 'LA STRADA'
젬파노와 젤소미나.
안소니 퀸과 줄리에타 미시나.
길, 오토바이, 수도원, 바다, 폐허.
어릿광대 젤소미나, 이슬같은 영혼, 젤소미나의 선율, 바닷가, 외롭다고 몸부림처 우는 동물같은 사내 잠파노.
카메라는 차츰 부감으로 떠오르고 흰 포말이 몰려온다.
말초적 쾌락이 범람하여 그것에 허덕이는 내 영혼에 일요일 한낮 한모금 생수처럼 스며드는 영화.
17847 1995. 12. 19 (화)
연말의 업무.
굉장히 어지럽게 널려있는 듯 한데 막상 달려들어 씨름을 하여도 진척이 없다.
밖의 날씨는 제법 싸늘하고.
이청준, 조성기 소설 반납하고 김수현의 '망각의 강'을 빌려 한시간여만에 후딱 읽어 치운다.
이른바 심령소설, 문학이라는 물건과는 거리가 있는 드라마꾼, 이야기꾼. 그녀의 대사는 참으로 톡톡 튀는 느낌이다. 재치가 넘치는 적재적소에 배치된 대사들.
악한 영, 귀신, 죽은 자의 영, 빙의 같은 개념들은 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존재의 실체성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성경에도 등장하는 많은 악한 영들.
인간이 오감으로서 인식하고 두뇌로서만 이해하는 한계, 그것만이 사실이고 과학이라면, 도저히 인간의 속성으로서 이해 불가한 어떤 현상 역시 사실이고 과학일 것이다.
노태우 첫공판.
한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자의 당당함도 없는채 그냥 비굴한 한명의 죄수.
17848 1995. 12. 20 (수)
평정된 느낌의 마음밭이었다가, 잠시 회의실 장의자에 몸을 눕히고 일어선 후의 마음밭은 그게 아니다.
싱숭생숭, 초조, 불안, 우완좌왕, 음탕한 암시...
주님의 안정된 평형감과는 배리된 다른 정서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무엇일까?
이 心因의 정체는?
심층심리의 요동일 것이고 그것을 부추기는 어떤 조건이 외부에서 입력되었을 것이데 그 조건이라는 놈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니면 확실히 어떤 나쁜 영의 준동일까.
이러한 경우는 한두번이 아니다.
세밑,
한해 저무는 들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감회는 어떤 것일까.
감개일까 초조함일까 쫓기는 느낌일까 기대에 부푼 설레임일까...
세대에 따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있겠지만 나이에 따라서는 공통의 감회가 있을것이다.
나이 먹어가는 세대에게는 쫓기는 느낌, 어머니의 세대에게는 어떤 단절의 예감에 몸서리치는 느낌...
퇴근하여 마루에 앉아서 한병의 소주.
俊이는 때로 매우 반항적으로 불손한데, 그 반항 자체가 걱정스럽다기 보다는 늦깎이 사춘기인가 하여 더욱 걱정스럽다.
17849 1995. 12. 21 (목)
Sh씨 의 단견과 총무부장이 만든 아이디어 고과평정.
그 귀찮은 작업을 회의실 들어앉아 싫은 고름 짜내듯 처리한다.
직반장 회식.
조선 조기 수리선부의 부서장과 P상무와 나, 그리고 30여명의 직반장들.
배만 부르고 먹을 것 없는 뷔페에 모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끝내버릴 직반장들이 아니다.
추가 예산을 마련하여 2차 나이트.
장선일 직장이 오히려 관리직 부서장보다도 세련되어 어른스럽다.
벗은 여자가 둥그런 무대에서 꿈틀거리고 플로어에는 욕구불만의 중년들이 살진 몸을 흔들어 댄다.
직반장들의 춤솜씨는 상당, 모두가 능숙한 스텝을 구사하고 노는 가락들이 대단하다.
17850 1995. 12. 22 (금)
아침밥을 먹지 않을 것.
뱃 속을 때로 비워 두는 것이 장기에도 휴식을 줄테고 장에도 좋을 것이다.
내게는 젊었을적 없었던 탐식의 경향이 있다.
입맛이 좀 당길라치면 속이 아무리 포만하여도 그저 쑤셔 넣는다.
술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고.
아랫배에서는 그만 보내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건만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바람부는 구청의 게시판.
합격자 64명의 명단에 내 이름은 없다.
기대를 전혀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담담하게 불합격을 수렴한다.
부산지방의 수천명의 응시생중 고작 64 명 합격이다. 무슨 고등고시도 아니고...
고작 휴일날을 이용하여 며칠 공부한 것으로 합격을 바란다는 게 무리였다.
17851 1995. 12. 23 (토)
내일 모레면 성탄절.
기쁘다 구주 오셨네.
예수님의 이미지가 데코레이션처럼 색색으로 반짝이고 방울소리처럼 경쾌하게 울리는 계절.
아기 예수 오신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은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라는 것이지, 죄인인 인생 자체를 기뻐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밑의, 죄인들이 범람하는 이 땅에 울리는 반짝이고 딸랑딸랑 울리는 즐거움은 큰 축복이다.
예수 탄생일이 12월의 어느 날이라는 근거는 없다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는 바로 이 현대사회의 노예들이 느껴야하는 세밑의 반짝거리는 즐거움.
그런데 세월이 예전과 달라서 갈수록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은 퇴색하고 있는 느낌이다.
17852 1995. 12. 24 (일)
토요일, 회사의 식당에서 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노조회의실에서 KJ도 와 바둑 다섯판.
거듭 느끼는 것인데 호승심을 죽이고 바둑 자체에만 몰두한다면 바둑을 깊은 재미로 느끼면서도 이길수가 있는 것이다.
케이크 두개 사들고 돌아온다.
17853 1995. 12. 25 (월)
J와 英 俊이 함께 어머니께.
크리스마스 이브.
어머니 그렇게 늙으시고 형제는 술을 마신다.
아이들은 저희끼리 시내로 나가고.
17854 1995. 12. 26 (화)
매섭게 추운 날씨.
부산하고도 영도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날씨이다.
회사의 창립 50주년.
각 도크와 각 선대 앞에는 젯상이 차려져 있고, 그 돼지머리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 절들을 한다.
2공장 식당의 떡국은 맛있었다.
사장의 기념사라는 알맹이없는 연설.
그 옆에 늙은 신모씨하며 눈치꾸러기들 중역들하며 그저 대선의 생리에 순치된 뱁새들이 앉았다.
아, 세밑은 저물어가는데 이 황량한 영토에는 여성다움이 이제 아주 증발해 버렸는가.
괴테여, 괴테여.
17855 1995. 12. 27 (수)
연일 매서운 추위.
그래봤자 영하 5-6도 정도이지만 해양성기후에 익숙한 이곳 사람들의 체감으로는 되우 추울 것이다.
제1공장 현장 도로에 아스팔트 시공.
불과 한나절만에 검은 아스콘이 도포되고 노란색 차선까지 그어진다.
참으로 간단한 공사가 아스콘 공사이다.
17856 1995. 12. 28 (목)
SB-419 해상크레인 동원하여 M/E 탑재.
오전 잠시 시내에 나간다.
고려당에서 부차장들에게 선물할 케잌 30여개 주문.
퇴근하여 여덟명의 관리과 직원과 동삼동 하리의 횟집.
생선회를 먹고 단란주점.
늘 흥청거리는 노래하고 춤추는 그곳, 돈버는 소리가 들린다.
17857 1995. 12. 29 (금)
전일의 과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하루 아랫배는 그다지 괴롭지 않다.
생선회를 안주로 해서일까, 컨디션이라는 드링크를 미리 마셔 두어서일까, 대장환이라는 약을 복용하여서일까.
그도 아니면 알콜에 절어서 마취되어 미처 느낄새 없는 무감각 때문일까.
다시 새 BUSINESS DIARY 에 주소 따위를 옮겨 적는 착잡함.
이번 연말에는 기어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절치부심한지가 불과 두어달 전.
그런데 내년의 직장생활을 단도리하는 세밑의 오십줄 사나이.
어쨌거나 한해가 간다.
아홉수라는게 있다던데.
이제 마흔 아홉의 고개를 넘는다.
아, 英이는 시집갈 나이가 차오르고, 俊이는 군대에를 가야하고....
그리하여,
우리 늙음에 어찌 어둠만이 있을소냐.
내일은 다른 날,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17858 1995. 12. 30 (토)
다시 읽는 옛날의 희곡 '은하수를 아시나요?'
누렇게 바래어 바스락거리며 부스러지는 낡은 종이 위에 인쇄된 언어들.
이제는 잊혀진 옛 성좌의 언어들.
김동규,김승일,김승우씨의 공연..
칼 비트링거 '은하수를 아시나요?'
나는 아직 죽어 버린 것이 아니다.
부차장 연말 선물로 준비한 고려당의 케잌 30여개, 여사원들 불러 돌리다.
오늘 종무식.
17859 1995. 12. 31 (일)
마지막 토요일 오전 일과,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다.
오후, 모두 돌아가 호젓한 사무실에서 KJ도 와 몇판의 바둑.
집에 전화하니 아이들은 외출.
J를 불러내어 가시버시 어울리다.
돼지갈비 먹고 둘이서 노래방에도 간다.
노래솜씨, 직선적이고 장식적이지 못한 노래의 선곡과 가창을 지적하여 모처럼의 마누라 기분을 상하게 하다.
그것을 달래느라 진땀.
여하튼 모처럼의 늙어가는 가시버시 둘만의 어울림이었다.
이런 시간이 매우매우 필요하고 또한 소중한 것.
俊이 늦은 시각 귀가.
英이는 과친구들과 경주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고.
주님.